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만화루(萬花樓)
"왜 나를 보고 그러쇼! 내가 뭘 어쨌다고!"
옷도 사주고 했는데 왜 트집을 잡느냐는 것이다. 해줄 것 다해주고 욕을
먹는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광견조를 굶기는 것은 다 자기들 잘되라고 하
는 것이지 어디 자신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가.
그들은 무공이 올라가서 좋고 자신은 돈이 굳어서 좋은 그야말로 일거양득
의 표본이 아닌가. 게다가 덤으로 맛있는 짐승고기가 생기니 간식비까지 절
약이 된다. 이렇게 훌륭한 것을 가지고 지독한 놈이라 욕을 먹고 있으니 그
저 답답할 뿐이다.
"자고로 한 조직의 우두머리란 말이다, 자신은 배고프게 살지언정 부하들
을 굶기면 안 되는 법이다."
뼈있는 소리였다. 그도 이미 조천영이 언제나 들고 다니는 것이 돈 보따리
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전낭(錢囊)을 힐끗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런 소릴 하지 마쇼. 영감! 나도 저 옷을 얼마나 오랫동안 입은 줄 아쇼
?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이것도 우리 아버지 것이란 말이오."
굳이 자신의 옷을 사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새옷을 입으
면 뭐 하나, 따뜻한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아버지의 사냥복이었던 털옷
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 것은 사지 않았다고 생색을 내며 입고 있던 헤진 넝마도 광견
조의 옷과 함께 마차에 실었다.
"여기 있는 석 대인에게 물어보시오, 어떻게 살아야 부자가 되는지?"
느닷없이 백산이 석숭을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동업을 했던
사람이고 자신 때문에 거금을 벌었으니 동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백산의 마음을 모르면 중원의 최대 부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백산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네는 걱정이 없지 않나. 나에게 맡긴……읍! 으읍!"
"알았소! 알았다고. 저기 보이는 주루로 들어가시오. 음식도 가장 비싼 걸
로 시켜먹고… 살우 모사 너희들은 나 좀 보자."
갑자기 석숭의 입을 틀어막은 백산이 주변에서 가장 크고 화려해 보이는
만화루(萬花樓)라는 주루를 가리키며 볼멘소리를 했다.
석숭의 입을 막기 위해서 우선 눈에 보이는 곳을 가리켰는데 하필이면 가
장 고급 주점이었던 것이다.
그런 백산을 의미심장한 얼굴로 쳐다보던 석숭이 큰기침을 하며 지나간다.
마치 '이제 너 나에게 약점 잡혔다, 이놈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짠
돌이 중의 짠돌이로 소문난 백산이 자신들을 고급 주루로 들어가라고 하고
선, 살우와 모사를 불러서 무슨 이야긴가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꺼림칙했던
지 일행은 서둘러서 만화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백산의 마음이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이라 그런지 만화루(萬花樓) 안은 손님들로 왁자지껄
했다. 주문을 받기 위해서 뛰어다니는 점소이, 주문 받은 음식을 들고 나오
는 점소이, 타지에서 온 무림인들을 비롯해서 이 지역 사람들로 한창 붐비
고 있었다.
이십여 명이나 되는 대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서자 만화루 주인인 만석대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자꾸만 귀 쪽으로 도망가려는 입 꼬리를 잡아당
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요 근래 들어서 장사가 너무 잘 되었다. 오늘도 거의 꽉 들어찼다. 지금
들어온 인원만 해도 이십여 명이나 되어보였고 옷들도 제법 고급 축에 속하
는 것처럼 보인다.
"어서 옵셔!"
입가에 연신 웃음을 흘리며 만석대가 갈태독 일행을 맞이했다.
보통은 점소이가 손님을 접대하게 되는데 오늘처럼 바쁜 날은 주인이라고
놀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십 명이 넘는데 자리 있는가?"
"예, 있고말고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가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단체손님을 받기 위해 탁자를 붙여놓은 곳인
듯, 일행이 앉아서 식사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봐, 여기서 제일 비싸고 잘하는 것으로 가져오게. 술은 죽엽청으로 하
고."
탁자를 열심히 훔쳐내고 있는 점소이를 향해서 갈태독이 하는 말이었다.
백년이나 지났는데 자신이 뭘 알겠는가. 그래도 자신이 시켜야지 그 수전노
같은 놈이 나중에 딴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직접 주문을 했던 것이다
.
갈태독의 주문에 가장 즐거워하는 이들은 산짐승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던
광견조 일행이었다. 그러나 막상 요리가 자신들의 탁자 위에 놓여지자 젓가
락을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막연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것이 먹으라는 요리인지 그냥 멋으로 가져다 두는 것
인지 구별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머뭇거리고 있는 광견조에 비해서 백년 동안이나 세
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갈태독은 젓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먹기에 여념
이 없었다.
"너희들 왜 안 먹는 거냐?"
자신들 앞에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도 먹을 생각을 안 하고 멍하
니 앉아있는 광견조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이…그러니까…저…."
광견조 일행 중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제 딴에는 고급음식이라고 하
는 것을 많이 접해보았던 섯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거린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고 갈잎을 먹으려하니 마땅히 어느 쪽을 먼저 뜯
어야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산해진미가 무색할 정도로 쌓여있는 요리들을 보고는 무엇을, 어디를, 어
떻게 먹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는 모양이었다.
"음식이란 말이다 즐겁고 맛있게 먹으면 되는 게야. 특별한 격식이나 형식
이 있는 게 아니다. 단 남기지만 말고 먹어라. 그리고 이왕 이곳 호남성에
왔으니 이곳 요리에 대해서 알아두는 것도 괜찮겠지."
갑자기 식사가 요리 품평회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여기 있는 이 용(龍) 모습을 하고 있는 놈은 자룡탈포(子龍脫脯)라는 이
름을 가진 요리로 이곳 상강(湘江)에서 잡히는 장어의 살만을 가지고 만들
어진다. 남자의 정력에는 최고의 요리로 치는 것이니 많이 먹어라. 그리고
여기 상어 모양으로 만들어진 요리는 홍소어시(紅小魚翅)라는 것으로 상어
지느러미를 이용하는 요리다… 그리고 이것은 유초선사…이것은 춘야전…."
과거 천장지옥마라고 불리던 갈태독의 요리에 대한 지식은 끝이 없었다.
백 년의 세월이 변화시킨 것은 인간뿐이었는지, 먹는 입맛은 전혀 변하지
않았나 보다.
"호남 음식의 전체적인 특징은 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호남에서 나라
를 세우는 혁명가나 반골(叛骨)들이 많이 나온다는 소리가 있기도 하지."
"어르신, 요리에 대해 굉장한 식견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철목승이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세상이 마두니 악인이니 해도 그들도 인간임이 분명하다. 인간인 이상 먹
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연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
다. 그런 것들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공포의 마인(魔人)이었던 갈태
독이 요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 출신이 의가(醫家)이다 보니 자연 관심을 가지게 된 거지 연구했던 것
은 아니네."
갈태독의 얼굴에 알 듯 모를 듯 쓸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누가 마두(魔頭)라는 호칭이 좋아서 악인이 되었겠나. 강호에 몸을
담고 살다보니 자의건 타의건 은원관계(恩怨關係)를 맺게 되고, 그 은원관
계가 복수에 복수로 이어져서 마인으로 또는 악인으로 탄생되는 것이 아닌
가.
"의가라뇨? 어르신이 의가 출신이었단 말입니까?"
호기심이다. 천하가 알아주던 대 마인, 과연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람을 구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던 의가 출신이 악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
"어차피 잊혀졌던 이야기이네. 나도 이미 가슴속에 묻어버렸고. 벌써 두
갑자가 넘은 일인걸…."
자신의 손에 무수한 인간의 피를 적셨다. 인간을 살리기 위한 피가 아닌
죽이기 위해서 적신 피였고,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라는 악명도 얻었다.
이제 나이 백오십, 지금에 이르러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복수란 얼마나 부
질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왜 그렇게 복수에 연연했는지,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자신의 생각만으로 세상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젊다는 것인지는 몰라
도 돌이켜 보면 회한과 후회투성이의 인생이었다.
갈태독이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한 회한에 잠겨있을 때 주루 문이 벌컥 열리
고 상거지 꼴을 한 두 명의 인물이 들어섰다.
"화아! 이곳 장사 죽이게 잘되는구먼? 캬악! 툇!"
걸쭉한 가래침을 사정없이 뱉어내며 사방을 한바퀴 돌더니 가장 중앙에 앉
아서, 백산 일행 못지않은 고급요리에 비단으로 된 화려한 금색 옷을 입고
있는 인물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봐, 형씨! 이것이 뭐라는 음식이야, 맛있어?"
흙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탁자 위에 놓여있던 음식을 이리저리 저어가며
돼지죽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야, 살산! 이것 한번 먹어볼래?"
그는 자신과 같이 온 살산이라는 인물의 얼굴을 향해서 접시째 그대로 던
져버리는 것이었다.
철퍼덕!
살산이라는 인물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음식이 사방으로 튀며 주변 탁자
위로 쏟아졌다.
"꺄악! 억! 이런 육시랄!"
이곳저곳에서 욕설과 비명이 터져 나오고 일부 칼을 찬 무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중 가장 인상이 찌그러진 사람은 바로 이곳 만화루의 주인인
만석대였다.
얼마 만에 누려보는 호황인가. 중원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으로 알려진
형산(衡山)이지만 그렇게 볼거리가 많지 않다. 한때 형산파라는 무림의 문
파가 번성했을 때만 해도 이곳은 무림인들로 넘쳐났었다. 그러나 권불십년(
權不十年)이라 했던가. 그 형산파라는 문파가 몰락한 이후에는 여타 찾아오
는 이도 적어서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실정이었다.
그러다 올해는 운 때가 맞았는지 한 달 전부터 손님이 몰리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되면 날파리가 꼬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익히 경험했던 바이지
만 이번에는 너무나 조용했기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은 생각지도 않은 날파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야심한
밤이 아닌 한낮에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고 있질 않는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만석대는 재빨리 금
고에서 은 열 냥을 꺼내서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담고, 이제는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있는 두 놈에게 다가갔다.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두 놈이 서로 싸우는 통에 주변의 탁자며 의자는 다
부서지고 쏟아진 음식과 깨진 접시의 파편들이 엉망으로 널려있었다.
"저기 두 분 협객님들!"
서로의 멱살을 잡고 다른 탁자를 부수기 위해서 가고 있는 - 만석대의 눈
에는 그렇게 보였다 -두 놈을 최대한 공손하게 불렀다.
"여기…."
갑작스런 부름에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던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만
석대의 내민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만석대을 향해서 피식 웃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나를 쳤어?"
콰당!
콧방귀만을 남기고 계속해서 만화루의 집기를 부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놈
들이었다.
"멈추어라!"
이때쯤이면 으레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협객이다. 흑의를 멋지게 차려입
고 허리에 도를 찬 인물이 섭선(摺扇)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주루의 문
앞에서 외치는 것이었다.
"세상이 어수선하다 보니 별 하찮은 악졸들이 설치는구나. 좋은 말할 때
이곳에서 부순 모든 집기의 값을 변상하고 떠나라. 그럼 목숨만 살려주마."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이 뚜벅뚜벅 걸어와서 철목승 일행이 있는 자리
를 등지고 선 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섭선을 내렸다.
그리고 도를 거칠게 뽑더니 아직도 상황을 이해 못한 듯이 멍청하게 서 있
는 상거지 두 명을 향해서 겨누었다. 순간 협객의 도에서 붉은 도강이 한
치 정도 솟아 나오며 살기를 토해냈다.
"아! 도강이닷. 엄청난 고수가 등장했다."
상황을 주시만 하고 있던 무림인들의 눈에서 감탄의 빛이 흘러나왔다. 안
에 있던 많은 무림인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가운데 등장한 인물의 무공 수
위가 생각보다 대단했기 때문이다.
"에게게, 저 자식 개 폼 잡고 있네!"
그러나 상거지 두 놈은 눈도 하나 깜짝 안하며 도강을 내뿜고 있는 협객
고수에게 다가들었다.
"네놈이 우리 형산쌍웅(衡山雙雄)에 대해서 못 들어본 모양인데, 아가야
싸움은 폼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다."
말과 함께 두 놈의 상거지가 도강의 고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가, 도강을 만들어 내는 고수가 아닌가! 달려드는 두
놈을 향해서 자신의 도를 사선으로 힘차게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곳의 모든 무림인들은 확신했다. 도강의 고수가 상거지 두 놈의 목숨을
가볍게 걷어갈 것이라고… 네 동강이 난 두 구의 시체와 피를 연상했다.
와지끈!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환상과는 정반대로 되어버렸다. 자신들에게 날아오
는 도강을 뇌려타곤이라는 저급의 수로 피하며 도강의 사내에게 더욱 가까
이 접근한 것이다.
퍼억! 퍽! 퍼버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강을 구사하던 멋진 협객이 주루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난 두 대밖에 안 쳤는데 왜 네놈은 세 대나 쳐."
"무슨 소리야. 내가 두 대고 네놈이 세 대지!"
이번에는 협객을 때린 횟수를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는 상거지 두 놈이었
다.
주위에 있는 무림인들이 두 사람의 무공에 모두 얼었는지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도강을 구사하는 고수를 단 일 초만에 주루 밖으로 던져버
린 자들이다.
공연히 객기부리다 저승 가기 싫으면 얌전히 있다가 나가는 것이 오래 사
는 지름길인 것이다.
견디다 못한 만석대가 오늘 벌어들인 모든 돈을 가지고 두 놈에게 걸어가
고 있었다. 오늘 못 번 것이야 내일 벌면 되지만 탁자나 의자가 부서지면
당장 며칠간 장사를 하지 못하게 된다.
"저기, 이것 가지고 제발…."
피눈물을 감추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내밀고 있는 만석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은으로 백 냥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점소이 세 명의 일 년 치 급료에 해당
하는 돈이다.
"주인장, 그 돈 줄 필요 없소이다!"
이층의 계단으로부터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윤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검은색의 옷에 허리에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된 멋진 검이 걸려있고, 차가운 눈빛과 꽉 다문 입매를 가진 멋진 조각
상을 연상케 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어떤 새끼가 다 된 밥에 코를….'
상거지 중 덩치가 큰놈이 흙과 음식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돌리며 이층 계
단을 쳐다보는 바로 그때, 한쪽 구석에서 관심도 없이 식사에 열중하던 냉
추렴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인물을 반갑게 불렀다.
"사 오라버니!"
철목승의 제자인 백면마 냉추렴이 반갑게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세상천지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마도제일룡 마군자(魔君子) 사진악이었다.
"오! 추렴아, 네가 이곳에는 웬일이냐?"
묵직하고 매력적인 저음이었다. 이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지
만 얼굴 표정이며 행동거지에 나타나는 차분함과 여유로움은 대 문파의 후
예다운 노련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곳에 계셨습니까, 부 맹주님!"
사진악이 철목승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천마군주(天魔軍主). 자네도 천선비도 때문에 왔나?"
약간의 질책 어린 목소리였다. 그깟 천선비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라고
천마군까지 출동시켰냐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요청에 못 이겨 맹주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그랬을 것이다. 전쟁을 원하는 주전파가 득세하고 있는 이상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천선비도 회수라는 것은 명분일 뿐이다.
천무맹의 전력탐색이 주목적이고 전쟁을 위한 실마리를 잡기 위한 출동일
것이다.
"일단 저기 마도인을 좀먹는 버러지 같은 놈들을 처리하고 다시 뵙겠습니
다."
철목승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사진악이 상거지 두 놈에게 몸을 돌렸다.
"너희들 같은 놈들이 있어서 우리 마맹이 욕을 먹는 거다. 마가 무엇인지
도 모르는 놈들."
사진악은 분노했다. 자신은 떳떳한 천마맹의 일원이다. 남을 해친 일도,
피해를 준 일도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
두라 손가락질하며 피해 다닌다.
일반인들과는 동화되어서 살 수 없는 별종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놈들 때문이다. 이런 하찮은 놈들 때문에 마도인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이다.
두 상거지를 향해서 다가가는 사진악의 몸으로부터 서서히 불꽃같은 기운
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루 안에 있던 무림인들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천마맹의 차기 맹
주감으로 거론되고 있는 마군자 사진악의 얼굴을 본 것만 해도 영광인데,
천하제일인인 철혈전마 철목승과 같이 한 지붕 아래에서 숨을 쉬고 술을 먹
고 있었다니…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려 하는 사
람도 있었다.
그만큼 철목승이란 이름 석자가 주는 무게가 컸다.
난처하기는 두 상거지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저 잘난 놈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져버리고 말았다.
"형님, 이제 어쩝니까? 저 새끼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릴까요?"
"야, 저 자식을 박살내면 철 대협 얼굴을 어찌 보냐?"
두 놈의 상거지, 바로 백산과 소살우였다. 세 사람이 남아서 무슨 일인가
상의하는 것 같더니 결국 만화루에서 공짜로 밥 먹고 하룻밤 쉬어갈 수 있
는 계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백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모사를 바람잡이로 이용하는 것까지는 완벽했다.
이곳 주인이 오늘 벌어들인 돈 전부를 내밀고 있는 순간에 저 썩을 놈이
나타났다.
'개자식, 조용히 밥이나 처먹고 갈 일이지….'
백산이 내심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설봉산을 넘기 전 객잔에서 우연히 돈을 벌었던 백산이 그때를 기억해 내
고는 지금 이 짓을 생각해낸 것이다.
"형님, 그냥 도망가죠?"
아무래도 사진악의 기도가 심상치 않았는지 소살우가 백산을 향해서 튈 것
을 제안했다. 적당히 손을 봐주자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철목승과 관계
가 있는 인물이고 또한 저자의 기세로 보았을 때 처리하는 것도 쉽지가 않
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산의 생각은 달랐다. 정천무룡 백무천과 비슷한 기도를 풍기고
있는 이놈이 아무래도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순간에 기
어나와 영업을 방해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주루 안에 있는 인물들이 마도제일룡이라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호기심도 생겼던 것이다.
"살우! 이 자식 때문에 우리가 도망간 것으로 하면 공짜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끝끝내 공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내 앞에서 도망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살우가 하는 도망가자는 말을 들은 사진악이 냉소하며 두 사람을 쳐다보
았다. 조금 전 도강의 고수를 물리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상당한 고수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전음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햇병아리들이다.
마도인처럼 보이지만 삼류건달일 뿐이다.
이런 놈들을 확실하게 징계하여 마도인들도 다 같은 마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정파인들만 이런 일을 하란 법은 없질 않는가.
도망을 가기 위함인 듯 눈알을 굴리며 이곳저곳을 쳐다보는 상거지 두 놈
을 쳐다보던 사진악이 마치 네놈들 원하는 대로 해보라는 듯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사진악은 백산을 너무 몰랐다. 자신들을 전혀 무인이라 생각지도
않고 뇌룡현의 삼류건달임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그런 인간들이 아닌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백산이었다.
자신들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냉추렴을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더니 얼굴에 묻은 음식물과 흙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어맛! 백 공자!"
냉추렴의 뾰족한 음성이 주루 안에 울려 퍼지고 그녀의 놀라는 목소리에
사진악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의 목소리였으면 돌아보지도 않았을 사진악이었지만 동생으로 생각
하고 있었고, 약간의 연정마저도 품고 있었던 냉추렴의 목소리였기에 자신
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것이다.
냉추렴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진악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에
놀라 더욱더 커진 그녀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큰 눈 속에 선명하게 비
쳐지는 것 하나, 자신의 뒤통수에 다가와 있는 커다란 발이었다.
퍽!
정신이 아득해졌다. 멀어지려는 정신을 애써 잡아끌어 다시 정신을 차리려
는 순간,
쾅!
이번에는 의자 모서리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뒤통수에 이어 이번에는 관자
놀이에 오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주루 내에 소리 없는 경악과 충격이 감돌았다.
마도제일룡인 마군자 사진악이 이름자 하나 없는 무명 잡배의 일족(一足)
에 그대로 기절을 해버린 것이다.
"내놔, 임마!"
백산이 재빨리 만석대로부터 돈을 빼앗더니 소살우와 함께 그대로 줄행랑
을 쳤다.
그러나 주루 안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백산과 소살우에 대해서 신경을 쓰
지 않고 기절해 있는 사진악과 철혈전신 철목승만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이 거인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자신의 부하가 당했는데도 가만히 있
을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큰 관심사였다.
"험! 험! 빨리 자리 정리하고 저 애는 이쪽으로 앉혀라!"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도 백산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자신이 나서서 백산
을 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못난 놈.'
내심으로는 창피하기도 했다. 마도 제일의 기재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아주 단순한 계략에 속절없이 당한 꼴이 아닌가.
냉추렴을 이용한 백산의 임기응변도 기발했지만 무인이란 녀석이 적을 앞
에 두고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산이 장난을 쳤기에 망정이지 생사대전이었다면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
이다.
"여어! 오래 기다렸지? 일이 좀 있어서 늦었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백산과 소살우 그리고 모사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언제 자신들이 이곳에 왔었느냐는 표정으로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남아있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야 섯다! 주루 안이 왜 이리 조용해, 무슨 일 있었어?"
이 정도면 완전히 악극단의 배우 수준이다. 주인장을 불러서 음식을 더 시
킨 백산은 모든 일행이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자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변명
이라도 하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재미로 그냥…."
"백 공자!"
"자네?"
"오라버니!"
"가가!"
냉추렴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사진악이 당한 것은 오로지 자신 때문이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더 이상 놀라지 말았어야 했다. 고개를 돌림과 동
시에 날아오르는 백산을 보고 더욱더 놀라는 표정을 지어 사진악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백 공자가 그렇게…."
"냉 낭자, 사람 창피하게 왜 그렇게 큰소리를 해요. 밥 먹었으면 빨리 쉴
곳이나 잡아야죠?"
"맞다, 추렴아. 빨리 숙소나 정하러 가자꾸나!"
철목승이 서둘렀다. 조금 전에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아무 생각을 못했는
데 사진악을 이곳에 두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악의 체면을 위해서도 빨리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이 많은 무림인들이 보고 있는 데서 아무리 암습이었다고는 하지만 기절을
할 정도로 당했던 것이다.
'충격이 없어야 할 텐데….'
사진악을 업고 가는 광견조원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는 철목승이었다.
그때 백산은 하루 수입을 몽땅 날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만화루 주
인 만석대에게 가서는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협의 말은 사진악 대협이 악졸 두 놈을 물리쳐서 이 가게를
보존할 수 있었고, 사진악 대협의 윗사람인 철목승 대협이 소협의 일행에
있으니까 공짜로 해달라 이 말씀이십니까?"
'이런, 순 날강도 같은 놈.'
만석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두 놈의 악졸 때문에 오늘 하루를 허탕쳤는데 이십 명이나 되는
인원의 먹고 자는 것을 공짜로 해달란다.
복장이 터지고 환장할 노릇이다.
만석대의 표정을 초조하게 주시하고 있던 백산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
빨리 안면을 바꾸며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잠시 후,
백산이 무슨 제안을 했는지 만석대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더니 고개를 끄덕
이며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철 대협, 부탁 하나만 들어주쇼."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백산이 남아있는 음식을 먹다 말고 심각하게 앉아있
는 철목승에게 부탁을 들어달라는 것이다.
"무슨…."
퍼뜩 정신을 차린 철목승이 의아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친구가 부탁이라
니….
"다른 것이 아니고 이름 하나만 써주시오."
백산의 심각한 표정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주시하던 일행들도 이름 석
자만 써달라는 말에 허탈한 눈빛을 보냈다.
기껏 이름 석자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냐는 듯한 표정들
이었다.
"내 이름 석자는 어디에 쓰려고…."
"철 대협의 수하들도 왔으니 떠날 것도 같고…그냥 간직하고 싶어서 그렇
지요."
백산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철목승이 자신의 별호와 이름을 써주
고 말았다. 약간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써준 이름 석자를
들고 좋아하는 백산을 보고는 별 싱거운 사람하고는 하면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 * *
"누굽니까?"
사진악이 조용한 음성으로 철목승을 쳐다보았다. 마도 제일기재 또는 마도
제일룡으로 알려진 그다. 자신이 손을 봐주려 했던 두 악졸이 냉추렴과 철
목승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현 강호상에서 자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짐승이건 인간이건 무림인이건 일단 움직임이 있으면 미세한 기척이라도
내게 된다. 자신 같은 고수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때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냉추렴의 커진 눈 속에서 자신의 뒤통수로 다가오는 발만을 보았을
뿐이다.
"추렴이 때문에 방심해서 그런 거네, 마음에 담지 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자신
위에는 하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들이 무너지고 있을
터이다.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겠지….'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머리만 좋아서 기재라고 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신력도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기에 기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 것
이다.
'마불신승이 그 친구에게 날개까지 달아버렸군….'
그도 보았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일 장이라는 공간을 없애
버리며 사진악의 뒤통수를 가격했던 백산의 모습을. 벌써 몇 번을 보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새롭고 신비한 무공이었다. 백산을 쳐다
보면 볼수록 정도 제일이라는 소림이 더욱 크게 보이는 것이었다.
* * *
"그러니까 형님의 말씀은 이것을 대량으로 모사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모사가 자신 앞에 놓여있는 것을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백산을 바라보
았다. 그의 눈앞에는 사정을 해서 받았던 '철혈전신 철목승'이라는 일곱 자
가 쓰인 종이가 놓여있었다.
"그래 임마! 모사는 네 이름이고 그냥 베끼란 말이다, 똑같이."
어디에 쓴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무조건 요구하는 백산의 행동에 하는 수
없이 밤새도록 작업을 해야만 했다.
다음날.
백산 일행은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형산(衡山)이 목적지이다. 웬일로 이번에는 가는 길에 먹
는다며 마차에 싣고 있는 음식들을 보고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이 실으라고 성화를 하는 백산의 모습을 광견조원들은 이상하게 여기
고 있었으나 더 이상 산에서 날고기를 안 먹어도 된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열심히 싣고 있었다.
그때 철목승을 비롯한 마군자 사진악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주루 밖으로
나왔다.
밤을 새웠는지 사진악이 추레해진 얼굴로 백산을 향해서 다가왔다.
"자넨가?"
무명소졸(無名小卒)에게 당했으면 굴욕감이나 분노의 감정이라도 있어야
하는데도 말을 하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섞여있지 않았다.
하룻밤의 밤샘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으로 충분했던가. 임기응변에
서도, 실력에서도 완전하게 무너진 그의 얼굴에는 더욱더 성숙해진 원숙함
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마도제일룡이라 불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십니까?"
느닷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진악을 모를 리야 없겠지만, 미안한
감정에 우선은 모른 체하며 철목승만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 굴욕감을 주고 싶은가! 그럼 성공했군. 나는 지금 상당히 모욕을
느끼고 있네."
하룻밤 사이에 엄청 성장해버렸다. 불과 어제만 해도 저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방을 앞에 놓고 너 때문에 내가 치욕을 받았다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인물로 커가고 있
는 것이다.
애초에 똑똑한 사람이 자만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인물이 된
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표정이 그렇다고 마음마저 완전하게 평정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겠
는가! 잔잔한 수면 위에 던져진 단 하나의 파문이 사라지는 데는 상당한 시
일이 소요될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를 직접 보니 그 파문이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 어디 하나 특출나 보이지 않는 외모에 그저 시골 총각처럼 평범하게 생긴
청년일 뿐이었다.
'사진악, 사진악아! 네가 이것밖에 되지 못한 인간이었나?'
언제부터 겉모습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했던가. 상대의 초라한 몰골에
자신도 모르게 경멸의 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십 년을 같이 살고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했는데 한순간 스쳐 본 것을 가지고 한 인간
을 평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내심으로 씁쓸했다.
"천마맹의 천마군주 사진악일세."
내심 자책하던 사진악이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아무런 기세도 없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을 다스렸는지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경멸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 그렇습니까? 백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백산도 조금씩 인간의 형태가 되어가는지, 아니면 철목승의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다음에 한 번 더 뵙고 싶군요."
반드시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의 치욕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럴 자신
도 있고, 앞으로 더욱더 노력할 것이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있었으나
뼈있는 말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
자신의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뒤돌아 멀어지고 있는 사진악의 어깨가 유
달리 왜소해 보였다.
"떠나시렵니까?"
"전 맹에 동원령을 내렸다는군."
철목승의 얼굴에 우려가 가득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자신이 어떻
게 해볼 수 있는 그런 사항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일 뿐이다. 도도히 흘러
가는 역사의 강물을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천하제일인,
그것은 허울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역사 속의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할 것이다. 지난 백
년 간 키워왔던 양 세력의 충돌이다. 거기다 어느 곳에 숨어있는지 몰라도
천사맹이 있고, 만상투인루에서 언뜻 들은 맹(盟)이라는 단체까지, 역대 가
장 처절한 전쟁이 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다.
"어르신께도 이야기했네만 추렴이를 맡기고 갈까하네. 잘 돌봐주게. 데리
고 가면 전쟁에 보내야 할 텐데 그렇게는 못하겠네."
"저야 좋지요!"
철목승의 심각한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산의 목소리는 쾌활하게 바
뀌었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들 간에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백산의 발걸
음은 어기적거리며 만화루를 향했다.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듯이 손
을 비비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만석대가 주루 안으로 들어서는 백산을
보고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가져왔는가?"
"여기 있소!"
만석대의 손에 올려놓은 것은 지난밤 밤새도록 베꼈던 모사의 작품인 '철
혈전신 철목승'이라는 일곱 자가 쓰인 새하얀 화선지였다.
"이것만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만석대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최소한 만화루의 음식이 맛있었다고 써
있기를 바랐는데 화선지 아래쪽에 있는 달랑 일곱 자를 보고는 비명에 가까
운 소리를 질렀다.
"참! 이 영감 뭘 모르네, 그러니까 말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백산이 만석대를 쳐다보며 다시 무엇인가 설명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만석대가 무릎을 탁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
이야기를 마친 백산이 만석대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이것 보게, 백 소협! 어제 먹은 밥에다 오늘 아침 마차에 싣고 있는 음식
들, 그리고 잠까지 해서 이 글 한 장과 바꿨는데 또 무엇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인가?"
'철혈전신 철목승'이란 일곱 자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일곱 자의 글자가 이십 명이 넘는 대 인원의 세 끼 밥값과 하룻밤
의 숙박비로 변했다.
"이 화선지 값은 주셔야죠."
백산의 말에 만석대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은 한 냥을 내밀었다.
"그럼 두루 번창하시오."
백산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나는 이곳 만화루에 와서 요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도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인이 아닌 요리사가 되고 싶도록 만든 곳이
바로 이곳 만화루였다.
-철혈전신 철목승
이러한 글귀가 쓰인 액자가 만화루의 정면에 걸려있는 것이 훗날 아주 훗
날 발견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