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격동(激動)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에 푸른 초목마저도 고개를 숙이는 성하(
盛夏)의 계절 여름.
한줄기 소나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강호무림에는 북풍한설
같은 찬바람이 몰아쳐 댔다.
그 한파(寒波)의 근원지는 섬서성에 있는 화산파와 종남파였다.
예상하고 있던 일임에도 그 예상이 현실로 나타나게되면 곧바로 인정하기
가 쉽지 않은 것인가.
충격, 경악, 공포를 넘어선 침묵.
천마맹의 대대적인 공세는 누구나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
과가 화산파와 종남파 두 곳의 멸망이라는 현실로 다가오자 강호인들이 택
한 대응은 침묵이었다.
두 문파의 멸망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조용한 침묵
속에 천무맹의 대응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피해의 당사자인 천무맹도
여타 강호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천명실.
천무맹의 주요 인물들이 놀라운 표정으로 천명실에 들이닥쳤으나 어느 누
구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팔파의 수뇌들과 무천각을 구성하고 있는 각 세가들의 대표들, 그들 대부
분이 느끼는 감정은 불안과 불신이었다.
과거에 비해 그 위세가 줄었다고 하지만 화산과 종남은 강호무림을 대표하
는 거대문파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거대문파 두 곳이 같은 날 동시에 멸망을 당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본가나 또는 문파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에 승리한다해도 본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동파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들의 불안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감정은 사천공격을 호언했던 화진
악에 대한 불신이었다.
제갈수연이 섬서방어를 주장했을 때는 누구하나 동의하지 않던 이들이 지
금은 맹주에 대해 강한 불신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관조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려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화진악의 사천공격설에 대한 동의는 자신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맹주에 대
한 신뢰감 때문이었다고 입장을 바꾸며, 작전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맹
주에게 떠넘겨버렸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침묵 속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있다.
바로 피해 당사자들인 화산파의 대라운검 권효웅과 종남파의 오뢰검객 추
상효 두 사람이었다.
"설명해 보시오. 맹주!"
권효웅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모든 감정이 죽어버린 까닭이다. 무
려 백년 동안을 천무맹에 협조하고 봉사한 보답이 멸망이었다. 맹주가 화산
파의 속가제자 출신이었고 구파일방에 반하는 정책을 하고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갈수연이 섬서공격을 확신한다고 했을 때 본산으로 돌
아갔어야 했는데도 제갈수연을 제외한 전체적인 의견이 사천으로 확정되었
기에 그에 따랐다.
"화산파와 종남파의 일은 유감입니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화진악이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니 인정하고 나왔다. 그밖에는 뭐라 할말이
없었던 까닭이다.
천밀각은 정보가 차단되어버렸고 자신에게는 확실한 연통이 있었다. 심증
을 믿기보다는 정확한 증거를 믿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전쟁이란 무엇이던가.
단순한 영역다툼이 아니다. 지는 쪽은 강호에서 사라지게 되는 생(生)과
사(死)의 결전인 것이다.
어떤 희생도 없이 전부가 사는 방법은 있을 수 없질 않는가. 어차피 치러
야 할 희생이라면 그 희생이 최소화 되도록 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게
수뇌로의 의무이다. 자신은 그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두 분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저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
니다."
"그럴 말이라고 하는 게요? 화산과 종남의 멸망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뇨.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었다 생각하시오. 천무맹을 위해서? 아니
면 정의 수호? 그 무엇도 아니오. 오직 본산 때문이었소. 그런데 당신의 실
책으로 모든 것을 잃었단 말이오. 책임을 진다 하셨소? 어디 들어봅시다.
어떻게 책임을 지실 건지."
감정이 격해지고 있는지 권효웅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화진악 때문에
이십 년간을 숨죽이고 살아온 화산파였다. 그가 화산의 속가제자만 아니었
던들 이렇게 억울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맹주라 불러줄 수가 없었다. 그는 예전에 화산을 버렸는데
자신들만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권대협, 추대협. 진정하시고 제 말도 좀 들어주십시오. 이 화모가 약속하
리다. 전쟁이 끝나면 최우선적으로 두 문파의 재건을 약속하겠소. 화산은
저의 고향입니다."
가장 버리고자 했던 속가제자란 말까지 언급하며 두 사람을 달래려 했으나
그 말이 권효웅을 더욱더 자극하고 말았다.
"흥! …화산이 고향이라 하였소? 그런 사람이 그렇게 화산을 버리고자 했
소? 그래서 속가제자들을 다 빼간 것이오? 그들만 있었어도 화산과 종남의
멸망은 없었을 것이오. 화산과 종남의 문도 천여 명은 당신이 죽인 것이요.
무능한 당신이 해쳤단 말이오."
결국 권효웅이 이성을 잃고 말았다. 화산과 종남 멸망의 모든 책임을 화진
악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속가제자만 있었더라도 하다못해 섬서분타의 병력만 빼지 않았더라도 최소
한 패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결국 자기 기반을 살리고자 화산과 종남을 버
린 것이다.
"당신은 맹주 자격이 없소. 전쟁수행 능력이 없단 말이오."
"닥치시오. 내가 속가제자들을 빼왔다 하시는 게요. 여기 계신 분들께 한
번 물어보시오. 저들이 왜 천무맹으로 왔는지. 그 대단한 본산을 등지면서
까지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인지."
화진악도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속가제자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도
할말이 많은 사람이다. 본산에 있는 직계제자들은 속가제자들의 설움을 모
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질 않는다.
갓 입문한 제자들이나 익히는 그런 무공을 인심쓰듯 던져주고 황금과 목숨
을 요구한다.
자신의 화씨세가가 그런 가문중의 하나였질 않는가.
섬서성에서 거부로 정평이 나있던 화씨세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것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의 부친은 힘을 갖기
를 원했고 오천맹과 강호패권을 놓고 세력다툼을 벌이던 문파들이 손을 내
밀어왔었다.
섬서와 사천에 있던 문파 중 가장 강했던 화산파를 선택했고 다섯 살 때
입문하여 무공을 배웠다.
십 년.
화산에서 보낸 세월이었다. 어렸을 때는 화산에서 준 무공이 최고인줄 알
았고 열심히 익히기만 하면 일류고수가 될 수 있는 줄 알았기에, 같은 또래
본산 제자들의 천대와 멸시도 견디어냈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화산에서 준 무공은 아무리 극성으로 익혀도 결코 고수가 될 수 없는 것이
었다. 기껏해야 삼류만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하산.
집에 도착해서야 화산파에서 하산시킨 이유를 알았다. 섬서 최고의 부호였
던 화씨세가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부친의 죽음과 함께 산더미
같은 빚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화산에 있었기에 오천맹과 싸우고 있던 화산파에 모든 자금을 대주
었고 그 결과 파산을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묘소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 길
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리고 온갖 고생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천무맹은 누구에게나 평등했소. 본산제자 속가제자가 없었던 말이외다."
언제나 본산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속가제자들, 그들의 입장에서 보
면 모든 것이 동등하게 열려있는 천무맹은 기회의 대지였다. 천무맹으로 입
단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자질과 노력만 있으면 최고가 될 수 있는 그런 곳이 천무맹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구파는 자신들의 행동은 전혀 생각지 않고 모든 책임을 천무맹에
돌리고 있다.
천무맹도 자신들이 창설한 단체가 아니었던가. 오만함이다. 자신들만이 강
호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독선일 뿐이다.
"그러셨구려. 그래서 복수하는 심정으로 화산의 멸망을 방치하셨던 게요?
속이 시원하겠소이다. 속가제자 출신이라는 오명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말이
오."
"갈!"
차앙!
급기야 화진악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고 말았
던 것이다. 이곳이 천명실이고 세가의 대표들과 팔파의 수뇌들이 전부 있다
는 것도 잊었다.
화산파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었던가. 삼류무공 하나를 버리듯 던져주고
부친과 화씨세가를 가져간 그들이 아니던가.
강호의 눈 때문에 파문시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심을 쓴 것처럼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을 버린 그들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
나 오만한 구파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검신이란 칭호를 얻어도, 천무맹
의 맹주가 되었어도 언제나 화산의 속가제자였고 자신들의 아래에 두려했다
.
"이 화진악을 버린 것은 당신들이었어. 섬서의 화씨세가의 몰락과 함께 당
신들이 내쳤다고, 독선으로 가득찬 당신들이 말이야."
사십 년간 묻어두었던 말이다. 구파일방과 돈독한 간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단 한 번도 들먹이지 않았다.
"왜, 그 검으로 찌르시겠소? 그럼 죽여보시오. 밖에 있는 화산의 제자 전
부를 죽여서 복수를 하란 말이오."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극에 달하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말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검신 화진악이 과거 섬서 화씨세가의 후손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왔거니와
화산파와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량수불! 그만하시지요, 두 분. 보기 민망하외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영풍진인이 두 사람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리 주시오, 맹주."
화진악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영풍진인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화산
파에 대한 화진악의 감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지금은 자기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지금 그의 입장은 화진악이란 개인이 아니고 천무맹의 맹주라는 공인이다.
맹주의 입장에서 일을 풀어야 했다.
어찌되었던지 자신은 강자이고 권효웅과 추상효는 약자다. 그들의 입장에
서 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를 못하고 똑같이 이성을 잃고 말았다.
"권대협, 추대협. 지금은 맹주를 탓할 때가 아니라 복수를 논할 때입니다.
"
"복수? 지금 복수라 하셨소. 허허! 정말 우습구려."
권효웅과 추상효의 입에서 비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우리가 필요하신 게요."
"권 대협…."
"관두시오. 복수는 우리가 할 것이오. 십 년이 걸려도 백 년이 걸려도 상
관없소. 화산에 매화가 만발한 이유를 보여 줄 것이오. 반드시."
이곳에 들어와서 울부짖는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본산의 멸망은 바뀌지 않는다.
"군사님. 저의 화산에 신경을 써 주신 것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권 대협. 저의 말대로 피하기만 했어도 그런 피해는…."
"군사님의 말씀을 모르는 바 아니나 다시 그런 일을 당한대도 결과는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그럼."
제갈수연에게 정중한 포권을 취한 두 사람이 천명실을 나서고 있었다.
화진악에게 했던 행동과는 전혀 딴판인 행동이었다. 마치 은인을 대하는
듯한 모양새.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화진악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모든 업무를
각주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고 말았다.
뒤돌아서 천명실을 나가는 화진악의 어깨도 권효웅과 추상효와 같이 힘없
이 늘어져 있었다.
"자! 자! 조금 전의 일은 접어두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합시다. 군사 부탁
하오."
그러나 천명실의 분위기는 쉬이 본래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맹주인 화진
악과 화산파의 갈등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인물들의 갈등이었다.
무천각과 십천각, 그들도 한때는 본산제자와 속가제자의 관계였기 때문이
다.
어색한 긴장감 속에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청성파의 풍뢰검객(風雷劍客) 문
상(汶常)이었다.
"맹주를 저대로 두실 거요?"
그가 화진악의 거취문제를 들고 나왔다. 구대문파에 대한 맹주의 생각을
안 이상 계속 맹주자리에 두는 것이 탐탁지 않음이다. 모든 면에서 공정해
야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어느 한쪽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제대로 일
처리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지금은 맹주의 거취문제를 논할 시기가 아니라 봅니다."
제갈수연이 문상의 말을 받았다. 육파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
은 전쟁의 시기이다. 맹을 혼란에 빠트릴 수는 없는 일이질 않는가. 그것은
육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여기서 논의해야 할 사안은 맹내의 일이 아니고 산서성 전투에 관한 건입
니다. 우리의 운명이 산서성에 달려있습니다. 천마맹을 몰아내고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갈수연의 말이 아닐지라도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생각이다. 이제 화진
악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맹의 모든 결정사항은 이곳에 있는 인물
들의 공동사항으로 수행 될 것이다.
맹주자리가 문제가 아닌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천마맹이나 천무맹이나 가장 중요한 거점이 산서성이 되어버렸다. 산서성
을 완전하게 점령한 곳이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은 산동분타와 제마각을 산서성으로 출병시키고, 호북분타는 맹으로
불러들여야겠습니다."
모든 사항이 제갈수연의 지시로 처리되고 있었다. 이제 여섯 개의 문파만
이 남았지만 그들로서도 제갈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항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화산과 종남의 멸망이 십천각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는 제갈수연의 우려
와는 달리 육파를 더욱더 단합시켜 전쟁에 더욱 적극성을 띠게 하고 있었다
.
두려움이었다. 자신들의 문파도 멸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더욱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궁세가 가주 주변의 병력을 증원시켜 주십시오. 증원병력은 새
로 영입된 인물들로 해 주시고요."
"그들을 믿을 수 있겠소?"
"그래서 그 쪽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맹의 방어나 중요한 전투를
맡길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팔극도룡의 쾌거를 듣고 천무맹으로 입단했던 인물들을 두고 말함이다.
어차피 명성을 찾아온 사람들이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들이다. 진정
한 천무맹의 인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들은 나중에 변수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백산 일행이 있는 곳에 강호의 떠돌이 무사들을
보내면서 변수라 하고 있다.
"상황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금일 천명실의 회의, 화산과 종남의 멸망은 맹주인 화진악의 입지를 약화
시켰고 제갈세가는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 * *
"남궁세가는 과거 우리의 동맹이었다."
손녀딸이 너무 급하게 몰아치는 것 같았음인지 제갈장령의 얼굴에 우려의
표정이 서렸다.
천마맹이야 없애야될 적이지만 남궁세가와 팽가는 과거의 동지였다.
그들을 뛰어넘고 싶어했지만 적으로 만들면서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
갈수연의 생각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고 있는 것 같
아서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남궁지우 그분
의 강호행은 그저 유람이 목적인 것도 알고요. 하지만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가 건재하는 한 제갈세가는 맹주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맹주인 화진악이 속가제자라는 부담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것과 마찬가
지로 제갈세가도 같은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제갈세가가 천하를 지배해도, 남궁세가나 팽가가 건재해 있다면 언제나 그
들보다 아래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강호인들은 그리 생각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완전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고리 같은 것
은 잘라내야 하고 동정이나 연민도 버려야한다.
철혈(鐵血)의 피만이 최고가 될 수 있음이다.
"남궁세가와 팽가는 이미 연결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두 가문이 벌써 연합을 했다니."
"그 일행의 대장으로 있는 자가 천하제일도였던 팽무도의 제자였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지금 팽무도가 살아있다고 했더냐?"
제갈장령이 격정에 찬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큰아들과 같이 백살
대에 있었던 인물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음모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을 구
해주지 못했고 가문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식의 죄를 인정하고 말았다.
먼저 보낸 자식을 추억하며 오십 년을 보냈다. 지금도 밝혀지지 않는 오십
년 전의 비밀, 그 비밀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자식
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생겼음이다.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느냐?"
팽무도를 만나보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야 사건의 내막에 대해서 모르겠지
만 피해당사자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오십 년 전의 일입니다. 큰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셨고요."
질책 어린 목소리였다. 제갈세가의 영광을 위해서 더 이상 들춰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랬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제갈장령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오십 년 전의 일이라며 손녀딸이 침묵을
요구하고 있다.
굳이 과거 일을 꺼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자식의 죽음까지 묵과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가문이 최고가 되기 위해 비상
하려는 시점이다.
과거에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침묵해야 했고 이제는 최고가 되기 위해서
침묵해야만 된다.
'용아….'
제갈용.
큰아들의 이름이다. 제갈세가 역사상 최고의 무재였던 큰아들이었다.
음모에 의해서,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큰아들을 위
해서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
그런데 손녀딸은 또다시 음모에 의해서 두 가문을 몰락시키려 하고 있다.
천하를 움켜쥐었던 인물인데 손녀딸의 심중을 왜 모르겠는가.
새로 들어온 이백여 명의 무림인들, 그들 중 몇 명이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남궁가주 일행을 강호 공적으로 만드는데 증인이 될 것이다.
천무맹인물들이 강호공적이라 하면 불신하는 강호인들이 있을 지도 모르지
만 일반 무림인들이 그들의 공적질을 이야기하면 모두가 믿을 것이다. 제갈
수연의 노림 수가 여기에 있었다.
"네가 현 가주니까 다른 말은 하지 않으마. 단지 넘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할아버지는 무천각을 준비시켜
주십시오. 출병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패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제갈장령의 물음에 제갈수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 손녀딸이지만 무섭구나….'
이번에 출병하는 제마각과 각분타와의 연합세력이 천마맹에 패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일을 진행
하는 손녀딸의 독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화인걸은 패하게 하고 무천각이 승리를 거머쥠으로서 맹주를 실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맹주의 권력을 제갈세가로 이양을 받으려는
심산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제마각이 출병한 후에 논의하기로 하지요."
손녀딸을 응시하던 제갈장령이 힘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모든 것이 가문을 위해서입니다. 더이상 제갈세가 위에 아무
것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산서성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입니다. 산서성
에서, 맹주도 천마맹도 전부 말입니다….'
* * *
삼문협(三門峽).
하남성과 산서성의 경계부인 황하 중류에 있는 협곡을 일컫는 말이다. 폭
이 사십 장에, 길이는 약 백 장 정도로 중간에 있는 신문도(神門島)와 귀문
도(鬼門島)에 의해서 강물이 삼분되는 곳이라 하여 삼문협이라 불린다.
소림사를 떠난 백산일행이 산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삼문협에 도착했다
.
거의 한 달여 간의 여정동안 별다른 사고도 없었고 양 맹의 공격도 없었기
에 평온한 신색으로 여행을 즐겼다. 단 두 사람 백산과 조천영을 제외하고
는….
이제 임신 팔 개월이 된 조천영의 배가 동산같이 솟아 있었던 것이다. 찌
는 듯한 삼복더위에 정상적인 사람도 몸을 가누기 힘든 판국인데 배까지 불
러있으니 그 고초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만해요, 백랑!"
"왜, 추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도 땀이 식혀지지 않을 판인데
춥냐고 묻고 있다니. 그러나 백산이 묻는 말의 의미는 금방 밝혀졌다.
빙천비(氷天匕).
백산의 손끝에 빼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비수하나. 빙천비에서 찬 기운
이 밀려나오며 마차 안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을 출발하면서부터 계속해서 하고 있는 일이었다. 배가 불러온 조천영
이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자 그때부터 자신의 내공을 이용하여 마
차 안에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얼려서 마차에 두라 하여도 마누라가 고생하고 있는데 저만 편하자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백산의 대답이었다.
"아니에요. 백랑이 피곤하잖아요."
조천영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자신이 정상적인 여자였더라면 남편
되는 사람을 이리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이럴 때 써먹으려 무공을 익힌 거지."
언제나 이랬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씨. 복수를 위해서 무공을 익혔지
만 이제는 그 의미자체도 사라져버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라
도 무공을 버릴 사람이기에 더욱더 고마움이 앞섰다.
자신들의 행복 이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
"오라버니. 우리가 어깨 주물러 줄까?"
냉추렴과 구소운이 소반하나를 받쳐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 덮지?"
"응."
무공의 고수인 그녀들이 더워봐야 얼마나 덥겠는가. 백산만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하지만 하루종일 내공을 밀어내고 있는데 몸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 운공을 하는 회수가 부쩍 잦아진 것만 보아
도 알 수 있다.
거의 운기행공 같은 것을 하지 않는 백산이었지만 소림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의 운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잠자는 것도 거의 보지 못했다. 운기를 할 때를 빼곤 거의 하루종일
이러고 있는 것이다.
"아!"
순간 조천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누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영감 불러올까?"
조천영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란 백산이 조천영의 표정을 살피며 허둥거렸
다.
"아니에요."
조천영이 고개를 흔들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 좀…."
"왜요?"
"아기가 발길질을 해요."
얼굴을 붉힌 조천영이 백산의 귓가에 살짝 이야기를 했다. 신비로운 경험
이었다. 두 사람의 결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정말?"
백산에게 살짝 이야기를 한다고 했지만 모두 들었는지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어디! 나도! 나도!"
세 사람이 누구 할 것 없이 서로의 손을 조천영의 배에 가져다 대고는 긴
장된 표정을 지었다.
툭! 툭!
미약했지만 꿈틀거리는 느낌이 손바닥 가득 전해졌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
며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느낌이 밀려왔다. 생명의 신비로움에 대한 감동이
었다.
"찬다! 정말 발길질을 한다고. 프! 하하하! 정말이야 이 녀석이 찬다고."
"오라버니 뭐해요! 마차가 더워지는데!"
냉추렴이 조천영의 배를 만지며 소리를 질렀다. 새로운 신비를 접한 백산
이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조천영의 뱃속에서 느껴지는 태아의 움직임은 세 사람에 있어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남의 아이도 아니도 자신들의 아이가 아니던가.
"참! 언니 약."
태아의 움직임에 정신을 팔고 있느라 잊고 있었던 약을 내밀었다. 백산이
소림사에서 강탈했던 대환단, 무림인이 복용하면 이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천고의 영약이 산모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보약으로 쓰이고 있었다
.
너무 강한 약효 때문에 한꺼번에 복용을 시키지 못하고 조금씩 나눠서 다
른 약재와 섞어 먹이고 있는 것이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 보았다면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이미 백산의 사고
방식에 면역이 되어버린 일행은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보기 좋군요."
흐뭇한 표정으로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 있는 인물들, 광견
조와 석두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었다.
그들 중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남궁세우였다. 무너진 가문의 가주로서
가정을 전혀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바랄게 없다는 것은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이거든."
갈태독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맺혔다. 자신이 백 오십이나 되어서야 깨
달은 무욕의 삶이다.
명예도 권력도 탐하지 않고 세상에 바라지도 않는 삶, 가진 것에 만족하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그런 삶, 인간이면 누구나 꿈꾸는 삶이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던가.
그런데 저기 있는 녀석들은 그리 살고 있다. 자신들만 건들이지 않으면 누
가 어떻게 살던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무공을 익히는 데도 특별한 목적이
없다. 단지 힘이 없어서 설움 받지 않겠다는 한가지와 삶을 편하게 해준다
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갈태독의 인상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저들끼리 박투 비무를 하고 있던 광견조원들 중 소살우란 놈이 자신에게
비척비척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어…."
"말해라. 네놈이 언제 말 가렸다고 망설이는 게냐?"
"영감… 혹시 빙공(氷功) 아는 것 있소?"
"빙공은 왜?"
"그런 것 묻지 말고 있소 없소."
"이유를 알아야 가르쳐주든지 할 것 아냐."
이미 소살우가 묻는 의미를 알고 있는 갈태독이었지만 하는 양을 좀더 지
켜보고자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자기들 딴에는 백산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언젠가 자신
들도 장가를 갈 테고 마누라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써먹으려 빙공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럼 겨울에 애를 낳게되면 어쩔래?"
"겨울? 그건…."
소살우가 말끝을 흐렸다. 겨울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형수인 조천영
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빙공의 필요성만 인식했던 거였다.
"그럼 화공(火功)도 같이 배워야 되나…?"
"이놈아 천영이는 몸이 약해서 그런 것이고 보통은 그냥 낳는 게 가장 좋
은 게야. 그래야 애도 튼튼하고."
"그런 거였소? 그럼 그 소환단인가 하는 것도 영감이 다려줄 거요?"
"그것은 너희들 먹으라고 준 것 아냐?"
대환단이면 충분하다는 갈태독의 말에 소환단은 비상시에 쓰라며 광견조에
게 주었었다.
대환단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소환단도 복용하면 이십 년의 공력을 얻게
되는 영약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장가도 안 간 놈들이 그것마저도 제 자
식들을 위해서 쓰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약 먹어서 뭐하게."
"그래, 알았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고 장가부터 가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해 주겠다고 말해 버린다. 괜스레 이러니 저러
니 해 봐야 말싸움만 하게 될 것이고, 이놈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 해 봐야
자신의 염장 지르는 소리밖에 없으니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
이었다.
"고맙소.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 기억이 안 난다거나 그런 소리하지 마쇼."
"크윽!"
결국 염장을 지르고서야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갈태독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이미 가버린 놈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혼자 삭일 수밖에 없었
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머지 일행의 얼굴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백 오십 나이의 노인에게 노망들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왜 표정들이 그 모양이냐."
"아, 아닙니다, 어르신. 그나저나 산서성에서 겪을 일이 걱정이군요."
갈태독의 시선을 받자 재빨리 표정을 바꾼 서문천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계속해서 소살우를 생각하고 있으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산서성에 대한 우려의 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산
서성은 양맹의 최대 격전지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다.
산서성을 장악한 쪽이 이번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기에. 그런데 자신들은
가장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움직이고 있다.
백산은 산서성을 피해서 가자 했지만 서문천과 석숭의 생각은 아니었다.
두 맹의 격전지로 들어가게 되면 그 만큼 자신들에 대한 관심이 분산되리
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서 백산 일행을 노리던 적
들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더이상 하남성에 머물 수도 없는 입장이고요."
석숭도 서문천의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질 않는가.
섬서성이 천마맹의 수준에 떨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천마맹에서 언제든지 암살조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
라리 탁 트인 곳에서라면 적의 암습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객잔 같은
곳에서는 그것도 여의치 않다.
그리고 하남성을 빨리 떠나야할 가장 큰 이유가 조천영 때문이었다. 임신
팔 개월. 산달이 되기 전에 북경에 도착하고자 했기에 서둘러서 출발한 것
이다.
"그런데 광천뢰는 누가 훔쳐간 것일까요."
"글쎄요. 환상미로진이 천고의 절진은 아니지만 아무나 파훼할 수 있는 그
런 진식은 아닌데…."
백산일행을 당혹스럽게 한 이유중의 하나가 광천뢰의 분실이었다.
일행이 소림사를 떠나고 보름정도 지난 후에야 광천뢰가 사라진 것을 알았
다.
석두가 거의 죽었다 생각하고 백산에게 보고를 했으나 백산의 표정은 의외
로 담담했다.
화를 내고 싶어도 조천영의 더위를 식히느라 내공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움
직이지 못한 이유도 있었고 아비 될 사람이 화를 내면 태교에 좋지 않다는
갈태독의 말에 무사히 넘어갔던 것이다.
그나마 소림사에 들어갈 때 광견조에게 두개씩 들려보낸 것이 남아있었기
에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야! 저 철대가리 잡아."
그때 광견조원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며 마차 쪽을 향해서 움직이는 스님을
잡기 위해 뛰어가고 있었다.
요몽.
갈태독이 데려온 각인대사의 제자인 그가 일행 중 가장 애물단지였다.
어린애 수준의 지능에 세상의 첫 나들이다 보니 건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
거기다 광천뢰를 잃어버린 것이 소림사 때문이라 생각한 백산이 자신들의
근처에 요몽이 다가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기에 광견조가 그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행 중 요몽에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들은 조천영을 비롯한 여인네
들이었다. 모성애의 발로인지는 모르지만 백산과 광견조원들에게 구박받는
요몽을 달래다보니 그녀들을 가장 잘 따랐고 지금처럼 마차밖에 여자들이
아무도 없으면 불안한 표정으로 마차 쪽으로 움직이려하는 것이다.
"요몽스님은 치료 효과가 있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네. 다만 태어날 때부터 백치는 아니었단 것만 알 수 있
을 뿐."
의원으로서의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요몽의 상태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모
르지만 치료해보기로 했고, 그의 상태를 진찰한 갈태독이 내린 결론이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치료는 가능할 게야."
"과거가 평탄한 사람이면 좋겠군요."
어둡고 힘든 과거라면 차라리 지금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되찾
게되면 지금의 저런 상황은 꿈이 될 것이다. 다시 고달픈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후일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게야."
백산일행이 되면서 터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
해서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 영반. 백산 저 녀석의 사부에게 연락한 것은 어찌되었나."
"예. 지금쯤 그곳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미리 출발했는지도 모르지
요."
산서성으로 움직일 것을 결정할 때 내린 결론이다. 광천뢰도 몇 개 없이
이십여 명의 인원으로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을 통과하는데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빨리 와야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