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84)

제6장 청혼(請婚)

 그날 밤.

 백산, 조천영, 풍신개, 철목승, 냉추렴은 한자리에 모여서 축하잔치를 벌

이고 있었다. 혹시 하면서 끌고 왔던 것이 역시로 변했고, 이제는 여기 있

는 누구도 백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별다른 부상 없이 끝나기

를 바랄 뿐이었다.

 "자, 한잔해라. 네놈의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는 네가 원하는 대

로 된 것 같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광천마승은 그리 간단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는 소림의 최고 기재였다. 차기 방장 감으로까지 낙점

 되어 무공 수업을 받던 놈이었다. 그 놈이 소림사에 있을 때도 방장의 무

위를 넘어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는데 지금이야 오죽 하겠느냐."

 광천마승 요불.

 소림의 역사이래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나이 서른도 안되어

소림의 칠십이 절예 중 절반 이상을 터득하여 소림사 및 정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기린아였다.

 그런 그가 십 년 전 돌연 미쳐버렸다. 자신의 사(師)형제 세 명을 죽이고

소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처음엔 쉬쉬하면서 비밀에 부쳤지만 소림 고수들이 속속 강호에 모습을 드

러내고 비밀에 쌓여있던 사대금강까지 강호로 출두하자 모든 강호인들은 의

아해하였다.

 과연 저 위대한 소림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수백 년 동안 몇 번 나타나

지도 않았던 사대 금강까지 하산했단 말인가!

 그러나 비밀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인지 요불의 사건을 알게 된 강호는 아연

실색했고, 갈가리 찢겨진 사대금강의 시체를 보았을 때는 경악하다 못해 할

 말을 잃었다.

 누가 있어 저 전설의 사대금강을 상대해서 저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사대금강 사건 이후 많은 무림인들이 요불을 잡겠다고 나섰으나 모두 시체

가 되었고 요불은 사라져버렸다.

 "그깟 파괴승 하나 가지고 뭐가 걱정이야, 영감? 광천마승인가 하는 놈이

여자만 아니면 이길 수 있으니 걱정은 꽉 붙들어 매시오, 영감."

 백산이 걱정 어린 풍신개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내가 걱정하는 것은 말이야. 벌써 마누라 감이 둘이나 있는데 광천마승이

란 놈을 잡았을 때 너무 멋있다고 여자들이 반해서 떼로 몰려오면 어찌할까

, 그것이 걱정이지. 아마 누님도 그것이 제일 걱정 될 거야. 그렇죠, 누님?

"

 황당하고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저놈의 머리통에서는 어떻게 저런 사고가 나올 수 있을까 풍신개는 정말

백산의 머리통을 갈라보고 싶었다. 머리통에 똥이 찼나 확인하고픈 심정이

었다.

 한데 백산의 다음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근데 말이요. 그렇게 죄 많은 놈의 목을 따주면 보상이나 뭐 그런 것 없

어? 왜 있잖아 죄지은 놈들을 자신들이 잡기 힘들면 현상금 같은 것 걸고

그런 것 같은데…."

 크크큭! 푸 하하하!

 풍신개와 철목승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파안대소를 하고, 냉추렴

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야, 이놈아! 네놈의 머리통속에선 어떻게 그런 생각만 나오냐? 내 살다

살다 너 같은 꼴통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악인을 처단하는데 무슨 현상금이

고 보상이냐?"

 "그놈이 악인이었어. 말을 들어보니까 실제로 죽인 놈은 세 놈인가 밖에

없드만. 세 놈이야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사대금강인가 뭔가 하는

놈들은 죽이겠다고 쫓아온 놈들 아니야?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

다 그놈들이 죽었는데 그것도 죄가 되는 건가? 이건 엄밀히 말해서 소림사

내부의 일이야. 자신들의 제자가 동문을 살해했으니 그들이 잡으러 나오는

것은 당연한 거지. 그리고 사대금강이 죽고 나서 요불을 쫓았던 놈들 말이

야, 지들이 뭔데 남의 집안 일에 나서서 이것저것 간섭하냐고 정작 소림은

가만히 있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 천무맹도 가만히 있었을 테고."

 맞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허용된 일정한 틀을 세워놓고 그 안에 있으면 정상이고 그 너머

에 있으면 이단이라 치부하며 경원해버리는 많은 강호인들, 요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림사가 요청하지 않은 이상 그 누구라도 간섭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강호인들은 사대금강을 죽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요불을 악인 취급을 하며

 요불을 서로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무덤인지도 모른 채, 어쩌면 사대금강을 죽인 요불을 자신

이 잡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부가적으로 돌아오는 명예와 찬사를 기대했는지

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 광천마승인가 하는 놈을 패 죽여도 소림사에서는 아무

런 보상도 하지 않는다 이거지? 그럼 안 되지, 말로는 무림의 태산북두(泰

山北斗)라고 소문이 자자한 강호의 대문파가 자신들의 골칫거리를 깔끔하게

 해소시켜 주는데 입이야 닦겠어? 우리 삼류 건달사회에서도 빚쟁이의 빚을

 받아주면 일 할의 구전을 주는데… 나중에 꼭 한번 찾아가 봐야지. 그곳이

 숭산이라 그랬지?"

 이 일로 인해서 먼 훗날 소림은 백산에게 웃지 못할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 먼 훗날 이야기다.

 "야! 이 녀석 백산아! 자꾸만 헛소리할래?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할 거냐

고 이놈아! 네놈이 계속 이러면 네 사부를 이쪽으로 부른다."

 순간 백산의 모든 행동이 딱 멈춰졌다. 효과 만점의 약이었다.

 "그렇게만 해보쇼. 그럼 난 영원히 중원으로 안 가고 이곳에서 살아버릴

테니."

 백산이 풍신개의 복수에 대한 것을 빗대어 그를 협박했다. 자신이 없으면

풍신개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신이 하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백산은 그것으로 풍신개를 협박하

고 있었다.

 "그래 안 부른다, 안 불러. 치사한 놈."

 백산이 하는 말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말로는 항상 안 한다고 하는 놈

이지만 이미 마음속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고마움과 미안함, 두 가지 마음

이 교차해서일까, 술잔을 들고 있는 풍신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계획은 지금부터가 진짜라우. 지금까지 한 것은 그저 기초작업에 불과한

거라고. 그리고 이왕 시작했는데 끝장을 보아야지요. 완전하게 아무것도 없

는 것으로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헤픈 표정과는 다르게 백산의 얼굴에 스산한 살기가 피어오르

고 있었다.

*     *     *

 일 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 남자들에게는 힘이 드는 밤이요,

 여인네에게는 길어서 좋은 밤, 게다가 음모를 꾸미기에는 더없이 그만인

밤이다.

 등잔불이 일렁이고 있는 이곳은 백산이 머무는 처소였다.

 "이번에 형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제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일휘랑 같이 왔

습니다."

 석두와 일휘의 출현에 의아해하고 있는 백산을 향해서 석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산이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며 강구두를 쳐다보았다.

 "제가 구두 아저씨께 여쭤보았습니다. 그래서 형님이 이곳을 없애버리려

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고요. 그래서 제가 나서서 본격적으로 준비를

했고, 어제 미리 와서 사전 답사도 했습니다."

 석두가 제 품에서 커다란 두루마리 한 장을 꺼냈다. 그곳에는 만상투인루

건물의 설계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고 군데군데 십자표시가 되어있었다.

 "일단 이곳을 지워버리기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화약이 만 관, 벽력탄 한 상자 그리고 흑유 오십 통입니다."

 엄청난 물량이었다. 전쟁을 수행해도 충분할 정도의 물량을 준비해온 것이

다. 그러나 백산의 말은 더 가관이다.

 "그 정도로 부족하지 않겠냐?"

 화약이야 써 보았으니까 만 관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만 벽력탄이나 흑유는

 도무지 개념이 없는 백산이고 보니 약간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표

정이 생뚱맞게 변했다.

 "이 정도면 이곳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합니다."

 일단 화약 팔천 관은 건물 외부의 기초가 되는 부분에 매설하고 나머지는

관중석 아래에 있는 빈 공간에다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벽력탄은 백산이 지하 사층에다 상자째 가져다두고 그 중 하나만

빼가지고 나오면 된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흑유였습니다. 오십 통이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도 문제거니와 마땅히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고민했는데

며칠 전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곳 만상투인루는 중원과 멀리 떨어져있어서 필요할 때 술을 바로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괄로 구입하여 연말에 이곳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

서 그 술통에 술 대신 흑유를 가득 담아서 이곳으로 들여오기로 했다는 것

이다.

 "바로 삼 일 후입니다."

 석두의 이야기가 얼추 끝이 났을 때 백산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형님! 형님!"

 석두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난 백산은 멋쩍은 듯이 석두를 쳐다

보았다.

 "임마! 넌 이야기가 너무 길어. 앞으로는 좀 간단하게, 아주 간략하게 요

점만 정리해서 이야기를 해라. 나머지는 네가 다 알아서 하면 될 것이고,

내가 할 일은 뭐야?"

 며칠 밤을 꼬박 새가면서 고민하고 작업해온 석두의 수고를 너무 길게 말

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묵살해버린 백산은 자신의 일이면서도 어느 사이 방

관자가 되어있었다.

 "형님은 지하 사층에 벽력탄 상자를 숨겨놓은 뒤 하나 가지고 있던 것을

던지고 그냥 빠져나오면 그것으로 만상투인루는 끝납니다."

 지하 사층의 벽력탄의 폭발력으로 지하 삼층의 폭약은 자동으로 터질 것이

고, 폭약의 폭발로 지하 이층의 흑유에 불길이 일면서 외부의 화약이 같이

터지게 되면 이곳은 그야말로 불구덩이 생지옥이 되고 만다.

 석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근데 벽력탄이라는 것 믿을 만하냐? 한 상자면 별로 되지도 않잖아."

 한 상자로 지하 사층을 몽땅 날릴 수 있다는 석두의 말이 아무래도 미심쩍

은 모양이었다.

 "벽력탄 하나면 그 주변 일이 장 정도는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 어디서 샀냐?"

 석두가 설명하는 벽력탄의 효과에 대해서 깜짝 놀라하며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자꾸 딴소리만 하는 백산을 향한 힐난의 목소리였다.

 백산과 만나서 함께하는 첫 일이다. 무엇보다 시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석두가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화약이 만 관이면 그 양도 엄청날 텐데 그것을 어떻게 들

키지 않게 매설 하냐?"

 아까부터 백산이 가장 궁금한 것이 이것이었다.

 이곳 만상투인루의 건물 주변에는 곳곳에서 경비가 순찰을 돌고 있기 때문

이다. 아무 때나 건물 옆에 땅을 파서 작업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제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일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아! 예!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진식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환상미로진(幻

想迷路陣)을 설치하여 그 안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경비가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환상미로진.

이 진법은 인간을 현혹하여 살상하거나 하는 진식이 아니다. 단지 들어오는

 사람의 눈에 그 장소와 가장 어울리는 지형 지물을 환상으로 보여줌으로써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가게 만드는 진식일 뿐이다.

 무공을 모르는 문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으로 창칼의 위험으로부터 자

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되던 진식이 과거 권문세가였던 석두의 집안으로

 흘러들어와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짜식! 머리 엄청나게 썼구먼. 수고했어. 임마! 그런데 구두 아저씨는 왜

이 일에 협조를 하지? 일이 성공하게 되면 아저씨의 모든 기반이 깡그리 날

아갈 텐데. 어라? 구두 아저씨, 내공이 생겼네. 어찌된 일이죠?"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백산도 석두의 머리에 놀랐는지 수고했다는 말을

다 한다. 그만큼 석두가 가져온 장비며 계획은 백산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

던 것이다.

 그런데 백산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강구두의 내공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강구두에게는 내공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보통이 아니다. 이건 완전히 일류 고수 수준이 아닌가!

 "이번에 나갔을 때 공자의 사부께서 고쳐 주셨지요."

 회한의 목소리로 강구두가 입을 열었다.

 이십 년 전에 강구두는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천무맹의 전사대(戰士隊)

대주였다.

 그의 별호는 일검무적(一劍無敵)으로 불렸다. 비록 출신은 비천했지만 뛰

어난 자질로 젊은 나이에 전사대의 대주까지 된 입지적인 인물로, 많은 젊

은 무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배경 없이 홀로 성장한 자의 한계인지 전사대에 속해있던 명문세가

 출신인 부하의 잘못에 대주였던 강구두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무인으로서 목숨보

다 중요한 무공을 폐지당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이곳까지 왔다. 이곳에 와서 자신이 전사대의 대주로 활약할 때 목

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던 오구를 만나 구두파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야! 일검무적(一劍無敵) 강구두 너무 멋지다. 구두 아저씨는 그렇게 멋진

 별호를 가지고 있는데 운수대통 다쇠불알이 뭐냐고! 나같이 멋진 놈에게

그런 이상한 별호가 가당키나 해? 야, 석두! 너 머리가 있으니 생각을 좀

해봐라."

 백산은 강구두의 과거 별호가 일검무적이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 주변에 있는 놈들의 별호가 멋있어지면 안 돼.

'

 백산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한번 지어진 별호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으

로 알고 있다. 그래서 별호가 없는 녀석들의 별호는 자신이 직접 지어주기

로 했다.

 그것의 첫 번째가 바로 일휘와 석두였다.

 "좋아. 내 이미 별호가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 안 한다. 하지만 석두,

일휘 너희들의 별호는 내가 지어주마. 아주 아주 멋있는 별호로 말이야."

 백산이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석두와 일휘를 쳐다보았다.

 "형님, 저희들은 별호가 있는데요?"

 석두가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말렸으나 눈치 없는 일휘가

 백산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뭐라고 지었는데? 아주 멋있게 지었겠구나!"

 백산이 일휘를 쳐다보며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일휘는 백산의 미소에서 약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으나 어두워서 그런가 하

고 그냥 지나쳤다.

 "저는 절대천룡(絶代天龍) 일휘고요. 제는 절대천뇌(絶代天惱) 석두라고

지었습니다. 어때요?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형님."

 백산의 머릿속에서 툭하며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날 밤 주방장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 세 명이

시퍼런 칼을 들이대면서 달걀을 내놓으라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주방에 있

던 달걀을 다 내어주었다.

 그리고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상당량의 술을 훔쳐먹었던 것

이다.

 "이 씨팔. 그런다고 또 이렇게 패냐? 벌써 이게 몇 번째냐?"

 일휘가 달걀로 얼굴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새끼야! 그런 소리를 왜 해. 내가 말렸잖아!"

 "너희들 두 놈이야 그놈의 부하니까 그렇다 쳐도 왜 가만히 있는 나까지

이렇게 됐냐고? 이 나이에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냐?"

 세 사람의 한숨소리에 석두의 말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래도 이만한 것이 다행이다. 세 사람이 나눠 맞으니까 조금은 줄어든

것 같은데…."

 "나쁜 새끼…."

 강구두의 욕설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세 사람은 달걀로 부지런히 얼굴

을 비비고 있었다. 주변에 술병을 쌓으면서….

*     *     *

 다음날 밤.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번쩍이는 새하얀 섬광이 비추는 사이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네 개의 그림자

가 보였다.

 "비는 안 들어가게 밀봉은 잘 했겠지?"

 "네. 기름 먹인 종이로 완전하게 감싸서 바람 한 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날씨가 좋아서 작업을 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형님, 날씨 한번 기가 막히게 좋군요!"

 백산과 석두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일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

앞을 가릴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두 사람은 날씨가 좋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휘는 자신의 궁금증을 물어보기 위해 어깨 위에 있는 짐을 다잡고는 석

두를 향해서 몸을 돌리는 순간,

 "일휘야! 때로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건강에 좋을 때가 있다.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상자에 번개라도 내리치면 우리 모두는 끝장이다."

 일휘를 돌아다본 백산이 싱긋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합니까? 그러니까 여기 이놈이 번개를 맞으면 '

꽝!' 하고 터진다 이 말 아닙니까?"

 백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일휘의 걸음이 빨라졌다.

 "빨리 가십시다. 여기서 얼쩡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구두 아저씨! 빨리

 오라니까요?"

 일휘가 불안한 표정으로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면서 부리나케 내달리고 있

었다.

 "자식 겁은 많아 가지고. 오래는 살고 싶은 모양이지?"

 백산의 말에 석두와 강구두는 큭큭거리며 저 멀리 멀어지는 일휘를 쫓아

몸을 날렸다. 무거운 화약상자를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젖어버린 땅바닥

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삼 일간에 걸친 화약 매설 작업은 모두 끝이 났다. 흑유도 무사히 들어온

것을 확인했고 이제 모든 준비는 완료된 것 같았다. 몇 가지 지시 사항과

함께 석두 일행을 돌려보낸 백산은 자신의 방에서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

고 있었다.

 "이 부자 양반이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그냥 튄

것 아냐?"

 혼자 중얼거리던 백산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거지 새끼나 부자나 지 말하면 오는 것은 같군!'

 "백 공자 있는가?"

 만금돈노(萬金豚奴) 석숭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왜 안 오시나 했습니다. 앉으시죠."

 백산이 음흉한 미소로 석숭을 맞아들였다.

 그동안 얼굴도 비치지 않던 석숭이 드디어 투신을 뽑는 최종전을 이틀 앞

두고 백산을 찾아온 것이다.

 "의외로 표정이 무척 밝구먼. 자신 있는가 보네?"

 "저는 이미 석 대인과의 약속을 지켰고 앞으로도 변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 이제 석 대인의 약속만 남았습니다."

 백산은 만금돈노 석숭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금돈노(萬金豚奴) 석숭은 중원제일의 거부이다.

 수백 년간 중원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석숭의 석가장만은 나라가

바뀌었어도 계속 건재했다.

 자신조차도 그 끝을 모르는 막대한 금력이 새로운 왕조를 원하는 세력들로

 하여금 석가로 손을 내밀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석가는 계

속 살아남았던 것이다.

 "내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는데, 광천마승에게는 돈을 걸고 싶어도 걸 수

 없게 해놓았더구먼."

 만상투인루를 파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두었다는 것이다.

 투신전의 비무자들의 실력이 엇비슷할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

처럼 한쪽이 워낙 밀려버린다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즉 한쪽에만 돈이

전부 걸리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약한 쪽에 고율의 배당을 주면서까지 그쪽으로 돈을 걸도록 유도하

고 또한 최대로 걸 수 있는 한계치를 정해서 한쪽으로만 돈이 몰리는 것을

아예 차단하고 있었다.

 그 한계치가 오억 냥이라는 말이었다. 즉 걸린 금액이 오억 냥을 초과하게

 되면 그 쪽은 더 이상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의 배당은 이대일. 자네의 배당률은 무려

 이십 대 일이더군. 한마디로 말하면 자네를 비무 상대로 취급도 안 해준다

는 말이네. 그건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고, 그래도 자네는 자신이 있

는가?"

 석숭이 그가 있던 북경을 떠나서 이곳까지 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주군의 부탁을 받고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왔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도 하지 못한 채 이상한 일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바로

 백산과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단순히 마령호의 가죽을 팔러왔다 만난 청년

, 권력의 암투 속에서 살아 온 그였기에 투박하지만 거리낌없는 이 청년의

행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어떤 신선함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게

하고 있었다.

 그는 중원 제일의 부를 가지고 있는 상인이다. 부의 축적이란 상술만을 가

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을 제대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잘못

선택된 투자는 사업만 망하지만 잘못 선택된 인물은 집안을 망하게 한다는

것이 석숭 일가에 내려오는 상술의 제 일도(一道)를 차지할 정도로 인간을

보는 안목을 중시한다.

 그러한 석숭에게 백산이란 인물은 자신의 구미에 딱 맞았다. 십 여 년 전

에 이곳에 터주대감으로 있던 초인파를 정복했을 때의 그의 활약상을 보더

라도, 이런 유형의 인간은 한번 신뢰를 주면 상대방이 배신을 하기 전까지

는 절대로 자신이 먼저 배신하지는 않는다.

 친구가 원하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이 친구의 성장이 궁금

하기도 했다.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절대 이름 없이 사라져 갈 그런 친구

가 아니었다.

 "제 나이 이제 스물 다섯입니다. 죽을 자리인줄 알면서도 뛰어들 만큼 오

래 살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 해볼 것도 너무 많고요."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다.

 백산은 백산대로 석숭의 모든 것을 믿는 것은 아니다. 근본도 세력도 아무

것도 없는 자신에게 아무리 돈이 남아 돌 정도로 많다지만, 설령 그것이 약

속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쉽게 투자할 인간은 세상천지에 없다.

 돈 많은 석숭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어 자신에게 이런 호의

를 베푼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수, 반박귀진의 경지에 도달해 겉보기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도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바로 석숭이었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없기에 백산도 묵인하고 지금까지의 계획을 소리

없이 이끌어 왔다.

 "아마도 내가 예상하기는 광천마승(狂天魔僧)에게는 돈을 걸지 못할 걸세.

 일부 소소한 정도의 돈을 걸도록 해 주겠지만, 우리 같은 부호들이 돈을

걸게 될 때는 그 대상은 자네가 될 것일세. 나도 자네 앞으로 이 억 냥을

걸려고 하고, 그럼 이곳은 파산 정도까지 가게 될 걸세. 아니면 이곳의 책

임자 및 그와 관련된 자들은 이렇게 되고 내년이 되면 또 다른 책임자에 의

하여 새롭게 투신전이 열리게 될 테지."

 석숭이 손으로 목을 쓰윽 그어 보이는 시늉을 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죠. 그럴 수도 없을 거구요 …그건 그렇고 제가

비무 끝나고 복용할 영약은 구해놓으셨습니까? 광혈단의 부작용이 슬슬 나

타나기 시작하는데…."

 백산이 걱정되는 투로 석숭에게 물었다.

 정말이지 독한 놈이었다. 광혈단이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음에도

그런 사실을 석숭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약 타

령이다.

 "걱정 말게. 인세에 보기 드문 영약으로 구해놓았네. 그것을 복용하게 되

면 잃어버린 자네의 모든 공력이 돌아옴은 물론이고 추가로 일 갑자 이상의

 공력을 더 얻을 수 있는 영약일세. 마침 이곳에 그런 약이 있어서 오만 냥

이나 주고 구해야 했네. 그것도 그 노인네가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 사정 이

야기를 다하니까 그제야 허락하더군. 물건은 자네 비무하는 날 받기로 했네

."

 이곳에서 영약을 구했다는 석숭의 말에 백산은 무엇인가 뒤통수를 붙잡는

나쁜 기운이 이는 것을 느꼈다.

 영약을 판 사람이 노인네라는 석숭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자신

의 가문을 위해서 강제로 앗아간 내단을 설마 팔 리야 있겠는가 싶어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백산과 이야기를 마친 석숭이 돌아갔다.

 "이제 슬슬 마무리로 들어가고 있군. 금뎅이 녀석이 없어서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거야 강호에 가면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 놈에게 진 빚이야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겠지…."

*     *     *

 지평선 너머 스러져가는 태양은 마지막 시간을 불태우듯 찬란한 황금빛을

갈대밭에 뿌렸다. 한낮의 더위에 지친 듯 하느작거리던 갈대들은 다가오는

어둠을 향해 고스란히 몸을 내맡기고 있다.

 황금빛 노을의 한 가운데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두 남녀가 서 있다.

백산과 조천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안타까

워."

 아스라한 지평선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조천영이 백산에게 말하

는 것인지 자신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모호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것들을 다 돌

아보고 싶고요. 중원 절경을 구경하러 다닐 때 누님이 옆에 있다면 그 아름

다움은 배가 될 텐데…."

 순간 조천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혼이었다. 그리고 맨 처음 떠오르는 생

각은 백산과 함께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

러나 지금의 자신은 어떠한가?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그녀는 결혼생활

을 경험한 여자였다.

 자신의 양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난! 난 아냐, 아니라고!…동생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있을 거야."

 격해지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안간힘을 쓰며 조천영이 울먹거렸다.

 좋은 사람이란 것은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알고 있다. 배신당한 상처 때

문에 인간을 믿지 못하는 자신을 치료한 남자이다. 과거에 이런 남자를 만

났더라면 사랑을 저주하며 강호를 떠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와락!

 조천영에게 몸을 돌린 백산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누님 정도면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그리고 지나간 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원하는 누님은 지금 이 모습의 누님이지, 결코 다른 모습의

 누님이 아닙니다."

 껴안은 상태 그대로 조천영의 눈을 쳐다보며 백산이 힘있게 말했다. 그러

자 조천영이 눈물을 흘리며 백산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백산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조천영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조용한 어둠이

두 사람의 주위를 감싸고 백산과 조천영은 그 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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