소설리스트

57화 (58/84)

제3장 혈전(血戰)

 용미리(龍尾里).

 우뚝 솟아 있는 용문산(龍門山)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이름이다.

 강호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 단체의 전쟁 양상이 치열해지다보니 그 전쟁의

 영향권 내에 있는 용미리 같은 마을도 남의 집 일인 양 구경만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특히 용문산에서 땔감을 장만하거나 약초를 채집하여

큰 도시에 내다 파는 일로 끼니를 연명해왔던 사람들은 더더욱 생계가 막막

해졌다.

 자신들의 생활 터전인 용문산에 있는 나찰마궁 때문이었다.

 전쟁이 임박해오면서 산으로 올라갔던 마을 사람 몇몇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들의 실종 원인이 천무맹의 첩자로 오인받아서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누구도 산에 오르질 못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이 그른 게 아니었는지

 용미리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한 달 전부터 천무맹과 천마맹에서 은밀하게 무사를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천마맹에서 모집하는 무사의 기준은 태원 쪽의 지리에 능통한 인물들이 주

를 이루었고, 천무맹에서 모집하는 무사의 조건은 용문산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者)라는 단서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급료가 무려 은 열 냥, 자신

들이 다섯 달을 고생해야 만질 수 있는 거금이었기 때문이다. 조건 또한 생

각 외로 간단했다. 무공을 기준으로 무사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를

많이 알고 있는 자라 하였다.

 때문에 용미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내세운 조건에 딱 부합되는

사람들이었다. 용미리 사람들뿐만 아니었다. 용미리 건넛마을에 있는 구곡

리를 비롯하여 전횡리 사람들까지, 전부 조건에 합당하는 자들이었다. 나무

며 약초를 채집하는 사람들이니 용문산 지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들을 대도시에 내다 팔아야 하니 태원이며 평양 등 안 가본 곳이

없는 것이다. 가는 길도 관도로만 다닌 것이 아닌,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지름길로 다니곤 했던 사람들 아닌가.

 마을에 있는 삼사십 대의 장정들이 모두 지원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 어떤 이는 천마맹에, 또 어떤 이는 천무맹에 가입을 하였던 것이다. 상식

적으로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것은 패 나누기를 좋

아하는 칼을 든 무인들이나 권력을 좋아하는 높은 자리 인간들의 사고방식

일 뿐이고, 용미리 같은 시골 사람들에게 정(正)이니 마(魔)니 하는 것을

구분 짓게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

는 쪽이 정(正)일 뿐, 신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은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

는 일이다.

 양이와 마달.

 올해 서른다섯 살로 두 사람은 십 년 전에 용미리에 들어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무꾼이었다가, 두 단

체에서 무사를 모집한다 해서 들어왔던 거였다.

 "캬! 술맛 좋다. 이제(二弟), 자네가 있는 곳 사정은 어때?"

 거의 한 달 만에 만난 친구들이다. 처음에는 둘이 같이 나찰마궁에 지원을

 했었다. 그런데 양이까지는 들어갔으나 더 이상 인원이 필요 없다고 하여

마달은 천무맹으로 들어갔고 결국 서로 소속이 달라졌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곳 마을에 있는 대다수의 장정들이 서로 다른 소속이 되어 그들에게 돈을

 받고 일을 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한 달 만에 휴가를 나왔다. 이상한 일은 양쪽에서 똑같은 시기에

휴가를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고 다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기에 바

빴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소속에 있었고 다른 이들의 눈치도 있고 해서 서

먹서먹한 점이 없지 않았으나 몇 잔의 술이 돌자 그제야 다시 친구로 돌아

간 것이다.

 "응? 응, 정신없네. 무사들의 서슬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내는 실

정이야."

 양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가다 마주치는 무사들의 온몸에서

무서운 기운들이 흘러나와 그들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있는 곳도 마찬가지야. 너무 겁나. 괜히 들어갔다 싶기도 하고…….

 휴가도 이번이 마지막이래. 당분간은 나갈 생각 말라더군."

 마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양이를 쳐다보았다.

 "돈 때문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지만 점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에이! 걱정하지 말고 술이나 먹어. 우리가 칼을 쓸 줄 알아, 아니면 무공

을 익혔어. 그네들 길 안내만 해주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야, 무슨 일이 있

을라고."

 길 안내, 마달과 양이가 하는 일이었다. 양이는 태원으로 가는 그들만이

다니는 지름길을, 마달은 용문산 내부의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저 멀리 대초원의 오랑캐가 아니잖아."

 말로만 들었던 원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의 기마병이 휩쓸고 간

자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다는 몽고 오랑캐.

 그러나 산에 있는 나찰마궁이나 천무맹은 대초원에서 쳐들어왔던 오랑캐가

 아니었다. 가장 단순한 예로, 나찰마궁이 있는 용문산에서 지금껏 나무를

하고 약초를 채집하여 천무맹이 있는 태원이나 평양에 가져다 팔았던 그들

이었다. 심지어는 양쪽의 무사들과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들에 대

한 감정이 나쁠 리가 없었다.

 누가 주인이 되더라도 자신들의 터전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즉, 용미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두 곳 중 어느 곳이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두 곳 모두 자신들의 양식을 대주고 있는 좋은 곳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용미리에 있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만의 생각이었으니…….

사천과 섬서성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한 천마맹과 천무맹, 양 맹에서 이번 전

쟁의 최대 격전지로 지목했던 곳이 산서성이질 않던가. 그 산서성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살기를 머금은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잔혹한 폭풍을 예고할

 것이라는 것을 두 맹에서 일을 봐주고 있는 용미리 주민들 어느 누구도 알

지 못했다.

 산서성 동쪽을 가로지르는 여양산맥(呂梁山脈)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누런

황하의 물줄기를 뒤로 두고 있는 곳에 위치한 용문산, 이 용문산이 섬서성

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용문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으로 손꼽히는 곳임에도 일반인은 물론이고

, 선택된 자들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 있으니 천마맹의

 여섯 방수 중 나찰마궁이 있는 황석곡(黃石谷)이다.

 색 바랜 낙엽들이 흐드러지게 쌓여, 온 계곡이 황색의 비단을 펼쳐놓은 것

처럼 금빛 천지인 이곳에 수백 채의 건물들이 저물어가는 황혼의 빛을 받으

며 조용히 서 있다.

 뇌운각(雷雲閣).

 나찰마궁 수백의 건물 중 궁주인 뇌전도(雷電刀) 마사(馬絲)의 거처가 바

로 이곳이었다.

 "궁군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을 이곳으로 유인하는 데 이번 전쟁의 승패가

달렸다 하였소."

 마사가 자신 앞에 있는 두 명의 인물을 향해서 나직이 입을 열었다.

 뇌전도 마사.

 새파란 뇌전을 발생시킨다는 뇌전도법(雷電刀法)을 극성까지 익힌 자로,

천무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남성과 섬서성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나찰마궁을 구파일방 못지않게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시켜온 강력한 지도력

을 가진 인물이다.

 "여기를 봐주시오."

 전면에 있는 용문산의 지도를 가리키며 마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적을 유인해야 할 곳은 석산평과 혈리평입니다."

 마사가 지도를 보면서 지목하고 있는 두 곳은 나찰마궁으로 접근하기 위해

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지역이었다.

 먼저 북동쪽에 있는 석산평은 암석지대로 이루어진 평원이고, 남동쪽에 있

는 혈리평은 가슴까지 차오르는 풀들로 이루어진 초원지대였다.

 그리고 두 평원의 중간에 있는 승천로. 석산평과 혈리평을 분할하는 협곡

을 일컫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른 열 명 정도가 횡으로 서면 더 이상 움직

일 공간이 없는 틈이라고 해야 할 만큼 좁은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은

 방어지역에서 제외시켜도 별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장소였다.

 "그럼 우리가 혈리평을 맡아야겠군요."

 검은색의 철갑을 두르고 장창을 들고 있는 인물이 마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철마궁의 최정예인 흑기철기병(黑旗鐵騎兵)의 단장인 묵창(墨槍) 패웅(覇

雄)이란 자였다. 거의 광사 초상과 맞먹는 키에 십이 척에 달하는 묵창은

철마궁이 있는 서안에서는 감히 상대가 전무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지휘하는 흑기철기병. 무림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병으로 구성

된 병단이었다. 경공술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에게 말이란 멀리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이동수단 이외의 별다른 구실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으나, 그런 무인들의 상식을 완전하게 뒤집어버린 단체가 있으니

바로 흑기철기병이었다.

 전부 칠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창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흑기철기병

은 말 그대로 무적군단이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풀뿌리밖에 남

지 않는다고 하였다.

 과거 섬북고원(陝北高原)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초적단이라는 오백여 명으

로 구성된 녹림도들이 철마궁도를 공격하여 십여 명의 궁도가 사망하는 사

건이 생겼을 때 처음으로 흑기철기병의 위용이 드러났다. 단지 백여 명의

흑기철기병만으로 초적단 오백을 전부 몰살시켜버린 것이다. 말마저 검은

철갑을 둘러서 화살공격에도 끄덕 없는 상태이고 장창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녕 두렵기 그지없다고 한다.

 그 흑기철기병 전부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석산평인가?"

 환궁(幻弓) 무랍파, 혈마궁의 제이인자로 궁주인 귀궁 척단세와 견줄 정도

로 궁을 잘 다룬다는 궁(弓)의 달인이다.

 "그렇소, 두 분이 혈리평과 석산평을 맡아주시면 나찰마궁의 정예는 승천

로를 맡도록 하겠소."

 궁유의 작전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찰마궁을 중심으로 혈리평과 석산평에

적을 유인하여 승천로로 밀어 넣은 후 화약을 이용해 몰살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여세를 몰아 분하(汾河)까지 치고 들어간다는 작전이었다.

 황하와 마찬가지로 산서성의 중심을 관통하는 분하는 하남성을 치는 데 매

우 중요한 보급로로써의 역할을 하기에 감숙성으로 치고 들어가야 하는 천

무맹의 입장에서는 별반 소용이 닿지 않는 곳이지만, 하남성으로 들어가는

천마맹의 입장에서는 전략적인 요충지로써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중요

한 곳이다.

 "허나, 그들을 끌어내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묵창 패웅의 물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이곳은 나찰마궁의 근거지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까지 들어와서 죽여

달라고 목을 내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승천로에 함정을 설치하고 그

곳으로 천무맹 인물들을 밀어 넣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비밀리에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겠소."

 패웅의 물음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마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실제 흑기철기병이나 혈마궁의 궁사대는 천마맹의 섬서성 공격과 같은 시기

에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스며들었다. 지금의 작전을 위해서 그때부터 미리

계획하고 있었기에 천무맹에서는 결코 흑기철기병과 궁사대가 이곳에 와 있

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은 극비사항입니다. 그들을 끌어들이

는 것은 본인에게 맡겨두시오. 그들은 오게 되어 있소, 반드시……."

 마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적을 알고 있는 반면에, 적은 이곳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고 있으니 그것이 곧 승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겠는가.

 용미리 주민들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적들도 자신들을 알기 위

해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고 또 알게 해주어야 수월하게 작전을 펼칠 수

있다. 흑기철기병이나 궁사대가 들어온 것을 목격한 주민들은 이미 제거하

여 입을 막았다.

 '화인걸이라 했더냐, 이곳 산서성이 네놈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     *     *

 태원(太原)에 있는 천무맹 산서분타.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곳의 분위기도

 용문산의 나찰마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나찰마궁은 천무맹을

공략할 계획을 이미 짜놓은 반면에, 이곳 천무맹은 그들에 대한 정보 부족

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요즈음 연일 계속

되고 있는 부하들의 실종사건 때문에 화인걸 등 이곳에 있는 수뇌부들이 곤

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금 실내에는 천무맹에서 나온 백의천룡 화인걸과 제마각의 부각주인 일

월신도(日月神刀) 냉무기(冷務基), 산서분타주인 사혼창(蛇魂槍) 도양상(道

陽像), 그리고 산동분타주인 풍마도(風魔刀) 마금천(馬金玔)이 심각한 표정

으로 앉아 있었다.

 "각주님, 간밤에도 다섯 명이 사라졌습니다."

 "또요?"

 화인걸이 인상을 찌푸리며 도양상을 쳐다보았다. 그거 하나 제대로 처리하

지 못했냐는 질책이었다.

 요 며칠간 계속된 사건이었다. 말단 하급무사들의 실종사건이 연이어 발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전쟁이 무서워서 도망을 친 자들이라 치부하고 대충 넘기고

 말았는데, 며칠간 계속해서 일어나자 수뇌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

다. 지금껏 오십여 명의 분타원들이 의문스럽게 실종되었던 거였다.

 워낙 하급무사들이라 전력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분타원들의 전체

적인 사기가 떨어진다는 것과 상부에 대한 불신이 문제였다. 연이어 실종사

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 하나 처리해주지 못하고 있냐는 불신감이 팽배

해지면 부하들이 상관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전쟁의 수행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건 불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

다고 봅니다."

 풍마도 마금천이 용문산으로 진격해가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마금천

의 말이 아니더라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 단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없기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사항은 용문산에 대한 정보요."

 화인걸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구화산에서 호

되게 당했던 기억 때문에 이번에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정보를 동원하여 적

의 동정을 살피고자 하였다.

 자신들은 도시에 분타가 있는 이유로 해서 적에게 노출이 되어 있는 반면,

 용문산 산중에 있는 나찰마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병력이 어

느 정도 있는지, 지원 병력이 따로 와 있는지 등의 여부도 전혀 알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용미리와 구곡리, 그리고 전황리에서 뽑아왔던 안내원들을

 전부 내보냈습니다."

 "어찌 되었습니까."

 "별다른 조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찰마궁 자체 병력 외에는 어떤 조력자

도 와 있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들여보내라."

 도양상이 밖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자 부하 한 명이 삼십대의 장한을 데리

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용미리의 마달이었다.

 그의 휴가는 그냥 보내준 게 아니었다. 친구인 양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로

부터 나찰마궁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 나갔던 거였다.

 "이름이 뭔가?"

 "마달이라 합니다요, 나리!"

 "마달? 그것도 이름이더냐."

 화인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대천무맹이 전쟁을 수행하려는데 정보가 없어서 저런 시골 무지렁이들

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아무런 책임

의식도 없이 오직 은자 열 냥이라는 돈 때문에 와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빌어먹을……. 제갈수연!'

 군사인 제갈수연에 대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천밀각의 밀정들이 전부

 제거당했다는 연락만 왔을 뿐, 용문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자신과 아버

지를 끌어내리기 위한 그녀의 술수라는 걸 알면서도 증거가 없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결국 모든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용문산에 대

한 정보도, 산서성의 전쟁도.

 그래서 용문산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내놓은 대안이 그곳 근처에 살고 있

는 마을 사람들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래, 나찰마궁의 형편은 어떻다고 하더냐."

 "예, 나리. 제 친구 녀석의 말로는 요 며칠간 상당수의 인물들이 그곳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이외 별다른 것은 없었습죠."

 화인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수의 인물들이 빠져나갔다는 말은 지금 납

치사건의 원흉이 나찰마궁이라는 뜻이다.

 "그래? 네가 용문산 밑에 산다고 했더냐. 그럼 나찰마궁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겠구나."

 "그렇습죠, 나리. 나찰궁으로 가는 길이라면 세 곳밖에 없습니다."

 "나찰궁?"

 "아! 용미리나 그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찰마궁을 나찰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달의 나찰궁이란 말에 화인걸이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 있던 도양상이 재

빠르게 설명을 했다.

 "무식한 것들……. 계속해라."

 정의가 무엇인지 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들은 자신들의 배만 부르면 만

족해하는 돼지나 다름없다. 강호의 해악이 되는 자들을 자신들의 터전을 지

켜주는 사람들로 착각하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이런 자들에게 도움을 구해

야 한다는 처지가 그를 더욱 짜증나게 하고 있었다.

 "네, 나리! 그곳으로 가려면 혈리평, 석산평, 승천로 세 곳입니다."

 "승천로는 많은 인원이 이동할 수 없다 하지 않았더냐."

 화인걸이나 이곳에 있는 수뇌들도 마달이 이야기하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

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곳이 아니었다. 나찰마궁도 모르는 그런 길

이 필요했기에 용미리 사람들을 쓴 것이었다.

 "네, 나리! 동굴이 하나 있습죠."

 "뭐라고? 동굴? 자세히 설명해봐라."

 마달의 설명을 듣고 있던 수뇌들의 얼굴이 관심 어린 표정으로 변했다. 지

금껏 열 명 정도밖에 움직일 수 없다던 승천로에 동굴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것도 한꺼번에 수십 명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더군다나 그 동굴은 용

미리에서도 자신 혼자만 알고 있는 길이라 한다.

 "어디까지 나 있더냐."

 "네, 나리! 거기서 보면 멀리 나찰궁의 정문이 보입니다요."

 "그래?"

 화인걸이 마달에게 은자 꾸러미를 던졌다. 일종의 정보비라고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지금껏 안내원들이 가져온 정보 중에 가장 그럴싸한 정보였던 거

였다. 마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미궁처럼 여겨지던 나찰마궁을 공략

할 길이 생긴 터였다.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마달이 나간 뒤 네 명의 인물들은 다시 회의를 시작

했다.

 "저놈을 감시하러 보냈던 수하들은 별말 없었나?"

 "네! 각주님, 나찰마궁이 보낸 첩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화인걸도 용미리 주민들의 생활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내원들을 휴가

 보낼 때 감시병을 전부 딸려 보냈던 것이다.

 "좋아, 일단 저놈을 데리고 가서 그 동굴을 확인해보고 다시 보고하시오."

 다시 회의는 속개되었으나 조금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은연중에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냉부각주는 제마각의 나머지 인원들을 용문산 쪽으로 이동시키시오!"

 "네, 각주님!"

 천무맹에서 출발한 제마각 인원 이천 명 중 오백 명만 이곳으로 오고 나머

지 천오백은 이곳이 아닌 용문산 가까운 곳에 은밀하게 배치를 시켜두고 있

었던 것이다.

 나찰마궁도 그들을 속이고 있었지만 화인걸도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않았

다. 한 번의 패배를 바탕으로 배운 교훈인 게다.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말라는 강호의 철칙을…….

 그로부터 며칠 후 태원의 산서분타에서 모든 인원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천 명, 이번 산서성 전투에 동원된 천무맹의 전체 병력이었다.

 바야흐로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산서성을 점령하기 위한 두 세력간의

 최대 격전의 막이 올랐다.

*     *     *

 그믐날의 어둠을 뚫고 천여 명의 인물들이 용문산을 오르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잉!

 그들 일행이 전부 멈춰선 곳은 용문산의 삼부능선쯤 되는 곳이었다. 오십

여 장의 절벽을 타고 무심한 바람소리가 몰아치고 있다.

 기묘하게 생긴 절벽이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이 나누어진 절벽, 마

치 하늘에서 도끼로 찍어버림 직한 모양이었다.

 나찰마궁의 인물들이 외부로 나갈 때 사용하는 길인 승천로가 바로 그 도

끼자국이었다. 그리고 그 양편에 있는 절벽 위쪽의 평원이 석산평과 혈리평

으로 불리는 평원의 초입이다. 이곳에서부터 백 리 정도를 나아가야 황석곡

에 도착하게 된다.

 벌써부터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겁먹은 바람이 중앙에 있는 승천로로부터

무서운 속도로 불어나오며 산 아래로 도망을 쳐댔다.

 "마분타주, 도분타주. 잘해주셔야 합니다. 되도록 요란하게 진격해 들어가

도록 하시오."

 절벽을 오르고 있는 두 곳의 분타원들을 쳐다보며 화인걸이 입을 열었다.

벌써 절반 이상을 올라가 있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앞으로 일각 정도 후면

전부 절벽 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네, 각주님!"

 가볍게 읍을 하며 두 사람이 절벽을 오르기 위해 몸을 날렸다.

 '오늘의 결전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천무맹의 운명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과, 맹주인 아버지의 운명을 말함

이다.

 맹에서 일어났던 아버지와 화산파 인물들과의 사건에 대해서 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 편이 없었다. 전부 적일 뿐이었다.

 천마맹과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 이곳 산서성에서 지게 되면 아버

지의 과거 이십 년 인생과 자신의 미래가 끝장나게 되었다. 무려 이십 년간

을 천무맹의 맹주로서 봉사해온 아버지를 그들이 내몰려고 하고 있는 것이

다. 그들의 가장 중심에 있는 자들이 제갈세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최후의 선택은 산서성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여세를 몰아

맹의 지지 기반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두 부자가 내린 결론이었다

.

 "진격하라!"

 화인걸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절벽 위쪽에 도착한 마금천과 도양상

의 진격을 알리는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 와! 와!"

 마금천과 도양상의 외침을 시작으로 두 곳의 병력 천여 명이 빛살 같은 속

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석산평과 혈리평. 두 분타주들이 그곳에서 적과 전투를 벌

이며 시간을 끌고 있을 때, 화인걸이 이끄는 제마각은 승천로를 따라 나찰

마궁을 직접 점령하는 것이 이번 작전이었다.

 "마달, 앞장서라!"

 두 곳의 분타원들이 사라지고 산등성이로부터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화인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달 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전

전긍긍하던 화인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는 무조건 승리를 해야 한다.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이기고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까지 몰린 인간의 다급함이 화인걸을 성숙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인간의 몸부림.

 "이쪽입니다요, 나리."

 승천로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의 거대한 바위 뒤쪽에 마달이 이야기했던

 동굴이 있었다. 그 동굴을 바라보며 화인걸이 이를 악물었다.

 '두 분타주만 잘해주면 승산이 있다. 아니, 분명하게 이긴다.'

 화인걸이 이를 악물고 있을 때 일사천리로 진격해나가던 마금천과 산동분

타원들은 첫 번째 장애물을 만나고 있었다.

 "으윽! 억!"

 "전부 엄폐물을 찾아라!"

 전면으로부터 직선으로 날아온 수십 대의 화살이 부하들의 몸을 뒤쪽으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엄청난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바람까지 자신들에게 불어오고 있었

기에 화살은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이것은 신비궁(神臂弓)?"

 부하들이 맞은 화살을 본 마금천이 기겁을 하고 말았다. 지금껏 만들어진

활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신비궁이었던 까닭이었다.

 신비궁.

 과거 송나라가 가지고 있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신비궁이

란 활이었다 한다. 만약 나무를 향해 쏘면 굳이 무인이 아니어도 궁의 힘만

으로도 화살의 절반 이상이 박히고 나아가 철갑도 관통한다는 엄청난 위력

을 가졌다는 무기가 바로 신비궁이었다. 그 신비궁을 가지고 적이 공격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신비궁의 약점은 빠른 시간에 연사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즉,

한 번의 활을 날리고 다음 화살을 장전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는 말이다. 적의 무기가 무엇인지 파악이 되었으면 공략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한꺼번에 공격하라!"

 부하들을 향해 우렁찬 고함을 지르던 마금천이 도(刀)를 휘두르며 먼저 앞

으로 나섰다.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꼈다. 빛살

같은 속도로 도를 휘둘러 화살을 쳐낸 마금천이 더욱더 빠른 움직임으로 몸

을 날렸다. 이윽고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적을 발견했다. 다시 장전

을 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앞에 있는 바위를 밟고

뛰어오른 마금천이 도를 전방을 향해 사선으로 휘둘렀고 동시에 두 개의 목

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비단 마금천이 있는 곳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죽어간

나찰마궁 인물들의 피가 사방으로 피어오르고 잔인한 혈육의 축제가 시작되

었다.

 아직 석산평까지 가려면 십 리 정도가 남았는데 벌써부터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신비궁으로 무장하고 있는 적의 공격은 매서웠다.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달도 없는 그믐날이었기에

 소리를 듣고 방어자세를 취했을 때는 어느새 몸속에 화살이 박혀 있는 경

우가 허다했다.

 지극히 조심스럽게 전진할 수밖에 없었고 엄폐물을 찾아서 움직이는 방법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방패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나무를 잘라서 방패를 만들어라! 되도록 두껍게!"

 칼을 든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이 방법이 최고의 대안이었

다. 보이지도 않는 화살을 막기 위해서는 방패 이상 효과적인 것이 없다.

주변에 있던 몸통만 한 소나무를 잘라내어 대충 방패 비슷한 모양을 만든

산동분타원들은 다시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는 신비궁이 별로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방패를 관통했다 하더라도

몸에는 큰 상처를 주지 못했던 터였다.

 신비궁의 공격으로 산동분타원들이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혈리평

으로 접근하고 있던 산서분타원들은 그들과 다른 장애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뒤쪽으로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있는 수십여

구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죽어 있는 인물들이 하나같

이 상처를 입고 있는 곳, 바로 발등이었다.

 귀전(鬼箭).

 일반적으로 철질려라고 불리는 무기에 독을 발라둔 것을 말한다.

 철질려는 후한시대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시대, 촉의 제갈량과 위의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제

갈량이 진중에서 사망하자 퇴각하던 촉이 추격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길

바닥에 뿌린 것이 철질려였다고 한다. 이때 사마의는 철질려로부터 발을 보

호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신발을 신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철질려에 독을 바른 귀전이 온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석산평과

같이 화살공격이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도양상이 재빠르게 부하들에게 지

시를 하여 나무를 잘라 신발 아래에 묶게 했으나 벌써 수많은 부하들이 희

생당한 뒤였다.

 "정지!"

 도양상이 분타원들에게 정지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멈춰 섰다. 그들의 눈앞

에 가슴까지 차오르는 풀로 뒤덮인 초목지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혈리평.

 이곳만 지나면 나찰마궁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가슴을 짓누르는 이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거의 오백여 장에 달하는 광활한 분지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운이 스

멀스멀 피어오를 뿐 그 흔한 벌레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검은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바다였

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대로 진격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고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어둠 속에 무엇인가 웅크리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신발 밑에 댄 판때기를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이곳 어딘가에 또

다시 조금 전과 같은 귀전이 있다면 이제는 나무도 구할 수 없는 곳이기에.

 차 한 잔 마시는 시간도 안 걸릴 거린데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

나 나찰마궁을 치기 위해서는 전진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대형을 좁혀라!"

 결국 그의 선택은 좁아진 대형으로 전진하면서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선두

 쪽에 희생이야 나겠지만 한꺼번에 당하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너무 조용해…….'

 도양상이 걱정하는 바였다. 용문산을 오를 때부터 일부러 요란스럽게 올라

왔다. 자신들의 위치를 발각시키면서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귀전의 공격

외에는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조용, 조용히 움직여라."

 너무 조용해서 불안한 곳은 도양상이 있는 곳이었고, 숨죽이며 소음을 내

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곳은 화인걸이 움직이고 있는 지하 동

굴이었다. 산동분타원들과 산서분타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찰마궁으로

향하는 바로 아래쪽에서 제마각 이천의 인물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

다.

 "얼마나 남았느냐."

 마달의 말대로 동굴은 상당히 넓었다. 폭이 거의 오 장은 되어 보였다. 그

러나 움직임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동굴의 바닥에 있는 바위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동굴이라 경공을 발휘하여 달릴

수도 없기에 이동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화인걸이 짜증을 내는 이유였다. 지상에서는 이미 시작했을 터인데 자신들

은 동굴 속에서 아직 나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작전에 차질이 생길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벌써 상당히 온 것 같은데도 동굴은 끝이 보이질 않고

 짙은 어둠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예! 나리. 이제 일 다경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요."

 가장 선두에서 그들을 안내하고 있는 마달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

는 이 동굴 입구까지만 안내를 해주면 임무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자신을 노려보는 천무맹 인물들의 서

슬에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이곳까지 오고 말았던 것이다.

 "쉿!"

 화인걸이 제마각 인원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두런두

런 말소리와 함께 함성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거의 입구에 다 왔든지, 아

니면 승천로에 가깝게 있다는 뜻인 게다.

 "다 왔습니다, 나리!"

 마달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 검은 동굴의 끝이 보였다.

 '냉무기, 나가서 동정을 살피고 와라.'

 '네, 각주님!'

 냉무기가 은밀한 동작으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도 위에서부터

고함소리가 들려오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

 '벌써 시작했단 말이군.'

 이미 산동분타원들과 산서분타원들이 혈리평과 석산평에 도착했다는 뜻이

었다.

 '각주님!'

 '다녀왔나, 동정은?'

 '양옆으로 해서 나찰마궁 인물들이 매복해 있습니다. 거의 사백 정도의 인

원입니다.'

 '그럼, 나찰마궁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이곳에 사백 명 정도가 있고 외부에 아무리 적은 인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천여 명 이상은 있을 것이다. 나찰마궁의 전체 상주 인원이 천오백여 명이

조금 넘는다고 했을 때 이미 궁은 비어 있다는 말이다.

 '좋다, 은밀하게 이동하여 매복하고 있는 자들을 친다.'

 서로에게 수신호를 전달한 제마각 인원들은 조용히 동굴을 빠져나와 나찰

마궁 인물들이 매복해 있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나찰마궁의 인물들이 외부에 전부 나와 있다면 굳이 궁으로 쳐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화인걸의 실수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나찰마궁에 와 있는 흑기철기병의 말발굽소리를 들었을 테고 또 다른 방수

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터인데, 석산평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너무

서둘렀던 것이다.

 제마각 인원이 은밀하게 이동하는 그 순간, 석산평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석산평의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왔을 때 적의 기습이 시

작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화살공격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 매복하고 있

던 적들이 튀어나오면서 산동분타원들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으악! 커억!"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적이 산동분타원의 목을 침과 동시에 자신도 검에

찔려 쓰러지고 있었다.

 "나를 따르라!"

 마금천이 자신의 도를 빼어들고 전력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방패는 이미

 버린 지 오래, 적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무거운 나무를 들

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달려가는 그의 눈에 바위틈으로 몸을 숨기는 적이 보였다.

 "폭풍기(暴風氣)!"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마금천의 도에서 폭풍 같은 도기들이 전방을 향해

 난사되어갔다. 풍마도라는 별호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으-악!"

 순식간에 두 명의 적이 분시(分屍)가 되면서 그 육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

다. 신비궁에 당한 분풀이라도 하듯 무서운 기세로 산동분타원들이 전방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너무 적어…….'

 무서운 기세로 전진하여 나가면서도 마금천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생각보

다 저항이 너무 미미했던 까닭이다.

 지금껏 산동분타원 앞을 막아선 인물들은 기껏 삼십 여명. 그들 중 고수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일도도 감당하지 못하는 약졸

뿐이었다. 구파일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찰마궁임에도.

 "혹시……. 전부 엄폐물을……."

 슈-욱! 핑! 핑!

 "커억! 컥!"

 해쓱해진 표정의 마금천이 부하들에게 외치는 순간, 전방으로부터 수십 수

백의 인원들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자신들을 향해서 화살공격을 퍼부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맨 앞쪽에 있던 자들이 솟아오르며 첫 번째 화살을 날

리고 그들이 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 두 번째 줄에 있던 자들이 허공으로

솟으면서 활을 날리는, 그렇게 끝없이 솟아오르며 산동분타원들에게 활을

쏘아댔다.

 "저럴 수가……. 저들은 혈마궁의 궁사대!"

 마금천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지금껏 다른 방수들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혈마궁의 궁사대가, 그것도 전원이 와 있었다.

 궁사대의 가장 무서운 점이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였다. 숨쉴 틈도 주지

않고 화살을 날린다는 점이다.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연환공격이 바로 저들

의 공격이다. 모두 칠백 명의 인원이 전부 활을 장전하고 있다가 순서대로

쏘는 방법, 한 번에 칠십 명씩 쏘게 되므로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활을 쏘는 것이 가능하다. 피할 곳도 없다. 허공으로 솟아올라 쏘는 것이

기에 웬만한 엄폐물은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저들과의 거리는 삼십 장. 중간에 바위들도 많다. 한꺼번에 돌격한다면?'

 결국 마금천이 택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之)로 움직이며 나아

가서 접근 전으로 승부를 보는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희생이 클

 터이지만 지금 이 상태로 있다가는 분타원들만 한 명씩 죽어나가게 될 뿐

이다.

 '전달하라!'

 전 대원들에게 마금천의 지시사항이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진격하라! 몸을 멈추지 말라! 계속해서 교차시켜라!"

 "와-아! 와!"

 엄청난 고함소리를 지르며 산동분타원들이 궁사대를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막연히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또

는 세 사람이 서로 교차하면서 좌우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대단하군. 역시 천무맹이라 이건가!"

 환궁 무랍파. 부하들이 펼치는 연환사궁진(連環死弓陣)에 당당히 맞서는

산동분타원들의 행동은 그에게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하였다.

 거의 백여 명이 죽어나갔고 빗발치는 화살비에 의해 바로 옆에 있던 동료

가 쓰러지고 있음에도, 추호도 망설임이 없이 분타주의 지시를 이행하는 모

습은 대단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물러나면서 정사(正射)하라!"

 적의 모습에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직 죽여야 할 적일 뿐이다.

 정사, 움직이는 물체를 쏠 때 취하는 방법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쫓아 화살

을 날리는 방법이다. 연사에 비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

만 정확도는 연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욱 빨리 움직여라!"

 마금천이 한층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단 화살비는 그쳤지만 이번에도 부

하들이 쓰러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적과의 거리는 십여 장, 적도 물러나면서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자신들이 접근하는 속도보다는 늦었다.

 "돌격하라!"

 적을 향해서 돌진하라는 명령은 산서분타원들이 있는 혈리평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두!

 사혼창 도양상을 비롯한 산서분타원들의 전면에 있는 기마병들, 그 수백

명의 기마병들이 이쪽을 향해 돌진해들었다. 검은 철갑에 검은 창, 그리고

검은 말(馬)들, 강호제일 무적 철기병인 흑기철기병이 폭풍 같은 기세로 산

서분타원들을 향해 질주해 들어왔다.

 "쳐라!"

 사혼창 도양상이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기병술을 익힌 적을

앞에 두고 방어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허리에 사혼창을 고정시킨 도양상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전방을 향해 쾌

속하게 창을 찔러 넣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탄력과 앞으로 튀어나가는

창의 속도에 의해서 흑기철기병 한 명의 목에 자신의 창이 틀어박히는 촉감

이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파(破)!"

 다시 한 번 도양상의 외침이 울리고 창두(槍頭) 주변에 백광이 어리더니

창이 박힌 흑기철기병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흑기철기병의 머리를 날려버린 도양상의 몸은 멈추질 않았다. 머리가 사라

진 철기병의 몸을 박차고 그 자리에서 회전을 하며 사혼창을 휘둘렀다. 붉

은색의 창영(槍纓)이 허공을 가르며 덩달아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사혼창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이다. 손잡이 부분을 제

외한 모든 창간(槍杆)에 날이 서 있어 베기에도 유용하게 만들어진 창이 바

로 사혼창이었다. 여섯 개의 검은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사방으로 떨어

졌다.

 "사혼 제일 식, 천단세(天斷勢)!"

 도양상이 거대한 외침소리와 함께 일 장 크기의 장창을 하늘에서부터 대지

를 향해 일직선으로 갈라쳤다.

 하늘을 잘라버린다는 천단세. 창에서부터 시작된 백색의 광망이 마치 벼락

이 치는 것처럼 전방으로 떨어지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수직으로 잘라버린

다. 창으로 펼치는 탄(彈)의 경지였다.

 흑기철기병 대여섯의 몸이 말과 함께 반으로 잘려지며 양옆으로 쓰러졌다.

 자욱한 피보라와 함께 역겨운 냄새가 풍겨나왔다.

 "횡단세(橫斷勢)!"

 땅에 있던 사혼창을 들어올리며 다시 좌(左)에서 우(右)로 무섭게 쓸어내

는 동작, 사혼창법의 이 식인 횡단세였다.

 "크악! 아악!"

 말에 타고 있던 흑기철기병들의 다리가 말의 몸통과 같이 잘리면서 고통스

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엄청난 무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일당백이라는 흑기철기병 십여 명을 순식

간에 도륙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도양상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흑기철기병이 너무 강했던 까

닭이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산서분타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패웅! 패웅은 어디 있나. 사내라면 네놈이 나서라!"

 시간을 끌어야 함이다. 신룡각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희생을

줄일 수 있기에 패웅과 자웅을 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러서라!"

 무섭게 몰아치던 흑기철기병이 패웅의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뒤쪽으로 이

동했다. 쌍방이 물러선 중앙의 공간은 도저히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지경

이었다. 제대로 된 시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한 번 죽었던 시체들도

말에 의해 짓밟혀서 어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흑기철기병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도양상에 의해서

다리가 잘렸던 흑기철기병마저도 모두 고혼이 되어 차디찬 바닥에 누웠다.

사방지천에 널려 있는 것은 죽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와 어육, 그리고 말

발굽에 의해서 터진 내장 조각들이었다.

 "그대가 정도 제일 창이라는 사혼창(蛇魂槍)인가! 반갑군."

 뒤쪽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인물, 흑기철기병의 단장인 묵

창 패웅이었다.

 그도 뒤쪽에서 사혼창 도양상의 무위를 보았다. 단 일격에 예닐곱의 흑기

철기병을 절단 내버리는 도양상의 가공함은 패웅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지

금은 비록 말 위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지만 창은 패웅의 모든 것이었고 가

족을 버리면서까지 오직 창에 일생을 걸었던 사람이 그였다. 자신과 비슷한

 인생관을 가진 인물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섭게 방망이질하는 것을

느꼈다.

 도양상을 쳐다보던 패웅이 말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철갑을 벗어서 부

하에게 맡긴 후 도양상의 삼 장 전면으로 다가왔다.

 투구까지 벗어버린 패웅의 얼굴은 뜻밖에도 인자한 육십대 노인의 얼굴이

었다. 그러나 얼굴만 그렇지, 다른 쪽은 아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양 팔

뚝에 솟아 있는 근육들은 금방이라도 무서운 힘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

다. 거의 칠 척에 달하는 키와 십이 척이나 되는 철창(鐵槍)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시골 노인이 아니라 한마디로 전신의 모습이었다.

 "자네와 나의 비무는 저들의 싸움과는 별개네. 아마 우리의 비무 시작과

함께 흑기철기병은 다시 진격할 걸세."

 도양상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응해줄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다. 이미 역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자

신이야 개인적으로 도양상과 싸워보고 싶은 욕심에 나섰지만 지금은 어차피

 전쟁이다. 죽고 죽이는 혈전만이 남는 전쟁.

 "자! 시작해볼까?"

 부웅!

 패웅이 취한 자세는 저사평창세(低四平槍勢)의 자세였다.

 창을 배꼽 부근과 일치시켜 수평으로 놓으며 뒷다리에 중심을 두는 자세로

 선공을 양보한다는 뜻이었다.

 "좋소이다, 선배. 한 번은 겨뤄보고 싶었소이다."

 도양상도 가슴 높이에 창을 수평으로 놓으며 공격자세인 고적사평창세(高

吊四平槍勢)를 취했다.

 의도가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역시 늙은 노물답게 자신의 수가 통하지 않

았다. 개인적인 욕심도 차리고 전투의 승리도 거머쥐겠다는 수작인 게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틈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모든 신경을 비무에만 집중해야 할 때다. 비록 자신보다 한 단계 위에 있지

만 무공이 높다고 해서 비무에 이기는 건 결코 아니다. 한순간, 찰나의 순

간에 승부가 결정되기에 한 사람이 바닥에 누울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다. 패웅만 물리치면 자신들이 승리할 수도 있을 터였다.

 사혼창. 창두가 뱀이 움직이는 모양처럼 되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십

척 두 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사혼찰(死魂札)!"

 창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라 할 수 있는 찌르기였다. 그러나 도양상이 하

는 찌르기는 일반 군병들이 하는 찌르기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의 창두를

 감싸고 있는 백색의 기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精)과 기(氣)와 신(神)을 모두 하나로 일치시킨, 전력을 다한 찌르기였

다. 그리고 그 빠르기란, 앞으로 달려가는 그의 빠르기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했다.

 "묵령찰(墨靈札)!"

 패웅의 입에서 나온 외침도 똑같은 찰(札)이었다. 찰(札)이란 창으로 찌르

는 기술을 총괄하는 말이었기에 두 사람의 초식명 마지막이 같았다.

 순간 패웅의 창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뒤쪽으로 빠져 있던 오른발

을 앞으로 이동시키며 창을 쭉 내밀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쭉 밀려났다. 창두와 창두가 정확하게

 부딪치며 그 충격으로 서로가 밀린 것이다.

 "천단세!"

 뒤로 물러나던 도양상의 몸이 허공을 향해 일 장가량 솟구쳐 오르고 이어

패웅을 향해서 아래쪽으로 내리꽂듯이 달려들며 사혼창을 내려쳤다. 조금

전 흑기철기병 몇 명을 수직으로 잘라버린 그 수법이었다. 사혼창에서 흘러

나온 백색의 기운이 패웅의 머리 위쪽의 공간을 잘라내며 무섭게 달려들었

다.

 "묵혼지절세(墨魂地切勢)!"

거대한 일갈과 함께 패웅이 자신의 창을 들어 땅바닥으로 힘차게 내리치며

그 반동을 이용하여 위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휘둘렀다.

 백색강기를 머금은 도양상의 창과 흑색강기를 머금은 패웅의 창이 거칠게

부딪쳤다. 이번에는 창두만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거의 창간의 절반가량이

 섞이며 엄청난 굉음을 만들어냈다.

 "횡단세!"

 상대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의 접전을 시작으로 흑기철

기병이 공격을 시작했고 또다시 피륙이 난무하는 도살장으로 변해가고 있었

기 때문이다.

 "묵혼극(墨魂極)!"

 역시 백전노장이란 말이 어울리는 패웅이었다. 자신의 내력을 소모하는 법

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도 도양상의 창과 부딪친 반발력으로 생긴 힘을 이

용해서 땅을 치며 허공으로 솟아오른 그가, 조금 전 도양상이 보여주었던

몸놀림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향해 내리꽂으며 찌르기를 시도하였다.

 창이 노리고 있는 곳은 도양상의 인후, 검은색의 묵광이 도양상의 목을 노

리고 빗살같이 들이닥쳤다.

 "배단세(背斷勢)!

 그러나 도양상의 대응도 놀라웠다. 횡으로 쓸어가던 창을 멈추고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면서 패웅이 내려설 만한 자리를 향해 쾌속하게 창준을 이용

한 찌르기를 시도했다.

 창준.

 창의 손잡이 뒤쪽을 지칭하는 말이다. 창두만은 못하지만 창준도 찌르기에

는 최상의 공격무기였다.

 과-앙!

 다시 두 사람의 창이 거칠게 맞닥뜨렸다. 도양상은 앞으로 더 전진해나가

고, 패웅은 허공으로 더 솟아오른 다음에 바닥으로 내려섰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접전이었다. 창에 있어서는 무림 최고수의 비무임에

도 누구 하나 관전자가 없었다. 그들 주변에 있는 관전자들도 자신들의 생

명을 살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까닭이다.

 흑기철기병에 맞서서 싸우는 산서분타원들의 대항은 처절했다. 무적 철기

병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그들의 위용은 대단했다. 철갑으로 감싸진 몸에

는 칼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적어도 강기 수준은 구사를 해야 적의 몸을 잘

라낼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흑기철기병에게

최대한 접근하여 철갑의 틈 사이로 검을 밀어 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른 철기병이 등 쪽에서 그를 훑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어두

워지며 정신이 아득해진다.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 두 무인이 창(槍)을 휘두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서로를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

고 있었다. 어느 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기지 못하면 남는 것은 죽

음뿐이다.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고, 흑기철기병은 너무 강했다. 검(劍)은 죽음을

 몰고 오는 악마의 사신이었다. 전후좌우 사방을 휩쓸며 휘두르는 장창에,

찔려도 죽고 타격에 의해 맞아도 죽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방어는 흑마의 다리 관절을 잘라서 적을 처치하

는 방법뿐, 정신없이 몰아치는 흑기철기병의 서슬에 제대로 된 실력도 발휘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몸을 누였다. 죽어가는 산서분타원들 중에는 지금까

지도 발에 나무판을 대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부하들이 전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임에도 몸을 빼지 못하는 자, 사혼

창 도양상이었다. 점점 거세지는 패웅의 기세에 다른 곳은 신경 쓸 틈이 없

었다.

 "이제 마무리를 하세나."

 주변에서 자행되고 있는 잔인한 죽음의 유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패웅이

자신의 묵창을 가슴 쪽으로 들어올렸다.

 "과연 흑기철기병이외다."

 패웅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도양상의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묵창 패웅. 가는 길이 달랐을 뿐이

지, 진정한 무인이었다. 단 한 번도 비겁한 수나 암습을 가하지 않았고 오

직 창술로만 자신을 누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의 대결은 선후배간의 비무가 아니고

생(生)과 사(死)만 남는 전쟁이기에, 계속 가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음이다

.

 고적사평창세(高吊四平槍勢).

 마지막 최후의 초식을 장식하는 두 사람의 무공은 공히 찌르기였다. 창술

의 가장 기본이며,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찰(札)이라는 공격기술. 찌르기

를 말함이다.

 두 사람의 창 끝으로 모든 기운이 모아지고 있었다. 패웅의 묵창에서는 검

은 광채가 솟아나며 창간 전체로 퍼져나가고, 도양상의 사혼창에서는 백색

의 기운이 솟아나와 창두를 감싸기 시작했다.

 우우웅!

 묵창의 창두가 서서히 움직이며 기이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창룡음(槍龍音

)으로 불리는 음향이었다. 창을 다루는 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

 일명 환영창의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현상이 바로 창룡음이

었다.

 환영창(幻影槍).

 시전자의 모든 힘이 집중된 창두가 스스로 움직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 환영창이 펼쳐지면 순식간에 창두가 수십 개로 늘어나며 시전자 자신도

어느 것이 진정한 창두인지 알지 못한다 한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부위에

창을 찔러 넣기만 하면 창이 알아서 적을 살상한다는 전설의 경지가 환영창

이다.

 "제가 운이 좋군요, 전설의 경지를 보게 되다니 말입니다."

 사혼창 도양상이 자신의 창을 불끈 거머쥐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목마르게 원했던 경지를 적이 보여주고 있었다. 언제나 다가올 듯

멀어졌던 환영창의 경지. 이제 막 실마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는데.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환영창을 모방했지요."

 도양상의 두 팔에 힘줄이 돋아나더니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환영창을

 구하려다 편법으로 만든 방법, 두 팔의 근육이 파열되는 고통을 견디며 창

안했던 사혼창의 삼 초식인 광단세였다.

 부우웅!

 도양상의 창이 벌 떼가 날아가는 듯한 소성을 내보내며 무섭게 좌우로 움

직였다. 이 마지막 초식을 펼치고 나면 이긴다 할지라도 두 팔의 근맥은 전

부 끊어지게 된다. 영원히 불구가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내일이니 미래니 하는 것은 무의미하

기에 전진해나가야만 한다.

 "광단세(光斷勢)!"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전방으로 튀어나가며 사혼창을 찔

러 넣었다.

 순간 백색의 강기가 한일자를 만들며 공간을 갈랐다. 베어서 공간을 자르

는 것이 아닌 찌르기로 공간을 점유해버린 것이다.

 "묵혼환영(墨魂幻影)!"

 도양상보다 조금 늦게 패웅의 외침이 들려오고 그의 몸도 빛살처럼 나아갔

다. 그의 몸놀림을 따라서 주변의 여린 초목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창

에서 몸에서 발산되는 압력에, 공간마저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챙! 챙! 챙채챙!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찌르기 공격에 창 끝이 부딪치면서 나는 미약한 소

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몸에서 발산된 강기에 의해 주변의

초목들이 허공으로 비상하며 눈가루처럼 휘날렸다. 어느 순간, 수없이 들려

오던 소음은 딱 멈추면서 눈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도양상의 사혼창은 패웅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고, 패웅의 창은 도양상의

목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묵창 패웅의 승리였다.

 "무심(無心), 일심(一心)일세."

 어떻게라는 도양상의 말, 자신을 이긴 방법을 묻고자 함이 아니었다. 평생

을 익히고자 했던 환영창을 어떻게 얻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군, 그랬어."

 무심과 일심.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니던가. 아

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에서 한 가지만 얻기를 원하는 마음.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환영창을 얻기 위해 창두를 뱀 모양인 사혼

창으로 만들었고, 환영창에 다가가기 위해서 창간에 칼날을 달았는데, 그

모든 노력이 속절없는 짓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십 척 창에 일심으

로 매달렸으면 환영창은 벌써 자신의 것이 되었을 텐데…….

 "고맙소, 선배……."

 패웅이 창을 뽑아내자 그곳에서부터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죽어 있는 도양상의 표정에 아쉬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

의 평생소원이었던 바를 성취한 자의 얼굴이었다. 무인답게 죽었다는 안도

감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면서 죽는 것 또한 무인들이 바라는 죽음이었

기에.

 그나마 사혼창 도양상은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죽었건만 오직 전쟁

의 승리를 위해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나머지는 아니었다.

*     *     *

 "돌격하라!"

 상대와 오 장 거리를 남겨두고, 마금천이 무서운 기세로 뛰쳐나가며 소리

를 질렀다.

 이제는 난전만 남았다. 더 이상 적의 활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적의

수가 더 많지만 상대는 궁을 가진 자들이다. 활을 쏘지 못하는 궁수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금천의 예상대로 산동분타원들이 무섭게 치고 나갔다. 혈마궁의 궁수들

이 궁을 이용해서 산동분타원들의 공격을 막고는 있으나 이미 접근전으로

달려들고 있는 산동분타원들에 의해서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

다.

 그러나 결코 우세한 싸움이 아니었다. 적의 수효가 너무 많았다. 무려 칠

백이나 되는 인원수가 아닌가. 아무리 날고 기는 산동분타원들이라 해도 거

의 두 배에 가까운 궁사대를 유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어느 쪽도

쉽게 우세를 점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컥! 윽!"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산동분타원들이 쓰러져갔다. 피아 구분 없이 서로

 섞여 있는 혼전의 양상 속에서 정확하게 산동분타원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

는 인물이 있었다.

 환궁 무랍파였다. 그의 궁술은 혼전이나 난전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

다. 원하는 장소에 정확하게 화살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놈!"

 풍마도 마금천이 빛살 같은 속도로 무랍파를 향해 몸을 날렸다.

 "폭풍강!"

 순간 폭풍 같은 강기의 태풍이 몰아치며 무랍파를 향해서 밀려갔다. 몸이

멈추면서 전개하는 강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과 함께 도신합일이 되어 무

랍파에 뛰어들면서 전개하는 초식이었다.

 무랍파의 대응도 신속했다.

 무인이 궁을 무기로 삼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단 경공에 자신

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먼 거리에서 절대적인 이점을 가진 무기가 바로

궁이었기에. 그런 의미에서 보면 경공은 궁술을 익히는 무인에게 가장 중요

한 보조수단인 것이다.

 무랍파의 경공술도 대단했다.

 급작스런 마금천의 공격에 별로 당황함이 없이 뒤로 몸을 날리며 그의 절

기를 쏟아냈다.

 "마영시(魔影矢)!"

 쉬이익! 쉬이!

괴이한 소리와 함께 네 대의 화살이 마금천이 날린 도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

 무랍파를 환궁이라 부르는 이유, 그의 화살의 특수함에 있었다. 화살촉에

조그마한 구멍이 수십 개가 뚫려 있어서 그곳으로부터 괴이한 소성이 흘러

나와 상대를 현혹시키기 때문이다. 화살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커지고 상대의 내공마저 억제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슈아악!

 콰광! 쾅!

 "크윽!"

 마금천이 거친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괴이한 음향 때문에 마지

막까지 진기를 잇지 못했던 거였다. 들리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 화살

에서 발생하는 거북한 음향이 그의 내부를 뒤흔들어놓고 말았다.

 "너의 무덤자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마금천."

 어느새 마금천과 십여 장 이상의 거리를 둔 무랍파가 입을 열었다. 혼전이

 벌어졌지만 자신의 부하들이 궁술만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산동분타원들에

 비해 무공 면에서 약하다 할지라도 경공과 인원수에서는 자신들이 유리하

기에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무랍파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산동분타.

 하남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타임에도 천무맹 인물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

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척박한 곳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천무맹과 같은 거대 단체에서 흔히 일어나는 권력다툼, 그 암투에서 패한

자들이나 상관의 눈 밖에 난 자(者)들이 좌천되어가는 곳이 산동분타였다.

때문에 산동분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은 성정이 거칠고 윗사람에게 고개

를 숙이는 데 인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소위 천무맹의 반골 집합소가

바로 산동분타였던 것이다.

 그것은 풍마도 마금천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던 마금천의 신형이 전광석화와 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폭풍탄(暴風彈)!"

 십여 장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폭풍마도법(暴風魔刀法)의 삼 초식을 펼쳤

다. 풍마도 마금천의 독문 무공이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공이 아

니다. 오십 년 전의 일대 마인인 폭풍마(暴風魔)의 독문도법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폭풍마도법을 습득한 마금천은 정파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익혔다. 오직 강해지기 위한 일념으로 익혔지만 고지식한 정파 무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은 폭풍마도법 때문에 산동분타로 좌천되고 말았다. 강함을 추구하는

행위는 무인의 본능임에도 자신들의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앙에서

밀려난 그였기에 누구보다 반항적인 기질이 강했다.

 오기, 결국 남은 것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오기밖에 없었다. 오직 무공

으로 증명해보겠다는 오기 하나로 피땀 흘려 무공을 연마했다.

 그러한 오기는 분타주인 마금천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산동분타

원 대부분이 마금천과 같은 경우를 당한 자들이었다. 우세한 인원으로도 혈

마궁의 궁사대가 산동분타원들을 유린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마금천이 펼치고 있는 폭풍탄은 폭풍마도법의 최후

초식이다. 도강보다 한 단계 위인 도탄의 경지임에도 전력으로 펼쳐버린 것

이다.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저돌적인 공세가 아닐 수 없었다.

 "사혼시(死魂示)!"

 전방에서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는 도탄강기를 향해 무랍파의 손이 번개처

럼 움직였다. 네 번, 무랍파가 순식간에 활시위를 놓았던 회수였다.

 끼끼깅!

 듣기 거북한 소성과 함께 전부 열여섯 대에 달하는 화살이 죽음의 살기를

머금고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콰과광!

 "커억!"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살에서 나온 괴음향 때문에 마지막 진기가

 이어지지 않아 또다시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 마지막 순간에 약해진 강기를 뚫고 하나의 화살이 틀어박혔다

.

 "놈!"

 마금천이 더욱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진다는 것을 알기에 입 안

 가득 들어찬 비릿한 피를 삼키며 더욱더 빠른 속도로 무랍파를 향해 뛰어

들었다.

 "폭풍탄!"

 거의 동귀어진(同歸於盡)에 가까운 수법이었다. 온몸을 무방비상태로 노출

시키며 오직 하나의 강기만 쏟아냈다. 이번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각오로 펼친 마지막 초식이었다.

 "헉!"

 자신이 공격했던 화살 중의 하나가 상대에게 박힌 것을 확인한 무랍파가

마음을 놓았다가 다시 저돌적으로 뛰어 들어오는 마금천의 공격에 경악하며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이 쏘았던 화살이 어떤 것이던가. 그 화살에 포함되어 있는 힘만 해도

 수천 근이 된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한 발짝은 물러서야 한다. 하물

며 어깨에 화살이 박혔음에야…….

 그러나 마금천은 아니었다. 더욱더 저돌적으로 다가들면서 폭풍도를 휘둘

러왔던 거였다. 온몸이 허점투성이였다. 활시위를 당겼다 놓기만 하면 바로

 끝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뒤로 물러나며 활시위

를 당겼다. 자신의 최후 절초인 무영마시(無影魔示)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무영마시, 말 그대로 화살 없이 진기로 쏘는 궁술 최고의 수법이다.

 그러나.

 털썩!

 마음은 벌써 활시위를 놓았는데 괴음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무랍파의 몸이 잘리며 나는 소리였

던 것이다.

 무랍파가 뒤로 물러나는 속도보다 마금천이 전개한 한줄기 도탄강이 더욱

빨랐고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무랍파의 몸을 훑어버렸다. 최후 초식을 펼

쳐보지도 못하고 환궁 무랍파는 생을 마감했다. 단 한순간의 방심이 부른

결과였다. 또한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승리자가 된다는 인생사의 평범한 진

리가 다시 한 번 입증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부 죽여라!"

 무리한 공격 때문에 내상이 더욱 심해졌는지 목으로부터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나왔으나, 애써 눌러 삼킨 마금천의 몸이 혈마궁의 궁사대 사이로 뛰

어들었다.

 "폭풍기!"

 "으악! 으-아-악!"

 핏물과 함께 터져나온 마금천의 외침소리에 이어 사방으로 도기(刀氣)의

폭풍이 일었다. 곧이어 뒤따르는 처절한 비명소리, 그의 몸이 지나간 곳마

다 궁사대들의 육편(肉片)이 허공으로 날렸다. 정녕 폭풍이란 말이 실감나

는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간신히 승기를 잡고 있던 궁사대의 진영이 무랍파의 죽음으로 급격히 흩어

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산동분타원들에게 기회가 생겼다. 지금껏 죽어간 동

료들의 복수라도 하듯 궁사대를 향해 거칠게 도검을 날렸다.

 "물러서지 마라! 더욱 바싹 접근하라!"

 뒤로 후퇴하고 있는 궁사대를 발견한 마금천이 더욱더 큰소리로 지르며 앞

으로 달려나갔다. 궁사대와 거리가 생긴다 함은 다시 활을 쏠 수 있는 여유

를 주게 되고 기껏 잡아둔 승기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금천의 기대와는 달리 산동분타원들의 전진은 더디었다. 이미 죽

음을 각오한 궁사대원들이 동료들의 후퇴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몸으로

방어하고 나섰던 것이다. 뒤이어 다시 날아오는 화살들, 동료의 죽음을 방

패삼아 뒤로 물러났던 궁사대들이 산동분타원들을 향해 무섭게 활을 쏘아댔

다.

 마금천의 얼굴이 다급하게 변했다.

 "빌어먹을! 각주 이 자식은 언제 나오는 거야!"

 절로 욕설이 터져나왔다.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가장 많은 병력을 가

진 자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있지 않은가. 지금쯤은 나찰마궁에서 불길이

 오르든지, 아니면 석산평이나 혈리평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어야 할 시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금천이 욕설을 퍼붓고 있는 당사자인 화인걸과 제마각 무사들도

 승천로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나올 형편이 못 되었다. 나찰

마궁도의 인원수는 사백여 명 정도밖에 없었으나 공격할 수 있는 공간이 너

무 좁았다. 그리고 양편 절벽을 타고 다니면서 제마각 인물들을 향해 독암

기를 뿌려대고 있었기에, 선두에 있던 무사들이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결국 앞이 막혀 있는 이유로 해서 아직 동굴 속에 있던 인원조차도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냉무기! 좌측 절벽을 맡아라!"

 밖으로 나온 화인걸이 재빠르게 냉무기를 향해 명령을 내리고 오른쪽 절벽

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면을 박차고 솟아오른 화인걸의 몸이 비스듬히 누

운 상태에서 절벽을 타고 나아가며 나찰마궁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환검(無幻劒)!"

 검신 화진악의 오늘이 있게 했던 무극태을검법(無極太乙劍法)의 일 초인

무환검. 환(幻)에 환(幻)을 더해서 결국에는 무환을 이루었다는 환검의 극

치인 검법. 살아 있는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화인걸의 손에

서 펼쳐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청색으로 변한 수십 개의 검이 그림자를 만드는 것처럼 생겨나더니 적의

허리에 일자로 지나갔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 자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갔

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잔인했다. 화인걸의 검이 지나간 부분은 수십 조각으로

분(分)해 있었던 것이다. 몇 조각으로 분리되었는지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승천로 바닥에 떨어졌다.

 과거 사문평에서 혈인검 천목수를 향해 자신의 무공을 일 초도 펼치지 못

했던 나약한 그가 아니었다. 한 번의 실패가 화인걸을 성장시켰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하는 절벽을 타고 다니며 계속해서 무

극태을검법을 뿌려댔다.

 타타타타닥!

 "무변검(無變劒)!"

 자신의 앞면을 향해 쏟아지는 암기세례를 몸을 뒤로 누이는 것처럼 피해낸

 화인걸이 이 초인 무변검을 쏟아냈다.

 "으아악!"

 무수히 많은 변화로 이루어져 마침내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변검의 최고

라는 무변검. 그 무변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육덩어리만 남았다.

 그러나 상대를 잘라버린 화인걸의 몸은 멈추질 않았다. 이 초를 펼친 화인

걸의 몸이 절벽을 박차며 반대편을 향해 날아갔고, 그쪽에서는 냉무기가 이

쪽 벽을 향해 몸을 날리며 승천로 바닥을 향해 검을 뿌려대고 있었다. 서로

 간에 절벽을 오가면서 눈앞에 있는 모든 적들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백의

천룡의 새하얀 백의가 혈의가 되어도 화인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검 끝에 담는 데만 모든 정신을 쏟고 있었다.

 승천로에 시체들이 쌓여갔다. 나찰마궁도들의 시체와 제마각 인물들의 시

체가 겹겹이 쌓여, 수조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바닥의 높이를 높여갔다

. 제마각 무사들의 옷에 흐르던 피가 죽어 있는 자들의 몸 위로 떨어지고

또 그 위로 죽어버린 육신이 자리를 잡았다.

 두 시진.

 나찰마궁 인물 사백여 명과 제마각 인물 삼백여 명이 죽어간 시간이었다.

 "조용히!"

 모든 적을 척살한 화인걸이 제마각 무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승천로 위쪽의 상황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석산평에서 나는 고함소리밖에 없었다. 혈리평 쪽에서는 아무런 기

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가. 너무 늦었단 말인가!'

 나찰마궁도들과 싸우는 중에 언뜻 말발굽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

은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다는 것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냉무기, 석산평 쪽으로 가라."

 아무래도 혈리평 쪽이 마음에 걸려서 자신이 직접 가보고자 하는 거였다.

가장 먼저 몸을 날린 화인걸이 혈리평의 격전지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혈리평에 도착한 일행의 상황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었다. 주변

백여 장이 완전하게 초토화되어 있었고, 사혼창 도양상을 비롯한 분타원 전

원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제대로 된 시체는 어

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갑자기 오한이 밀려들며 연화불지에서 겪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그 수효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모든 시체들이 찢겨져 있지 않았던가

.

 둥!

 어디선가 북소리인 듯한 미약한 소성이 들려왔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

으며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인걸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와 있는 구백

여 명의 제마각 무사들은 눈앞에 있는 처참한 상황에 넋을 잃고 있는 상황

이었다.

 둥! 둥! 둥둥둥둥둥!

 "으악! 커-억!"

 엄청난 북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여기저기서 부하들이 쓰러졌다. 단

순하게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장풍에 당한 자처럼 거의

오 척 이상이나 뒤쪽으로 거칠게 밀려나면서 쓰러지는 것이었다.

 '활?'

 "최대한 몸을 낮춰라!"

 기겁을 한 화인걸이 모든 내공을 실어서 부하들에게 외쳤다. 그러나 아직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고 있던 이들은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화살에 속절없

이 죽어나갔다. 함정이었다. 오백여 장 떨어진 곳에서는 죽고 죽이는 혈투

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반대편에는 죽음의 함정을 파두었던 것이다. 이미

흑기철기병이 휩쓸고 지나갔기에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엄

폐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 아닌가.

 치밀하게 계획된 함정이 아닐 수 없었다. 북을 먼저 침으로 해서 화살이

움직이는 소리를 전혀 감지할 수 없게 해놓았다. 그리고 지금은 칠흑 같은

어두운 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무림인이라면 결코 소리

없이 다가오는 화살을 피할 수가 없다.

 "각주님! 승천로를 제외한 사방이 모두 포위되었습니다."

 화인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승천로로 움직여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가게 되면 그야말로 떼죽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좁은 곳에

몰아넣은 다음 양쪽에서 화살공격을 퍼부어대면 견딜 재간이 없지 않겠는가

.

 하지만 이곳에 계속 엎드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가만, 저들의 작전을 역이용하면?'

 화인걸의 머리가 무섭게 회전했다.

 '허나, 만일 냉무기가 있는 곳이 유리한 상황이라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냉무기의 도움이 있어야 되는

 상황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화인걸은 망설이고 있었다. 석산평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냉무기가 유리한 상황에 있는데 자신의 부름으로

해서 전세가 뒤집어지기나 할까 하는 우려였다.

 '일단은 나찰마궁을 잡는다, 손님은 그 다음이야.'

 이곳에 도착해서야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다른 조력자들이 있

다는 것을 알았다. 흑기철기병이 와 있었던 것이다.

 흑기철기병이 강하기는 하지만 제마각 무사들의 실력이면 이기지 못할 것

도 없다. 일단 활을 가지고 있는 나찰마궁의 인물들을 전부 제거하고, 그

다음 방수들을 없애려는 생각이었다.

 '저들과의 거리를 알아야 한다, 거리를…….'

 바닥에 엎드려 있던 화인걸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찰나지간 사방에서 미약한 소성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재빠르게 몸을 숙인 화인걸이 다시 한 번 자세를 세웠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곳은 나찰마궁이 있는 한 방향뿐이었다.

 승천로와 일직선으로 나 있는 곳, 이번에는 분명히 보았다. 오십여 장 밖

풀숲에서 자신들을 향해 활을 쏘는 인물이 언뜻 보였던 것이다.

 "일대주, 이대주, 삼대주, 사대주는 이쪽으로 와라."

 잠시 후, 혈리평에 있는 절반 정도의 인원이 엎드린 자세 그대로 빠르게

승천로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사대주, 시작하라.'

 승천로 절벽에 도착한 화인걸이 사대주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냉무기! 이쪽이 포위되었다!"

 혈리평의 가운데서 화인걸의 외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석산평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냉무기가 도착했을 때 산동분타원들은 거의 전멸 직전에 있었다. 흑

기철기병, 혈리평에서 산서분타원들을 전멸시킨 그들이 석산평으로 이동해

있었던 거였다.

 산동분타원들과 싸우던 궁사대가 더 이상의 후퇴를 멈춘 곳이 지금 이곳,

바위가 전혀 없는 평지였다. 즉, 산동분타원들을 흑기철기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후퇴였다.

 기다리고 있는 있던 흑기철기병이 엄청난 위용으로 산동분타원들을 유린하

기 시작했다. 다섯 기가 한 무리를 이룬 흑기철기병의 장창이 사방을 휩쓸

고 다녔다. 화살을 맞고 쓰러진 인물들을 향해 검은 장창이 가슴을 관통하

고 그 위를 말발굽이 지나갔다.

 석산평이 다시 피로 젖어들었다.

 산동분타원이 고전하고 있는 그때 제마각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대

항은 산동분타원들과 또 달랐다. 천무맹의 최정예인 맹주 직할대답게 공포

의 흑기철기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기의 경지를 이루지 못한 무사들은

삼 인이 한 조가 되어 흑기철기병을 쓰러뜨려나갔다. 단순한 삼재진만으로

검은 사신을 상대해내는 것이었다. 천무맹 인물들이 쓰러지는 것보다 천마

맹도들의 주검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마금천이 고함을 내지르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또다시 승기가 보였다. 이

곳에 있는 흑기철기병과 궁사대만 물리치면 나찰마궁의 나머지 인물들은 크

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때 화인걸의 외침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마 대협! 각주님이 위험하오이다."

 "무슨 소리요, 냉 대협. 지금 적들을 없애지 못하면 우리가 지게 되오이다

."

 마금천이 냉무기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화인걸이 한 시진만 버텨주면

, 이번 용문산 전투의 승리는 천무맹이 거머쥘 수가 있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앞에 있는 적들을 물리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승기를 잡고 적을 몰아치고 있는데 냉무기는 후퇴를 하자는 것

이다.

 "그래도 가야 하오. 제마각주의 명령이외다."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며 검은 머리 하나를 잘라낸 냉무기가 소리를 질렀다

. 그도 마금천이 말한 의미를 알고 있다. 지금 여기서 조금만 더 몰아치면

적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흑기철기병과 궁사대를 상대하고 있을 때 화인걸의 신변

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맹주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자신이 맹을 떠나올

때, 맹주인 화진악이 화인걸의 신변에 대해서 신신당부를 했었다.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맹주의 부탁이질 않는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것 한 가

지만은 지켜야 할 약속인 것이다.

 "십, 십일, 십이 대는 승천로 쪽으로 후퇴하라!"

 용문산 전쟁을 다시 혼전 속으로 밀어 넣는 명령이었다. 절반의 무사를 뒤

로 돌린 냉무기가 승천로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제마각 무사의 절반 정도가 빠져나가자, 다시 상황은 천마맹 쪽으로 유리

하게 전개되었다.

 계속해서 뒤로 후퇴를 하며 적을 막고는 있으나 천무맹 인원들이 쓰러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냉무기가 승천로 쪽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화인걸은 삼백의 무사들과 함

께 승천로를 타고 은밀하게 나찰마궁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정지!"

 나지막한 정지명령과 함께 화인걸이 손을 들어올렸다.

 칠십 장.

 승천로를 따라서 움직인 거리였다. 조용히 절벽을 타고 오른 그들의 눈에

이십여 장 전방에서 열심히 활을 쏘아대는 인물들이 들어왔다.

 '신비궁?'

 부하들이 오 척 이상을 밀려나며 죽어갔던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

무리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다지만 화살에 그런 힘이 내재되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신비궁 때문이었다. 신비궁이었기에 궁술을 거의 모

르는 나찰마궁의 궁도들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죽여라!"

 삼백이나 되는 인원이 왔는데 은밀하게 처리한다고 통할 리도 없을 것이기

에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화인걸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적이…… 컥!"

 화살을 재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렸던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는

 순간, 화인걸의 검이 지나갔다. 치켜뜬 눈을 감지도 못하고 목이 잘려버린

 인물의 몸에서 솟구친 피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순식간에 기습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제마각 무사들도 무사할 수만

은 없었다. 전방을 향해 쏘려고 활을 준비하고 있던 자들이 뒤에서 달려드

는 화인걸 일행에게 쏘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대는 신비궁

은 강한 무공을 지녔다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수한 죽음이 새로이 생겨났다. 한 번 신비궁을 당긴 무사들은 제마각 인

물들의 칼 아래 혈리평의 고혼이 되어 쓰러져갔다.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

며 화살을 날리고는 있으나 더 이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더 이상 없습니다, 각주님!"

 나찰마궁 쪽에 있던 이백여 명을 처치하자 더 이상 남아 있는 적이 없었다

. 뒤쪽에 적이 있는 것을 눈치 챈 다른 쪽의 인영들은 벌써 몸을 빼버린 터

였다.

 "좋다, 현재의 진영으로 나찰마궁을 친다."

 이미 승천로를 따라서 냉무기가 오고 있을 것이었다. 나머지 부하들이 혈

리평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이동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한 성공이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바람을 타고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느껴졌다.

 '설마…….'

 "불입니다, 각주님. 저 앞에 불이 붙었습니다."

 사색이 된 부하 한 명이 나찰마궁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백여 장 전면에 새빨간 불길이 피어오르며,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서 엄청난 기세로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후끈한 열기가 제마각 무사들을 향

해 밀어닥쳤다.

 "승천로로 이동하라!"

 결국 남은 곳은 승천로밖에 없었다. 멀리 보이는 석산평에서도 온 사방을

뒤덮으며 밀려드는 불길이 보였던 것이다.

 '빌어먹을!'

 화인걸이 거친 욕설을 뱉어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불길이 그의

 발길을 잡아버렸다. 적은 이미 화공까지 염두에 두고 이번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각주님! 동굴이 막혔습니다."

 "뭐라고? 마달, 마달은 어디 있나?"

 "보이질 않습니다."

 승천로로 내려온 제마각 무사들이 우왕좌왕하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적의 암수가 뻔히 보이는데 승천로를 타고 내려갈 수도 없는 일이지 않는

가. 그러나 자신들이 왔던 동굴은 이미 그 입구가 무너져 있었다.

 진퇴양난이란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인지, 적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승천로를 빼고는 어디에도 길이 없었다. 위쪽에는 벌써 다가온 불길이

 널름거리며 제마각 무인들을 노려보고 있다. 바람을 타버린 불길은 제마각

 무인들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던 거였다.

 "승천로를 따라서 전력으로 이동하라!"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육십 리, 지금 이곳에서 승천로 입구까지의

거리다.

*     *     *

 승천봉(昇天峰).

 석산평을 따라서 오르다보면 만나게 되는 봉우리의 이름이다. 승천봉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나찰마궁이 있는 황석곡으로부터 시작하여 혈리평, 석산평

, 그리고 움푹 파인 승천로가 한눈에 확 들어온다.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이곳 승천봉의 정상에도 몇 개의 바윗덩어리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

는다.

 여러 개의 바위들 중 가장 평평한 곳에 한 인물이 등을 돌린 채 승천로와

혈리평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와 있었나?"

 온 얼굴이 땀에 젖어 있는 인물이 막 정상으로 올라서면서 등을 돌리고 있

는 인물을 향해 말을 건넸다.

 "좀 늦었구먼."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 인물, 뜻밖에도 화인걸을 안내했던 마달

이었다.

 그런데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나무꾼이었던 마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는 무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엄청난 기도가 흘러나오

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막 도착한 인물, 나찰마궁의 안내원으로 들어간

마달의 친구인 양이라는 사람이었다.

 아래쪽에서는 엄청난 불길이 일며 온 산을 태우고 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승천봉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자네……. 금제를 풀었구먼?"

 "할 일을 다했는데 이제는 풀어야지. 그리고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무공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지금껏 어떤 금제에

의해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는 말이 되질 않는가. 과연 이들의 정체가 무엇

이기에.

 "저기 가는 화인걸이라는 놈?"

 양이가 턱으로 가리키는 곳, 승천로 양옆으로 엄청난 기세의 불길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고 그 아래쪽으로는 수백의 인영들이

 서로 엉기며 불길을 벗어나기 위해서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불구불한

 승천로를 따라서 이동해야 하는 제마각 인물들에 비해서 바람을 타고 직선

으로 움직이는 화마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땀방울 같은 무수한 불똥을 승

천로 안으로 내던지며 재앙을 피해 도망을 치는 인간을 비웃는 것 같았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천무맹의 무사들이 불길이 무서

워서 도망을 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대단한 존

재로 보일지는 몰라도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그저 힘없고 나약한 존재

들뿐이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불똥을 피하지 못한 이들이 몸에 붙은 불을

꺼트리기 위해 나뒹구는 모습도 보였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화약은 치웠나?"

 "절반만 치웠지, 뭐. 놔두면 다 죽어버릴 것 같아서……."

 나찰마궁의 궁주인 마사가 언급했던 화약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마

달의 말로 볼 때, 화인걸이 가고 있는 승천로 절벽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다

는 뜻이고 그중 절반을 양이가 치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참! 상부에서 지시가 떨어졌네. 저놈들을 초리하(草鯉河)쪽으로 유인하라

고 하더군, 뭐라고 했더라……. 그래! 항산에 갔던 백무천이란 자가 분하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고 했고 미끼도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미끼?"

 "몰라, 하여간 그런 게 있나봐"

 더욱더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금신가의 무공을 수습하고 있던 백무천이

 드디어 나왔다는 말이었다. 또한 백산 일행에 대한 것도 언급되고 있었다.

 "어이, 마달!"

 "왜?"

 마달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얼마 전 화인걸이 했던, 그것도 이름이냐고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개자식!"

 마달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뭐라 하는 놈

들이다. 그런 놈들은 대부분 겉치레만 중시할 뿐, 그 사람의 실력이라든가

능력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숫자를 세어봐, 다섯부터. 내가 자네를 신으로 만들어줄게."

 인상을 쓰고 있는 마달을 향해 새삼스럽게 뭐 그러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

던 양이가 이상한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양이를 쳐다

보던 마달이 그의 표정에서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를 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섯, 넷, 셋……. 하나!"

 콰앙! 콰앙! 과앙!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승천봉에까지 그 진동이 느껴질 만큼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승천로의 한쪽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에 의한 폭발이 아니라

불길에 의해서 저절로 폭발하도록 화약을 매설해둔 것이었다.

 "아쉽네!"

 양이가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의 눈에 승천로에서 질주하던 인원 중 절반

 정도가 쏟아지는 바윗덩어리 아래로 묻히는 광경이 보였다.

 수백의 인물들이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고 있는데 그것을 본 양이는 아쉽다

 하고 있었다. 화약을 치운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거였다. 전부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아쉬워할 것 없어! 저놈들은 더 이상 강호상에 발붙일 곳이 없을 테니까.

"

 "벌써 정리해버렸나?"

 양이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달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맺혀들

었다.

 "자네도 가봐야지?"

 "그래야지. 돈을 벌어야 하니까."

 빙긋 미소를 지으며 양이가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추격자들을 이끌고 길

안내를 하러 가는 것이다. 양이를 배웅한 마달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아래쪽

을 쳐다보았다. 이미 절반으로 줄어버린 천무맹의 인물들이 승천로를 벗어

나기 위해서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곳 산서성에서 너희들은 완전히 망가지게 될 거다. 우리 혈맹이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다. 우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크하하하!"

 혈맹(血盟).

 지금껏 단 한 번도 강호에 등장하지 않았고 백산의 품속에 있는 혈맹인명

록에서 잠자고 있던 혈맹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 함인가.

 마달과 양이의 정체는 혈맹의 인물이었던 거였다.

 "유대운!"

 "네, 접주님!"

 "저놈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잘 도와라. 목표는 초리하다."

 "알겠습니다."

 유대운, 그도 안내인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용미리가 아닌 구곡리 출

신의 나무꾼 유대운뿐만이 아니었다. 용미리, 구곡리, 전횡리에서 안내원으

로 지원한 거의 모든 인물들이 혈맹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유대운이란 자를 따라 수십여 명의 인영들이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그들

이 움직이는 방향, 화인걸과 제마각 무사들이 필사의 도주를 하고 있는 승

천로 쪽이었다.

 "화인걸! 사람 이름도 갖지 못한 놈에게 한 번 죽어봐라!"

 나직한 중얼거림을 남기고 마달의 신형도 꺼지듯 사라졌다.

 가공할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를 양분하고 있는 천무맹과 천마맹의 산서격돌은 암중에 있는 혈맹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되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피해 당사자며 온몸에서 땀을 쏟아내고 있는 화인걸도 알지 못하는 사실

이었으니.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미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다. 혈의로 변해 있던 백의가 이번에는 검은색

으로 변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불똥은 그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눈가루였다. 붉은색의 화기를 머금은 새빨간

 눈가루가 그의 전신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피하고자 해도 피할 공간이

없었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뒤에 남아 있는 부하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가 없다. 엄청난 폭발로

인하여 많은 수가 죽었을 것이다. 일단은 승천로를 빠져나가 다시 정비를

해야 한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용이 승천할 때 만들어진 흔적이라는 영광

의 길이 아니었다. 구유지옥 중의 하나인 풍뢰의 지옥길이었다.

 또다시 패배. 설마 화공에 이은 화약까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건

경험부족도 뭐도 아니다. 정보 면에서도 무력 면에서도 일방적으로 당한 꼴

이다.

 "다 왔습니다, 각주님!"

 드디어 승천로 끝에 도착했는지 냉무기가 화인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악몽 같은 하룻밤이었다. 마금천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

다. 그의 말대로 흑기철기병과 궁사대를 처리하고 나찰마궁으로 진격했더라

면 지금쯤 자신들은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만있지는 않을 것인데…….'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이곳에 왔을 때의 삼분지 일도 되지 않

는 병력이다. 삼천의 병력이 왔다가 간신히 육백 정도가 남아 있는 것이다.

 마금천과 그의 부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화약이 터

질 때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마금천의 생사보다 더 중요한 일은 지금 있는 육백의 병력으로 하남성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승기를 잡은 나찰마궁에서 추격해올 것임은 자

명한 일이기에.

 냉무기의 우려는 공연한 걱정이 아니었다.

 황석곡에 있는 나찰마궁에서도 전열을 가다듬은 흑기철기병과 궁사대가 다

시 출정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패단주."

 뇌전마도 마사가 패웅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승리를 한 것 같지만 그들

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승천로에 매복하고 있던 나찰마궁의 정예

사백과, 궁을 쏘고 있던 부하들이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피해는 환궁 무랍

파와 궁사대 오백을 잃은 것이다. 더군다나 추격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궁

사대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결국 따지고 보면 양패구상 수준이었다. 다행히 의도한 대로 되어 화약에

의한 공격이 성공했고 도망치는 적을 상당수 제거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이곳에 왔던 적의 대장인 화인걸을 잡아야만 완전한 승리가

될 것이다.

 "맹에 소식은 보냈습니까?"

 "네! 곧 추가 병력이 파견되어 올 것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산서성을 접수

해야지요."

 "그래야겠지요. 저희 철기병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 몸으로 괜찮겠습니까?"

 사혼창 도양상과의 비무 때 당한 상처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무공의 고수라

 하지만 옆구리에 창이 관통했는데 몸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이 정도 상처 가지고 물러서면 부하들이 욕합니다."

 이곳에서 죽어간 부하들이 이백이다. 흑기철기병이 창설된 이후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그들의 복수를 해주기 전에는 상처를 돌볼 틈이 없다. 천

무맹의 잔당을 전부 쓸어내야 나을 상처인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추격하도록 하지요."

 드디어 추격이 시작되는 것인지.

 나찰마궁으로부터 천여 명의 병력이 쏟아져나왔다. 가장 먼저 길을 잡은

자들은 검은 철갑의 흑기철기병이었다. 그 흑기철기병의 가장 선두에 있는,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인물, 바로 길 안내를 맡고 있는 양

이였다. 승천봉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지금의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양이라 했는가? 잘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요, 나리."

 자연스럽게 말에 오르는 양이를 가만히 쳐다보던 패웅이 이내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나찰마궁에서 추격대가 출발하고 있는 그 시각, 화인걸과 살아남은 제마각

 무인들은 그들의 눈앞에 드러난 참상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산간 마을이

었던 용미리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온 마을이 검게 탄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살해되어, 그 시체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지옥의 불길을

뚫고 이곳까지 왔는지 그 불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누가 이런 짓을……."

 '각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망연자실 서 있는 화인걸을 향해 냉무기가 전음을 날렸다. 지금 남의 불행

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제마각의 안위가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일행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었는데 마을에 있는 유일한 우물 속에는 시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다음 마을인 구곡리까지 달려야 할 판이었다.

 "각주님, 생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불에 타고 있는 집에서 살려달라는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

었다.

 "지금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추격대가 쫓아오고 있다. 출발하라."

 '그대로 죽는 것이 더 편할지도…….'

 망설이는 화인걸을 대신해서 냉무기가 출발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구해준

다고 해도 치료도 해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 그

럼 고통만 당하다 죽어갈 것이다.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도와주는 길이

라 생각했다.

 살려달라는 신음소리를 뒤로하고 제마각 인원들이 전력으로 몸을 날려 떠

나갔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가닥 양심이 이곳에서 빨리 떠나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사건은 용미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음 마

을인 구곡리도, 그 다음에 있는 전횡리도 폐허가 되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어 있었던 거였다.

 결국 물은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했고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나찰마궁이 있는 용문산 부근에서 나무와 약재로 밥을 먹고살았던 세

 마을 사람들은 이번 두 맹의 전쟁으로 인해서 모두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

들이 한 일이라고는 양 맹에 협조해서 돈을 벌려 했었다는 것뿐이었는데.

 "악마 같은 놈들……."

 떠나가는 화인걸과 제마각 인물들을 쳐다보며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 전

횡리 주민이었다. 도시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막 도착해서 본 광경은 폐허

로 변해버린 마을과 죽어 있는 형제와 이웃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무심하

게 쳐다보고 있는 무사들.

 천무맹 무사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마을 주민들도 왔던 길로 다시 걸음

을 옮겼다.

 "잔인한 놈들,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화인걸과 천무맹 일행에 대해서 욕을 하는 또 다른 자들이 있었다. 검은

철갑에 검은 말, 나찰마궁을 떠난 흑기철기병들이 화인걸 일행보다 반나절

뒤에 용미리에 도착했다.

 쫓는 입장에 있는 자들의 여유인지, 아니면 동정심의 발로인지는 알 수 없

지만 말에서 내린 철기병들이 온 마을을 뒤지며 생존자를 찾고 있었다.

 "아무도 없나?"

 "네, 단주님. 전부 사망했습니다."

 화인걸 일행이 지나갈 때 거의 다 죽어 있었던 마을 사람들이었는데 그로

부터 반나절이 더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자신들이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는 임무를 잊기라도 했는지 철갑을 벗어 붙

인 흑기철기병들이 모든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모아서 무덤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리! 너무 지체하면 놈들을 따라잡지 못합니다요."

 무덤을 향해 흙을 퍼붓던 양이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패웅을 향해 빨

리 출발할 것을 종용하고 나섰다. 천무맹 일행과 반나절 정도의 차이를 두

고 있는데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면 더욱 추격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자넨 이곳 출신이 아니었나?"

 오히려 패웅은 자신의 마을이 파괴되었는데 빨리 떠나자고 하는 양이가 더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는 이곳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습니다요, 나리.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서는 제대로 일을 해야죠."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양이가 패웅의 시선을 피했다. 패웅의 눈길이 이상

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천무

맹과 너무 멀어지면 계획했던 일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럼 출발하세나."

 이미 마을 사람들의 무덤을 다 만들었고 부하들이 출발 준비를 마쳤기에

양이의 뒤를 따라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두 시진도 채 되지 않아서 다시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구곡리도

전횡리도 용미리와 전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길에 의해 완전하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마을의 여기저기에 타다 만 시체들과 칼에 잘린 마을

사람들이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천무맹 놈들! 전부 다 죽인다."

 처음엔 잔인한 놈들이라고 욕만 해대던 패웅의 입에서 엄청난 포효소리가

터져나왔다. 부하들의 죽음 앞에서도 이리 분노하지 않았다. 비록 많이 죽

기는 했지만 그들의 죽음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싸

웠고 마도천하에 목숨을 걸었던 자들이다. 또한 무인이었기에 싸우다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지나쳐온 세 개의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강호무

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고 더구나 천무맹이나 천마맹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어린아이까지 포함해서

전부 도륙했다. 자신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저질러놓은 만행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물며 정의를 위한다는 천무맹 놈들이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양이,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라!"

 "따라오십시오, 나리!"

 양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표정이었

다. 마달이 정리했다는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단순하게 화인걸의

죄만이 되는 게 아니다. 강호정의를 위한다는 천무맹의 잔악함을 부각시켜

그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즉, 천무맹은 더 이상 강호정의를 수호하는 무림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호인들에게 인식시키는 작업.

 화인걸과 제마각 인물들은 이곳을 그저 지나가기만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리 생각해주지 않을 것이다. 천마맹과 전쟁 중에 마을 사람들을 희생시켰

다고 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들로부터 강호민심을 떠나게 하는 방법으

로 용문산 근처의 세 마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쁜 도망자들은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른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있는 산만 넘으면 되나?

 "그렇습니다, 각주님. 저곳에 있는 세 개의 산만 넘으면 추격대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쫓기고 있는 자들, 천무맹의 제마각 일행이었다. 전횡리를 떠난 이들이 반

나절을 더 달려서 도착한 곳이 지금 서 있는 곳이다.

 태변산, 삼교산, 백석산, 이 세 개의 산이 연이어 마치 산맥처럼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그 산세 또한 험해서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런 산이다. 험한 산세 때문인지, 아니면 근처에 마을이 없어서인

지 일반인의 출입이 전혀 없다보니 그 흔한 오솔길 하나 있지 않은 울창한

수림(樹林)만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길은?"

 화인걸이 냉무기를 돌아다보았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검게 변해버린 태

변산이 왠지 진입을 꺼리는 것 같은 느낌에 그도 모르게 꺼낸 말이다.

 그러나 저곳을 넘지 않으면 추격대를 뿌리치지 못함을 알고 있다. 추격대

가 알고 있는 길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산길을 따라서 이동하게 되면 이틀이란 시간을 벌게 되고 추격대와

는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이틀인 것이다.

 "혹시 전서구 남은 것은 없나?"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모두 분실했다는 말이다. 천무맹에 소식을 전

해야 하건만 방법이 없다. 승천로를 빠져나올 때 전서구를 관리하던 병력이

 모두 죽은 것 같았다. 패한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날 터이

지만 그들 또한 산서성을 잃어서는 안 되기에 추가 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

을 것이다. 더욱 빨리 이동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었다.

 "갑시다."

 "각주님! 물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간밤에 나찰마궁을 공격할 시점부터 지금까지 하루 동안 입에

 댄 게 아무것도 없다. 허기가 질 만도 하건만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그것마저 잊고 있었다.

 "산으로 가서 계곡만 찾으면 된다, 출발하라!"

 일행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 개의

 마을을 가로질러왔던 것인데 어느 곳에서도 물을 구할 수 없었다.

 서둘러 산으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산이면 계곡이 있을 터

이고 계곡이 있으면 반드시 물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곡만

 생각했지, 올 여름은 가뭄이 유달리 심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무인이었기

에 논밭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는 것도, 먹을 게 떨어진 농민들은

집을 버리고 유랑민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단지 산이 있으면 계

곡이 있을 거란 생각뿐이었다.

 어둠을 뚫고 전진하기를 두 시진, 벌써 몇 개의 계곡을 지나쳐왔지만 어디

에도 물은 없었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면서 전진하고 있었기에

나아가는 속도도 생각보다 더디었다. 그런 그들에게 더욱 큰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불길을 뚫고 온 상태에서, 휴식 한 번 없이 움직

이고 있었던 탓에 상당수의 부하들이 탈수 증상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땀을 흘렸기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빨리 물이라도 찾아야 할 텐데……."

 지금 부하들은 물이 아닌 소금이 있어야 치료를 할 수 있겠지만,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좀 마신 후 휴식을 취하면 어느 정도는 나을 수 있을 것이라

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부 내공 약한 부하들이 벌써부터 구토를 해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지

체하게 되면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각주님! 물입니다, 물!"

 백여 장 높이의 절벽을 앞둔 곳에 도착했을 때 부하 한 명이 기쁨에 찬 소

리를 질렀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뜻밖의 장소에 물이 있었던 거였다. 자연적으로 형

성된 샘이었다. 바닥에서 솟아나온 물이 삼 장 크기의 못을 만들고 있었다.

 사막에서 녹수(綠水)를 발견한 사람들의 기분이 이러할까. 모든 제마각 인

원들이 반색을 하며 연못가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꿀맛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태어나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

는 음식이 바로 지금 마시고 있는 물임을 누구도 부정치 못할 것이다.

 "여기서 쉬었다 간다."

 철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절벽을 타고 넘어야 하는데 지금 부하들의 체력

으로는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두어 시진이라도 몸을 쉬어 체력을 보충하고

 움직여야 할 일이다.

 피곤함에 지친 제마각 무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자리

를 잡으며 몸을 누였다. 바닥으로부터 차디찬 냉기가 올라와 전신으로 엄습

해들었으나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함

께 곧바로 코를 골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화인걸도 마찬가지였다. 천무맹이 대패했고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곳은 어제 오늘 이틀간

 머물렀던 장소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길까지 만들면서 들어온 곳인

데 추격대에게 발견될 리가 없으리라는 안도감에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화인걸과 제마각 무인들은 추격대만 생각하고 있었지, 자신들이 머

물고 있는 연못의 주인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깊은 산속

이고 주변에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장소에 단 하나 있는 연못이 있다 함

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 산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의 갈증을 식혀주

는 유일한 곳이 이곳이다. 연못의 주인은 지금 자고 있는 인간들이 아니고

산속에 있는 동물들이라는 말이다. 즉, 동물들에게 비친 인간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들일 뿐 그 무엇도 아니었다. 더구나 육식을

 하는 맹수들에게는 더더욱.

 '뭐지?'

 천근 같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설핏 잠들었던 화인걸이 온몸을 죄어오는

섬뜩한 느낌에 슬며시 눈을 떴다.

 '이런!'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무리 안전한 장소라 할지라도 경계를 세우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건

만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는

 화인걸의 귓가에 잔뜩 긴장한 냉무기의 전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늑대입니다. 온 사방이 늑대 천지입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였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살기와 야수들의 몸에

서 풍기는 노린내가 자신들을 완전하게 포위하고 있었던 거였다.

 '얼마나 깨웠나?'

 '절반도 깨우지 못했습니다.'

 이미 공격범위에 있는 늑대들에게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서 조용하게 부하

들을 깨우고 있었으나 너무 잠에 취해 있어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이제

절반 정도를 깨웠을 뿐이었다. 깨어난 부하들이 다른 동료에게 전음을 이용

하여 같이 깨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자고 있는 부하들의 숫자는 이

백여 명이 넘었다.

 냉무기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라도 자고 있던 부하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일어나서 늑대들을 쳐다본다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

이기 때문이다.

 결코 늑대들이 겁나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늑대라고 해봐야 짐승일 뿐이다

. 무공을 익힌 무인에게는 위협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부상을 당했을 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들은 쫓기고 있다. 다친 사람을 데리고 가면 그만큼 시간을 잡아먹게

되고 산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추격자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 터이다. 냉무

기가 걱정하는 바였다.

 그런 냉무기의 우려는 금방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많은 물을 마시고 잠

들었던 부하 한 명이 소피를 보기 위해 일어났다가 검은 어둠 속에서 시퍼

런 귀화처럼 빛나는 수백의 눈동자를 보고 만 것이다.

 "으엑! 저게 뭐야?"

 캬우우!

 순간 절벽 위에서부터 밤하늘을 관통하는 한줄기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

고 사방으로부터 늑대들이 들이닥쳤다.

 크아앙! 커엉!

 이미 잔뜩 웅크리며 기회만 노리고 있던 늑대들이 한 번의 도약으로 일행

을 덮쳐왔다.

 "으악! 크악!"

 캑! 캐엥!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제마각 무사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늑대의 발

톱과 날카로운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 뜯겼다.

 "정신들 차리고 한곳으로 모여라!"

 검을 뽑아든 화인걸이 늑대들을 쳐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무공을 익힌 무

인들에게 몇십 마리의 늑대는 아무런 위험이 될 수 없지만, 지금은 온 사방

지천에 깔려 있는 것이 늑대이고 제마각 무사들의 몸 상태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던가.

 화인걸의 검이 청색 광망을 토해내고 냉무기의 도에서 백색의 빛이 사방으

로 퍼져나가며 늑대들을 도륙해댔으나,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카르릉! 캬앙!

 동료 늑대의 잘린 몸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오히려

 야수의 본능에 의해 더욱더 광폭해진 늑대들이 침입자를 향해 무섭게 덮쳐

들었다.

 "절벽 쪽으로 물러나라!"

 냉무기가 고함을 지르며 도를 휘둘렀다. 눈앞으로 달려드는 놈을 쳐내면

다른 놈이 바로 다리 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다시 그놈을 발로 차내면 머리

쪽으로 공격해오는 놈들이 있었다. 동시에 수십 마리의 늑대가 달려드는 것

이었다.

 인간과 맹수의 피 어린 사투였다. 벌써 수십의 동료가 죽어갔지만 늑대들

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죽어버린 동료의 시체를 넘어서 더욱더 거칠게 공

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다.

 "으악! 살려줘!"

 한 무사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회를 틈타 들어온 늑

대 한 마리가 오른팔을 물어뜯음과 동시에 발톱으로 안면을 긁어버린 것이

다. 그리고 늑대 발톱에 걸려 있는 둥그런 물체 하나, 안면만 찢긴 것이 아

니라 눈마저 발톱에 걸려서 빠져버렸다.

 "둘 다 잘라!"

 누군가의 외치는 소리가 절벽에 메아리 되어 울렸다. 방법이 없었다. 늑대

만 따로 죽일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고 이미 팔이며 눈까지 다 사라진 동

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옆에 있던 동료의 칼이 번쩍이며 늑대와 무사의 몸을 잘랐다. 이미 눈이

사라지고 몸통마저 잘린 동료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료의 몸통을 잘랐던 무사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

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몸통이 잘려 두 조각으로 나누

어떨어지는 동료의 모습에 멈칫하는 행동을 보이는 순간, 늑대의 공격을 받

고 만 거였다.

 "이런 미물들이……. 무환검! 무변검!"

 화인걸이 검무를 추어댔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늑대들을 향해, 검신이란

영광스런 칭호를 받게 했던 태을무극검법을 전력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늑대들의 잘린 조각들이 쏟아져 내리고 검게 변했던 그의 옷이 다시

 혈의로 변해갔다.

 검에서 쏟아져나온 청색 광망은 백의천룡 화인걸의 분노였다. 전쟁에 패하

고 꿈마저 잃어버린 패배자의 절규였다.

 "무량검!"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화인걸의 손을 떠난 검이 허공을 날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펼칠 수가 없다고 여겼기에 단 한 번도 시전할 생각을 않았던

무량검. 죽어가는 부하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고 온몸을 지배하는 분노

를 풀어낼 길이 없었기에 무량검이란 이기어검을 통해 자신의 절규를 쏟아

내었다.

 과연 검신의 무공이었다. 화인걸이 있던 전방 오여 장이 완전히 초토화되

어버렸다. 단 일 검으로 오십여 마리의 늑대가 전부 분시(分屍)가 되어 사

라져버렸다.

 "커억!"

 무리를 한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더 이상 진기를 이어주지 못하고 그 자

리에 무릎을 꿇은 화인걸이 검은 피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그런데 왜 이리 속이 편안한 것인지. 더 이상 내공을 사용할 수도 없고 이

제는 죽음만이 남았는데 의외로 머리는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죽음도 별

로 두렵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이렇게 편안한 것을 그동안은 왜 그

리도 자존심과 명성에 연연해했던가. 화인걸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떤 늑대가 와서 자신을 물지는 몰라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캬우우!

 "저 빌어먹을 늑대."

 냉무기가 거친 욕설을 토해내며 절벽 위를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달도 없

는 하늘을 쳐다보며 울음을 토해내는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지금

껏 이놈들을 조정해왔던 우두머리 늑대였던 것이다. 놈의 울음소리가 후퇴

의 지시였는지 주변에 있던 늑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감히 큰소리로 외치지는 못하고 그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승리의 미소

를 지었다. 비록 전쟁에 패하긴 했지만 전쟁보다 더 극악한 상황에서 승리

를 이루어낸 것이다.

 "괜찮습니까, 각주님!"

 냉무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화인걸을 부축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별삼일 즉당괄목상대(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란 말이 이렇게 실

감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자신보다 아래라 생각했던 화인걸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이기어검을 구사하는 초극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이 내상을 입을 줄 알면서도 부하들을 위해 몸을 희생하는 모습은 한 단체

의 수장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행동이었다. 지금껏 화진악이 원했던 아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 이 모습인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너무 아쉬웠다. 몇 개월 전에만 저런 행동을 보여주었던들 맹에서 그렇게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서 패했고 부하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보인다 한들 어느 누가 인정해주겠는

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게 아니겠는

가. 다행히 더 이상 늑대들의 공격은 없었다.

 "뭘 하고 있나? 부상자들을 돌보고 주변을 정리해야 될 것 아닌가."

 또다시 겪은 동료들의 죽음과 부상 때문에 넋을 잃고 있는 부하들을 향해

냉무기가 고함을 질렀다.

 "운기행공을 하라. 바로 절벽을 오른다."

 일단은 바쁘게 움직이게 해서 현실을 잊게 만들어야 한다. 자꾸만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산다는 것 자체가 지겨워질 수가 있다. 그럼 제마각은 바로

끝장이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이걸 드시고 운공을 하십시오."

 냉무기가 내밀고 있는 것은 맹을 출발할 때 화진악이 내준 내상약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화인걸에게는 쓰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은 주

인에게 돌아갔다.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았어. 적들에게 위치만 노출시킨 것 같아."

 운공을 하고 있는 화인걸을 주시하던 냉무기가 자신들이 왔던 길을 쳐다보

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더욱 서둘러야 할 이유가 생겼다. 간밤에 온 산을 진동시켰던 늑대의 울음

소리는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도 들렸을 터이고 자신들을 추격하는 추격대

도 알아차렸을 것임에 분명하다.

 "운구 자네가 수고 좀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부각주님."

 늑대에게 물어 뜯겨서 왼팔이 잘려버린 인물로 부상자들 중 가장 상급자가

 최운구였다.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겠다는 소리다. 뒤에서 적들이 추격해

오고 있을 터인데 부상당한 몸으로 절벽을 오를 수도 없고 설령 절벽을 넘

어서 간다 하더라도 제마각 전체에게 짐만 될 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미안하다!"

 상관으로서 가장 힘든 때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부상당한 부하들을

적진에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 다수를 위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저들도

 생사를 같이 했던 전우가 아닌가. 그런 냉무기의 심정을 알아차린 부상자

들이 걸을 수 없는 동료들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 동료들이 운

공에서 깨어나기 전에 떠나주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운신하기도 힘들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맹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맹에서……."

 절뚝거리며 멀어지는 부하들을 쳐다보는 냉무기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

혔다. 강호유수 세력에서 천대받던 속가 제자들의 후예들. 제마각 무사로

입단하면서 과거의 아픔은 덜었지만 결국은 거의가 다 죽어갔다.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정의와 강호대의를 위한

전쟁인 줄 알았고 자신들의 비상을 위한 전쟁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부

하들이 죽고 또 부상당한 부하들을 버리는 시점까지 와서 생각해보니 도대

체 알 수가 없다. 과연 지금 치르고 있는 이 전쟁이 피를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 것이다. 다만 떠나는 부하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살아남으라는 말과 의미 없는 눈물 한 방울뿐이었다.

 "행운을 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각주님이나 동료들이 깨어나기 전에 떠나야 한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식경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온몸이 땀에 젖어버렸다. 부

상으로 인한 출혈이 너무 심했다. 더구나 심한 탈수증으로 몸조차 가누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움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멈추는 순간 잠이 들 터이

고 그 다음은 바로 죽음이다. 살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제마각.

 누가 시켜서 갔던 곳도 아니고 스스로 선택한 꿈이었다. 강호에 이름을 날

리고자,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자 들어갔던 곳이다.

 죽어도 제마각 일원으로 죽을 수 있기에 그 꿈은 이미 이루었는지도 모른

다. 단지 강호상에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꿈만은 이루지 못했다. 이곳에서

살아나간다면, 살 수만 있다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최운구의 몸이 비틀거렸다. 팔에서 다시 출혈이 시

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비틀거리는 순간, 놓친 동료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

었으나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전

신에 마비가 온 것이었다.

 안타까운 눈으로 동료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슴 쪽을 쳐다보았다. 아

직도 부르르 떨고 있는 화살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명중의 여운을 즐

기듯 부르르 떨고 있는 놈이…….

 "궁사댄가? 빠르군……."

 길을 떠났던 부상자들 중 마지막으로 죽어가던 최운구의 독백이었다.

 엄청난 속도의 추격이 아닐 수 없었다. 화인걸 일행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출발한 자들이 하루 만에 일행을 따라잡은 것이다.

 "축해!"

 "네! 나리."

 "저 절벽을 넘으면 어디냐?"

 "계속 산입니다요, 나리. 이틀 정도는 가야 산을 벗어나게 됩죠."

 혈마궁의 궁사대가 이렇게 빨리 도착한 이유는 축해라는 자 때문이었다.

구곡리 출신의 안내원. 그의 안내로 이곳에서 제마각 인물들을 따라잡은 거

였다.

 "기다려라. 절벽의 중간쯤 올랐을 때 정리한다."

 막 절벽을 오르기 시작하는 적을 향해 시위를 걸고 있던 부하들의 행동을

중지시켰다. 지금 공격하면 다시 혼전으로 갈 가능성이 많다. 중간 정도 올

라갔을 때 손을 써야 가장 효과적인 공략이 될 것이다.

 '결국 내 손으로 끝내게 되는구나.'

 궁사대의 이인자인 하정의 눈가에 살기가 흘렀다. 대주를 비롯한 동료 오

백의 목숨을 앗아간 놈들이다. 대주를 직접 살해한 놈들은 놓쳤지만 지금

저곳에 있는 자들만 처리하면 산서성 전쟁은 승리로 끝이 난다. 섬서성 공

략보다 더 중요한 일은 전쟁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고 그 공은 자신들이 차

지하게 되는 것이다.

 '화인걸이라 했던가. 네놈의 머리는 내 거다.'

 "축해!"

 "……."

 "축해 못 봤느냐?"

 "네. 소피보러 간다며 저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빌어먹을 놈!"

 절벽을 넘는 길 말고 지름길을 묻고자 했으나 어디로 갔는지 또 보이질 않

는다.

 이곳까지 오면서 지금과 같은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새로운 길로 가야 할

때가 생기면 언제나 잠깐씩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곤 하는 놈이었다. 본인의

 말로는 와본 지가 오래되어 길을 확인하느라 한 번 둘러보고 왔다지만 상

당히 짜증나게 하는 행동임에는 틀림없었다.

 "전진하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날 놈이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아직 돈을 주지

않았으니까……. 저번 때처럼 알아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 하정이 부하들

을 향해서 전진명령을 내렸다. 절벽의 중간 정도까지 올라가 있는 놈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십여 장 정도만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하나

씩 떨어뜨리게 될 터이고, 그러면 이번 작전은 마무리된다.

 하정이 절벽을 쳐다보며 노려보고 있는 그 순간, 축해는 다른 인물을 만나

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방갓을 깊게 눌러쓴 인물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수고하는구나. 이제 너희들의 고생도 다 끝났다."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다 저희를 위한 일인데……."

 한순간에 사람이 이리도 변할 수 있는지 지금껏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던

어수룩한 축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마달과 양이가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들, 그 또한 혈맹의 간자였다.

 "목표물은?"

 "바로 저 앞에 있습니다. 이백 명가량입니다. 그런데 병력은……?"

 축해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방갓 쓴 이를 쳐다보았다. 비록 이백 명 정도

밖에는 없지만 상대는 혈마궁의 궁사대다. 그런데 저들을 치기 위해서 왔다

는 맹의 무사들은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 무공이 금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가까이 있는 인원은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뒤에 있지 않느냐."

 "네? 허억!"

 고개를 돌린 축해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쳤다. 기절할 일이었다. 언제 자

신의 뒤에 와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다섯 명씩이나……. 움직이는 기척은

고사하고 숨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거였다.

 "다섯 명으로……?"

 놀라던 축해의 얼굴이 이내 기묘하게 변했다. 살아 있는 자의 느낌도 없고

 귀신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상대는 이백 명이다. 기껏 다섯 명으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경만 하거라. 혈맹의 위대함을 눈으로 보는 최초의 인물이 될 테니까."

 축해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방갓 쓴 이에게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

다.

 "허억!"

 그를 쳐다보던 축해가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다시 한 번 삼켰다. 그의 몸에

서 엄청난 사기(邪氣)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터였다. 이어서 들려오는 전율

스러운 목소리, 결코 두 번은 듣고 싶지 않은 음성이었다.

 "나ㆍ의 종ㆍ들ㆍ아, 저ㆍ들ㆍ을 기ㆍ억ㆍ하ㆍ라. 그ㆍ리ㆍ고 전ㆍ부 죽ㆍ

여ㆍ라, 한 놈ㆍ도 남ㆍ김 없ㆍ이 전ㆍ부……."

 마치 유부(幽府)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지독히 차가운 음성과 함께, 붉은

혈광이 지금껏 가만히 있던 오 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저럴 수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은 축해가 두 눈을 치떴다. 다섯 명의 인물들이 움

직이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도 무공을 익히고 있기에 저들이 펼치는 경지를

 알고 있다.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인 상태에서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이 그의 시야

에서 멀어지는 가공스러운 광경,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풀잎의 끝을 밟고

나아간다는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이었다. 더구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온

몸을 감싸버린 혈광에 의해 혈운덩어리가 흘러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오 인의 인물이 보여주는 엄청난 경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는 축

해의 시야에 더욱 가공할 광경이 목격되었다. 소리 없이 다가간 혈운 속에

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오며 궁사대원들의 머리를 그대로 으깨버린 것이

었다. 다섯 명 전부가 검이며 도를 메고 있었음에도 그것들은 전혀 쓰지 않

고, 오직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상대를 격살하고 다녔다.

 인간 같지도 않은 오 인의 활약에 놀란 사람은 같은 소속인 축해만이 아니

었다. 바로 당하고 있는 궁사대의 대장인 하정, 새롭게 궁사대의 대주가 된

 하정이 축해보다 더 경악스러워하고 있었다.

 절벽을 향해 정사를 하려던 순간,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놈들이

나타나 사방을 휩쓸며 부하들을 도살하고 있다. 그들이 지나는 곳에는 어김

없이 찢겨진 부하들의 시신이 남는다.

 "활을 쏴라! 활을……."

 하정의 입에서 발악적인 외침이 터져나왔고, 곧이어 수십 대의 화살이 오

인의 인물을 향해 쏟아졌다.

 툭! 툭툭툭!

 "저럴 수가……. 어떻게……."

 두 번째 시위를 당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하정이 망연자실 동작을 멈췄

다. 전력을 다해서 쏜 그들의 화살이 전부 퉁겨져나온 것이다.

금강불괴(金剛不壞).

 자신들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사신(死神)은 전부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고

있는 괴물들이었다. 강호상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있지만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자가 과연 몇이나 있던가. 열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할 것이다. 그런

데 부하들을 도륙하고 있는 저자들은 전부 화살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후퇴하라!"

 상대가 누구이고, 정체가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다. 일단 살아야 그런 것

도 필요한 것이다. 활도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 더 이상 대항해봐야 죽음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후퇴를 명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붉은 혈운은 너무 빠르게 움직여 다녔다. 바람의 움직임이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다 손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게 사람의 머리건 사지 중의 하나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 바로 찢어버린다. 머리가 잡히면 터뜨려버리고 사지가

 걸리면 뜯어버린다.

 이백 명의 궁사대가 전멸하는 데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인물을 향해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마지막 순

간에 궁금증이 살아났기 때문인가. 죽어도 누군지는 알고 죽어야 덜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 상황이 제발 현실이 아니길, 부디

깨어나기를 바라며 소리를 질렀는지도 모른다. 악몽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

면서…….

 그러나 하정의 꿈은 영원히 깨지를 못하는 꿈이었다.

 퍼억!

 "팔ㆍ십 호, 팽ㆍ무ㆍ련."

 머리가 터져나가며 붉은 선혈과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뇌수를

터트린 장본인은 어떠한 느낌도 없는지 머리가 없어진 하정의 몸통을 막연

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더 이상 죽여야 할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정이 머리통을 으깬 다음, 무심한 목소리에 포함되었던 이름 석

자.

 팽무련이라 했다.

 강호상에 같은 이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만은, 지금 이 괴물의 등에는 도(

刀)가 매어져 있다. 도와 팽무련,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리는 인물은 강호

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목숨보다 더 사랑했기에 그녀의 가슴에 검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고, 그

녀를 잊지 못했기에 평생을 복수에 매달려 복수귀가 되어버린 풍신개 구칠.

 그의 부인 이름이 바로 팽무련이었다. 아울러 팽무도의 친동생이기도 한

이름.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은 잉태되고 있는 것인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손녀까

지도 복수의 길을 걷게 한 풍신개의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비록 강

시라는 껍질을 쓰고는 있지만 어렴풋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인간

으로…….

 "수고들 했다. 특히 팔십 호 잘했다."

 방갓인이 팽무련의 어깨를 두드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번에

팔십 호를 데려온 것은 모험이었다.

 폐기처분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활용을 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

해서 데려왔었다. 다른 강시들과는 달리, 팔십 호에게는 세상을 태울 듯한

한이 없었다. 오직 한 남자에 대한 사랑만이 온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거

였다. 강시로서는 부적합한 재료였다.

 한(恨)만이 완벽한 강시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 팽무련에게는 그게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도 대법을 걸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한(恨)뿐만 아니라 간절한 바람, 그녀가 만나고자 하는 남자에 대한 갈망으

로 완벽에 가까운 강시가 되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너의 남편도 만나게 될 것이다. 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편 말이다."

 방갓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전혀 모르는 것인지 팔십 호라 불리

는 팽무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축해!"

 "네, 나리!"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축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충격이었다. 혈맹의 위대함을 목격하는

최초의 인물이 될 거라 했던 방갓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다음 녀석들에게 안내를 해야지?"

 "아! 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축해가 황망히 공손한 표정으로 바꾸며 몸을 움직이

기 시작했다.

 태변산에서 벌어지는 죽음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천무맹의 제마각을 쫓

는 천마맹과 그 천마맹을 제거하며 두 세력의 힘을 줄여나가는 혈맹. 세 개

의 세력이 쫓고 쫓기고, 죽고 죽이는 광란의 장이 태변산이라면, 세상사와

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뱃놀이를 즐기는 인물이 있었

다.

 추풍기혜백운비(秋風起兮白雲飛). : 가을바람이 일고 흰 구름 나는도다.

 초목황락혜응남귀(草木黃落兮鷹南歸). : 초목은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고

기러기는 남쪽으로 돌아가도다.

 난유수혜국유방(蘭有秀兮菊有芳). :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로우니,

 회가인혜불능망(懷佳人兮不能忘). : 아름다운 님을 그리워함은 잊을 수 없

도다.

 …….

 과거 중원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나라의 뒤를 이어 한(漢)이라는 거대

한 제국을 다스렸던 무제의 추풍사(秋風辭)라는 시를 읊조리는 자, 황금빛

찬란한 금의를 입고 세상을 비웃는 듯한 눈매를 가진 백무천이었다.

 분하의 물길을 바라보던 백무천이 아득한 회상 속으로 잠겨들었다. 겨우

몇 달 전의 일임에도 마치 수년의 세월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그

곳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던 까닭이리라.

 인간의 무공이 아니라 하늘의 비공이라 했던 화룡파천비공(火龍破天秘功),

 천역의 힘을 흡수하면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의 오산이었다. 석실

중앙에 있던 단위에서 연공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열기가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의지로 견딜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버린다면 더 편할 터였지만 무공을 익혀야 하기에 정

신을 잃어서도 안 되었다. 죽음 속에서 얻어낸 기연이었지만 끝이 아니었다

. 화룡파천비공을 익히기 위해서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할아버지라 여겼던 운학자의 마지막 눈빛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몇 번이

고 자결을 생각했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공동을 잊지 말아달라

며 자신을 위해서 죽어가던 두 사질의 눈빛이, 뒤돌아보지 말라던 운학자의

 음성이 사라져가는 그의 의지를 다시 일깨웠다.

 그래서 견디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디며 화룡파천비공을 익혔다.

단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또 다른 문제가 발

생했다.

 제일 공인 화룡지천무는 완전하게 익혔으나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이 공

이나 삼 공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펼쳐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

어졌다. 아무리 고민을 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해답이 보이지 않았

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 금황신공의 최후 단계와 같은 무공을 익히려

고 할아버지가 죽고 두 사질마저 죽었다는 생각에 극도의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에 대한 환멸과 금황비동에 대한 분노였다. 최고의 무공을 알고 있는

데 펼칠 수가 없다는 생각에 그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고 결국 눈앞에서 자

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은 금장천의 시신에 대고 그동안 익혔던 화룡지천무

를 펼쳐버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금장천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나머지 이 공을 익

힐 수 있는 비결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곳에 새로운 글이 쓰여 있었다. 간

단했다. 오직 신만이 비공을 얻을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결국 금장천이 출동을 못하고 남아 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인간의 감

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공마저도 완전하게 익히지 못했던 거였다. 적어도

 삼 공을 십 성 정도는 익혀야 나갈 수 있는 곳이 금황비동이었다.

 신만이 익힐 수 있다는 말, 인성을 가진 인간은 화룡파천비공을 완전하게

익힐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오욕칠정을 끊고 새로운

 개체로 거듭나야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또다시 백

무천의 운공이 시작되었다.

 미증유의 고통을 주며 온몸을 태우는 열기도 잊었다. 운학자의 죽음도 잊

었다. 오직 신이란 한마디만 생각하며 운공에 몰두하였다. 온몸의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 터지고, 터진 살갗이 다시 터져나가고, 고통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던 고

통이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광명이 찾아왔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느

낌, 천지가 바로 나이고 내가 천지인 경지를 넘어선 완전한 무의 상태, 그

가 마지막 접어들었던 경지였다.

 석실 벽이 녹아내리며 천 년의 무공이 사라지고, 자신이 앉아 있던 단의

높이를 낮추어도 백무천의 운공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백무천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은 앉아 있던 단이 사라졌을 때부터였다. 그의

 몸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던 불꽃이 사방을 가득 메우며 넘실대기 시작했다.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무천의 몸에서 끊임없이 불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지어는 입에서까지 흘러나와 사방을 채워나갔다.

 첫 번째 변화가 끝나자 곧이어 두 번째 변화가 시작되었다. 입에서 나오던

 불꽃이 새하얀 색으로 변하더니 주변에 있던 붉은 불꽃을 전부 잘라먹는

것이었다.

 잠시 후, 붉은색의 불꽃은 전부 사라지고 엄청난 열기를 간직한 새하얀 불

꽃만이 백무천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는 전설상의 신

조인 가루라(迦樓羅)의 탄생이었다.

 번쩍!

 가부좌를 하고 있던 백무천의 눈이 떠짐과 동시에, 새하얀 불꽃들이 쏟아

져나와 전면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이어서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

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신무(神武)인 화룡파천비공의 완성이었다. 극성으로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금장천이 말했던 삼공의 십 성 단계까지는 이루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도 바랐고 군림의 길을 갈 수 있는 기반을 성취했음

에도, 백무천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고함을 지르고 파안대소(破顔大笑

)를 터트려야 하는데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기에 더 이상 세속의 기쁨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제자리를 찾은 것뿐이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생각뿐, 더 이상의 내색은 없었다.

 "사숙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함께 배를 타고 있는 두 인물,

공동사장로 중의 두 사람인 목운자와 목형자였다.

 대단한 충정이었다. 천선비동으로 들어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일행을 기

다리기 위해 항산의 초입에 초막을 짓고 기다렸던 것이다.

 "제갈군사께서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읽어보게."

 "네, 사숙님."

 백무천을 대하는 목운자의 행동이 과거에 비해 더할 수 없이 공손해졌다.

항산에서 백무천을 만났을 때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무천

의 몸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세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거대한

대자연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에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본 백무천이 빙그레 미소를 짓자 이번에는 온 사방에서

따스한 기운이 밀려들며 심신(心身)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들로서

는 지금 백무천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인간의 경지는

이미 초월했다는 짐작뿐이었다.

 공동의 영광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초리하에서 양 맹의 전투가 있을 거라 합니다. 그곳에서 천마맹을 처리하

고 맹으로 오시라 하였습니다. 맹주 이양식이 있다고……."

 "맹주 이양식?"

 "그렇게만 쓰여 있습니다, 사숙님."

 '그동안 많은 일을 했구나, 수연. 자격이 있어. 천하제일인의 부인이 될

자격이…….'

 목운자와 목형자는 그동안 계속해서 제갈수연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현

 강호의 정세를 비롯하여 천마맹과 천무맹의 상황을 전부 두 사람에게 알려

주었고, 이미 백무천도 거의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맹주 자리까지 손을 뻗

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르긴 해도 모든 것이 완전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뜻일 게다. 천마맹을 처

리하여 맹 내에 확실한 인식만 심어주면 천무맹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화인걸은?"

 "지금 대부분의 제마각 무사들을 잃고 쫓기고 있다 합니다."

 "빨리 가세나."

 갑자기 배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백무천의 몸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물살을 밀어내자 주변 경관이 뒤쪽으로 급속하게 멀어졌다. 가공할

 무위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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