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개전(開戰)
팽무도의 걱정과 우려와는 달리 백산 일행은 무사히 구화산을 지나갔고 남
아있는 야망자들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雨).
가슴속에 있는 욕망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투쟁에 자신의 산허리
가 붉게 젖어버린 구화산이 끝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인
가.
잠시 맑아졌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며 빗방울을 흩뿌려대기 시작했다. 이
어서 들려오는 애잔한 바람소리, 계곡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구화산의 호곡
소리는 죽어간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기라도 하듯이 천태봉, 천문봉, 연화봉
등 구화산의 모든 봉우리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아직은 죽음의 향연은 끝나지 않았음을 울고있는 구화산도 모르고
있었다.
관음봉.
관세음보살 형상을 한 바위가 정상에 있다하여 관음봉이라 불리는 봉우리.
관음봉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에서 또 다른 죽음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 흐르는 안개에 섞여서 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
고 있는 것은 서로를 죽이고자 하는 진득한 살기(殺氣)였다.
자신들이 속한 인물들의 뒤를 받치기 위해서 출병한 천무맹의 백의대와 천
마맹의 흑사파가 북쪽과 남쪽에 자리하여 서로를 주시하며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 살아서 구화산을 내려가는 쪽이 승자라는 것이
고 개전 첫 전투에서 영웅이 된다는 것이다.
미끼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질 않고 있었다. 미끼를 처리하는 것은 기
정사실이고 두 세력 중 누가 이곳으로 와서 합류하느냐 하는 것만이 관심사
였다.
다비천검 정철이 돌아오게 되면 백의대가 승리할 것이고 혈마 소지악이 돌
아오게 되면 흑사파가 소속되어있는 천마맹이 승자가 되어 산을 내려가게
된다. 아울러 구소운과 냉추렴의 살해에 대한 책임은 내려가지 못한 쪽에서
전부 지게될 것이고 강호 민심을 등에 업은 승자는 그 여세를 몰아 상대를
치면 되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 분타주에게 연락이 없다니."
관음봉의 북쪽, 다비천검 정철이 있는 연화봉과 마주보고 있는 주화평의
천무맹 진지에서 흘러나온 고함소리였다.
백의천룡 화인걸.
그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청오검(靑烏劒) 군무해(君武解)를 쳐다보고 있었
다.
구소운과 냉추렴이 있는 일행을 노리고 있던 다비천검 정철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지금껏 정철이 상황보고를 해왔었고, 요 며칠 연락이 없었지만 임무수행이
바빠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또한 그가 알고 있는 정철이란 인물은 실력 면에 있어서나 책략 면에 있어
서 이미 백전노장이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염려하지 않았었
다.
오히려 화인걸이 신경써야 될 부분은 자신들의 반대편에 있는 흑사파였다.
그들만 움직이지 않으면 천마맹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미끼를 처리할 것으
로 믿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지금쯤이면 자신이 있는 백의대와 합류해서 흑사파를 치
러가야 하는데 소식이 두절되어버린 것이다.
"연화불지에는 가 보았느냐?"
"지금 인원을 보냈습니다."
"아니다. 직접 간다. 최소경계인원만 남고 전부 이동해라."
"전부 다 말입니까?"
군무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연화불지의 상태만 확인하
러 가는데 전 병력이 다 움직일 필요가 없는 일이다.
흑사파에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을 터인데 모든 병력이 빠져나가면 이곳
주화평은 곧바로 표적이 될 수 있음이다.
남아있는 부하들의 신상도 걱정이지만 이곳에는 자신들의 군량이 있지 않
은가. 비록 오 일 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양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피해를
당하게 되면 당장 구화산을 떠나야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병력을 나눌 수는 없질 않은가."
화인걸은 그 나름대로 흑사파의 공격을 우려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용지에서 천마맹 비마군과 전투 이후 생긴 변화
였다.
평소의 대범함은 사라지고 극도로 신중함을 보이며 모든 사건을 판단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위험성 여부를 먼저 따지는 것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은밀하게 다녀오면 될 일을 가지고 오백이나 되는 전
병력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빨리 안 따라오고 뭐하나?"
"아! 네, 대주님."
'결국 부족한 것이 저것이었나….'
평소에는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함을 갖추고 있는 자가 화인걸이었다. 그
러나 맹내의 인물들의 평가는 언제나 백무천 아래였다. 무공면도 그렇고 배
경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백무천에 비해 우위에 있었으면 있었지 아래라고
는 할 수 없는 입장임에도 그가 부족하게 평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
데, 이곳에서의 며칠동안 겪어본 화인걸은 세인들의 평가가 결코 틀리지 않
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집안에서 길러진 연약한 화초였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썩은 가지마저
도 잘라주는, 외양만 튼튼한 아름다운 관상목(觀賞木)이었다. 가는 비바람
에도 견디질 못하고 후둑 잎사귀를 떨구고 마는 길러진 나무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하듯 화인걸도 자신의 약점을 알지 못했다.
"이럴 수가…."
안휘분타원들이 있던 연화불지에 도착한 화인걸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
다.
폐허.
연화불지에 있던 모든 천막들이 갈가리 찢겨진 채 흩어져있었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체들과 낭자한 선혈들, 죽어있는 시체는 몇 구 되지 않았지만
너무 잔인했다. 기습의 흔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흑사파는 지금껏 자신들이 감시를 하고 있었고 움직임의 기미가 전혀 없었
다. 그렇다고 천마맹의 비마군이 이들을 기습했을 리도 없다. 서로의 싸움
은 미끼를 처리하고 난 후의 일이다.
"대주님!"
천막 부근과 주변을 수색하던 부하 한 명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화인걸을
찾았다.
가장 끝에 세워져있던 천막 근처의 바위틈에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한 것
이었다.
"흑사파?"
부지불식간에 터져나온 외침이었다.
흑사파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의 손잡이가 전
부 검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의 손목에 새겨져있는 검은 뱀 문신, 이 두
가지 것으로 볼 때 분명 흑사파인물임에 분명했다.
"이곳에 흔적이 있습니다."
두 곳에서 동시에 들려온 외침소리였다. 관음봉 남쪽으로 향한 발자국과
천문봉 쪽으로 이어진 발자국들. 어지러이 찍혀있는 무수한 발자국들이 확
연히 보였다.
"흑사파를 감시하던 감시조는 돌아왔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흑사파의 진영이 있는 사문평은 확 트여있는 곳이었기에 척후조를 자주 교
대할 수 없다.
때문에 한 개조가 나가면 이틀은 머물렀다 돌아온다.
그러나 교대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흑사파가 이들을 기습했단 말인가…."
"대주님, 너무 이상합니다. 이곳의 상태는 일부러 꾸민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을 면밀히 살피던 군무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화인걸 옆으로 다가
왔다. 그의 판단으로는 기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했다. 즉 흑사파가
기습을 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꾸민 흔적이 역력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흑사파가 기습을 해 왔다면 흔적은 이곳이 아닌 천막 쪽에 더
많이 있어야 함에도 그쪽에는 싸웠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일부러 꾸민 것이라 해도 사백이나 되는 안휘분타원들의 실종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
미끼가 되는 자들이 안휘분타원들을 공격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다. 기껏 이십 명 남짓의 인원으로 사백이나 되는 인원에 대항했다는 것 자
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더구나 광천뢰가 폭발했던 소리도 없었다. 이들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직접 해치기에는 무리라고 여겼다.
툭! 툭! 투투투!
'빌어먹을… 이래서 산이 싫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린 화인걸이 목까지 치밀어오르는 욕설을
애써 삼켰다. 가늘던 빗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달리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언제나 백의만 입고 다니는 성격 때문에 백
의천룡이란 별호가 생긴 그였는데 산에서 지낸 지가 벌써 이십여 일이 지나
가고 있었다.
목욕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세안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설상가상
으로 하염없이 비까지 뿌려대니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고 급
기야는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내곤 했다.
천마맹에 대한 선공을 주장했지만 이렇게 직접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부하들을 내보내놓고 자신은 맹에서 지휘만 하면 모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화진악의 생각은 달랐다. 백무천이 없는 지금이 화
인걸에게는 기회라는 것이었다.
천마맹과 개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기에 자신에게 일을 준 것이다.
흑사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 맹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상승할 것이고
백무천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구화산에 머물고 있는 이유였다.
"군무해 너는 천문봉 쪽을 수색하고 망도군 너는 흑사파를 다녀와라. 나머
지는 일단 돌아간다."
더 이상 수색해봐야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한 화인걸이 주화평 쪽으로 몸
을 날렸다. 비도 싫었지만 눅눅한 습기는 그를 더욱 짜증나게 하였다. 일단
천막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화인걸의 그런 기대는 주화평에 도착했을 때 산산조각으로 부서지
고 말았다.
경계를 위해 남겨두었던 오십 명 전원이 전부 독에 중독되어 싸늘한 시체
로 변해있었고 자신들의 군량마저도 전부 풀어헤쳐진 채 빗속에 뒹굴고 있
었다.
"주변을 수색해라. 어서!"
화인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들이 연화불지에 다녀올 동안 두시진 만에 부하 오십 명이 살해당한
것이다. 천막도 모조리 찢겨진 것이 연화불지의 상황과 너무 흡사했다.
"찾았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주님."
이번에는 몇 개의 발자국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은밀하게 다가와서
중독시켰다는 말이 된다.
'빌어먹을. 누구란 말이냐. 역시 흑사파인가….'
두 시진이란 시간상으로 보았을 때는 흑사파가 가장 유력했지만 섣불리 단
언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하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애초의 목적대로 흑사파를 치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
대로 철수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쉴 곳도 군량도 다 떨어진 마당에
더 이상 머물 수도 없는 일이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정철이 합류해야 하는데 그들과도 연락이 안 된다
는 것이 화인걸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대주님, 일단 저곳에서 비를 좀 피하십시오."
화인걸이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 들어선 곳, 주변에 널려있는 천막
들 중에서 그나마 좀 성한 것을 골라 급조하여 세운 것으로 십여 명도 채
들어갈 수 없었다.
화인걸 옆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몇몇 인물들이 다시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
모든 부하들이 비를 맞고 있는데 자신들만 천막에 있는 것이 거북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뭐하고 있나? 쓸만한 천막을 고르지 않고."
"네! 대주님."
대답은 하고 있으나 이미 쓸만한 천 조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인걸이 쉬
고 있는 천막이 가장 성하고 유일한 것이었다.
"이봐, 뭐해. 빨리빨리 움직여. 찾는 척이라도 하라고."
백의대 무리들이 흩어진 천막사이로 돌아다니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으나
이미 한번 뒤졌던 곳인데 천막이 나올 리가 없질 않는가.
"수색 나갔던 녀석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천막 안에 홀로 남은 화인걸의 머릿속에는 수색 나간 군무해와 망도군의
생각뿐이었다.
한편, 화인걸이 기다리고 있는 망도군은 관음봉 북편에 있는 불목애(佛目
崖) 근처에 와있었다.
이미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의해서 모든 흔적이 사라졌기에 극도의 신
중함을 기하면서 흑사파의 본거지가 있는 곳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는 중이
었다.
송풍검 망도군 청성파의 속가제자 출신으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천
무맹으로 투신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자(者)이다.
지금 그가 있는 곳,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관음봉 정상에서 보면
마치 그 생김새가 사람의 눈 모양을 닮았다 하여 목애(目崖)라 하기도 하고
또한 이곳이 관음봉이다 보니 부처님의 눈과 같다하여 불목애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이곳 불목애를 지나면 사문평이란 바위투성이의 분지가 나오는데 그 분지
의 끝에 흑사파의 진영이 있다.
백의대의 척후조가 있는 곳은 불목애의 절벽을 따라서 전진하다 보면 눈의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절벽의 가장 안쪽에 있었고 그곳에서 보면 흑사파의
진지가 한눈에 드러나 보인다.
또한 흑사파가 가까이 있는 만큼 위험도가 높은 곳이다.
"헉!"
백의대의 척후조가 있던 곳에 도착한 망도군이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척후조 두 명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그럼 저들이 안휘분타원을 공격했단 말인가….'
망도군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두 구의 시체, 연화불지에 있던 시체와 죽어
있는 모양이 너무 흡사했다. 독에 당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을 처치하고 백의대의 이목을 속인다음 안휘분타원들을 기습했다
는 말이 된다.
그도 군무해처럼 안휘분타원들의 실종은 조작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
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엎드렷!"
망도군이 재빠르게 척후조가 있던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며 수하들에게 지
시를 내렸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그들이 있는 오 장 앞에 네 명의 흑사파 인물들이
나타났다. 순찰을 돌고 있는 자들 같아 보였다.
"몸은 괜찮은가?"
"이 정도는 약과지 뭐. 절반이상이 죽었는데 살아난 것만 해도 어딘가. 그
리고 복귀하게 되면 영웅이 될 텐데."
"맞아! 독에 중독된 놈들이 왜 그리도 독한지… 어째든 안휘분타원인가 하
는 놈들을 전부 몰살 시켰으니 승전고는 우리가 먼저 울리게 되지 않았나."
네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 있는 망도군이 심한 갈등에 빠졌다.
저들과의 거리는 오 장, 한번의 도약으로 공격할 수 있는 거리다. 제압해
서 진지로 데리고 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 이야기를 듣다가 조용히 빠져나갈
것인가를 망설이고 있었던 참이다.
'아니다. 일단 정보만 있으면 된다.'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정보를 얻기 위함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는 자
세를 풀고 귀에다 전 내공을 집중했다.
"그런데 언제 떠난다 하던가?"
"오늘밤에 떠난다 하더군. 백의대의 척후를 죽였으니 빨리 사라져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 싸우게 되면 병력이 부족한 우리가 질 것은 뻔한 일인데….
"
"가세! 짐싸야지."
흑사파 일당 네 명이 사라지자 망도군과 다섯 명의 수하들이 재빠르게 자
신들의 진지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결국 안휘분타원들을 기습한 곳은 흑사파였다. 백의대를 경계한 것처럼 행
동하고 있다가 다른 곳을 친 것이다.
멀어지는 망도군 일행을 쳐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조금 전 망도군을 뒤에
두고 떠들던 흑사파의 인물 네 명,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그
들이 다시 돌아와서 떠나는 백의대 일행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었다.
"아우! 자네 작전이 먹힐까?"
"당연하죠. 비상(飛上)하고 싶어하는 놈이면 이 기회를 놓치진 않겠죠."
"또 어렵게 이야기한다. 쉽게 좀 이야기하라니까?"
광사 초상과 무욕인 삼인, 백산일행을 떠나보낸 이들이 이곳에 남아서 육
포 값을 하고 있었다.
그들 네 명은 이곳에서 많은 일을 했다.
우선은 천무맹 안휘분타와 천마맹 혈마 소지악의 진지를 습격 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사냥을 해야했다. 백산과 자신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던 인물
들이 죽은지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동물의
피였다.
그리고 시체 쪽에 신경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천막을 찢는 것을 제외
하곤 그곳에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시체를 자세히 살피게 되면 죽은지 상당기간 지났다는 것이 바로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두 곳 중 한 곳만 걸려도 작전은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천무맹의 백
의대가 걸려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거냐?"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천무맹 놈들이 몰려오면 흑사파에 알리기만 하면
되지 않겠소."
"그럼 저기까지 뭐 빠지게 달리면 일이 끝나냐?"
초상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흑사파의 진지였다. 구마 중 한 명인 혈마 소
지악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다른 행동은 일절 하지 않고 천무맹의 백의대만
주시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적당히 몇 놈씩 죽이고 가야 되지 않겠소?"
"화인걸인가 하는 그놈이 속아야 할 텐데…."
* * *
"그럴 줄 알았어…."
백의대 진지.
송풍검 망도군의 보고를 듣고 있던 화인걸이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망도군의 말과 연화불지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안휘분타원들을 공격한 곳은
분명 흑사파였다.
흑사파의 인원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밤 떠난 다는
말까지…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치게 되면 안휘분타원의 복수와 흑사파의 괴멸이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게 되는 것이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미끼에 대한 생각은 이미 저만큼 날아가버렸다. 일단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그 주역이 화인걸 자신이었다
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준비해라. 그들을 친다."
"대주님! 좀더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좀더 신중을 기하자는 군무해의 말이었다. 흑사파의 기습치고는 뭔지 작위
적인 냄새가 풍겼던 것이다. 아무리 독에 당했다고 하지만 싸움의 흔적이
너무 없었다. 두 세력이 부딪쳤으면 인원이 구백이다. 그런데 한 쪽이 전멸
했는데도 아무런 단서도 없고 너무 조용히 진행된 것이다.
"그럼 어떻게 설명을 할거냐."
"그게… 저."
마땅히 할말이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것은 분명한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
다. 서로 전력이 비슷한 흑사파에서 자신들을 도발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꾸몄을 리는 없을 것이다. 불과 이틀만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에 더욱 답
답했다.
"그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확인을 해야 된다. 만일 우리가 이대로 철수했는
데 실제로 흑사파가 안휘분타원들을 공격했고 그들의 병력이 절반밖에 없었
다면 그때는 누가 책임을 질 거냐."
화인걸의 말에 군무해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도 가장 우려하는 바가 바로 그 점이었다. 망도군이 가져온 정보가 제대
로 된 것이라면 안휘분타원들을 공격하고 절반의 전력밖에 남아있지 않은
흑사파를 그대로 방치한 책임은 고스란히 백의대에서 지게될 것이다.
그러나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고자 해도 시간이 없다. 놈들이 떠날 준비
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군량도 없고 쉴 곳도 없는 자신들도 철수를
해야 될 입장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대주님."
방법이 없다. 속임수이든 아니던 흑사파와 일전(一戰)을 결해야 한다. 그
러나 그가 걱정하는 것은 흑사파가 전력이 절반밖에 없느냐 하는 것 보다
백의대의 사기였다.
백의대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있었던 것이다. 천문봉을 수색하고 돌아온 그
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천막 안에 홀로 있는 화인걸과 밖에서 비를 맞고 있
는 백의대 대원들이었다.
거의 이십여 일의 산중생활에 지친 것도 있지만 그들의 눈에 나타나 있는
것은 대주인 화인걸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우리머리에게 실망한 수하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지 않는가. 그래서 신중론을 펴자 하였는데 화인걸은 받아들이
지 않고 있었다.
"신속하게 이동해라!"
화인걸의 명령에 따라서 백의대가 사문평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둠과 함께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거의 십여 장 앞조차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기습을 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삼원대진(三元大陣)!을 펼쳐라."
그러나 불목애에 도착한 화인걸의 명령은 기습이 아니었다. 진의 구축, 진
행 속도가 느리지만 갑작스런 기습공격보다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진을
선택한 것이다.
백의대를 향해 화인걸의 음성이 전달되었고 백의대 전원이 하나의 진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허허!"
군무해에게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습을 감행하려 했으면 바
로 돌진해서 적을 유린해야 하거늘 진을 구축하려는 화인걸의 의도를 알아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의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수장이 하는 일에 반대할 수도 없다. 평소 같으면 한마디 하겠지
만 지금은 전장(戰場), 수장의 명령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희생을 줄일 수도 있겠지….'
군무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이 흑사파의 속임수
였다면 진으로 진격하는 작전이 부하를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길일 것
도 같았다.
삼원대진(三元大陣).
수비보다는 공격에 목적을 둔 진으로 곤륜파의 삼원진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백의대만의 독문 검진이다.
가장 먼저 진의 중앙에 지휘자를 포함한 하나의 삼원진이 만들어지고 그
진을 중심으로 전후좌우로 해서 네 개의 삼원진을 배치하여, 전방에 있는
진이 머리가, 좌우에 있는 두 개의 진이 양팔이 그리고 후방에 있는 하나의
삼원진이 꼬리가 되어 사방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유
사시에는 각진이 독립된 개체로 움직이며 적을 유린할 수 있는, 파괴력 면
에서는 최강을 자랑하는 진이다.
이윽고 삼원대진이 구축되자 전후좌우 네 개의 소진으로부터 물결파가 퍼
지듯 기운이 퍼져나가더니 사방을 감싸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튕겨내버린다.
개개인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경지가 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강지가 없어서 그런가….'
용지에서 죽은 삼 조의 조장인 마강지가 없기에 진에 약간의 허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새로 편성된 인원을 자신이 있는 내부로 전부 모아두었기에
안쪽이 약해졌을 뿐 외부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대진, 중보(中步)!"
오백 명으로 구축된 거대한 대진이 화인걸의 명령에 따라서 천천히 사문평
을 향해 움직여나갔다.
"대진 속보!"
사문평에 진입하면서 진의 속도가 더욱더 빨라지며 진에 부딪친 빗방울이
뒤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우야! 저래선 우리가 공격할 수 없지 않느냐."
빗방울을 튕겨내며 자신들을 향해서 돌진해오는 삼원대진을 바라보던 초상
이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문천을 쳐다보았다.
마치 한 마리의 멧돼지가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죽이긴 뭘 죽이오. 그냥 가서 알리면 된지. 적이닷! 적이 침입했다!"
애초의 계획을 변경했다. 원래는 싸우면서 물러설 작정이었는데 너무 엄청
난 기세로 달려드는 모습을 본 서문천이 흑사파 진영으로 몸을 날리며 고함
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냐, 적이라니?"
흑사파의 이인자인 혈인검(血忍劍) 천목수(千木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도 혈마 소지악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인데
적이 침입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뭐하고 있느냐? 전원 방어대형으로!"
밖으로 튀어나온 천목수가 기겁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
다.
천무맹의 백의대 전원이 엄청난 검진을 형성한 채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
었던 것이다.
"중앙을 비워라!"
병력이 두 패로 나뉘더라도 그 방법이 최선이다. 빗방울마저 튕기며 돌진
해오는 진식과 정면충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저것이 백의대의 숨겨진 힘인가?'
천무맹과 천마맹, 양맹에 파견한 첩자들로 해서 서로가 모든 것을 파악하
고 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 한 가지 수만큼은 숨겨두고 있었다.
백의대가 숨겨둔 최후의 수는 바로 삼원대진이었던 것이다.
"진(陣), 산개(散開)!"
흑사파의 중앙을 잘라버릴 것처럼 밀려오던 삼원대진이 갑자기 멈추어서며
화인걸의 명령에 따라 마치 꽃망울을 터트리며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사
방으로 퍼져나가며 검광을 뿌려댔다.
"으아악! 으악!"
순식간에 이곳저곳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붉은 피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팔
이 잘리고 목이 잘린 흑사파 인물들이 질척한 바닥으로 쓰러져갔다.
"진, 회(回)!"
첫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했다고 생각한 화인걸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려는
듯 일차 공격을 마치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있던 각각의 진에 회전을 명
했다.
각각의 삼원진이 한 방위씩을 방향을 바꾸며 상대에게 혼란을 줌과 동시에
더욱 강하게 몰아치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흑사파의 인원들도 이번에는 쉽게 당하질 않았다. 비록 수십 명의
인원이 이번에도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지만 처음 받은 공격 때처럼 우왕좌
왕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진, 퇴(退)!"
"대주님! 계속 산개해서 끝장을 보는 것이…."
군무해가 다급한 표정으로 화인걸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의 두 번째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내기는 했지만 지금 흑사파의 대응은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화인걸의 입장은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삼원대진의 장점, 돌진하
면서 공격을 가할 때 가장 큰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적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어차
피 기선을 잡기 위한 기습공격이었고 어느 정도 효과는 보았다 생각했다.
목적 달성을 했는데 굳이 적진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화인걸의 명령에 따라서 네 개의 삼원진이 화인걸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고
오장 가량을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화인걸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자신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흑사파는
아직도 완전한 방어대형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대비
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완전하게 괴멸은 아니더라도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너무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려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진(陣), 광속보!"
"흑룡마진(黑龍魔陣)을 펼쳐랏!"
화인걸과 천목수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외침이 사문평에 울려퍼졌다.
거대한 멧돼지 모양의 삼원대진이 흑사파의 진영을 향해서 다시 한번 돌진
해 들었고 이에 질세라 흑사파의 인물들도 일렬로 길게 늘어서면서 하나의
진식을 구축하고 있었다.
"제 일룡, 나서서 막아랏!"
천목수의 외침에 따라서 열 개의 길게 늘어선 진식중의 하나가 뱀이 똬리
를 틀 듯이 뭉쳐지더니 삼원대진의 머리를 행해서 진격해 가기 시작했다.
챙! 채채챙! 차앙!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삼원진 하나와 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흑룡마진이 부
딪치며 선혈이 터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번에는 서로가 피해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양쪽 진들이 모두 다수로
이루어진 진이고 한 두 명의 죽음으로는 진의 허실이 드러나지 않기에 구축
되어있는 진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흑룡출해(黑龍出海)!"
두 진이 부딪친 직후의 틈을 이용해서 천목수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나오자
흑룡대진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앞쪽에 나가있던 한 개의 진이 뒤쪽으로 회수됨과 동시에 뒤쪽에 있
던 세 개의 진이 앞으로 나서며 무서운 속도로 삼원대진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었다.
"좌우합진(左右合陣)!"
화인걸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오고 삼원대진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던 소진이 서로 교차하며 세 개의 흑룡마진을 향해서 검을 뿌렸다.
무수한 비명소리와 인육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내리는 빗물을 따라 선혈이
날렸다.
'어떻게 된 건가!'
진을 지휘하고 있던 화인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던 흑사파의 전력이 전부 남아있었던 것이다.
'속임수에 당했단 말인가! 아니다. 미끼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
다. 그럼 도대체 누가….'
흑사파의 농간이 아니었다. 그들의 농간이었다면 자신들의 공격에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들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함은 무엇을 의
미하는 것인가. 자신이 당한 것은 분명한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
었다.
"이봐, 조금만 참아. 잠시 후면 맹의 비마군이 도착한다고 했어."
그때 화인걸의 귓가에 들려오는 흑사파 인물들의 말소리가 그의 상념을 가
로막았다.
천마맹 인물들이 저들을 돕기 위해서 오고 있다 한다.
'그럼 혈마 소지악이 이 모든 것을….'
뭐가 어떻게 된 사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다. 이미 시작된 전쟁이고 무조건 승리를 해야만 한다.
처음의 공격에서 흑사파에 많은 손실을 입혔기에 아직은 백의대가 유리한
국면이었다.
'어떻게 해야하나.'
현 상태대로 끌고 가면 백의대가 승리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적잖은
피해를 입겠지만 흑사파를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흑사파 인물들의 대화, 혈마 소지악이 온다고 했기에 망설일 수밖
에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다.
'좋다. 진을 분리해서 동시에 친다.'
결국 화인걸이 모험을 하기로 했다. 빠른 시간에 모든 것을 끝내고자 하는
결정이었다.
"진(陣), 산개. 멸(滅)!"
화인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각 방위에 있던 진들이 퍼져나가며 길게
늘어져있는 흑룡마진을 향해서 쇄도해 나갔다.
'기회닷!'
천목수가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기전으로 끌고 갔으면 자신들이 패했
을 것임이 분명한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화인걸이 서두름으로 해서
반격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저들의 진식을 끊어라!"
뭉쳐있는 삼원대진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지금처럼 산개하여 공격해
온다면 이미 구축되어있는 흑룡마진으로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천목수의 명령에 따라 다섯 마리의 흑룡이 삼원대진 사이로 돌진하면서 모
든 진의 고리를 끊어내며 화인걸이 있는 중앙진을 포위해버렸다.
"재미있게 싸우는구먼?"
사문평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봉의 정상에 무욕인 네 명이 두 세력
간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화인걸이 서두르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천마맹의 흑사파가 너무 밀린다
생각한 서문천과 초상이 은밀하게 화인걸의 근처로 다가가서 그에게만 들리
도록 혈마소지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문평은 말 그대로 죽음의 관문이었다.
광활한 분지 다섯 곳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혈투, 전후좌우로 밀려갔다 밀
려오는 삼원진과 흑룡마진의 모습은 마치 멧돼지와 뱀이 싸우고 있는 모습
을 연상시켰다.
다섯 마리의 멧돼지와 열 마리의 뱀.
그들의 싸움이 남기는 것은 뿌연 흙먼지가 아니었다.
이동하는 진의 뒤쪽으로는 빗물에 섞인 붉은 피와 인간의 시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은 옆에 있던 동료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적의 검을 막아내는 것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흑룡마진도 정파의 진 못지않게 무서웠다. 뱀이 꼬리를 말았다가 다시 펼
치는 모양처럼 진이 펴지며 삼원진의 같은 부위를 계속해서 공격해댔고, 그
곳에서는 어김없이 백의대가 죽어나갔다.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연환공격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진식이
흑룡마진이었다.
또한 거의 직선으로 구성된 진식이다 보니 기동력에 있어서 삼원진보다 앞
섰던 것이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팽팽한 공방전이었다. 계속해서 사상자가 생겨나고 있지만 백의대와 흑사
파 인물들은 한 치도 물러남이 없이 서로에게 검을 뿌려댔다.
죽고 죽이는 인간의 행위에 울고 있는 것은 구화산뿐인가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좌로 이동하라!"
홀로 떨어져있던 화인걸이 자신이 있는 진을 다른 진 쪽으로 이동하기 위
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그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의 대장이 있는 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흑사파 인물들이 화인걸이 있는
곳만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주님 먼저 빠져나가십시오."
진이 거의 괴멸 직전까지 왔을 때 부하 중 한 명이 화인걸을 향해서 소리
를 질렀다. 자신들이 있는 삼원진으로 적의 흑룡진 세 개가 붙어서 무서운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대주님을 보호하라."
더 이상 진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남아있던 삼십여 명의 인물들이 화인걸을
가운데 두고 흑룡진을 뚫기 시작했다.
"군무해! 뭐하나?"
화인걸이 있는 진에 흑사파 인물들이 많이 몰려있는 바람에 흑룡마진이 느
슨해졌고 그 틈을 타서 군무해가 이끌고 있는 삼원진이 종횡무진 사방을 휩
쓸고 다녔다.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승기가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화인걸의 목소
리가 들려왔고 부하들의 몸을 방패삼아 자신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 맹주의 아들인 화인걸을 구해야만 한다. 그가
없으면 이 전투에 승리를 하더라도 의미가 없음이다.
"전부 산개해서 대주를 보호하라."
화인걸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을 풀 수밖에 없었고 백의대와 흑사파의 전쟁
은 바야흐로 난전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애송이 놈! 네놈이 화인걸이더냐?"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백의대의 인물들을 베어내며 천목수가 화인걸을
향해서 한발 한발 다가섰다.
그의 작전은 주요했다. 다른 곳은 피해를 좀 보더라도 적의 대장인 이놈만
잡으면 전투는 끝이 난다.
결국 화인걸을 사면초가에 몰아넣는데 성공했고 적의 진들은 와해되어 그
가 바라던 난전이 되었다.
화인걸의 주위에 있는 놈들은 이십여 명 남짓, 바로 밀어붙이면 끝이 날
것이다.
"쳐라!"
화인걸이 있는 진을 완전하게 끝장을 내기 위한 명령이 떨어지고 흑사파
인물들이 화인걸이 있는 곳을 향해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혈전뇌(血電雷)!"
천목수의 검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더니 화인걸 앞에 있던 백의대 한 명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쾌검.
혈인검 천목수의 검법은 가공할 쾌검이었다. 삽시간에 화인걸 주변에서 보
호막을 치고 있던 백의대 인물들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차디찬 대지위로
고개를 박았다.
"막아랏!"
화인걸이 사방으로 검을 휘두르며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미 피아의
구분이 사라졌고 자신을 향해서 달려들고 있는 자들은 전부 적일 뿐이었다.
"크억!"
등 쪽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에 화인걸이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
의 손에 죽어간 인물들만 해도 벌써 십여 명이 넘었지만 감당하기에는 적의
수효가 너무 많았다.
"화인걸 부하들을 방패삼아서 도망을 가느냐!"
천목수의 상황도 화인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뒤
쪽에서 들이닥친 백의대 인물들이 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다 잡은 것 같았는데 주변에 있는 부하들이 몸으로 자신의 검을 막아선 바
람에 더 이상 진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화인걸과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그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이제는 자신도 살기 위해서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부하들은 화인걸을 포
위공격하고 자신은 백의대 인물들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
다.
자신들의 상관이 위험에 처하자 상대방을 공격하던 수하들이 하나씩 모여
들기 시작했고 싸움은 자연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현장을 직시하는 양쪽 진영 인물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사문평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수많은 시체들, 팔 다리가 잘리
고 없음에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던가. 서로가 자신이 정의라고 외치는 인물들의 의지에
의해, 허울로 감싸진 그들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차디찬 주검으로 변해버린 수많은 젊은이들.
그들의 꿈은 무엇으로 보상한단 말인가.
백의대와 흑사파의 육백여 인물들을 삼켜버린 사문평은 더욱더 거센 비바
람을 뿌려대며 묵묵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