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흑색지안(黑色之眼)
창조.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세상에 인간이 살
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새로운 것들을 만들고 창조했지만 그들에게도 영원히
미지의 영역이 존재했다.
오직 신만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능력, 바로 탄생의 신비이다. 만물
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인간이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이기도 한 탄생
의 신비. 그러나 그 생명의 창조도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산고(産苦).
그 무엇보다 힘들다는 고통이 바로 산고인 것이다.
"아악! 백랑! 백랑!"
"누님! 저 여기 있어요."
백산의 품에 기대어 설핏 잠들었던 조천영이 깨어나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진통.
산달이 되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달갑지 않은 손이 찾아온 것이다.
삼문협을 지난 일행은 별다른 사고 없이 평양으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 수양산에서 느닷없이 진통이 시작되었다. 기겁을
한 일행이 급한 마음에 온 산을 다 뒤져서 찾아낸 곳이 백야평 근처에 있는
이십여 호의 화전민 마을이었다.
"네놈을 닮아서 성격이 급한가보다, 이놈아!"
갑작스런 진통에 불안해하고 있는 산모와 백산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 말
이지만, 갈태독 또한 내심으론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한 시진 전부터 시작된 진통이었다. 명색이 의원인 그가 출산을 앞둔
산모를 두고 초조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도 애를 받아
본 경험이 전무하다는 게 문제였다. 의술을 배우고 익혔으나 의가(醫家)라
기보다는 무림문파에 더 가까웠던 가문이었고, 제대로 시술을 배우기도 전
에 멸망했기에 출산하는 산모와 같은 평범한 환자는 접해보지 못했던 것이
다.
또 한 가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사실은 조산이 주는 압박감이었다.
열 달을 다 채우고도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는
가. 그런데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빠르게 진통이 와버린 것이다. 천고의 영약
인 대환단도 그리 큰 효과를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정상적인 임신이 아니었기에 더 걱정스러웠다. 진맥을 할 때 보
면 태아의 상태는 거의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이 알 수 없는 상황은 도대체
.
"누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백산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가득했
다.
지금 와 있는 이곳은 너무나 황량한 곳이다. 혼례(婚禮)도 올리지 못했기
에 출산만큼은 가장 좋은 환경에서 하게 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한 달의 여
정이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이 첩첩
산중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백랑! 오히려 기분이 좋은 걸요, 아욱!"
인상을 찌푸리고는 있으나 그리 힘들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지막 출산
이라 했다. 다시는 이런 진통을 겪지 못할 것이기에 좀더 기억해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과
의 분신이 주는 고통이었기에.
결코 아파해서도 힘들어해서도 안 될 일이다.
"백랑……. 우리 아가 이름 지어요."
잠시 진통이 멈추었는지 느닷없이 백산을 향해 이름을 짓자는 것이다.
"이름? 나중에 지어도 되잖아요."
"안 돼요, 지금 지어야 돼요. 백랑은 딸 이름으로 지어요. 나는 아들로 지
을 테니까."
"누님!"
"제발, 백랑!"
조천영의 얼굴이 애원조로 변했다. 불안함이다. 정상이 아닌 임신에다 이
제는 조산(早産)이다. 태어나는 아이나 혹은 자신이나 살아난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름이라도 지어주고 싶고 또 불러보고 싶었다.
둘 다 살아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에 더욱
더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님!"
백산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조천영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도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더욱더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능력
도, 석숭에게 맡겨둔 수십 억 냥의 돈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하늘만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그 빌어먹을 하늘만이 조천영과 아기의 운
명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며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좋아요, 누님! 음……. 뭐라고 지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더할
걸 그랬네?"
"천자문만 알고 있어도 충분해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갈태독과 두 여인이 더 이상 지켜보기가 힘
들었는지 밖으로 나갔다. 조천영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저러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
니라는 것도.
"어떻습니까, 어르신."
밖으로 나온 갈태독 주변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일행들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네. 오직 하늘만이 알고 있겠지, 하늘만이…….
"
의원으로서 느끼는 좌절감이다. 아무리 최고의 의원이라지만 탄생의 신비
만큼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다. 하늘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애 받을 사람은 찾았나?"
"네, 다행히 애를 받아본 경험이 많은 분이 계시더군요. 지금 모시러 갔습
니다."
갈태독이 청한 것이었다. 그로서도 경험이 없었기에 조금이라도 많이 알고
있는 산파를 원했고, 특별히 의원이 없는 화전민 마을이어서인지 동네 애
를 거의 받다시피 한 산파가 있었다.
'백공자는 어떻게…….'
'심부름을 보내야겠지.'
'괜찮겠습니까?'
'천영이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네.'
석숭과 갈태독 사이에 오간 전음이었다. 방 안에 있는 백산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음을 사용해야 했다.
갈태독도 그렇고, 조천영도 백산을 떼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일이 잘되면
상관없지만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다가올 충격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 함이었다.
"휴! 어쩌다 이런 일이……."
갈태독이 안타까운 눈으로 집안을 쳐다보았다.
"백랑! 이름 지었어요?"
"음! 소령이라 지었어, 괜찮지?"
"백소령. 희고 작은 꽃이라.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
조천영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배를 쓰다듬었다.
"누님은?"
"그냥 백랑이 지은 이름으로 할래요. 아들이어도 소령, 딸이어도 소령."
처음부터 자신은 이름을 지을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만나보지도 못할 아
버지이기에, 백산더러 같이 짓자고 말한 것뿐이었다.
"아가야. 네 이름은 소령이란다, 소령……."
마치 지금이 아니면 이름을 불러줄 수 없다는 듯이 한 자 한 자 불러보고
있었다.
"아-윽!"
"누님, 왜! 또 진통이야?"
"아니에요, 알아들었대요. 마음에 든대요."
미약한 진통임에도 그것마저 태아가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랑도 한 번 불러봐요, 어서!"
"소령아!"
"아윽! 또 차네? 백랑도 느꼈죠? 제 이름이 소령이란 것을 아나봐요."
조천영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이제는 잘못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름도 불러보았고 아가도 알아들었으니 된 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
었고 엄마의 목소리도 들었으니 외롭지 않을 것이다.
"천영!"
조천영을 부르는 백산의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힘들어하
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에 겨웠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더 안타까웠다.
"백랑, 저를 사랑하나요?"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해주지 못했다. 언제나 자신만 기
대고 있었다. 조천영의 물음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사랑해, 천영! 사랑해, 내 목숨보다 더……."
"저도 사랑해요. 당신을 만나게 해준 하늘에 감사해요."
'당신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당신 덕에 살아온 삶이에요.'
"그리고 혹시라도 제가 잘못되면……."
"천영!"
백산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껏 조천영이 했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
다.
유언(遺言)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깨어나지 못할 것에 대비해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도 먼저 지어달라고 떼를 썼다.
"들어야 돼요, 백랑!"
"안 돼! 안 들을 거야! 천영 없이는 아무것도 안 돼, 살아갈 수가 없다고!
"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은 가끔 했지만 그
대상에서 천영은 제외되었었다. 단지 아이가 잘못될 수 있다고만 생각했었
다.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될지라도 천영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
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데 굳이 아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녀가 유언이란 것을 하려 한다.
"백랑! 제 말을 들어야 해요!"
조천영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백산의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잠시 후에 그를 떠나보내야 하기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기에…….
'저도 죽어야 한다면 당신의 품에서 죽고 싶어요, 하지만…….'
백산은 자신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소운이 있고 추렴이 있다. 그녀들을 위
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잡아두어야 한다.
"저에게 맹세하세요."
"천영!"
"저와 백랑의 사랑에 대고 맹세를 해요."
굳어진 표정으로 조천영을 응시하던 백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
상 거부하면 그녀가 힘들어할 것이다. 그녀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수락
해야만 한다.
"그래요, 그래야 착한 아이지."
조천영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어리더니 곧 백산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소운이와 추렴이에게 잘해주셔야 돼요
. 그 애들에게는 백랑밖에 없어요. 백랑이 나 때문에 실의에 빠진다면 그
애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도련님들은요. 약속하는 거예요?"
"천영도 한 가지만 약속해줘. 그럼 나도 약속할게."
"뭔데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바보. 포기할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잡은 행복인데."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서로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애명환이 울어댔다. 하늘이 갈라놓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손길이
었다.
"갈 할아버지께 가보세요. 당신에게 시키실 일이 있대요."
밖으로 나온 백산은 갈태독의 말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소리요? 약재를 사오라니."
갈태독이 백산에게 시키는 심부름. 출산에 필요하다며 약재를 사오라는 것
이었다. 그것도 이곳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 부근에 있는 풍릉도(風陵渡)
라는 곳까지 다녀오란다. 백산의 경공으로도 한나절 거리에 있는 곳이다.
지금 출발한다 해도 사경 내지 오경쯤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일행 중 백산이 가장 빠르기에 시킨다 하는 것이었다.
"영감! 지금 천영이에게는……."
"놈! 천영이와 자식을 죽이고 싶은 게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을 위해서 꼭 필요한 약재라며 사오라고
하는데 못 간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영감!"
갈태독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백산이 그 자리에 무너지며 무릎을 꿇었다.
"내 목숨을 달래도 주겠소. 내 모든 것을 다 달라 해도 주겠소. 시키는 것
은 무엇이든지 다 할 것이오, 그러니……. 그러니 천영이만 구해주시오, 제
발……."
백산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울고 있음이다.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그의 눈이 울고 마음이 울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도 보았고 아버지의 죽음도 겪었다. 그러나 이렇게 절실하게
원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서, 하늘에 대해서 무
엇을 원했던 적이 없었다. 처음, 생전 처음 하늘에 빌었고 갈태독에게 애원
하는 것이었다.
"나를 믿어라. 내가 있는 한 결코 죽지 않는다."
백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하는 맹세였다.
가진 것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려는 이들의 행복을 누구도 깨트려
서는 안 된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다녀와라! 빨리 와야 자식을 가장 먼저 안아볼 수 있다."
"알겠소, 그럼 영감만 믿겠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백산이 일어섰다. 천영에게 필요한 일이기에 가는 것
이다. 가장 빨리 다녀올 것이다. 모든 내공을 쥐어짜서 천영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테다.
백산의 급한 마음을 대변하는지 주변에서 무서운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
고, 잠시 후 백산의 모습은 한 점이 되어 아스라이 멀어졌다.
"소령아, 보아라. 아버지다. 멋있지 않니? 너의 아버지고 이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란다."
"언니!"
떠나고 있는 백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천영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
러내렸다. 지금의 모습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백산의 흔적을 끝까지 좇고 있었다. 그런 조천영의 손에 쥐
어져 있는 물건, 언제나 백산의 품을 지키고 있던 항마불주(降魔佛呪)였다.
곁에 있는 소운과 냉추렴의 얼굴에서도 덩달아 눈물이 흘렀다. 하늘이 원
망스러웠다. 백산이란 남자를 사랑해버린 자신들이 미워졌다. 자신들만 없
었다면 결코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을 터였다. 죽더라도 그의 품에서 죽으려
했을 것이기에 더욱 미안했다.
"산모가 뭐 하고 있누, 빨리 자리에 누워야지. 힘이 있어야 애를 잘 낳지.
그리고 밝은 마음으로 애를 낳아야지 그 애가 행복하게 잘 산다네."
그녀들을 깨우는 소란스러운 소성이 들려왔다.
마을에서 온 할머니였다. 조천영의 상태 때문에 침울해하고 있던 일행을
닦달하여 물을 끓이고 방에 불을 넣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던 그녀가, 울고
있는 세 명의 여자들을 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신랑인가보네? 착하게 생겼구먼. 신랑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지,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거라오."
"그렇죠, 할머니?"
벽촌 할머니의 단순한 한마디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조천영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아직은 살아 있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날 거야, 소령이와 같이 살고 말 거야!"
백산이 주고 간 염주를 굳게 말아 쥔 조천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심산의 밤은 유달리 일찍 찾아온다. 별로 한 일도, 준비한 것도 없는데 어
느 사이 다가온 어둠은 수양산 전역을 감싸 안으며 침묵 속으로 인도했다.
초집들의 기름등잔에 하나 둘씩 불이 밝혀지며 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
으나 누구 하나 잠들지는 못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집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거의 일 년 만에 찾아온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진통이었고 마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각각의 집
에서는 출산 후 산모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
다.
송일(宋一).
산파 할머니의 남편으로 마을의 가장 안쪽 끝에 살고 있다.
마을에 있는 모든 아이를 받아준 부인을 둔 덕에 저도 모르게 촌장이 되어
버린 사람이다. 송일이 콧노래를 부르며 연신 아궁이 속으로 마른 장작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가 콧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오랜만의 경사 때문이다.
거의 일 년간이나 마을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작은 마을이었기에 아기
가 태어난다든지, 누가 장가를 간다든지 하면 축제가 벌어진다. 마을에 활
기가 넘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축제였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냄새가 더욱 정겹고 즐거웠다.
그런데 외지인이 들어오면서 다시 한 번 축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오늘밤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내일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음식이란 게 산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물이나 덫으로 사냥한 짐승에 불과
할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음식보다 더 훌륭한 진수성찬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웃을 생각하며 정(情)으로 만든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끓이고 있는 것, 마을의 축제 때만 사용하는 커다란 가
마솥에 가득 들어 있는 이것은 새하얀 호랑이 뼈였다. 외지인이 가져온 것
이었다. 수천 년 먹은 호랑이 뼈이므로 푹 고아서 먹으면 보약으로는 최고
라 하였다.
벌써부터 고소한 고깃국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것이 시장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술 한 잔에 국물 한 술이 최고
다.
재작년 옆집 귀남이 출산 때 묻어두었던 매화주가 생각났다. 노랗게 익은
매화를 한껏 따서 화주와 함께 담아 뒤뜰에 묻어두었었다. 작년 경사 때 먹
으려 했었으나 귀남이 집에서 원체 많은 준비를 하여 필요가 없게 되었기에
지금껏 남아 있는 거였다. 어쩌면 내일 전부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땐 한잔해야 돼."
매화주 생각을 하자 갑자기 입맛이 당겨 참기 힘들었는지 종종 걸음을 치
며 뒤뜰로 나갔다.
그러나.
송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매화주 단지가 아니었다
.
"누구? 큭!"
뒤뜰에 도착한 송일이 본 것은 등에 검을 메고 있는 흑의인이었고, 누구냐
고 소리치려는 순간 정신을 잃어버렸다.
"으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송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광경은 야수 같은 분
위기를 풍기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오십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 절
대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산에 가끔 가다 보이는 늑대들에게서나 풍기는
그런 살기를 쏟아내고 있는 자, 무림인이었던 거였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빨리 대답해라, 그래야 조금이나마 오래 살 수 있다.
"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야 될 것만 같았다. 아무
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무언가 서려 있었다. 한마디라
도 잘못 대답하면 바로 죽은 목숨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금 저곳에 있는 자들의 상태는?"
"예?"
중년인이 주는 공포에 얼결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곳,
낮에 온 외지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에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며 반갑게 맞아들였던, 임산부가 있는 외지
인들. 지금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지 않았던가.
"왜 저들이 저곳에서 유숙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상대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일행이 도착한 직후부터 시작
해서 지금까지의 상황이 절로 흘러나왔다.
"살려주십시……."
우두둑!
살려달라는 말을 다 맺지도 못하고 송일의 눈동자가 흰 백태를 드러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절
명하고 만 것이다.
"놈들……. 결국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모닥불이 환하게 피워져 있는 마을 입구의 집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
고 있는 이 인물, 놀랍게도 천무맹에서 도주했던 설검후였다.
그러나, 지난날 천무맹의 부맹주였던 고고한 설검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
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거의 헤어진 의복 등에서 보이는 그의 행색은,
오직 객지로만 떠돌고 다니는 낭인무사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새였
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전율적인 살기,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만
평생을 살아온 자의 광기가 표출되는 것처럼 섬뜩했다.
복수(復讐).
도망치듯 천무맹을 빠져나온 후 바로 산서성까지 왔다.
이미 황실의 죄인이 되었기에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
려 오 개월 동안을 태행산맥에 숨어 야인처럼 생활하였다.
제갈수연에게서 오는 연통이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터였다. 원수들의
행적을 꾸준히 알려온 제갈수연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
으로 제갈수연이 준 정보, 놈들이 펼치고 있는 남궁세가의 청풍검진을 무력
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무서운 여자였다. 남궁세가의 절대검진을 파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다른 각에는 알리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연연해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복수할 방법을 알았
으니 익히면 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분노
때문에 수천 그루의 소나무를 베어냈다.
평생에 걸쳐 이루어놓았던 가문이 사라졌고, 자신의 손으로 땅에 묻고자
했던 자식은 원수들의 손에 의해서 가슴속에 묻어야 했다. 복수만 할 수 있
다면 악마와 손을 잡아도 좋다고 생각했고 마침 오늘밤 그 악마가 손을 내
밀었다.
가장 완벽한 기회가 왔다. 조산을 하게 된 임산부 때문에 저들의 모든 이
목이 산모에게만 쏠려 있을 뿐 외부의 동정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마을에는 십여 명의 어린애들마저 있다. 제갈수연이 주었던 청풍검
진의 파훼법을 완벽하게 써먹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소진철!"
"네! 장주님."
"다 잡아와라. 애들만 빼고 나머진 다 데려와라."
수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설검후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이미 아
무것도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인륜도 도덕도, 무공이 없는 힘없는 양민
들도 복수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원수를 도와주는 놈들도 전부 다 죽이는 거다. 크큭큭! 궁수 준비!"
악마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악마가 되어 있었다. 마을에 있는 어
른들은 광천뢰의 방패막이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
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애들은 살려두려는 것이었다. 청풍검진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정도 최고의 단체였던 천무맹의 부맹주 설검
후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가 무공도 모르는 양민들을 인질로 삼아서 복수
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네놈들이 새 생명 탄생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
리라 생각했더냐?"
설검후의 광기 어린 눈길이 머물고 있는 곳, 조천영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는 초집이었다.
"악! 아-악!"
생명 창조가 주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무명천을 입에 깨물고 있었으나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비명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는지 조천영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힘을 내야 해, 새댁! 엄마가 되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엄마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선명하게 들려오는 한마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온몸에 있는 모든 힘을 전부 짜냈다.
'해낼 수 있어. 백랑과 나의 분신이야, 나의 행복이라고. 절대 놓치지 않
을 거야.'
조천영이 이를 악문 채 다시 힘을 써댔고 그녀의 옆에 있는 갈태독도 정신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순간 조천영의 몸 상태를 살펴야 했기에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녀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혼자서 낳는 아이가 아니었다. 구소운과 냉추렴이 같이 힘을 쓰고 있었고,
밖에서는 석두와 광견조 일행이 용을 쓰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마음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건강한 아가의 출산과 조천영의
안전이었다. 두 사람을 걱정하는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대고 소원을 빌듯이 석숭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수십 개의 별똥별들이 마을로 쏟아지는 게 목격되었다. 붉은 불
길이 넘실대고 있는 별똥별.
"헉! 적이닷!"
그것이 별똥별이 아니고 불화살이었다는 알아차린 석숭이 기겁을 하며 고
함을 내질렀다.
나무와 풀로 지어진 집들은 금방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
이들의 비명소리. 광견조 일행이 있는 집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불길이 솟
아오른 것이었다.
"빨리 사람들을 구해라!"
"멈춰!"
석두의 명령에 따라서 광견조원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수백 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한 놈이라도 움직이면 여기 있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는다."
"설검후?"
석숭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설마 이곳에서 설검후와 조우하
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벌써 오 개월이 흘렀고 황실에서 지목한
죄인이었기에, 다시는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가 복수의 칼을 갈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거였다.
"석 대인! 광천뢰로 날려버립시다."
소살우가 가지고 있던 광천뢰를 꺼내들며 석숭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 되네. 저들의 앞에 있는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최고의 무기였던 광천뢰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
이었다. 설검후의 일행 맨 앞쪽에 서 있는 사람들, 바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환대해주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맨 앞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진영 중간 중간에 마을 사람들을
세워둠으로 광천뢰를 던질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해버렸다.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하나씩 하나씩
전부 씹어주겠다."
설검후의 몸에서 광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죽이고 또 죽여도 분이 풀리
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더욱 화가 나 있었다. 저 별것도
아닌 놈들에게 자신의 모든 기반이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릴 정도
로 분노가 일었다.
"닥쳐라, 이놈! 감히 황실에 대항하려 했더냐? 네놈이 저지른 죄과는 생각
지도 않고 가문이 몰락한 것만 억울하였단 말이냐? 잘 듣거라. 금의위 영반
으로 명하노니 지금부터 설검후를 돕는 자들은 대역죄인으로 간주함은 물론
이고 구족이 몰살당하는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석숭이 추상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설검후를 제외하더라도 그의 부하들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구족, 자신이 알고 있는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두를 다 색출하
여 참수하겠다는 협박이었다.
"호! 그랬군. 네놈이 금의위 영반이었단 말이냐?"
저들에 의해서 설가장이 멸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숭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아들의 비밀이 들통 났던 거였다. 중원 최대 부호인 석숭
의 또 다른 신분은 금의위 영반이었다.
그러나.
이미 목숨 같은 것은 버린 지 오래다. 부하들도 전부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 설가장에 남아 있던 무사들은 대부분이 형제고 가족이었다. 또한 자식인
설태만의 사건을 모두 알고 있기에 투항하더라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복수밖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놈이 죽어도 구족을 멸할 수 있을까? 전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그
럼 이들을 살려주마. 너희들에게 쉴 곳을 주었던 불쌍한 마을 사람들을 말
이다."
백산 일행에게 쉴 곳을 주었다는 설검후의 말, 만일 마을 사람들이 죽게
되면 그것은 전부 백산 일행의 책임이란 소리였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석숭의 시선을 접한 설검후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살려주세요! 엄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집이 타 들어가며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
하고, 어른들은 인질로 잡혀서 일행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었다.
"너의 가문을 멸망시킨 사람은 금의위 수장인 나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
은 관련이 없다.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나?"
"큭! 역모는 구족이 참수당하는 중죄가 아니었나? 너희는 나에게 역모를
저지른 것이야. 따라서 너를 포함한 전부를 말함이야. 새로 태어나는 애도
제외가 안 돼, 셋을 셀 동안의 기회를 주겠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석숭의 말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백산 일행 전원이었다.
"야비하구나, 설검후! 그래도 한때는 천무맹의 부맹주까지 하지 않았더냐.
"
"그랬지. 또다시 천무맹의 부맹주가 된다면 정의의 수호자로서 살 거야,
얼마든지 그리 살 수 있단 말이다. 하나!"
인간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인간의 양면성. 정도라는 것도 마도라는 것
도, 심지어는 선악의 판단마저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석대인!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애들이 죽습니다.'
남궁지우의 전음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대소를 구분하려면 아이들 쪽에 무
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빨라도 적의 손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죽여달라고 목을 내밀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둘!"
둘이라는 설검후의 목소리가 악마의 호곡성처럼 들려왔다. 그 순간 석두를
비롯한 광견조원들의 행동이 약간 변했다.
석두와 소살우는 가만히 자신의 품속에 있는 광천뢰를 꺼내 들었고 나머지
는 서로 움직여야 할 집을 눈빛으로 교환하고 있었다.
'석 대인, 광천뢰를 쓰겠습니다.'
'자네?'
석두를 향해 놀란 듯한 전음을 보내곤 있으나 그 방법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이 항복한다 해서 마을 사람을 살려줄 자들도 결코
아니다. 금의위 영반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자들이 아닌가. 자신들의
생사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 전부가 죽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설검후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힘없는 양민들이다. 이 깊
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사는, 어쩌면 마을 사람들 또한 인생의 실패자
들인 것이다.
'살우야, 앞으로만 던져라.'
소살우에게 전음을 날린 석두가 광천뢰를 만지작거리며 전면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으나 그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한결같이 불타고 있는 자신들의 집 쪽이었다. 이미 처참하게 죽어 있
던 촌장의 모습을 보았기에 자신들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들을……. 컥!"
석두와 눈이 마주친 한 명이 소리를 지르다 이내 칼에 찔려 쓰러졌다. 자
신들은 죽어도 좋으니 아이들만은 구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석두의 눈에 뿌연 물막이 어렸다.
저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죄라면 이곳에서 자신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것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 저들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죽음을 택하고 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소외되어 다
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기에 이곳까지 밀려왔고, 작지만 소박한 행
복을 일구어놓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방문이 저들을 죽음으로 몰
아가고 말았다.
전부 자신들 때문인 게다. 자신들만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던들 저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운명으로 치부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
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잘 키워드리겠습니다! 훌륭한 인물로 키우겠습니다!"
석두와 소살우의 손에서 광천뢰가 날았다. 전부 네 개의 광천뢰가 마을 사
람들과 설가장 인물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빗살 같은 속도로 날았고 나머지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 던지고 싶어도 덜질 수 없었다. 불에 타고
있는 집까지 영향을 받기에 네 개밖에 던지질 못했다.
"헉!"
설검후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설마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광천뢰를 던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석두
와 광견조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까닭이었다.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항복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몰랐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질 않은가. 조천영과 새로 태어날 아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항복할 수가 없었다.
콰앙! 콰앙!
수양산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화광과 함께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사방에 마을 사람들과 설가장 인물들의 찢겨진 혈육이 난무하였다.
"으악! 살려……."
순식간에 백여 명의 인물들이 어육으로 변하며 십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죽인다!"
온몸이 붉은 혈광에 휩싸인 석두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나오며 곧
설가장 인물들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광천뢰가 터지기 직전에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던 눈빛,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타지인들을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다만 자식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의 눈빛이었다. 석두가 더욱 분노한 이유였다.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서 화탄을 던지고 있는데도 왜 저들은 화를 낼 줄도
모르는가. 왜 체념이라는 굴레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것인가. 힘이 없
어서인 게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기에,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그 참혹함
을 저들이 겪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자신이 지었
던 눈빛과 똑같은 눈빛을 가지고.
"창궁혈해천(蒼穹血海天)!"
"광풍신권(狂風神拳)!"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갛게 달아 있는 붉은 검이 허공을 날고, 두 정권에서
는 사방에서 타고 있는 불빛 같은 분노가 전방을 향해 죽음의 살기를 뿌렸
다.
장강에서부터 시작된 혈전에서부터, 그의 두 손과 검에 무수히 많은 피를
적셔왔지만 진정으로 화를 내본 적은 없었다. 오직 살기 위해서, 죽이지 않
으면 내가 죽어야 했기에 적을 향해 살수를 뿌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분노했고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생성
된 죽음의 살기가 전신을 통해서 무섭게 분출되었다. 남보다 힘이 있으면,
남보다 많이 가졌으면 그들이 전부 옳은 것인가. 자신보다 힘이 없고 가지
지 못했으면 인간도 아니란 말인가. 그들도 인간이란 사실을 왜 한 번도 생
각해주지 않는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익힌 무공이 아니었지만 남에게 피해
를 주고자 익힌 무공도 아니었다.
"으아악! 커-억!"
분노한 석두의 검은 무자비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떨어진 팔다리가 허공에 난무했다. 순
식간에 온몸에선 적의 피가 쏟아져 내리며 혈인이 되어갔다.
시작.
석두의 광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석두의 뒤를 이어 설가장의 인물들을 향해 몸을 날린 이들은 석숭과 금령
이었다.
"구룡신공(九龍神功)!"
모든 내공을 뽑아내며 자신의 최고 절기를 쏟아냈다. 자신이 관리가 된 이
유가 무엇이었던가. 넘치도록 많은 돈을 가진 자신에게 굳이 재산이 필요했
던 것도 아니었다. 권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재산 중 조금만
빼내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이 권력이었다. 하늘이 자신에게 많은 재산
을 주었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친
구가 성군이 되는 것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황실의 관리로서 보호해야 할 양민의 죽음을 방치하고 말았다
. 저들이 복수하러 나타날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옥새를 찾을 욕심에 금
의위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들의 보호를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황실의
안위만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금령 두 사람이 옆에서 적을 베어내고 있는지 사방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
다. 그러나 상대의 수도 엄청났고, 무공 또한 고강했다. 복수의 칼날을 갈
아온 그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행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육 척에 달하는
초상의 사풍도가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은 채 허공을 가르며 서문천의 양손
에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사방으로 뿌려졌다.
혈우가 내리고 있었다. 이십여 호밖에 살지 않던 조그마한 화전민 마을이
피에 젖어가며 울어댔다.
"활! 불화살을 쏘아라!"
부하들이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설검후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었다. 검강 도강의 고수들이란 것은 알
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목숨도 도외시한 채 달려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 정도의 고수들이고 또 신분이라면 몸을 사릴 만도 한데, 그들도 자신들
과 같은 심정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악마의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수십 수백의 화살이 조천영이
누워 있는 집을 목표로 날아들었다.
화살 하나하나에 내공이 실려 있는지 그 빠르기 또한 엄청났다. 설가장 인
물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던 일행이 화살을 쳐내기 위해서 뒤로 물러났다.
"어르신, 이곳을 피해야겠습니다."
다급한 표정으로 석두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 안도 밖의 상황처럼 그
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조천영의 상태가 위급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진통은 계속되고 있는데
몸속에 있는 아이가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온 힘을 쓴 조천영 또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거였다. 밖에서 피비린
내가 흘러 들어오고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나가보지 못
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조천영의 온몸을 주무르고 있는 노파, 송일의 부인인 그
녀의 눈에 가득 고여 있는 것은 눈물이었다. 평생을 같이 살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 했던 남편이 죽었고, 옆집 처자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그녀도 알
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산모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출산이라 했다. 죽어간 남편과 동네 사람들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가 되어버렸다.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같았지만 이 황량한 외지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기도 했
다.
"아악!"
거의 실신 지경에 있으면서도 진통은 느끼는 것인지 조천영의 입에서 고통
스러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어르신!"
이미 집에 불이 붙었는지 천장 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광견조
일행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지만 내공마저 실려 있는 수백의 불화살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가자! 천영아, 조금만 참아라."
갈태독이 두 손으로 조천영을 안았다. 안타까웠다. 조산하는 것만 해도 위
험한 일이거늘 장소까지 옮겨야 하다니…….
"모두 백야평으로 이동한다!"
계속 머물기에는 마을이 너무 비좁았다. 어린애들과 조천영이 있는데 사방
이 불구덩이가 아닌가. 이런 곳에서는 아이들이 견디지를 못한다.
"아악!"
"이런!"
조천영이 지르는 비명소리에 갈태독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하체
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거였다.
"피가 너무 많아요, 영감님!"
"무슨 소린가?"
"하혈도 같이 일어나고 있어요."
"빌어먹을."
태아는 움직일 생각도 없는데 양수(羊水)가 터진 거였다. 또한 산파의 말
을 들어보면 하혈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이다.
지금 최대한 힘을 써야 할 산모는 입술이 검게 변한 채 거의 실신한 상태
이고 앞에는 적들이 새카맣게 일행을 가로막고 있다.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
까봐 지금껏 자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내공을 이용해서 조
천영의 정신이 돌아오게 해야 했다.
"할…아…버지……."
"그래, 정신이 좀 드느냐."
"백랑은……."
"아직 안 왔다. 힘을 내라. 그 녀석에게 예쁜 아기를 안겨주어야 할 것 아
니냐."
"힘이 없어요."
백산이 아직 안 왔다는 갈태독의 말에 조천영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
렸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결코 와서는 안
될 사람이기도 했다.
'백랑!'
그러나 보고 싶었다. 단 한 번만 얼굴을 보면 새로운 힘이 날 것 같았다.
"언니, 힘을 내요. 오라버니는 곧 돌아올 거예요."
"추렴아, 소운아.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지? 꼭 그대로 해야 돼!"
백산이 떠나고 나서 그녀들에게도 유언이란 것을 했다. 자신을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사랑해주라고.
"안 돼요, 언니. 언니가 힘을 내지 못하면 오라버니도 살지 못해요."
"그래, 추렴이 말이 맞다. 네가 살아야 모두가 산다. 산이가 살고 소운이
가 살고 추렴이가 산다. 그러니 제발 힘을 내라."
바로 옆에서 죽음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
도 않는다. 오직 조천영을 구하고 태아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밖에
없었다.
광견조 일행이 구축하고 있는 진은 과거 용지에서 구축했던 남궁세가의 청
풍검진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꾸준히 연습을 했기에 이제는 거의 완전하
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궁지우와 남궁미령의 표정은 그리 밝지
가 못했다. 완전한 검진의 위력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청풍검진의 최
대 약점을 안고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장 앞에는 석두가 자리를 잡고 주변으로 혈광을 뿌려대고 있었으며 좌측
에는 소살우가, 우측에는 석숭이, 그리고 맨 뒤에는 광사 초상이 자리를 잡
았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여덟 개의 삼재진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십여 명의 아이들과 조천영 일행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검후가 이미 청풍검진의 약점을 간파하고 지금의 상황을 유도해
왔다는 것을 남궁지우와 남궁미령은 알지 못했다.
제갈수연이 그에 준 정보가 바로 이것이었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부하들과
백여 명의 궁수들, 그리고 청풍검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내부에서 떨
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검진이 속도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청풍검진은 이미 절대의 검진이 아니다. 다만 좀 강한 무인들이 구축
한 평범한 검진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사경을 헤매는 임산부와 아이들
까지 보호해야 하는 광풍대원들로서는 설가장 무인들이 날린 화살에 고스란
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설검후가 승리를 장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아이들만 살려둔 이유였다
.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네놈들의 죽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나의 자식처럼 실성하며 떠돌게 해주겠다. 킥킥킥!"
백산이 없는 것도 송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식이 받았던 대로 돌려주어 백산마저 미쳐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이미 미쳐가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널
름대는 화마 속에서 번들거리는 설검후의 눈은 적들의 죽음을 즐기고자 하
는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윽!"
이제는 도영천이라 불리는 칼날이 지르는 비명소리였다. 앞에서 몸을 날리
며 달려드는 적을 베어내는 순간, 자신의 옆으로 빨려 들어가는 화살을 발
견하고 다리를 내밀어 막아냈던 거였다. 내공이 가득 실린 화살이 향한 곳
은 내부에 있는 아이들이었던 까닭이었다.
허벅지로부터 섬뜩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화살을 뽑아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계속해서 달려드는 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순간의 멈칫거림은 청
풍검진이 무너짐을 의미하고 진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
남궁지우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적들은 청풍검진의 약점을 완벽하
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였던가…….'
남궁세가의 진에 대해서 이 정도로 알고 있는 곳은 과거의 동지였던 제갈
세가밖에 없다. 애들만 살려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남궁지우도 설검후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기동력을 중시하는 청풍검진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동귀어진에 이은 화살공
격,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면 진에 구멍이 생기고 애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 이미 약점을 간파당한 청풍검진은 더 이상 강호최강의 절대검진이 될 수
없었다.
검진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혈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화살을 막
을 시간이 없을 때는 전부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피가
아닌 자신들의 피로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진영을 유지해라!"
피를 많이 흘린 칼날과 송곳이 비틀거리며 주춤하자 남궁세우의 내공 실린
일갈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버텨야 한다. 백야평으로 가야만 자신들에게 여유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일행의 피해가 너무 컸다.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
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씩 몸에 박히는 화살의 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갈 노인이라도 나서준다면 조금 여유가 생길 수 있겠지만 그의 상태도 자
신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자신의 내공과 온 심력을 다해서 조천영의 상태
를 돌보느라 다른 곳에는 눈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궁미령을
비롯한 여자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무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각이면 도착할 수 있는 백야평인데 한 시진을 이동했음에도 절반밖에 오
지 못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적도 칠십 명 이상이 죽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
는 수가 너무 많았다.
"남궁 대협, 제가 심검을 전개하면 안 되겠습니까?"
보다 못한 석두가 남궁세우를 향해 말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심검을 펼치면, 그 다음에는?"
심검을 펼친다 하더라도 적들도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 처치 가능한 인원은
오십 명 내외일 것이다. 그럼 석두는 당분간 재기불능이 된다. 짐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말이다.
"백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남궁세가에서 남궁무와 비무 중에 백산이 했던 말, 최악의 상황일수록 가
장 자신 있는 무공으로 상대하라 했던 가르침을 두고 한 말이었다.
혈로(血路)가 이어지고 있었다.
청풍검진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따라서 피로 물든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 죽이고자 달려드는 설가장 인물들의 피와, 광견조와 무욕인, 그리고 나머
지 일행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메마른 땅을 적시며 길게 이어졌다.
몸이 정상적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너덧 대의 화살을 팔다리에 박
아둔 채 백야평을 향해 힘든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공자! 빨리 오게, 자네만이 희망이네.'
백산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없었기에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자신들에게도 조천영에게도 백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
다.
"조금만 힘을 내라, 백야평에 다 왔다."
여섯 개의 화살을 몸에 단 채 일행을 독려하고 있었으나 남궁지우의 얼굴
은 암담했다. 청풍검진의 약점이 간파당했기에 백야평도 크게 유리하다 할
수 없음이다.
남궁지우가 가려고 하는 곳, 광활한 평지에 유일하게 서 있는 거대한 바위
쪽이었다. 그곳으로 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공격을 피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남궁지우의 지휘에 따라 백야평으로 가기 위해 광견조 일행이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일진광풍을 일으키며 하늘을 나는 검은
점이 있었다.
백산이었다.
한낮에 출발하여 약을 살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강호
무림의 최고 고수인 그가 온몸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무서운 속도로 질
주하고 있었다. 일반 무인의 걸음으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를 거의 한나절
만에 왕복한다는 것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도 쉬운 일
이 아니었다.
그러나 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내더라도 자신의 품에서 보내고 싶었다.
혼자 가는 길은 너무 힘들고 외로울 것이다.
부인들 셋이서 밤을 새워가며 만들어준 옷이고 비만 와도 옷 버린다며 빗
물조차 퉁겨내면서까지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옷이 뜯어지고 있는데도 인식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양산이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수양산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백산
의 몸이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마음은 벌써 화전민 마을로 달려가 있었지
만 남아 있는 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구룡신공!"
"혈극폭!"
혈인들이었다. 모두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듯 온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옷 사이로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오며 바닥에 뿌려졌고 이내 흔적이 지워졌
다.
석두와 광견조 일행은 결국 이곳까지 왔다.
온몸에 화살을 꽂은 고슴도치가 되어서 도착했고, 절반씩 나누어 전방을
보호하는 한편 나머지는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버틴 시간이 또 한 시진이다. 지혈도 소용없었다. 몸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혈하기 위해 눌렀던 혈도를 다시 풀어야 했다. 그럼
또다시 피가 흘러나온다.
"천영아! 힘을 내라, 힘을……. 산이가 오고 있다, 백산이 온단 말이다."
갈태독이 울고 있었다. 이미 죽었어야 했는데 자신의 내공과 죽을 수 없다
는 조천영의 의지가 혼백(魂魄)을 붙들어두고 있는 것이다.
"백랑이 왔어요?"
순간 조천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고 염주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돌아
온다. 백산이란 한마디에 정신을 추스르고 있는 거였다.
"설마……. 아닐 거야."
갈태독이 그럴 수 없다는 듯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죽기 전에 나타나는
회광반조(廻光反照)의 현상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 돼!"
"나온다! 좀더 힘을 내! 조금만 더!"
갈태독과 산파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갈태독의 외침은 떠나려는 혼을
막기 위한 고함소리였고, 노파의 외침은 드디어 아이가 나오는 것에 대한
희열의 외침소리였다.
'백랑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해, 백랑이 오기 전에…….'
어디서 힘이 생겨나는지 알 수가 없다. 조천영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온몸에서 힘이 쏟아져나왔다.
황량한 벌판, 거대한 바위의 아래쪽. 앞에서는 수백의 인물들이 공격을 해
오고 뒤에서는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피 흘리는 광견조와 석두, 그리고
죽어 있는 적들. 오직 죽음만이 존재하고 있는 이곳에서 생명의 탄생이 이
루어지고 있었다.
"백-랑!"
"나왔다! 나왔어요!"
조천영이 백산의 이름을 부르며 마지막 힘을 썼고 산파의 희열에 찬 외침
소리가 백야평에 울려 퍼졌다. 노파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편과 이웃 친지들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었다.
재빨리 탯줄을 끊어낸 노파가 아이를 위로 쳐들었다. 마치 죽어간 남편과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행동 같아 보였다.
순간.
슈-아-악!
바위 위쪽으로부터 검은 방립을 쓴 인물이 아래쪽으로 뛰어내리며 무시무
시한 도강을 뿌려댔다. 목표는 소운과 냉추렴이었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와
주변에 있는 아이들까지도 전부 도강의 영향권 내에 들어 있었다.
"안 돼!"
가장 먼저 흑의인을 발견하고 몸을 날린 이는 석두와 교대하기 위해 지친
몸을 일으키던 소살우였다. 소살우의 외침소리와 함께 같이 일어나고 있던
칼날, 도치, 쌍칼 등 그곳에 있던 광견조원 전원이 도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
흑막 살수 중 서열 삼위인 사객의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이었다. 영
객과 같이 투입되었던 사객이 지금에서야 나타난 것이다. 금의위에 쫓기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청부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이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음을 풀고 있을 때를 노린 암습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누구도 바위 위에 적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강 속으로 뛰어든 소살우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 자신의 외침소
리와 함께 갈태독이 조천영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몸을 포개는 모습과, 산
파 옆에서 아이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던 요몽이 노파와 아이의 몸을 감
싸는 모습이었다.
그럼 남은 이들은 남궁미령과 두 형수, 그리고 아이들밖에 없다.
두 줄기 도강이 그녀들의 목을 향해 쏘아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천
영의 생사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녀들도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씨펄!'
소살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들고 있는 도(刀)로 막을 수 있
는 강기는 한줄기밖에 없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개새끼!'
재차 튀어나온 욕설을 씹어 삼킨 소살우가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며 양팔
을 활짝 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에 의해서 도강이 퉁겨나가는 게 느껴
지고, 동시에 붉게 변해 있던 왼쪽 팔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크-아-악!"
처절한 포효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핏빛 광풍(狂風)이 몰아쳤다. 백산이 도
착한 것이었다.
화전민 마을에 도착한 백산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
다. 이십여 호의 집들은 이미 재가 되어버렸고 마을 사람들과 알 수 없는
자들의 살점, 시신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천뢰가 터진 흔적.
그때 백산의 귓가에 조천영의 애달픈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힘을 다 짜내서 백야평에 도착한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이제 갓
태어난 소령이를 들어올리며 웃는 산파와 위에서 아래쪽으로 덮쳐가는 흑의
인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빨라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쿠웅!
툭!
광견조원들이 뛰어드는 게 보였고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져나갔다.
'베었다.'
사객(死客)이 내심으로 지르는 소리였다. 그의 도가 피륙을 잘라내는 느낌
이 분명히 손을 타고 전해져왔던 거였다.
나머지 인물들에게 쏘아낸 강기는 그리 강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미끼 둘
에만 모든 힘을 다 쏟았고 한군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기회를 노리면 된다.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건대 이들
은 결코 자신들을 감시하거나 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적들이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제 몸을 뺄 차례였다. 자신의 도를 막기 위해 뛰어들었던 자들은 아래쪽
에 있는 아이들에 더 관심이 많았고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처절한 고함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자신의 목
을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커억!"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눈을 들어 전면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은 보석 두 개, 죽음의 광채가 쏟아져나오는 흑
안(黑眼)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거였다.
흑색지안(黑色之眼) 일국(一國) 멸(滅)이라 했던 파멸안의 두 번째 단계가
현세했다. 사객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백산의 오른손으로부터 사천비가 튀
어나와 사객의 오른팔을 절단해버리고, 가볍게 들려진 왼손에서 운천비와
풍천비가 튀어나와 두 다리를 잘라버린다.
"으-으-으!
공포에 절어버린 사객은 자신의 팔다리가 없어졌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
고 있었다.
"살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소리였다.
살수가 되기 위해 인성을 죽이고 감정을 말살하는 훈련을 거쳤다지만, 절
대적인 공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직 살고 싶다는, 살아야 한
다는 욕망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네깟 놈이, 천영이를……."
지독히도 차가운 저음이 백산의 입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흘러나왔다.
백산의 팔목에서 튀어나와 붉은 빛을 발하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던 사천비
와 운천비, 그리고 풍천비가 위에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사객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객의 몸을 돌고 있던
세 개의 수천비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운천비는 사객의 심장 앞에, 사천
비는 명치 부근으로, 마지막 풍천비는 단전 앞에 자리를 잡으며 몸속으로
파고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죽…인…다!"
백산의 검은 눈에서 한줄기 묵광(墨光)이 번쩍이고 오른손에서 독천비가
튀어나오며 사객의 이마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독천비를 통해서 방출된 절
대독에 의해 사객의 몸이 이마 쪽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검은 독물이 팔 위로 흘러들며 자신의 옷을 태우고 있었으나 행동에는 변화
가 없다.
이윽고 사객의 얼굴이 녹아서 사라짐과 동시에 두 손을 가볍게 앞으로 당
기자, 뇌룡사에 의해서 감겨 있던 사객의 몸이 사등분으로 분리되며 바닥으
로 흩어졌다.
손을 흔들어 독액을 털어냈음에도 백산의 팔에서는 검은빛이 사라지지 않
고 있었다. 아직도 천목환에 남아 있던 천비비 때문이었다. 천비비에서도
백산의 눈과 같은 검은색 광망이 흘러나오며 팔목 전체를 묵빛으로 물들이
고 있었다.
자신의 팔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산의 얼굴이 천천히 설가장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뭣들 하느냐? 활을 쏴라!"
갑작스런 백산의 출현과 그의 잔인한 행동에, 손을 놓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부하들을 향해 설검후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미 살인적인 광기에 도취된 설검후는 이성을 잃고 있었고, 아직도 자신
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절반 정도의 부하들이 죽었지만 적도 역
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별로 없다. 더구나 살수처럼 보이는 놈의 암습
덕택에 대여섯 놈이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새로 나타난 놈이 대단해 보이기는 하지만 수적으로 유리한 것은 자신들이
다. 한 놈이 더 왔다 해서 바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설검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설가장 궁수들이 다시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
다. 이번의 목표는 전부 백산이었다. 수십 수백의 화살이 백산을 향해 무서
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텅! 텅! 텅!
백산의 몸에서부터 안개처럼 퍼져나간 붉은 기운이 화살을 퉁겨내고 열두
개의 비도가 사방으로 유형하며 춤을 추었다. 하늘을 향해서 곧추선 산발된
머리는 바람결에 일렁이듯 휘날리고 암흑색의 동공 두 개는 붉은 혈운 속
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옮길 때마다 주변의 대기가
터져나갔다.
"큭큭큭!"
백산의 입에서 흘러나온 괴소는 메아리가 되었고 나직한 중얼거림은 노래
가 되어 울린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천멸우(天滅雨)!"
손과 발에서 천비들이 사방으로 몰아치며, 검은 눈동자의 인간이 춤을 추
고 있다. 살짝 들려진 다리에 연결된 빙천비가 전방을 향해 반원을 그린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네! 생혼멸(生魂滅)!"
휘감아도는 왼손과 함께 생천비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사방으로 찔러간다
.
"으-아악! 커-억!"
빙천비에 의해서 허리가 잘려진 설가장 인물들이 얼음 가루로 부서져 내리
고 생천비에 의해서 이마가 뚫린 인물들은 마치 그 자리에 정지하듯 선 채
로 죽어나간다.
덩실!
혈우신보와 연결된 백산의 손과 발놀림이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피하며 두
번째 마당을 시작했다.
"화염지옥이 탄생하니! 화염폭(火焰爆)!"
춤을 추기 위해서 들어올려진 다리에 연결되어 있던 화천비에서 사방을 태
우는 극양의 기운이 쏟아지며 달려들던 인물들을 비롯하여 생천비에 의해서
이미 절명해 있는 인물들까지 전부 재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마저 파괴하네! 사혼파(死魂破)!"
오른팔이 앞으로 휘감아지자, 사천비가 전방을 찢어발기며 검이며 인간의
육신이며 할 것 없이 걸리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별 위력도 없다 했던 혈뇌문(血雷門)의 무공이 흑색지안의 상태에서 발현
되자 엄청난 위력으로 펼쳐지고, 단순한 시구(詩句) 같은 중얼거림이 천비
로 이어지자 하늘의 기운이 솟구쳐나왔다. 지극히 무심한 저음의 노랫소리
가 백야평에 울려 퍼지며 백산의 춤사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혈운이 지나
는 곳에는 어김없이 피와 잘린 육신이 남았다.
"천영아! 천영아, 정신 차려라! 소령이를, 소령이를 보란 말이다!"
"아이가, 아이가 울지 않아요!"
조천영을 애타게 부르는 갈태독의 울먹이는 목소리와 산파의 울부짖는 소
리가 처연히 메아리쳐 울렸다.
사객의 공격에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조천영의 온몸에
다 추궁과혈(追宮過穴)을 하고 있었다. 소살우의 팔이 잘리고 그곳으로 뛰
어들었던 광견조원들의 등짝이 갈라져서 하얀 뼈가 드러난 채 쓰러져 있음
에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핏빛 바람이 불어오니! 혈광풍(血光風)!"
갈태독이 조천영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백산 주위의 혈광이 더욱더 진
해지며 그의 몸이 무서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몸을 따라서 날
리던 풍천비에서 가공할 풍압이 쏟아져나오고 그 풍압에 휘말린 설가장 인
물들의 몸이 찢겨지며 바람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산천초목이 사라지네! 무한극(無限極)!"
이제는 백산의 움직임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붉은 혈운에 감싸인 미쳐
버린 바람(狂風)이 온 사방에 몰아치며 설가장의 인물들을 도살하고 다녔다
. 인간이 아니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면 저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단 일수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어육이 되어 쓰러지고 있음에도, 아무런 감
정도 느낌도 없는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은 검은 눈동자는 더욱 빛을 발한
다. 백산의 절대적인 무위에 새파랗게 질려버린 설가장 인물들이 뒤로 주춤
거리며 물러나고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언제 쓰러졌는지, 자신의 목이 떨어졌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하나씩 몸
을 눕혀갔다. 아비규환 지옥도가 연출되고 있었다.
"저럴 수가……."
백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설검후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극단적인 공포,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였다. 어찌 피와 살로 이루
어진 인간의 몸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백산 앞에 있는 설가장의 인물들은 무인이 아니었다. 한겨울의 마른 갈대
였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슬쩍 움직이는, 발길질 한 번에 힘없이 쓰러지
는 메마른 갈대일 뿐이었다.
분노(忿怒).
광혈지옥비(狂血地獄匕)라 불리는 열두 개의 천비 중 철가의 한을 토해내
서 만든 천비비의 마지막 비밀, 혈뇌문 무공의 최후 비밀은 깨달음도 뭐도
아니었다. 하늘을 태울 듯한 분노가 잠들어 있던 천살(天殺)의 기운을 완전
하게 깨웠고, 천살성에 기인한 흉성이 수천비와 각천비를 통해서 뿌려지는
것이었다.
"검은 구름이 울부짖어! 묵운명(墨雲鳴)!"
우르릉!
"분노한 하늘이 소리치네! 분천뇌(奮天雷)!"
콰콰광!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단 한마디. '죽여라, 죽여라.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여라.'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여라는 말만 울리고
있었다. 이미 이성이란 것도 없었다. 검은 동공에 들어오는 희미한 그림자
들, 천영이를 해친 자들이고 이제 막 태어난 소령이를 죽인 자들이고 형제
들을 공격한 자들이다.
저들을 다 죽여야만 이 갈증이 해소될 것이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피를 데
우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뜨거운 피가 필요할 뿐이다. 심장을 터뜨
리고 그 피로 몸을 씻어야 한다.
"모두 피해랏!"
결국 설검후의 입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왔지만 이건 아니다. 정 안 되면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같이 죽고자 했다.
그러나 적은 단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괴물 같은 놈에게 일방적으로 도륙
만 당하고 있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설검후의 외침소리에 백산의 공격을 피해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던 설가
장 무인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백야평, 사방이 전부 트인 이곳에서 그들이 피할 곳은 어디
에도 없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출 속에 피어나는 것은 서러운 피무
지개였다.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붉은 운무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
막난 육신이 남았다. 소림의 절세신공인 무상신법은 이미 불공(佛功)이 아
니었다. 악마의 저주로 만들어진 사공(邪功)이었고 혈운을 피워내는 마공(
魔功)이었다. 광활한 백야평의 이곳저곳에서 솟아나는 검은 보석은 지옥에
서 산다는 야차의 눈빛이었다.
백야평을 누비는 것은 백산 혼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로 온몸을 씻었
던 석두와, 사객의 암습에 당하지 않았던 광견조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설가장 인물들을 도륙하고 다녔다. 그들도 조천영을 부르는 갈태독의 음성
을, 산파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힘을 얻고 난 후에, 처음으로 태어
난 생명을 지키지도 못했고 자신들의 어머니 같은 조천영을 지키지도 못했
다.
진기를 끌어올릴 때마다 화살 구멍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는데도 멈추질 않
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미쳐버린 사람은 백산만이 아니었다. 그들
도 이미 미쳐 있었던 것이다. 백야평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백산과 석두
, 그리고 광견조원들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혈무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살기였다.
"으앙!"
"울었다, 울었어. 아이가 깨어났다!"
희열에 찬 산파의 외침소리가 울려 퍼지자 석두와 광견조원들의 동작이 일
제히 멈췄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
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크아악!"
멈추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노파의 외침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더욱더 커
진 괴성을 질러대는 이, 검은 동공의 백산이었다. 목을 쳐낸 인물로부터 솟
구치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
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들었던 갈태독의 음성만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천영아! 정신 차려라, 제발. 너 아니면 저 녀석을 말릴 사람이 없다. 소
령이가 깨어났단 말이다, 천영아!"
갈태독이 계속해서 조천영을 주무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도 파멸안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였다. 지금껏
백산이 해왔던 행동으로 보아, 분노가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면 변했
었다. 분노가 커질수록 힘은 더 강해졌고, 힘이 강해지면 이성은 사라졌다.
지금 백산의 상태가 파멸안의 증상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만일 그
에게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면 가장 먼저 조천영의 상태를 보러 왔어야
했다.
그러나 조천영이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
는가.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살아 있는 생명체
를 말살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설가장 인물들이 다
죽고 나면 그 다음은 자신들도 그의 목표가 될 수 있음이다.
'깨워야 한다. 깨우지 못하면 오직 죽음뿐이다.'
아니길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기에 갈태독의 손놀림이 더
욱 빨라졌다. 백산이 마지막 인물의 목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으음! 백…랑!"
갈태독의 노력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조천영이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깨어
났다.
"천영아! 정신이 드느냐? 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갈태독이 하늘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루 동안에 걸친 운
명과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백오십 년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결국 운명을 이겨냈다. 떠나가던 혼을 다시 되돌린 것
이다.
"백랑은요?"
아이에 대해서는 차마 묻지를 못하고 백산만 찾았다.
"고생했다, 천영아. 소령이도 무사하다. 자, 봐라! 공주님이다, 이 녀석아
."
백산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소령이를 먼저 조천영의 품에 안
겨주었다. 그녀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두려워서
묻지 못했을 것이다.
"오! 우리 아기, 소령아! 소령아……. 백랑은? 백랑은 어디 있어요!"
소령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던 조천영이 갑자기 울부짖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이곳은 처음
있던 집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백야평을 둘러보던 조천영이 기겁을 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인물, 온통 혈광에 휩싸여 있는 백산의 모습이 보
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널려 있는 무수한 시체들.
조천영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하고 실신했다
깨어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
지 저 멀리 보이는 백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랑!"
백산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백-랑!"
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도 잊은 채 품속에는 갓 태어난 소령
이를 안고서 백야평을 가로질러 백산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하체를 타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
다. 자신이 살아났고 아이가 살았다. 미쳐버린 백산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황산에서 벌였던 살육을 또 시작했을 것이다. 얼었던 얼음이 다 깨져서 녹
아버렸을 것이다. 분노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자신도 버렸을 것이다. 잡
아야 한다.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백산을 외쳐 부르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설검후의 목을 틀어쥐고 비도를 뿌리려던 백산의 행동이 처음으로 멈췄다.
검게 죽어버린 그의 머릿속에 백랑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자신의 정신을 돌아오게 해주는 광
명(光明)의 목소리였다.
"천영?"
자신도 모르게 설검후의 목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백산의 눈에 보이는 장면 하나,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희미한 동체가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발소리만 듣고도, 숨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천영이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그녀였
다.
그녀가 다시 살아온 것이다.
"죽인다! 이야얍!"
조천영을 쳐다보며 넋을 잃고 있는 백산의 등을 향해 설검후의 공격이 터
졌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설가장도 부하들도 오직 자신 한 명만 남겨두고 전부
떠났다. 더 이상 생에 대한 미련이 없다. 죽고 싶었다. 이미 자신이 상대
가 되지 않음을 알지만 가장 편하게 죽는 방법일 것 같았다.
결국 설검후의 의도는 적중했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줄로만 알았던 열두
개의 비도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솟아오르더니 설검후의 온몸을 난자해
버렸다.
후두둑!
조각조각 떨어진 설검후의 몸이 바닥에 흩어졌다. 가문을 멸망시킨 자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지난 오 개월을 견디며 살았던 설검후의 죽음을 끝
으로, 설가장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식이 저질렀던 단순한 사건,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벌였던 일. 자
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행하고 있던 그런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이 끝났었고 이미 잊혔던 일이었는데
그 사소한 일이라 생각했던 사건으로 해서 설가장이 멸문되고 만 것이다.
떨어지는 설검후의 시신을 뒤로하고 백산도 조천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은 자신이 엄청난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한순간이면 조천영의 앞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조차 잊었는지 조천영의 이름만 되뇌며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눈물.
백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네 살 이후로 말라버렸던 눈물샘이 터졌
는지 그의 눈가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랑!"
"고마워! 정말 고마워, 살아주어서……."
"응애응애!"
굳게 껴안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소령이, 소령아. 내가 아버지다, 소령아!"
조금씩 시력이 돌아오면서 아이와 조천영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왜 이
리도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검은 동공을 씻어내려는 듯 끊임없이 눈물
이 쏟아져나왔다.
"괜찮아요?"
백산의 눈가에 눈물을 훔쳐내며 조천영이 물었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동자에서 검은빛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이 그
녀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괜찮지, 그럼. 가요!"
조천영을 번쩍 안아든 백산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좋았다. 조천영이 살아났고 아이가 살아났는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라랑!
사라랑!
마주 잡은 손에서 들려오는 애명환의 울음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뇌룡현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백산과 광견조원들이 입을 닫았다. 일행이
침울해하면 누구든지 한 사람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곤 했던 이들이 굳어
진 얼굴로 각자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조장인 소살우가 왼팔을 잃었고 그와 같이 뛰어들었던 쌍칼과 도치 등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치명적이라 할 만큼 큰 부상을 당했지
만 마을 아이들을 전부 구한 것도 아니었다. 열다섯 중 다섯이 희생되었다.
특히 태어난 아이와 노파를 몸으로 감쌌었던 요몽의 상처는 누구보다 컸다
. 도강을 맨몸으로 받았던 그의 등은 거의 넝마 수준으로 변했고 지금까지
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하게 다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도 온몸으로 화살을 막아내느라 성
한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구 하나 내색하지 못했다. 화살이 박혀 있던 자
리를 지혈하고 마을을 수습하느라 묵묵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을 사
람들의 시신을 한곳으로 모으고, 나무를 베어다 쉴 곳을 다시 만들면서 현
실을 잊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피해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백여 명의 마을 사
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자신들이 던진 광
천뢰였기에 더욱더 견디기 힘들었던 거였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
고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자신들의 방문으로 인해 일
어난 일이기에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은 내색할 수가 없었다.
"괜찮냐?"
거의 모든 정리가 끝나고 일행이 쉬고 있을 때 백산이 소살우를 찾았다.
소살우를 쳐다보는 백산의 눈길에 아픔이 묻어나왔다. 냉추렴을 구하기 위
해서 팔을 희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님!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소살우가 강렬한 눈빛으로 백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같으면 이 살우의 목숨과 팔을 선택하라면 어쩌겠소?"
"살우야……."
"대답해보시오."
"내 팔보다 너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우린 가족이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고 더 빨리 돌아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
고 싶었다. 그러나 소살우는 당연한 일일 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다.
만일 더 나쁜 상황이었다면 목숨마저도 버렸을 것이기에 백산의 마음은 더
아팠다.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무공을 가르친다는 명목 하
에 고생시킨 것밖에 없는데 그들은 이미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 안휘성에서 동생들 이름을 지어올 때 말이요, 다른 애들은 전부 이
름을 따로 지어왔는데 내 이름만 그대로였던 이유를 아시오?"
사실 백산도 그것이 궁금해서 조천영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소살
우도 좋은 이름이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때는 조천영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
고 말았는데 소살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소살우는 내 별명이 아니고 이름이기 때문이었소. 어머니의 성을 쓰기는
했지만 부모가 지어준 이름말이오."
평생을 작명만 하고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소살우가 별명이 아닌 이름이란
것을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서른이요, 어쩌면 우리 광풍대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
을 거요."
먼 옛날을 회상하는지 소살우의 말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에게
도 말하지 못했고, 또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창기였소, 그것도 하급창기."
그의 기억에는 항주(杭州)가 고향인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항주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 가문의 장자였다. 그런데 그
집안에 문제가 있었다. 다섯 명의 첩이 있었음에도 딸만 여섯이 있었고 대(
代)를 이어야 할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견디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 그때 소살우의 어머니를 만났다 한다. 술김에 창기와 하룻밤 잤던 것이
임신으로 이어졌고 태어난 아이가 소살우였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처지가 바뀌었다. 하급창기에서 대갓집 첩으로 들어앉
게 된 것이었다. 대갓집의 장자로서 소살우는 모든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이 년을 보냈다. 그땐 몰랐지만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호강이었
다.
그러나 소살우가 세 살이 되던 해에 모든 것이 변했다. 그동안 자식을 낳
지 못했던 본처가 임신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 아들이었다.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소살우와 그의 어머니는 노예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옮겨졌고 그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었다. 세인들의 이목 때문에 차마 밖으로
내치지도 못하고 집에서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살우가 사물을 인식하면서부터 본처와 나머지 첩들의 학대가 시작되었다
. 무수히 많은 채찍질과 칼부림, 철들기 시작한 소살우에게는 너무나 큰 고
통이었다.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지도 못
한 채 매일매일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 살았다.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여섯 살 때였다. 학대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출생
의 비밀을 알려준 뒤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생각에 자신만 없어지면
소살우에 대한 처우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혼자 남은 소살우를 비밀리에 다른 집안의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다 한다. 주인들의 손에 맞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얼
굴에 미소를 띠며 살아야 했다. 얼굴이 완전하게 웃는 모습이 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그때부터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고 더욱더 주인의 비유를 맞추
며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탈출, 팔 년간 노예 생활의 끝이었다.
"탈출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쇼? 그놈을 죽였소, 그때까지 내
가 알고 있던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말이요. 그런데 말이요, 사람을 죽이고
있는 그 순간에도 웃음이 나옵디다. 동생이란 놈의 머리를 돌로 짓이기면
서도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단 말이오."
항주를 떠나 도망친 곳이 뇌룡현이었다 한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발
에 차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런데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생겼소. 아직은 가족이 무
엇인지 잘 모르오. 다만 귀혼곡에서 형님이 그랬고 큰형수님이 그랬소. 우
리는 가족이라고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구화산의 혈전 전에 조천영이 냉추렴에게 한 말을 소살우도 들었고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철이 들고 난 후 처음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걱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었기에 아까울 것이 없다.
"저……. 살우 도련님!"
"어? 작은형수님은 왜 나왔소? 큰형수님이나 돌보지 않고."
그들의 뒤쪽에 냉추렴이 와 있었다. 많이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아직
도 울먹였다. 도강이 덮쳤을 때 죽음을 생각했었다. 그때의 상황이 너무 급
작스러웠지만 자신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기습에 아
무런 방비도 못했다.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으려 할 때 도강을 막는 것이 있었다. 소살우의
왼팔이었다. 너무 미안했다. 거의 대화 한 번 없었던 이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팔을 희생한 것이다. 자신 같으면 저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그
리 할 수 있을까 하고 바꿔 생각해보았지만 아니었다. 감사하고 미안한 마
음뿐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울고 있다가 이제야 나온 것이다.
"이거……."
"형수님!"
냉추렴이 내밀고 있는 것, 나중에 애를 갖게 되면 보약으로 쓰라던 소림의
대환단이었다.
"다음에는 다치지 마세요. 소운이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도련님들의 상처
가 심해서……."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형수님."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받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할 것이기에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백산과 냉추렴은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받았잖소!"
"먹어!"
줘봐야 먹지도 않고 따로 보관할 것을 알기에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것
이다.
"형님!"
"팔 하나 가지고는 소운이와 추렴이를 동시에 못 지킨다, 그러니 먹어. 그
리고 우리는 건달이다."
"알았소!"
두 사람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대환단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백산과 광견조 일행이 철저하게 지켜오는 철칙이 하나 있다. 여인들에게는
절대 살인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 자신들이 모두 죽었을 때는 모르지만 눈
을 뜨고 있을 때만큼은 그녀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무림인이
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발악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달들
의 사고방식 속에는 여인에게 검을 들게 하는 놈은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한 면이 이번의 사태를 불러왔고 결국 소살우는 왼팔을 잃었
지만 그들의 생각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제길! 이 보물을……."
대환단을 노려보던 소살우가 결국 그것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백산은
두고라도,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냉추렴의 시선 때문에 견
딜 재간이 없었다.
"고맙다!"
운공을 하고 있는 소살우를 쳐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까짓 약 한 알
로 잃어버린 팔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
다. 더구나 도(刀)보다는 주먹을 쓰는 무공에 더 집착했던 소살우가 아니었
던가. 이제는 권을 버리고 도만 써야하기에 두 손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배
는 강해져야 함이다.
"추렴아, 됐어. 더 이상 신경 쓰면 살우가 힘들어."
소살우를 응시하고 있는 냉추렴을 잡아끌었다. 추렴에게 감사의 말을 듣고
있는 소살우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살우가 혼자 나와 있던 이유, 자신의 팔을 잃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 비록 냉추렴을 구하기 위해서 한 팔을 잃었지만 그 위기의 순간에 그의
선택은 소운이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있었기에 구소운과 냉추렴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지, 만일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면 냉추렴은 포기
했을 것이다. 소살우가 석두와 그것을 이야기하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조
용할 때 소살우를 찾아왔던 거였다.
"오라버니!"
냉추렴이 울먹이며 백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래, 이제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백산이 냉추렴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달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일행 중에 부모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조천영밖에 없었
다. 티 없이 자란 것 같은 냉추렴도 초상의 말을 들어보니 어두운 과거가
있었고 소운도 그렇고, 누구 하나 제대로 살아온 이가 없었다.
"이제부터 어둠은 없을 거야. 우리의 행복은 내가 지킨다, 영원히……."
"네?"
"아냐, 누님에게 가보자. 근데 추렴이 너 가슴이 더 커진 것 같다?"
"오라버니!"
냉추렴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조그마한 농담이 우울했던 마
음을 돌려놓고 있었다.
백산의 뒤를 따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어떤 고
난이라도 그 사람만 곁에 있으면 다 극복될 수 있는 것. 결코 고난이 아니
다, 더욱 단단하게 엮어주는 매개체가 될 뿐…….
그들과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사랑을 키워가는 이들이 있었다.
"미안합니다, 남궁 소저!"
석두와 남궁미령이었다.
남궁세가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사람이었다. 검
법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둘 다 젊은 사람이다보니 오가는 감정
은 무공에 관한 느낌만이 아니었다. 서로의 가슴속에 무언가 조금씩 자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두가 지금 미안하다고 하는 말, 위기의 순간에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
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아니에요, 석공자님. 저는 무가의 자손입니다."
두 여인이 넋을 놓고 있을 때 가장 침착하게 대응한 이는 남궁미령이었다.
마음이야 조천영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지만 소운이나 냉추렴보다
는 덜했기에 비교적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조천영 쪽보다
는 아버지가 있는 전방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소살우가 뛰어드는 장면이 들어왔고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녀와 근처에 있던 몇몇
아이들이 상처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들이 사는 모습이 바보 같지요?"
"글쎄요……."
남궁미령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어떨 때 보면 그녀의 상식으로 이해
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언제나 자신들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임에도, 또 어떨 때는 단순할 정도로 의리라는 것을 따지
며 산다.
오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에게 광천뢰를 던질 정도로 냉정
하게 처리했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아이들만
없었더라면 청풍검진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부
상자는 없었을 것이다. 개인보다는 단체를, 조직을 우선시하는 무가나 문파
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행동이질 않는가.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
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택이란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대장이라는 백산이란 남자만 해도 그렇다. 소림사에서 보여
주었던 그 사람의 행동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부의 원수이면 불구대
천(不俱戴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수를 한다며 비무를 했고 이겼다.
그럼 영원한 봉문은 아닐지라도 몇 년 또는 몇십 년의 봉문을 시켜서 복수
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것이 대환단 세 알이었다. 그
것도 사숙 자리와 바꾼 것이라 한다. 내면에 있는 사정까지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나머지 일행의 행태도 그녀로서
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또한 대환단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무인이면 목숨을 걸고 구하는 그런 영
약을 그냥 보약으로 치부하고 누구 하나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지금 이들 중 누구라도 대환단을 복용하게 되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
로 강해질 것이다. 지금도 강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수준인데 이 갑자의
내공이 더해지면 상상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강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
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런데 안 아파
요? 좀 봐요."
"괜찮아요."
"이리 내봐요. 이 피 좀 봐, 천을 갈아야 될 것 같아요."
자신의 말처럼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미리부터 알려고 하면
더욱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지 않던가. 이들 속에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고, 이 사람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소저! 옷을 찢으면 어떡합니까."
남궁미령이 자신의 옷을 찢어서 석두의 상처를 싸맸는지 석두가 당혹스러
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다른 분들 상처 때문에 천도 없어요. 그러니 가만있어요."
멀리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백산과 냉추렴이
집으로 들어왔다.
"이것 보우! 아비가 돼서는 아기는 안 보고 어딜 그리 돌아다니누?"
일행 중 가장 힘들어해야 할 사람임에도 산파의 얼굴은 의외로 밝았다. 아
이가 살아난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할머니……."
"젊은이, 자네가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
네. 아쉬움도 있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네.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살았다고나 할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벌써 육십 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사
람인데 백산의 행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식이 태어났으면 하루 종일 싱
글벙글하고 다녀도 시원찮을 판인데, 마을 사람들과 일행이 입은 피해 때문
에 좋아하는 표정 한 번 짓지 못하고 밖으로만 나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 보기에는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욕심이 없다는 것, 그것은 다 가진 사
람들이란 말이네."
갈태독이 깨달았던 삶의 철학을 할머니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풍족한 사람들. 진수성찬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산나물 몇
가지가 전부인 반찬에 쌀로 지은 밥은 구경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사는 사람들. 남들이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내 사는 것을 자랑할 것도 없기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세상 누구보다 부자였던 거였다.
"자, 안아봐야지. 아비 닮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엄
마만 닮았어."
"감사합니다, 할머니."
백산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자신이 위로를 해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고 말았다. 노파가 건네주는 소령이를 받아 안았다.
백야평에서 보고 처음 안아보는 소령이다. 너무 부드럽고 귀여웠다. 도저
히 자신의 아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자신같이 못난 놈에게 이리
도 귀여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천영에게 고맙고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샘은 조그마한 감동에도 곧잘 물
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예뻐요?"
깨어났는지 조천영이 미소를 지으며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
굴이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낳은 여자의 지친 얼굴이었지만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숭고한 얼굴이었다.
"수고했어요, 누님! 미안해, 너무 늦어서……."
"아니에요. 제가 바보였어요. 백랑이 있어야 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인 사람이다. 그가 있어야 삶의 의미가 있다. 그가 없다면
자신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간이었고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반쪽을 만난 비익조(比翼鳥)였다. 누구 하나가 없어지면 날지도 보
지도 못하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비익조…….
"나가보세요. 동생들도 돌봐야지요."
"쩝!"
조천영에게 다녀온 백산이 서 있는 곳, 아버지의 유골을 모시고 왔던 마차
였다. 불화살의 공격에 검게 타버리고 안에 있던 모든 내용물은 재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유골이 들어 있던 상자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재가 되어
서 제대로 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몇 조각의 뼈만
있었다.
"아버지, 이제는 이곳에서 쉬셔야 하겠습니다. 칠성리까지 모시고 가고 싶
었는데 아버지가 할 일이 생겨버렸어요. 이곳에서 돌아가신 마을 사람들을
아버지가 위로해주셔야죠. 아들의 잘못인데 아버지가 책임을 지셔야지 별수
있습니까."
흩어져 있는 뼛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뼛조각 몇 개
를 제외하곤 아버지도 남긴 게 없었다.
"아버지, 그동안 보셨죠? 아버지와 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어
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소령이 보셨죠? 너무 예쁘지 않소? 아버지의 손녀이고 제 딸입니다.
"
남아 있던 모든 뼈를 수거한 후에 작은 절구를 하나 만들어 조심스럽게 빻
았다.
"이곳에서 장사 지내실 거요?"
운공을 마친 소살우가 다가왔다. 대환단이 주는 효과는 엄청났다. 이 갑자
전부가 내공으로 화하지는 않았겠지만 한 번의 운공으로 기세가 완전하게
달라져 있었다. 몸에서 발산되는 살기가 사라진 것이다. 백산이 원했던 경
지에 근접해 있었다.
"보약이 몸에 맞나보네?"
"그런 것 같소."
소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대환단이 주는 약효 때문이 아니었
다. 가족이란 개념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정이 가득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건……."
"아! 그냥 이곳에서 모시련다. 이편을 더 좋아하실 것 같기도 하고."
"아버님을 고향에 모시는 것이 형님의 마지막 꿈 아니었소?"
복수의 꿈을 접었던 백산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이 가지고 왔던 유골 전부를 칠성리로 모시고 가고 싶었었
다.
"꿈은 변하는 거야, 이제 내 꿈은 소령이와 가족이야. 참! 요몽 스님은 어
떠냐?"
"아직 혼수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래? 빨리 좋아져야 할 텐데."
가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자신이 그동안 구박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소령이와
산파 할머니가 살아났다.
이야기를 나누며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소, 영감!"
사뭇 걱정스런 얼굴의 백산이 갈태독을 향해서 물었다. 무의식 속에서 무
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연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요몽 스님은 보기
에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다른 광견조원들은 한 명씩 깨어나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요몽 스님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환단을 먹였으니 곧 깨어나겠지."
결국 소림에서 가져왔던 대환단과 소환단은 이곳에서 전부 써버리고 말았
다.
"으음!"
"깨어나려나 봐요."
요몽 스님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소운이 옆으로 다가앉
으며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인 그
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다. 무의식 속에서 지르는 소리다."
갈태독의 말대로 요몽 스님은 혼수상태에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진정 아버지였단 말입니까, 당신이 진정……."
"그렇다, 내가 너의 친아버지다."
"그렇다면 왜, 왜……."
"가문 때문이었다. 가문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선 인정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다."
"그깟 가문 때문에 어머님을, 자신의 부인을 죽인단 말입니까. 천륜을 어
기면서까지 가문을 세우고 싶었습니까. 그런 저주받은 가문이 제대로 된 가
문이 될 것 같습니까?"
"닥쳐라! 천륜이란 것은 인간에게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닥치시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 하셨소! 당신은 나의 어머님을 죽인 원
수일 뿐이오, 원수……."
"아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장자다. 배다른 그놈과 다르단 말이다. 내 말
을 따라야 한다. 너는 장자다. 우리 가문의 장자, 장자……."
"허억!"
"정신이 드느냐."
온몸에 땀을 흘리던 요몽 스님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갈태독이
재빨리 진맥을 하며 상태를 살펴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
다.
아마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괴로워하는 것
을 보고 어느 정도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잠깐 빛나는 것 같
던 요몽의 눈동자가 다시 예전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으으!"
다시 고통을 호소하는 요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갈태독이 이내 자
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는 대환단의 약효만으로도 충분히 치유가 가능하
기 때문이었다.
"나가자. 이젠 시간이 해결해줄 게야."
갈태독의 말처럼 백산 일행은 이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기로 했다. 상처를
입은 광견조원들 때문에 더 이상 이동하기 힘들었으므로 나머지 광풍대원들
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개방의 이목이면 자신들을 찾는 데에도 그리 어
려운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백산 일행의 소식은 개방에만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수양산 이곳저곳에서 전서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소식을 접한 이들
중에는 백산 일행이 설검후의 세력을 물리쳤다는 데에 대해서 놀라는 게
아니라, 백산의 무위에 놀라고 있는 자가 있었다.
* * *
무려 천오백 년 동안 가문의 유업을 이어온 자, 혈가(血家)를 알고 철가(
鐵家)를 알고 광혈지옥비를 알고 있는 천신가의 후예, 천무맹에 있는 장생
원의 주인인 검제 담운천이었다.
두 사람.
장생원 내에 있는 그 정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자들.
노야라 불리던 검제 담운천과 모든 것을 정리해야 서방정토를 만들 수 있
다던 스님이었다.
"노야, 어찌하실 겁니까."
강호무림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산서성으로부터 들어온 소식은 너
무 엄청났다. 붉은 혈광을 번득이며 지옥의 춤을 추는 비도가 출현했다는
소식이었다. 신의 가문을 몰락시켰던 저주받은 무기, 그 무기가 출현했다는
보고이질 않는가.
"자네, 그때 화전민 마을에 있던 것들은 전부 없앴나?"
"그렇습니다, 노야. 더구나 어른도 아니고 네 살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천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살아났을 가능성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혈랑 떼를 이끌고 그 마을을 유린할 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
었다.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산속에 고립되어 있던 유일
한 마을이었다. 그 폭우 속에 이제 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마을 밖으
로 나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때야 천살성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한 일이었지만, 혹여 사냥 나간 어른
이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혈랑 떼를 찾는 자에 대해서는 추살령까지
내려두었다. 단 한 치의 허점도 없이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비도는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죽음의 춤은 광혈지옥비가 확실한 것 같았으나,
파멸안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인 눈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고가 없었
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게는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
럽게 하였다. 그의 가문에서 알아낸 혈가의 비밀 중에 한 가지는 비도가 춤
을 추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어야만 끝이 난다고 했다. 즉, 그 살아 있
는 것에 포함되는 것은 적과 아군, 피아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도의 소유자는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가문에서 알아낸 그들의 비밀은 틀림없을 것이다. 거의 삼백 년에 걸쳐서
알아낸 그들의 비밀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혈가의 무
기는 가지고 있을지언정 천살성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어떤 운 좋은 자가
광혈지옥비를 얻어서 나름대로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 것이다.
"천살성이 동시대에 둘이 나타날 수도 있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걱정
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그들이 어디에 숨더라도 우리의 눈에서 벗
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다 쥐고 있는 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찮은
인간들이 저 잘났다고 해봐야 자신들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
다.
"설사 노야의 생각대로 그자가 파멸안이라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질 않습니까. 그들은 통치를 받아야 될 운명을 타고난 미물들일
뿐입니다.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담운천과 신가의 등장을 역사의 흐름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통치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나머지는 지배를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스님의 태도였다. 습관적으로 내뱉던 불호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네……! 무공을 대성했구먼."
담운천이 대견스럽다는 듯이 스님을 쳐다보았다. 반신오가 중 사신가의 무
공 대성, 마음속에 있던 모든 사악함을 증폭시켜 순수의 존재로 다시 태어
나버린 것이었다.
"무공을 대성하면서 깨달음이 많았습니다."
사신가의 무공을 대성하자 세상이 달리 보였다.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인간들의 행위가 우습게 보였고, 부처가
되겠다고 참선을 하고 있는 자들이 허황되게 보였다. 무릇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그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자들
은 세월이 지나도 노예일 수밖에 없고, 과거에 신이었던 자신들은 어떤 환
경에 있어도 신일 수밖에 없는, 세상 이치는 정해져 있다. 누군가 인위적으
로 바꾸려 한다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네도 무공을 완성하면서 깨달았을 것이네. 하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힘을 준 이유를 말이네."
지금껏 시골 노인처럼 하고 있던 담운천의 기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투명
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온 연못을 뒤덮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
늘의 기운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아옹다옹하고 있는 미물들과 어울려 살라고 준 것이 아니
네, 그들을 잘 통치하고 가르치라는 의무를 준 것이란 말일세. 우리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가진 자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네.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 의
무."
담운천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빛이 들어왔다. 천오백 년 동안 묻어두어야
했던 신인(神人)의 눈빛, 신안(神眼)이었다. 자신들이 우매한 중생을 지배
하는 것은 하늘을 대신하여 수행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권리 행사는 스
스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의무는 그렇지 않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의무는 반드시 수행해야 되는 천명을 말함이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있던가.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된 것이 인(因)
이라면 세상을 지배하는 의무는 과(果)이네. 그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고."
세상의 이치인 인과(因果)의 법칙을 자신들의 힘에다 결부시키고 있었다.
아무런 쓰임새도 없는데 자신들에게 힘을 주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고 어쨌
든 그 힘을 받은 자는 선택된 자들이란 말이었다. 아울러 하늘로부터 선택
되었는데도 그곳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을 쓰지 않음은 자연의 질서에 위해되
는 것이기에 더 큰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금신가의 무공을 익힌 아이만 나오면 시작될 것이네."
"무슨 소리입니까, 노야. 금신가의 후예가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노승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분명 금신가의 후
예가 제거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은 그것마저도 자신이 꾸민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질 않는가.
"금신가의 후예? 아니네. 그 아이는 금신가의 후예가 아니고 금신가의 무
공을 익힐 수 있는 우수한 자질의 인간일 뿐이네, 나의 창조물이고……."
"그럼 금황파천신공도……."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이었다. 천무맹 제자들의 무공을 익히는 장소
인 천무비고에 금황파천신공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앞에 있
는 이 사람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야망이 있는 녀석이었네, 자질도 있었고."
담운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우연히 자신의 가문에 흘러 들어와 있던 금황파천신공과 금황비도 천고의
보물이기는 했지만, 천신가의 무공과 동시에 익힐 수는 없었다. 금황파천신
공은 외부의 힘을 흡수해야만 대성할 수 있는 무공이었기에 천신가의 내공
과 합치시킬 수가 없었던 거였다.
즉, 천신가의 내공을 익히고 있는 자는 익혀봐야 독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금신가의 후예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천무맹의 인물 중에 모든 것을 버릴 만큼 큰 야망
을 가지고 우수한 자질마저 있는 사람을 골랐다. 그리하여 선택된 인물이
바로 백무천이었다.
"천선비도라 알려진 금황비도는 그 아이에 대한 시험이었네."
담운천이 천선비도라는 금황비도를 가지고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비도
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는 와중에 두 맹의 전쟁을 유도하는 것과, 백무천
이 그것을 얻어 금신가의 무공을 수습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금신가의 무공
을 익히게 된다면 계속해서 부려먹으면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
신이 조금 힘들 뿐 변하는 것은 없기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찌하시려고……."
자신도 신가의 무공을 익혔기에 그 가공함을 알고 있다. 오죽했으면 자신
의 성정마저 변해버렸을 것인가. 파천의 힘이었다. 만일 담운천이란 인간을
몰랐다면 자신을 고금제일인으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무공이었다.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물며 백무천은 말할 나위도 없을 터였다.
금신가의 무공을 익힌 상태에서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노
릇인 게다.
"야망이 있는 자는 나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네, 아니면……."
담운천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세가 변했다. 지금껏 폭풍 같은 힘만 내재
하고 있었을 뿐 사물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그 내재된 힘이
살기로 표출되고 있었다.
'크윽!'
노승이 내심으로 비명을 지르며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사신가
의 무공을 대성한 자신도 견딜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것이 천역 두 곳이 합쳐진 힘인가…….'
불연성지와 사극혈지, 두 곳의 힘을 흡수한 담운천의 능력은 이미 노승이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늘 밖의 또 다른 하늘이었다.
"또한 광혈지옥비를 겁낼 이유도 없고."
'내가 사신가의 무공을 대성할 때 두 곳의 힘을 합쳐버렸어. 그래서 혈가
도 두려워하지 않는 게야.'
혈가 때문에 천 년간을 숨죽이며 살아왔던 가문의 후예가, 광혈지옥비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도 확인조차 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자신감이었다. 과거에는 천역의 힘을 얻지 못해서 숨죽이고 살았지만 이제
는 아니라는 것이다. 천역 두 곳의 힘을 합쳐서 과거의 선조들보다 훨씬 강
해진 그였기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해결하도록 해야지,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는 게야
."
"그럼 광혈지옥비의 주인도 그대로 두실 겁니까?"
"그냥 두어도 저절로 전쟁에 참여하게 될 거고, 그러다보면 그 여아와 금
신가의 무공을 익힌 일꾼이 알아서 정리를 할 걸세. 그것만 조금 도와주면
될 것 아닌가."
결국 백산 일행의 산서성행도 순탄한 행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서 그들의 운명이 또다시 결정되
고 있었던 것이다.
"참, 요즘 대초원에서는 연락이 오고 있는가."
"원나라 잔당을 쫓고 있는, 자칭 신(神)이 되어 있는 그자를 말입니까."
"그자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임에도 그 그릇이 너무 커. 계
속 방치하면 우리를 넘보게 될 걸세."
고개를 끄덕이는 담운천의 얼굴에 가벼운 살기가 어렸다. 그동안에는 준비
가 되지 않았기에 다른 자들이 신으로 군림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은 걸리겠
지만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시면 그자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칭 신이라 하는 자는 누구를 말함인가. 중원대륙에서
하늘인 자는 한 명밖에 없다. 그리고 원나라 후예를 정벌하기 위해서 대초
원으로 나가 있는 자는…….
역천(逆天)을 생각하고 있는 자들임에도 그들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욕망의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남에게 맡겨두었던 물건을 찾아오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자칭 신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인간 세상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