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혈가(血家)
콰르릉! 콰르릉!
천지를 울리는 울음소리와 하얀 포말 만 남기고 급한 발걸음을 옮기는 저
폭포수가 마지막 가고자하는 곳은 어디일까? 결국엔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짜
디짠 소금기와 세상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 더러운 오물만 가득한 그런 곳
임에도, 먼저 간 형제들이 있기에 그들을 만나기 위한 일념 하나로 지친 발
걸음을 더욱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다를 향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폭포수, 그 아래
에는 떠나간 형제를 만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이 있었다.
물 속의 붉은 기운이 마치 수 십여 마리의 거대한 물고기들이 요동치는 것
처럼 수면위로 솟구쳐 올랐다.
"푸후!"
폐 속 깊숙한 곳까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수면위로 나타난 수십 개의 머
리들이 떨어지는 폭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앞에 적이 보듯 노려보고 있었
다.
"타핫!"
이윽고 물고기가 수면을 박차고 올라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인물들이 몸을 날리며 폭포수를 향해서 돌진해들었다.
무엇을 위함인가.
"혈극참!"
"창궁혈해탄!"
폭포수의 울음소리보다 더 큰 소리와 함께 모든 인물들의 손에서 붉은 기
운이 터져나오며 폭포수를 향해 횡으로 그어졌다.
광풍대(狂風隊).
뇌룡현에 남아서 계속 수련을 하고 있는 광풍대원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이곳, 백산이 혈우신보와 쾌의 원리 그리고 금강불괴지신(金
剛不壞之身)을 얻었던 용미폭포였다.
"강기를 담지 말고 마음을 담아라. 너희들이 들고 있는 것은 나무가 아니
다. 너희들의 팔이라 생각해라."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광풍대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인물, 백산의 사
부인 팽무도였다.
바로 옆에 있는 남궁세우와 같이 광풍대원들을 수련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근처에 쌓여있는 나무판자들, 나라에 죄를 지은 죄인에게 태
형(笞刑)을 가할 때 쓰이는 곤장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광풍대원들이 무기대신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이다.
"씨펄!"
폭포수를 향해서 나무판을 휘두르던 일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
다.
붉은 도강을 머금은 나무판이 중간쯤 진행하다가 산산이 부서져나가며 빈
손이 되어버린 것이다.
'팔 할 이상은 안 되는 것인가!'
팽무도가 원하는 경지. 손에 들고 있는 나무판에 팔 할의 힘을 주입하는
것이었고 일휘는 이미 그 경지에 도달했다. 그래서 더 강한 힘에 도전하고
있는 것인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백산이 행했던 쇠몽둥이는 편법에 가까운 것으로 완전한 신검합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말 그대로 신검합일(身劒合一)이라면 지금 익히고 있는
것은 신검합일(神劒合一), 즉 몸과 검이 아니라 마음과 검을 일치시키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정기신(精氣神)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검합일의 경지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라."
팽무도의 부르는 소리에 광풍대원 전원이 물을 박차고 두 사람이 있는 곳
으로 모여들었다.
"일휘야, 너의 오른손에 기(氣)를 주입해 보거라."
일휘가 자신의 오른손에 강기를 주입하자 팔 전체가 붉게 물들며 한 꺼풀
막이 생겨나고 마치 하나의 도를 보는 듯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자, 보아라. 일휘는 지금 자신의 팔에 모든 힘을 다 실었다. 그럼에도 팔
은 터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데 이 피부보다 더 단단한 나무판은
왜 부서지겠느냐?"
팽무도 또한 광풍대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강기를 부드럽게 다루는
방법이었다.
백산처럼 몸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문에서 배웠던 방식을 바
탕으로 이론을 겸비해서 하나씩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공은 강함과 부드러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이 외
부로 표출될 때 운용하는 무공에 특성에 따라서 절대적인 강함으로 또는 아
주 유연함으로 나타나지만 내재하고 있는 힘은 동일하다.
그러나 표출된 힘에 강약을 다 포함되어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강함
과 부드러움이 서로 보완하면서 더 큰 힘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게 된다. 즉
강기의 경지를 극복하게 되고 외부에서도 강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다.
"느낌이다. 몸속에 있는 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이 나무판 끝으로 사
물을 인식할 수 있어야한다."
무공의 고수이면 가지는 육감과는 또 다른 수준이었다. 육감이 미지의 상
태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막연하게 감지하는 것이라면 기로서 느끼는 것은
현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사물을 완전하게 인식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다.
마치 소경이 손에서 느껴지는 촉감만 가지고 사물의 상태를 알아내는 방법
을 기(氣)를 이용해서 해야한다는 말이었다.
"자, 다시 시작해라."
팽무도의 말이 끝나자 광풍대원 전원이 기다란 갈대 하나씩을 들고 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모두들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서 눈을 감더니 손에 있
던 갈대를 물 속으로 담그는 것이었다.
연약한 갈대를 이용해서 기를 보내고 그 감각을 깨닫게 하는 훈련이었다.
갈대로 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갈대가 아주 약하기 때문에 한
꺼번에 많은 기를 주입하지 못한다. 즉 갈대의 수준에 맞게 기를 보내는 연
습을 함과 동시에 기로서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 두 가지를 습득하는 수련법
이었다.
"아우! 저 녀석들 진식은 어느 정도 되었나."
"이제는 남궁세가인들 보다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습니다."
광풍대원들을 쳐다보는 남궁세우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거의 오십 년 만에 찾아온 미소였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아이들에게 비급을 줄 때만해도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을 다시 보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팽무도라는 듬직한 후원자가 있었고 자신도 가르치기는 했지
만 강기의 경지까지 올라서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무림세가였던 가문에서 기재(奇才)란 소리를 듣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자
신이 처음부터 그것들을 익힌다 할지라도 그 정도까지 될 수 있으리라는 장
담은 하지 못하는 그런 무공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 완벽하게 익혔다.
그리곤 그때 처음 알았다. 기재라는 것은 풍족하고 부족한 것 없는 가문에
서만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있는 집안에서는 목숨을
걸고 노력을 하는 인물들이 별로 없다. 때문에 자질이 있는 자만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남보다 조금 뛰어난 그런 자들을 기재라
불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달랐다. 가진 것이라고는 세상에 대한 한(恨)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아이들, 그 한이 노력으로 승화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기재
가 되었다.
해내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무공을 배우고 익혔던 이들은
기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기재는 뛰어난 머리도 훌륭한 스승도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한 노
력, 이루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가 바로 기재고 천재였다.
세가의 진식을 가르칠 때 그들의 습득 속도에 또 얼마나 놀랐던가. 얼마
가지 않아 진식에 대해서 더는 가르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전부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 속에서 하고 있던 것이 남궁세가의 진식을 이용한 비무였
다.
수공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 가지를 동시에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남궁세가의 진식의 운용이 그 첫 번째였다.
진(陣)이란 이인 이상일 때 이용하는 격투 방식으로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공격과 수비를 함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
게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일뿐 명문 정파나 유수의 문파에 있는 진식(陣式)은 또 다른 효능이 한
가지 더 존재하고 있다.
다수의 힘을 동시에 한 곳으로 집중하여 자신들보다 몇 배 강한 인물들과
도 대등하게 싸우거나 또는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진식을 배우는 진
정한 목적은 후자에 더 중요성이 있다 하겠다. 물 속에서 진을 구축하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
물 속이기 때문에 진에 의해서 운용된 힘이 쏠리는 부분이 확연하게 드러
난다. 그 힘을 조정하는 방법을 바깥보다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
두 번째 배우는 것은 쾌이다.
물 속에서 움직이는 몸놀림이 지상에서 하는 것과 같아진다면 그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곤장 모양의 나무판
, 그 나무판을 가지고 물 속에서 휘두른다는 것은 일반 검과 도를 가지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신의 강기를 이용해서 끊임없이 검이나 도의
모양으로 만들어야만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강기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광풍대원들이 물 속에서 비무를 하는 중에 수면 위의 출렁거림이 생기지
않는다면 강기의 부드러움을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녀석들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았기에 북경을 향해 길을 떠난
백산 일행이 걱정되었다.
귀혼마강시 사건도 있었고, 천마맹과 천무맹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들
이 이곳 뇌룡현으로 들어오는 장사치들의 입에서 심심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더욱 염려스러웠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산이 녀석이 남의 것을 탐하는 성격
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좋으련만…."
남궁세우의 말이 아니더라도 백산의 성격은 팽무도가 더 잘 알고 있다. 결
코 자신의 것이 아니면 욕심을 부리지 않는 녀석이다.
그러나 세상이란 곳이 자신이 원한다 해서 편히 살 수 있는 곳이던가. 자
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곳이 강호란 세계다. 자신이
그랬고 백살대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런 일을 당하면 결코 참지 못하는 백산의 성격이다. 남에게 손해
도 끼치지 않지만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을 괴롭힌다면 그놈은 살 생각을 버
려야 할 것이다.
"사부님!"
그때 팽무도를 부르는 일휘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 그러느냐!"
"저 아래에 동굴이 있습니다. 인공의 동굴이."
지금 일휘가 하고 있는 것은 물의 느낌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기(氣)를 이용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경지를 넘어섰다. 지금 일휘가 시도하
고 있는 것은 갈대를 이용해서 깊이를 재는 방법, 즉 사물의 위치를 파악하
는 것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충 연못의 깊이를 생각한 일휘가 이를 확인을 하기 위해서 물 속으로 잠
수해 들어갔고 수중 절벽 틈에 가려서 거의 보이지 않았던 동굴을 발견해낸
것이었다.
천연동굴에 인공을 가한 흔적이 보이는 동굴.
"가보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원도 아니고 이곳은 오지중의 오지이다.
이런 곳에 인간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물
속이 아닌가.
세 사람이 수면 아래로 잠수해 들어가자 가장 깊숙한 곳에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동굴이 나타났다.
해초들이 잔뜩 끼어있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굴을 따라서 천천히 이동간 세 사람이 거의 이 각 정도 왔을 때 빛이 들
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곳은 어디지?"
뇌산에 대해서 거의 알고 있는 팽무도조차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사방이
완전하게 막혀 있어서 자신들이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는 출구가 전혀 없었
고 공터에는 두 개의 연못만 존재하고 있었다.
"저곳으로 가 보지요."
남궁세우가 가리키는 곳, 절벽 아래쪽에 인가가 있었던 흔적인양 평평한
바위 등이 잔뜩 쌓여있는 곳이었다.
잔해를 치우자 절벽 쪽으로 연결된 조그마한 동굴이 나타났다. 아마 인가
로 보이는 집과 바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진 동굴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동
굴 속에서 발견된 것은 고대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석관이었다.
"오래 되었습니다. 거의 천 년 이상이 지난 것들입니다."
석관을 관찰하던 남궁세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있는 고대의 석관,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
었던 것이다.
"사부님, 한 번 열어보지요. 시체가 있다면 다시 묻어주면 되지 않습니까.
"
동굴 속에 있는 것이 관이었기에 망설이는 두 사람을 향해서 일휘가 입을
열었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 죽어갔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죽은 사람에게 너무 심하지 않겠느냐."
팽무도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왠지 모르게 열어보고 싶지가 않았다
.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서운 사실과 직면할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
왔던 것이다.
"이곳까지 왔는데 한번 보고가지요."
남궁세우와 팽무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일휘가 먼저 관 뚜껑을 열었다.
기이잉!
"허!"
팽무도에게서 흘러나온 신음소리였다.
석관 안에서 발견된 것은 두 구의 목내이(木乃伊)였다.
생전에 부부였는지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물이 품
에 안겨있었다.
"아미타불!"
팽무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불호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영면을 방
해 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었다.
그러나 팽무도가 있는 쪽과는 달리 남궁세우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석관 안
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가 열어본 석관 속에는 글이 촘촘하게 새겨진 수백 장이나 되어 보이는
철판들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이다.
"아우, 그게 뭔가?"
"역사입니다. 과거 춘추천국시대에 가장 비참했던 가문의 역사… 아니 이
땅에 살았던 민초들의 역사지요."
전부 오백여장의 철판이었다. 한 가문의 일년 동안의 일상을 철판 한 장에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즉 오백 년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는 철판이었다.
"아울러 파멸안(破滅眼)의 기원이기도 하고요."
"뭐라고? 파멸안이라 했는가?"
팽무도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남궁세우 쪽으로 황망히 다가왔다. 백산
의 운명인 파멸안, 이 세상 누구도 그 기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파멸안의
기록이 적혀있다는 말이 아닌가.
"어서 읽어보게 어서!"
팽무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남궁세우를 채근했다. 저주받은 운명이라 했던
파멸안, 어쩌면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길이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말이야 운명을 극복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어디 마음까지 그러
했겠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늘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나 혈가의 마지막 후예가 적는다."
남궁세우가 맨 위쪽에 있는 철판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혈가뿐만 아니라 대륙에 산재하고 있는 모든 철가들에서 태어나는 자
식은 축복을 받지 못한다. 특히 아들이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자식이 태어나고 십여 년이 지나면 아비가 죽어야했기 때문이다.
신가(神家)와 천가(天家)들 그들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태어난 자식에게 가문의 장인술(匠人術) 전부 전수하고 나면 그들
의 주문대로 무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무기를 죄다 만들고 나면 그 다음에 돌아오는 것은 수고했다는 치하의 말
이 아닌 죽음이었다.
무기가 제대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성능시험의 첫 번째 대상자가 바로 그
무기를 만들었던 철가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비전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철가인을
죽였던 것이다.
사육 당하는 짐승.
우리는 그들과 생긴 것만 같았지 인간이 아니었다. 사육 당하는 짐승이었다
. 그들의 감시 속에 사육 당하다 자식이 장인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인정되
면 그때부터 죽음을 향한 길을 걷는다.
장인의 피를 타고남을 증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태어난 자식의 피를 철에
먹였을 때 그 철이 피를 흡수하게 되면 그 아이는 장인의 길을 걷게 된다.
전 중원의 철가에 있는 모든 장인들은 단 한 명도 서른 이상 살지를 못했
다. 오백 년간의 전쟁이 신가와 천가와의 전쟁이 우리를 죽음으로 내 몰았
다.
그런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각 철가가 있던 곳에 무기를 만들 재료가 떨어지자 중원 각처로 철을 구하
기 위한 여행이 허락된 것이었다.
떠나는 자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보내준 여행이었기에 도망 칠 수도 아파
서 죽어서도 안 된다. 무조건 살아서 돌아와야 가족이 살아나는 것이다. 서
른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였지만 죽을 수 있는 자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 여행에서 우리 철가인들은 서로 만났다. 그때부터 우리의 일은 시작되
었다.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었기에 각 철가에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단단한 금
속이 한 가지씩은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조각도 있었고, 심해에서
얻은 것도, 더러는 화신이 폭발했던 곳에서 얻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
을 이용해서 우리의 희망을 만들기로 했다.
방법은 신가나 천가들이 이미 가르쳐 주었다. 무기를 통해서 그들의 힘을
받아들이는 방법, 그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 방법에다 우리의 것을 같
이 불어넣기로 했다. 바로 한(恨)과 분노(忿怒)였다.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이 걸리든지 우리는 해낼 것이다.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이어받고 또 그 자식의 자식이 이어받아서 백년의
세월동안 만들었다. 그들의 감시를 피해서 모든 것을 해내야했기에 비술의
전수자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부인들이 될 수밖에 없었
다.
아들이 태어나면 가장먼저 자신들의 희망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
다.
그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금속을 달구었던 불의 연료가 무엇이었는지 아는
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 신가와 천가에 의해서 죽어간 아버지의 시신을,
작은아버지의 시신을, 혹은 외삼촌의 시신을 태워서 그 불로 무기를 만들었
다.
우리의 한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가족의 시신을 태웠고 마침
내 열한 개의 비도가 탄생했다. 신가와 천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손바
닥보다 더 작은 비도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크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결된
줄도 같이 만들었다.
우리의 분노와 한이 하늘에 닿기를 원하면서 끊임없이 몸을 태웠다.
아버지를 태웠던 재와 삼촌의 뼛가루를 마시며 우리가 목마르게 불렀던 노
래, 광풍가(狂風歌), 우리의 기원을 들어달라고 우리의 한을 돌려달라고 피
를 토하며 광풍가를 불렀다.
그러나 하늘은 침묵했다. 열한 개의 신기(神技)가 만들어졌음에도 그것을
사용할 인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비도가 피를 받아들이는 인재, 그 인
재가 태어나질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의 비도를 더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그것을 천비(
天匕)라 부르기로 했다. 각 철가에서 십 년씩을 제련해서 마물을 만들기로
했다.
인신공양(人身供養).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늘에 비는 방법이었다. 천비를 만들 때 한이 되고,
천비를 두드릴 때 분노가 되기 위해 몸을 태웠던 사람들은 신가와 천가들에
의해서 죽어간 자들의 부인이고 딸이었다.
그들은 산채로 광풍가를 부르며 불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몸을 태워서 철가
인들의 한이 하늘에 닿기를 빌었다.
자신의 할머니가, 어머니가, 산 채로 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자식과 손자는 망치질을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망치질을 하면서 광
풍가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삶의 일부였다. 그렇게 백이십 년의 세월 속
에 수천의 생명을 먹고 만들어진 것이 천비다.
우리 철가인들의 노력에 하늘도 놀랐는지 마침내 우리의 한을 풀어줄 인재
가 태어났다.
천비가 아이의 피를 흡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같이 천하 자들에게는 애초에 무공 초식 같은 것이 없었다. 단
지 하늘의 기운을 몸 속으로 끌어들여 이용할 수 있는 방법만 알고 있을 뿐
이다. 나머지는 후예가 알아서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혈가는 곧 멸망할 것이다. 오신가의 후예들, 그들에게 우리의
힘을 시험해보았다. 성공이었다. 아직은 약해서 한 명을 놓쳤지만 그들의
적통 후계자를 네 명이나 제거했다.
오백 년만에 처음으로 시도한 철가의 반항이었다. 이제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먼저 죽어간 수천 수만의 철가인들 앞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다.
우리의 죽음은 혈가의 후예에게 또 다른 분노를 심어주게 될 것이다.
신가와 천가의 영원한 멸망을 바라며….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세 사람이 넋을 잃었다. 아무리 노예가 존재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정
도까지 해서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아니라 아예 소 돼지만도 못했
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저 석관 안에 있는 시신이 혈가의 마지막 후예?"
"아직 남아있습니다. 바로 저분의 인생이."
지금껏 읽었던 것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남아있었다. 바로 백산과 직접적
으로 관련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신가나 천가인들은 나를 파멸안(破滅眼)으로 또는 학살자(虐殺者)라 칭했
다. 아마 후대에도 그리 전해질 것이다. 나에게 도륙 당했다 하더라도 그들
의 후예는 살아남을 것이고 어떤 다른 시대에 또다시 역사를 쥐고 흔들 것
이기에….
하지만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에게 있어서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오늘 하루가 중요하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파멸안(破滅眼).
나는 스스로 파멸안이 되기를 원했고 악마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악마
도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신도 아니면서 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 자신들만의 고고한 이상과 자존
심만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내려다보던 신가와 천가인들도 결국은 인간이었
다.
나의 비도를 두려워했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인간이었단 말이다.
남보다 조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신으로 군림하고자 했던
야욕덩어리 들이었다.
뼛속 깊이 스며들어있는 것은 자신들만이 인간이고 최고라는 자만심과 허
영이었다.
편안한 죽음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따위 것들이 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
니를 죽게 했다는 것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분노가 강해질수록 힘은 커진다. 신가와 천가인들에게 훔친 무공으로 그들
을 도살하고 다녔다.
적을 죽이는 순간만큼은 자아가 사라짐을 느낀다. 내 자신도 주체할 수 없
는 분노와 살기가 온몸을 지배하고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없으면 정신이
돌아온다. 이것 또한 내가 안고 있는 숙명이었고 저주였다.
파멸안(破滅眼).
최초의 상태는 백색의 불이고 숙명의 불이다. 죽음의 길인지 알면서도 숙
명처럼 피워야했던 철가인들의 운명을 나타냄이다.
백색지안(白色之眼)을 말한다.
두 번째는 흑색의 눈, 아버지의 죽음에, 형제들의 죽음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살아야했던 침묵의 눈이고 체념의 눈이다. 흑색의 눈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오직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소리만 귓가에 들려온다.
뛰고 있는 모든 심장이 멈춰야만 살기가 멈춰진다. 실제로 우리의 무공은
이 흑색지안(黑色之眼)에서부터 발현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상태는 분노의 눈이며 광기의 눈인 광혈지안(狂血之眼)이다. 어머
니가 타서 죽는 것을 보고 딸이 불꽃이 되고, 누나가 재가되는 모습을 보면
서도 망치질을 해야했던 분노의 눈이고 미쳐버린 철가인들의 눈이다.
광혈지안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오직 살인만을 갈구하는 마물이다.
살아있는 인간의 뜨거운 핏속에 천비를 적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마물. 천
비가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마물인 상태가 바로 광혈지안인 것이다
.
하늘이 내린 저주였다. 아니 우리가 만들어낸 저주였던 것이다. 복수를 한
다는 명목 하에 아버지의 시체를 태우고 어미를 누나를 그리고 딸을 태우며
만들었던 우리들의 저주였다.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을 타고났던 나와 우리들의 미쳐버린 피로 만들어낸
광혈지옥비가 만들어낸 저주.
아니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랬던 수천 수만의 철가인들의 저주는 나 자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수천의 생명을 죽였는데 제대로 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너무 과한 욕심
아니겠는가.
이성이 없는 상태였지만 신가와 철가의 기운은 찾아낼 수가 있었다. 바로
내 몸 속에 들어있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뇌(雷)의 기운을 찾아가는 나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신가나 천가인들
중 유일하게 인간 취급을 해 주었고 사랑했던 여인,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헤어진지 십여 년이 더 지났고 이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도
그녀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결국 나의 죽음을 향한 행로는 그곳에서 끝이 났다. 그녀를 따라서 벽력세
가의 심처에 같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광혈지안에 돌입한 나는 인간의 피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마
물일 뿐이었다.
언제나 천비는 피를 원했고 그것이 나의 살심을 자극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남아있기에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그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갈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인간의 피가 아니면
결코 식힐 수 없는 갈증이었는데 목마름이 사라진 것이다.
오! 신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운명을 저주해야만 했다. 그녀였다. 화황, 그녀가 자신의 피로 나의
목마름을 해갈시키고 있었다.
뿌리쳐야 하는데 거절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나의 행동을 막았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이기심이
었다. 목마름이 해갈되는데서 오는 쾌감, 그것 때문에 뿌리치지 못했던 것
이다.
그녀는 그리 오래 살 운명은 아니었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을 탈출할
때 입었던 상처, 그것은 나로서도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런 그녀가 나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서 이른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웃으며 죽어갔다. 그녀의 가문이 우리 철가에 저질렀던 죄에
비하면 자신의 피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과 벽력천가를 용서해 달라는 말
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광혈지옥비의 저주가 풀린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피에 목말라 하지 않았다.
자살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준 생명이었다. 나의 일을 마무리하라
고 준 시간이었다.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신가나 천가는 없었다. 다 같은 인간들만 있었다.
여전히 계급이란 것이 존재했지만 한때 노예였던 자들이 왕이 되는 그런 세
상이 되어있었다.
우리 철가가 겪었던 그런 한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신가나 철가의 무리와 같이 자신들이 신이 되고 싶
어하는 자들이 또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파멸안은 재림
할 것이다.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고 나의 운명이었고 저주였던 광혈지옥비를 그들
에게 주었다.
광혈지옥비를 벗어다 함은 곧 나의….
…
…
"안 돼!"
팽무도의 고통스런 외침소리가 울러펴졌다. 그리고는 남궁세우로부터 철판
을 빼앗아 거칠게 던져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파멸안의 운명이 그 저주받은 운명이 백산에게 이어졌다. 그 녀석이 천살
성이었다. 그래서 혈뇌문의 무공이 완벽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자신이 이상
하다고 생각했던 의문이 풀렸다.
그런데 왜, 왜 백산이란 말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을 주었던 녀석
인데 자신의 실수로 저주를 안겨주고 말았다.
살아 생전에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죽기 전에 한 가지는 이루었
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최악의 패를 두고 말았다.
"빨리 가자! 산이를, 산이를 찾아야 겠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광혈지안이 되기까지는 사 년이 걸렸다 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 어디 가서 산이를 찾습니까. 구 형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편이 가장 빠릅니다."
팽무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말은 하고 있지만 남궁세우의 몸도 떨리고 있
었다. 팽무도에게 백산을 제자 삼으라 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설마
파멸안이 그런 운명을 타고났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일휘야, 이 사실은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한다. 알았느냐?"
"네, 알겠습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이 동굴에서 엄청난 비밀
이 밝혀졌고 그 당사자가 형님인 백산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씨팔!"
욕설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좆같은 인생들이다. 한(恨)으로 쌓은
탑만 해도 수백 개는 될 터인데, 과거에 그 정도 힘들었으면 되었지 않은가
! 뭘 얼마나 더 해야만 이런 지랄 같은 운명에서 벗어난단 말인가. 바라는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인데 하늘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부터 팽무도는 말을 잃었다. 언제나 초조한 얼굴로 대월산 쪽만 응시
하고 있었다.
풍신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휘와 남궁세우는 더욱더 강하게 광풍대원을 훈련시켰다. 백산의
운명을 바꾸는 길은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백산의 눈에선 이미 흑
색지안의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뇌룡현을 떠난 것은 그날부터 한 달이 더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