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화산가(華山歌)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이다. 도대체가 만족이란 것을 모른다.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조금이라도 가지기를 원하지만, 조금 가지게 되면 또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고, 더 이상 가질 게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끊
임없이 뭔가를 원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은 원하는 게 없을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도 원하는 게
있다.
권력(勸力)과 역사(歷史).
남의 것을 그냥 가져가도 그 정당성(正當性)이 인정되는 권력과 후대사람
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역사를 조정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다 가진 자들이 원하는 마지막 목표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가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많은데 나눌 수가 없다
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 내 것이 되는 것이 인간세상이질 않던가.
전쟁이 있고 음모가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자들인 천무맹과 천마맹의
수뇌들, 그들이 역사를 움켜쥐기 위해서 벌이는 욕망의 축제가 강호무림에
서 진행되고 있는 양 맹간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율배반적인 현실은 가진 자들의 욕망의 축제를 대신하는 자
들이 못 가진 자들이란 점이다.
인간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 아니면 역사가 원래 그런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이 세상은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
천무맹의 신룡각이 흑사파와 암천회를 멸망시키면서 촉발된 확전의 양상은
강호상에 흉흉한 소문과 갖가지 억측을 만들어냈고 그것들 중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는 소문의 하나가 바로 천마맹의 대대적인 공격설이었다.
패천마궁(覇天魔宮)이 있는 청해(靑海)로부터 사천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무림인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천마맹의 반격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에 발맞춰 중원 각처로부터, 많은
이름 없는 무인들이 사천성을 향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 구파일방 중 세 개 문파가 있는 점창산(點蒼山),
청성산(靑城山), 아미산(峨嵋山)이었다.
가진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 * *
청해(靑海).
마도 제 이의 세력인 패천마궁이 있는 곳.
이곳에도 역사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자가 있다.
철목승을 제외한 상대가 없다고 알려져 있는 패천마궁의 궁주 파뢰권마(破
雷拳魔) 패무극(覇武克)이 연무장에 모여있는 수백의 궁도들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제군들이여! 마도의 형제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정파 위선자들에 의해
서 죽임을 당했다. 우리가 누구이던가, 마도 제일인 패천마궁이 아닌가. 그
런 우리가 형제의 죽음에 침묵해야하는가, 이곳에서 몸을 움츠리고 숨어있
어야 하는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마도인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
어야 한다. 위선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제군들은 마
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루는데 선봉이 되고 싶지 않은가!"
수백의 인물들이 모여있음에도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인물들
의 눈빛에 담겨있는 것은 영웅이 되겠다는 열망뿐이었다. 마도천하를 이루
겠다는 영웅의 꿈만이 흐르고 있었다.
"마도천하의 선봉은 우리 패천마궁이 서야한다. 그것이 마도제일궁인 패천
마궁의 의무다. 나와 같이 하겠는가! …마도의 영광을 이룩하고 싶은 자는
외쳐라! 마도천하!"
"마도천하!"
"마도천하!"
"마도천하!"
수백의 인물들이 외쳐대는 외침소리와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사방을 가
득 채웠다.
천하를 지배하고자 하는 열망만 있었고 지금 이 전쟁에서 자신이 죽을 수
도 있다는 걱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결같이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마도천하를 이룩한 영웅으로, 만
인 위에 우뚝 서 있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가라! 가서 마도인의 혼(魂)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어라!"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의 목표는 섬서성(陝西省), 구파일방 중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곳이
다.
"제 일진은 나를 따르라!"
"제 이진은 나를 따르라!"
"제 삼진은…!"
"……."
"……."
마도천하란 한마디를 남기고 칠백여 명의 궁도들이 패천마궁을 빠져나갔다
.
"서둘러서 움직여라! 다른 곳에 선수를 내줄 수는 없다. 우리 혈마궁(血魔
宮) 이 선봉에 서야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감숙성의 혈마궁, 산서의 나찰마궁, 그리고 서안의 철
마궁에서도 그들의 최 정예 병력이 섬서성을 향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잔인한 여름의 시작이었다.
* * *
청해성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있는 파안객납산(巴顔喀拉山).
삼백 명 정도의 인물들이 굳은 표정으로 전방에 있는 한 인물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바로 황하가 시작되는 곳이다. 너
희가 도망쳤던 그곳으로 흘러가는 물이다."
가슴에 백색으로 패(覇)자가 쓰여진 흑의를 입고 있는 오십대의 인물, 패
천마궁의 무공교두인 광섬도(光閃刀) 단적(旦赤)이란 자였다.
경건한 의식을 행하듯 수하들에게 일일이 물을 한잔씩 건네는 단적의 표정
에는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명심하라. 우리의 목표는 적의 교란이지 점령이 아니다. 함부로 움직여
작전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네, 교두님!"
천무맹의 이목을 사천성에 묶어두기 위해서 구성된 결사대.
이들의 활약에 따라서 섬서성 점령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한가지만 명심해라. 생존의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말아라. 절대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결사대, 구성원 삼백. 자신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원한 병사들이
다.
마인(魔人)의 자식으로 태어나 정파인에 의해서 멸망했던 이름 없는 무가
의 후예들과 민초의 자식들.
평화의 시대 속에 마정불가침협정(魔正不可侵協定)이란 협약에 의해 묻혀
버린 조그마한 사건사고의 피해자들이었다.
서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이익과 상관없는 사고나 조그마한 마
을에서 일어난 사소한 분쟁은 아예 무시를 해버렸기에 집안이 멸망하고 부
모가 죽임을 당했지만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마도인들을 위한다는 천마맹에 신고를 해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를 못
했고 그들을 위한 어떠한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다.
때문에 스스로 복수의 방법을 찾아야했다. 정도니 마도니 하는 것은 배부
른 자들의 소리일 뿐이고 단지 부모님과 가족들의 복수할 기회가 생겼기에
마도천하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평범하게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출발하자!"
자신이 무공을 가르쳤기에 거의가 안면이 있는 얼굴이다. 부하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 두고 싶어서였다.
"교두님! 부디 보중하십시오."
삼백의 인영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마지막 하직 인사와 함께 사천
성으로 몸을 날려 멀어져갔다.
'부디 살아나라.'
부질없는 바람인 줄 알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고 싶었다.
자신들의 임무, 천마맹의 본진 세력 중 한곳이 발각된 것처럼 해야한다.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일부러 흔적을 보여서라도 싸워야 될 입장이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 피하는 것은 있어도 살기 위한 도주는 없다.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워야한다. 삼일, 자신들이 벌어야 할
시간이다.
마도천하가 이루어진들 누가 이들을 기억해줄 것인가. 수많은 전사자들 중
한 명으로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자신은 마도를 선택했고 천마맹의 구성원이 되었기에 미련이 없다지만 저
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저들을 사지로 보낸 자는 천마맹이 아니었다. 저들에게 복수할 수 있
도록 힘을 준 자신이었다. 무공을 가르쳐준 자신.
"맹에 마지막 전서를 보내라. 부디 마도천하를 이루길 바란다고. 출발한다
!"
광섬도 단적과 남아있던 백 명의 수하들이 움직이고 있는 곳, 점창산 방향
이었다.
* * *
화산(華山).
중원 오악 중 서악(西嶽)에 해당하는 산.
진령산맥의 북쪽지맥을 동서를 가로질러 달리고, 화산의 서쪽에 소화산이
있기에 이를 구분하여 태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손정(山蓀亭), 도림평(桃林坪), 희이갑(希夷匣), 사몽평(莎夢萍), 회심
석(回心石), 선인봉(仙人峰), 낙안봉(落雁峰), 연화봉(蓮花峰) 등 수많은
전설을 안고 있는 절지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루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절지가 존재하는 곳임에도 화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명승 유적이 아니다. 오악검파(五嶽劒派)의 수장
으로 알려진 무림의 문파인 화산파이다.
화산파(華山派).
화산의 정기를 배경 삼아 각 봉우리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던 세력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하나의 문파로 성장한 곳으로 연
화봉 정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검종과 기종 등 여러 가지 계파가 이어지고 있으나 그 중 검에 대한 것이
가장 주류를 이루고 검법에 관한 한 무당파와 쌍벽을 이룬다 할 정도로 독
보적인 곳이 또한 화산파이다.
그러나 현세에 와서는 화산파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서 많이 격하되었다.
속가제자 출신인 천무맹의 맹주 화진악이 구대문파로부터 독립적인 움직임
을 보이면서 대부분의 속가제자들이 천무맹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 화산파에 침침한 어둠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자하각(紫霞閣).
화산파 문주인 오악검제(五嶽劍帝) 악무위(岳茂衛)의 거처.
사경이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진 실내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천마맹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역 두곳 중 한곳이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악무위를 비롯한 수뇌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사실은 천무맹에서
온 두 장의 전서구였다.
"조장로의 의견은 제갈군사의 말에 따라 본산을 비우자는 말씀이시오?"
천무맹의 군사인 제갈수연으로부터 온 비밀전서, 천마맹의 공격목표는 맹
주가 언급한 사천보다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섬서성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쓰여있었다.
아울러 대항보다는 피하는 것을 고려해보라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제갈수연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선 이가 바로 수석장로인 연화검(蓮花劍)
조인상(趙仁相)이었다.
패천마궁 정도면 화산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지만 철마궁이나 혈마궁 중
한 곳만 가세하게되면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천무맹에서는 사천성에 전력을 집중할 뿐 섬서성은 안중에도 두
지 않고 있다.
"이곳은 우리 집입니다. 집을 비워두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지켜야지요
!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제일 장로인 단천검(斷天劍) 민요(閔堯)와 대부분의 화산문인들의 주장이
었다.
정파 최고문파인 대 화산이 마세의 침략이 무서워서 도망을 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설령 싸움을 피해서 화산의 모든 것이 보존된다 할지라도 강호인들의 비난
을 어떻게 감당하며 후대에 뭐라고 전해질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민장로의 말씀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봉문으로 끝날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패하게 되면 바로 멸문(滅門
)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물러서자는 것이고요."
강호가 존재하면서 수많은 분쟁이 있어왔고 그 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
었다.
그때는 승자도 너그러웠다. 자신들이 점령한 문파나 세가들이 강호활동을
금(禁)하고 봉문을 선택하면 그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짓곤 했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오십 년 전의 오천맹의 봉문이 그랬지 않았던가.
물론 오천맹의 힘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천무맹이나 천마맹도 불필요
한 희생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천무맹이 흑사파와 암천회를 칠 때 보
여준 잔혹성 때문이었다.
다시는 강호에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을 시켜버렸다.
천무맹에서 먼저 시작했는데 천마맹도 당연히 그렇게 나올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싸워서 물리쳐야지요. 우리 화산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천무맹
에 확실히 인식시켜야 합니다. 감히 속가제자가 본산을 버렸습니다. 분하지
도 않습니까?"
화산파의 수뇌부가 가지고 있는 천무맹주 화진악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가 화산파를 등짐으로 해서 수많은 속가제자들이 떠났고 그 결과 화산의
전력약화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파일방이라는 공동체의식 때문에 천무맹에 협조하고
있었는데 또다시 배신을 한 셈이다.
"문주님! 종만리입니다."
격렬한 토론의 와중에 밖으로부터 악무위를 찾는 음성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이곳에는 접근하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양오검(養吾劍) 종만리(宗萬里), 이대제자로 화산오검수가 실종된 이후 매
화검수의 수좌를 맡고있는 인물이었다.
"저희도 현 사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최종적
인 의견을 아뢰고자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뒤숭숭한 가운데 벌써 이틀동안이나 명분과 실리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수
뇌부의 심정을 제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후기지수 중 가장 위라 할 수
있는 매화검수들이 나서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모은 것이다.
"그래? 좋다. 너희들의 의견은 무엇이더냐."
구파일방 중 문주의 권위가 가장 강한 화산파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자들은 문주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이 화산파의 문규다. 제
자들의 의견이 있을 수 없음이다.
그런 문규를 어긴 제자에게 문주가 수합된 의견을 묻고 있었다.
목전의 상황이 그만큼 다급해졌음이다.
"저희 매화검수를 비롯한 이대, 삼대, 사대 제자들은 자랑스런 화산문인으
로 남고 싶다는 것입니다."
종만리의 얼굴에 비장감이 흘렀다. 치욕스런 삶은 싫다는 것이다. 비록 멸
망할지언정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으음! …제자들의 마음은 알았다. 그만 물러가라!"
"네! 문주님."
"종만리! …고맙다."
돌아나가는 종만리를 불러 세운 악무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큰짐을 덜었다는 표정이었다.
저러한 제자들이 있는 한 멸망을 당한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화
산은 강호제일의 화산일 뿐이다.
"결정사항을 전달하겠소. 화산파는 앞으로도 강호제일의 문파로 남을 것이
오."
천마맹과 전쟁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불리한 전쟁이었기에 망설임도 없
지 않았다. 자신들이야 살만큼 살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아니던가.
그런 악무위의 고민을 종만리가 전부 해소시켜주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모든 비전을 소요동(逍遙洞)으로 옮기고 무공이
없는 이들은 피신을 시키시오. 아울러 현 시각으로 동매령(冬梅令)을 발동
하오."
"알겠습니다. 문주님!"
십여 명의 인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문주령(門主令)을 받았다.
동매령(冬梅令).
멸문위기에 준 하는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지고 지엄한 문주령이다.
동매령이 발동되면 자하각 오층에 있는 천매정(天梅鼎)에 불길이 솟아오르
고 기이한 소성이 화산을 뒤덮는다.
화산의 곳곳에 은거해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모든 제자들을 소환하는 소
집령이다.
문주령이 하달되었다. 더 이상의 토론이나 의견교환이 있을 수가 없다. 이
제는 행동만이 남았을 뿐이다.
고오오! 고오오!
기이한 음향이 화산전역으로 울려 퍼지며 그 동안 금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자하각 오층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쌓여있는 목재부스러기를 다 태우자 이윽고 드러나는 거대한 동체,
붉게 달궈져 자하각 오층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매화모양의 향로였다.
동매령이 발휘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천매정, 그 천매정의 불길과 함께 영
내에 있는 화산파 제자들이 상궁(上宮)앞의 대 연무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
* * *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벌써 많은 격전을 치렀는지 입고 있던 검은 의복은 이미 넝마가 되었고 몸
의 이곳 저곳에서 새빨간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점창파(點蒼派)를 교란하기 위해서 떠났던 백 명의 결사대 중 이인, 광섬
도 단적과 그의 수하 한 명이었다.
벌써 삼일 째 쫓기고 있었다.
흔적을 만들어 일부러 발각된 후부터 계속해서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 언제부터 부하들과 헤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점창산은 정파인들에 의
해서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었다. 굳이 빠져나갈 이유도 없지만 가자고 한다
해도 방법이 없다.
지금처럼 점창산을 헤매다 죽어갈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이 자신들의 임
무이기에.
"여기… 컥!"
무림인 한 명이 단적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다 그대로 목이 떨어졌다.
쓸데없는 허영심에 이곳으로 온 무사들 중 하나이리라.
지금껏 이곳까지 오면서 두 사람이 겪은 자들은 점창파의 제자들보다 소속
이 불분명한 인물들이 더 많았다.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이곳을 찾은 자들,
어쩌다 자신들의 목이라도 베면 그것을 발판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한다. 저 위쪽에 가진 자들이 벌이는 꼭두각시
놀음의 결과로 그 명성을 얻는다는 것을….
"저곳에서 좀 쉬었다 가자."
그들이 달리고 있는 전방에 커다란 바위틈이 보였다.
"몇 살인가?"
모두 흩어지는 순간부터 자신 옆에 있었던 외팔이 청년, 아직 젖살도 빠지
지 않은 얼굴의 어린애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어리게 보였다. 무공을 가르치고 파안객납산에서 물잔
을 돌릴 때만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열여덟입니다."
"왜 자원했나. 본대를 따라갔으면 이렇게 죽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결사대에 자원한 동
기가 궁금했다.
"이것 때문이죠."
소매밖에 없는 왼팔을 들어 보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가진 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모든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해보았다는 만족의
미소,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열 여덟 살의 어린애가….
"제 고향이 이곳입니다."
평범한 화전민 아들이었다. 가난했지만 단란한 가족이었다.
그들 가족에 불행이 닥친 것은 약초를 채집하시던 아버지가 동자삼 하나를
발견하면서였다.
무인들이 원하는 영약 중의 하나라 생각한 아버지가 그것을 팔기 위해 점
창파를 방문했고 입구에 있던 경비무사에게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사람
을 따로 보내겠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마음도 있었으나 명문정파 사람들인
데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밤 일이 터졌다.
경비를 서던 두 사람이 자신의 집을 덮친 것이다.
부모님과 누나 둘은 그 자리에서 죽고 자신만 왼팔이 잘린 채 도망을 쳤다
.
"놈들을 죽일 만큼 죽였습니다. 더 이상 미련은 없습니다."
결사대로 자원한 모든 병사들이 다 이럴 것이다.
그들이 싸우는 목적은 마도천하라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신념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바뀐다하여 달라질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누가 쥐고 있던지 주인이 누구이던지 저 밑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
는 민초들의 삶은 변화가 없다.
신념(信念)이니 이상(理想)이니 하는 것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그래도 살수 있으면 살아남아라."
부질없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죽을 것임을 알기에 이름도
묻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가자. 또 움직여야지."
"대몽(大夢)입니다. 큰 꿈이란 뜻이라 하더군요."
"그래… 대몽. 이름이 좋구나."
"저기다! 마도의 악졸들이 저기 있다."
바위틈에서 몸을 빼는 순간 적들에게 발각되었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자
신들을 향해서 쏘아져오고 있었다.
"가라!"
"교두님!"
"최선을 다해 보아라."
조금의 시간이라도 주고 싶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나겠습니다. 그럼."
"자! 와라! 내가 바로 광섬도 단적이다."
멀어지는 대몽이란 소년을 쳐다보던 단적이 십여 명의 무림인들 사이로 몸
을 날렸다.
어깨를 향해 찔러오는 검을 피하며 목을 쳐낸다. 얼굴로 상대의 피가 쏟아
지고 있으나 피하고 싶지가 않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앞으로 몸을
굴리며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두 다리를 잘라낸다.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듯 쓰러지는 놈의 얼굴에 왼손 정권을 박아 넣는다.
결사대의 지휘를 자원한 이유는 무엇이던가. 무인이기 때문이었나? 아니면
마도인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단지 죽음을 향해
길을 떠나는 제자들이 불쌍했을 뿐이다.
앞쪽에서 또 다른 검이 달려들고 있다. 피할 시간이 없다. 검을 향해서 왼
쪽 어깨를 들이밀고 득의해 하는 놈의 허리를 베어버린다.
우리를 죽이려 하는 놈들도 정의수호니 하는 사명감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명성를 원할 뿐이다.
왼쪽 팔로 섬뜩한 기운이 다가온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팔 하나,
많이 본 것처럼 눈에 익은 팔인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다.
저 멀리서 대몽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차라리 옆에 둘 것을, 그랬으면
외롭지나 않았을 것을, 아니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았을 것을….
괜스레 후회가 밀려온다.
또다시 한 놈이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온다. 너무 느리게 보인다. 그 정
도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 놈의 목을 향해 힘껏 도를 날렸다.
잘려야 될 놈의 목은 그대로 있고 가슴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놈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외치고 있다.
"내가 단적을 잡았다. 광섬도 단적을 죽였다고…."
거칠게 검이 빠져나가자 심장으로부터 피가 쏟아지며 단적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모두 다 죽었다. 두 팔이 잘린 단적을 마지막으로 점창파를 공격했던 결사
대 백 명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무런 신념도 없었던 그들, 빌어먹을 삶에 대한 그들의 투쟁은 죽음이었
다.
* * *
그러나 여기 신념을 위해 칼을 뽑은 자들이 있었다. 자신의 집을 지키겠다
는 의지와 화산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다는 신념.
"위대한 화산의 제자들이여. 오늘밤 화산의 매화는 피에 젖을 것이다. 적
의 피가 아닌 여러분과 나의 피가 이곳에 뿌려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운
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파 제일문인 화산파이고 바로 이곳이 여러
분과 내가 묻혀야 할 장소이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상궁 앞의 대 연무장, 수백의 화산문도들이 비장한 얼굴로 악무
위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있었다.
"화산의 매화를 피우기 위해서 수많은 선영들이 피를 흘렸다. 오늘은 우리
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나 악무위는 매화를 피우기 위해 살과 피를 바쳐
화산의 양분이 될 것이다. 화산인이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늘 우
리의 죽음은 더 강한 매화를 피우기 위한 진통일 뿐이다."
텅!
검을 뽑아든 악무위의 검집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내일이란 말의 의미가
사라지는,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는 소리.
툭! 텅! 텅!
여기저기에서 검집 떨어지는 소리와 나지막한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
작했다.
1매화(梅花)가 열렸네.
사방 가득 매화가 피었네.
화산의 매화는 매화가 아니라네,
피와 살로 피어나는 혈매화(血梅花)라네.
고오오! 고오오!
내 피는 수액이 되네.
내 살은 뿌리가 되네.
화려한 혈매화로 다시 산다네.
화산이 화산인 이유는 혈매화 때문이네.
혈매화가 없으면 화산도 없다네.
고오오! 고오오!
우리는 혈매화를 피울 것이네.
피와 살로 더 붉게 피울 것이네.
천년만년 피울 것이네.
혈매화여 영원 하라.
화산이여 영원 하라.
고오오! 고오오!
구슬픈 천매정의 울음소리가 장단이 되고 모든 제자들이 화산가를 부르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혈매화를 피울 자리를 찾아 천천히 걷고 있었다.
'화산이여, 영원 하라! 화산이여, 영원 하라!'
수백 개의 검집만 뒹굴고 있는 상궁 앞의 대 연무장에 홀로 남은 오악검제
악무위의 중얼거림이었다.
고오오! 고오오!
화산파의 비장함과는 달리 투기와 살기가 진동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연화봉의 중턱.
칠 척 거구의 흑의인 두 명이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는 정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산이 결사항전을 각오한 모양입니다."
"정도제일문파인 화산이 도망을 칠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파뢰권마(破雷拳魔) 패무극(覇武克)과 혈마궁의 궁주인 귀궁(鬼弓) 척단세
(斥旦世)였다.
화산파의 멸문, 오늘밤 해야할 임무다.
천무맹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었고 멸문에 대한 빚은 멸문으로 갚아야 한다
.
패천마궁 병력 칠백, 혈마궁 칠백, 도합 천사백의 병력이 화산을 치기 위
해 모였다.
화산파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이다. 천무맹의 섬서분타가 사천으로 움직였기
에 예상보다 많은 병력이 이곳에 올 수가 있었다.
삼백의 결사대가 사천 땅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천무맹의 모든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고 패천마궁을 비롯한 마도인들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이
곳에 도착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산파는 오늘 멸망합니다. 종남파도 마찬가지고요."
허황된 자신감이 아니다. 병력도 무력도 모두 우위에 있다. 어떤 이변이
일어난다 해도 화산파의 멸망은 기정사실로 정해진 것이다.
"시작합시다. 척궁주!"
이미 화산을 치기 위한 작전은 마무리되었다. 삼면에서의 포위공격, 상궁이
있는 정면은 패천마궁의 정예가, 매화검수들이 지키고 있는 매화각 쪽은
귀궁 척단세가 그리고 동쪽의 수련각(修練閣)은 패천마궁의 부궁주인 마마
혈도(魔魔血刀) 강민구(姜閔久)가 주축이 되어 공략하기로 하였다.
"전 마도인들은 들어라. 오늘밤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마
도천하의 새로운 역사는 화산의 멸망으로부터 시작될 것이고 패천마궁과 혈
마궁의 업적이 가장 먼저 쓰여질 것이다. 가라! 가서 역사의 주역이 되어라
!"
"진격하라!"
"와-아! 가자, 위선자들의 목을 따자!"
엄청난 함성소리와 함께 수백의 인물들이 연화봉을 향해서 몸을 날리기 시
작했다. 화산 혈사의 시작이었다.
"문주님!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이미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사기의 높고 낮음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적을 물리쳐서 화산을 지키겠
다는 생각도 버렸다. 죽기 전까지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가면 그걸로 만
족할 뿐. 화산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다음에 볼 때는 육신이 없겠군요."
"문주, 보중하십시오."
연화검 조인상과 단천검 민요가 악무위를 향해서 큰절을 올리고 자신들의
위치로 몸을 움직여 갔다.
"화산의 전 문도는 매화검진(梅花劒陣)을 구축하라!"
수많은 화산파의 검진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검진이고 화산문도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펼치는 검진이 바로 매화검진이다.
상궁에서 보면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매화각, 양오검 종만리와 수석장로인
조인상이 이백의 문도를 지휘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매화 문양의 검진이 서서히 회전을 하며 하나의 거대한 매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쳐라! 와-아-아!"
수백의 흑의인들이 매화각의 담을 넘어 돌진해들었다.
"개진(開陣)하라!"
종만리의 외침과 함께 매화검진 내에서 백색의 검기가 솟아나며 또다시 화
산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매화가 열렸네."
"사방 가득 매화가 피었네. 풍매일검(風梅一劍)!"
종만리의 선창에 이어 이백의 화산 문인들의 후창이 이어지고 매화검진의
일식이 혈마궁의 궁도를 향해 뿌려졌다.
백색의 검기가 전방을 향해 난사되고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진다.
"화산의 매화는 매화가 아니라네."
"피와 살로 피어나는 혈매화라네. 동매이검(冬梅二劍)!"
"으아악! 아악!"
좀더 강해진 백색의 검기가 전방으로 휘몰아치며 혈육과 비명소리가 난무
하고, 화산가 속에 피어오르는 백색의 기운 속에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으윽!"
진으로 보호를 하고 있지만 화산의 문도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어느새 검
기를 뚫고 들어온 혈마궁의 궁도가 화산문인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던 것이
다.
"이야압!"
복부를 검에 찔린 화산문도가 자신을 찔렀던 자의 목을 친다. 그리고 복부
에 있는 검을 뽑아낼 생각도 없이 앞으로 돌진해나간다.
부상당한 자신이 검진에 남아있으면 허점이 생기기 때문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문도에게 검진에 들어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의 화산 문도가 한 순간에 죽어갔다.
고오오! 고오오!
천매정의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퍼지고 화산파의 모든 곳이 피에 젖어가고
있었다.
"내 피는 수액이 되었네!"
"내 살은 뿌리가 되었네! 춘매삼검(春梅三劍)!"
사형제의 죽음에 누구도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슴으로 외쳐대는 화
산가의 노랫소리만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화산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온몸으로 울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상궁 앞.
오악검제 악무위가 눈물을 흘리며, 진을 이탈하여 적을 향해 몸을 날리는
문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살 공격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무능함이
한스러웠다.
이것은 정의수호를 위한 전쟁이 아니다. 화산파란 이름 석자를 지키기 위
한 투쟁이다. 과연 화산파라는 이름석자가 저 많은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문주 힘을 내시오.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낸 매화는 더욱 강하고 화려하게
피어나오."
악무위의 사부인 자하상인 이었다. 악무위에게 문주직을 넘기고 선인봉(仙
人峰)에서 수도를 하던 중 천매정의 불꽃과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
"사부님!"
자하상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강호상에 우뚝 선 문파가 되
기까지 수많은 침입과 도전을 겪고 오늘의 화산파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제자들의 죽음과 화산파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울 뿐이었다.
"혈매(血梅)가 우리의 피와 살을 원하고 있음이오. 주어야지요. 문주의 피
와 내 살을 양분으로 주어야지요."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다음 세상에서…."
자하상인의 시선을 받으며 악무위가 전장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이제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으리라. 내가 죽어도 우리가 죽어도 화산은 영원한 화산
일 뿐이니….
"화산이 화산인 이유는 혈매화 때문이네."
"혈매화가 없으면 화산도 없다네. 철매사검(鐵梅四劍)!"
고오오! 고오오!
자색의 기류에 감싸 있는 악무위의 입에서 우렁찬 선창이 흘러나오고, 수
백의 화산문도들의 후창과 함께 매화검진의 사식이 펼쳐졌다.
매화의 천지가 이루어졌다. 악무위의 검에서 생겨난 수십 개의 자색 매화
와 문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백색의 매화가 허공에서 어우러지며 흑의인들
을 향해서 날아간다.
인육과 선혈이 날리는 핏빛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매화검진과는 별도로 자색의 인영 두 명이 패천마궁의 궁도들을 유린하고
다녔다.
현문주인 악무위와 전대문주인 자하상인이 그들이었다.
문주에게만 전해지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종횡무진(
縱橫無盡) 휘젓고 다닌다.
"우리는 혈매화를 피울 것이네."
"피와 살로 피울 것이네. 영매오검(靈梅五劍)!"
일반 문도들에게는 매화검진의 제 오 초인 영매오검을 펼치기에는 무리였
는지 여기저기서 피를 토하는 문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피를 쏟고 정신이 혼미해져도 진 내부에서는 쓰러지지 않았다.
더욱 큰소리로 화산가를 외치며 진(陣)밖의 흑의인을 향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개개인의 무공 실력도 화산파 무인들 보다 높았고
인원수도 두 배가 많았다.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화산파의 제자들을 베어내며 끊임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런 것을 두고 전통이라 하는가.'
패무극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무력과 인원수, 모든 면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동귀어진을 하면서까지 패천마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감동이었다. 무인으로서 생기는 존경심이었다. 패천마궁의 궁도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무혼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전쟁이다. 승자와 패자만이 있는 전쟁.'
무인으로서 존경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결코 멈출 수가 없다. 죽은 자와 산
자만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양쪽이 다 살아있으면 끝나지 않는 전쟁.
"패천대는 들어라! 저들의 중앙을 갈라라!"
패무극의 명령과 함께 패천마궁의 최 정예인 패천대가 매화검진의 중앙을
향해서 돌진해 나갔다.
고오오! 고오오!
"천년만년 피울 것이네."
"혈매화여 영원 하라! 혈매육검(血梅六劍)!"
백여 명의 패천대가 직선으로 돌진해오고 있는데도 매화검진은 아무런 변
화가 없다.
칠공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며 혈매를 피어 올린다.
붉은색의 매화가 상궁 앞을 가득 채우고 패천대의 전방을 향해서 물밀 듯
이 밀려간다.
그 핏빛 매화 속에 포함되어 앞으로 달려나가는 화산파의 제자들.
칠공에서 쏟아지는 자신의 피로 온몸을 적시며 패천대를 향해서 몸을 던지
고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갈라지고 피가 흐른다.
"화산이여, 영원 하라!"
"화산이여, 영원 하라!"
매화검진이 반으로 갈라지고 혼전이 벌어졌다.
패천마궁의 최 정예답게 패천대는 강했다. 화산 문도들이 온몸으로 방어를
하고 있지만 그들에겐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혼자 죽는 화산의 제자는 없
었다. 가슴으로 검을 받으며 상대의 목을 찌른다.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삶에 대한 미련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화산의 매화는 결코 시들지 않음에 대한 만족스런 미소만 흘렀고, 자신의
피와 살이 양분이 될 수 있다는 희열만이 있었다.
매화검진이 와해되었어도 화산가는 멈추지 않았다. 더욱더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먼동이 터 오고 태양이 비추자 화산 전역에 울려 퍼지던 화산가의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밤새도록 울던 화산이 지쳤는지 더 이상 울지를 않는다. 다만 천매정의 외
침소리만 더욱더 구슬퍼졌다.
연화봉에서 밤새 들려오던 화산가 소리가 멈췄다.
단 한 곳.
상궁 앞을 제외하고는….
"매ㆍ화ㆍ가 열ㆍ렸ㆍ네!"
"사ㆍ방ㆍ가ㆍ득 매ㆍ화ㆍ가 피ㆍ었ㆍ네!"
이어질 듯 끊어질 듯 간간이 들려오는 화산가, 온몸이 피에 젖은 한 인영
이 춤을 추고 있다.
코와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왼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
오악검제 악무위.
온몸을 감싸고 있던 자색 기류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움직이는 모습은
무공을 익힌 자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삼류무사의 움직임보다 더 약한 몸짓일 뿐이었다.
동트기 전에 그의 모든 내공은 바닥이 났고, 지금껏 목숨과 바로 직결되는
진원지기(眞元之氣)로 버텨 온 것이다.
자신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악무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수백 쌍의 눈들이 있었다.
오늘 전쟁의 승자인 패천마궁의 인물들과 혈마궁 무리들이다.
그 누구도 악무위의 목을 취하지 못했다.
대 화산파 문주의 목을 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인데도 아무도 움직이
지 못했다.
죽여야할 적장이 아니었다. 위대한 혼을 가진 무인이었다.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무질서한 손짓은 매화검법(梅花劒法)보다 강했고 비
틀거리는 발걸음은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보다 신묘했다.
힘없는 손짓은 검강이고 어검술(馭劒術)이고 심검(心劒)이었다. 육백이나
남아있는 침입자의 손과 발을 묶어버린 천하제일의 신공(神功)이었다.
"내ㆍ피ㆍ는 수ㆍ액ㆍ이 되ㆍ네!"
"내ㆍ살ㆍ은 뿌ㆍ리ㆍ가 되ㆍ네."
악무위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고 힘없는 다리는 그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굽혀졌다.
"화ㆍ산ㆍ이ㆍ여 영ㆍ원……."
상궁을 향해 절을 하는 자세로 엎드려있는 악무위의 입에서 더 이상 화산
가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화산의 혼을 부르짖던 무인의 절명이었다.
화산파에 있던 문도 육백과 천매정의 부름으로 달려온 오십여 명의 전대고
인을 포함한 육백 오십여 명의 화산파 인물의 전원 사망과 함께 연화봉의
혈전은 마무리되었다.
"철수하라!"
화산을 거점으로 하려했던 애초의 계획을 수정했다. 화산의 위대한 혼들이
그들의 머무름을 하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천무맹의 섬서분타로 간다."
패천마궁과 혈마궁의 무인들이 조용히 물러가고 있었다.
대 문파이었기에 수많은 전리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손대지 않
고 동료들의 시신만 안고 연화봉을 내려가고 있었다.
고오오! 고오오!
천매정의 울음소리만 연화봉에 울려 퍼졌다.
그날 구파일방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화산파와 종남파의 멸망이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