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무림삼천(武林三天)
"이거 지금 누가 내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귀가 왜 이리 가려워?"
그 시각, 비무대 위에서는 전대 투신이었던 혈검마(血檢魔) 나극과 마겸(
魔鎌)과의 비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역시나 백산 앞에는 만두가 놓여있었다.
"백 공자는 먹을 줄 아는 게 만두밖에 없나봐요? 항상 만두만 있어요."
냉추렴이 웃으면서 백산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얼레? 누님! 오늘 해가 분명 동쪽에서 떴죠? 냉 소저가 먼저 말을 다 걸
고 웬일이래요? 드디어 이 백산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어. 냉 소저도 점
점 남자 보는 눈이 생기는군요."
냉추렴이 지나가는 투로 인사 한번 한 것을 가지고 무지하게 호들갑을 떨
며 좋아하고 있었다.
"첫째는 여기 있는 누님이 만두를 좋아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거기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싸다는 것이지요."
싱글거리며 간단히 대답을 하는 백산이었다. 그러나 백산이 만두를 좋아하
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백산에게 기억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만두가게 장 노인 때문이다.
찾아가면 언제나 만두를 공짜로 주었던 암시장의 장 할아버지, 자신들의
구역싸움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식당에 들어가면 언제나 만두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자신도 모르게 만두에
손이 간다. 자신 때문에 돌아가신 장 노인에게 죄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표
현하는 백산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거 내가 좀 늦었군! 오늘도 역시 만둔가? 이제는 좀 바꾸지 그래?"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봐 냉추렴과 같은 소리를 하며 철목승이 나타났다.
"어서 오쇼, 철 대협. 오늘은 안 오실지 알았습니다. 저들 둘이 같은 집
소속이라 비무가 제대로 될 리도 없을 것 같고… 보기에 영 껄끄러울 줄 알
았는데…."
백산도 어디서 들었는지 혈검마와 마겸이 같은 천마맹 소속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아닐세. 아마도 저들은 목숨을 건 혈투를 하게 될 걸세. 어느 한쪽이 죽
어야 끝이 날 거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천마맹의 인물들. 자신의 수하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이 바로 자신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비무를 해야 하는 것을 지켜보는 입
장이 난처했는지 철목승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가시질 않았다.
"엥? 같은 편끼리 웬 목숨을 건 혈투? 지들끼리 싸워서 누구 좋은 일 시키
려고 그러나?"
백산의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표정으로 철목승을 쳐다보았다. 무림인의 생
리에 대해서는 석숭에게 어느 정도 들은 적은 있지만 같은 편끼리 죽고 죽
이는 이런 것인지는 몰랐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구두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철목승이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천마맹(天魔盟)의 현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주겠네. 지금
이야기하는 내용은 우리 천마맹뿐 아니라 천무맹(天武盟)도 마찬가지 현실
일세."
'천마맹(天魔盟)'
천무맹, 천사맹과 함께 무림삼천(武林三天)이라 불리며 그 중 가장 강한
세력이라 평가받고 있는 마도 집합체.
무수히 많은 고수와 인재들이 넘쳐나고, 모든 마도인들의 흠모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곳. 패도를 추구하는 젊은 무인들의 꿈이 서려 있는 곳
으로 오로지 강자존의 철혈원칙이 지켜지는, 그야말로 마도(魔道)인의 성지
(聖地)이다.
천마맹의 창시자는 패천신마(覇天神魔) 궁무독(宮茂獨)이란 인물로 그 당
시 패천마궁의 궁주였다.
그때만 해도 마도(魔道)의 힘이 정도보다 현저하게 약했기에 마도 인물들
은 정도인의 명성을 쌓아주는 표적 역할만 하고 있었다.
어떠한 세력에 속해있지도 않고 오로지 무도만 추구하는 무인들의 실정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들과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魔)나 사(邪)
로 낙인 찍혀서 제거당하는 실정이었다.
그때 궁무독의 일성(一聲)이 강호 전역을 질타했다.
"정(正)이 아닌 자들은 전부 악(惡)이고, 사(邪)이고, 마(魔)인가? 패도(
覇道)를 추구하는 무림인이여! 진정한 무도를 추구하는 무인들이여! 패천마
궁으로 오라! 진정한 무인의 세계가 있다."
폭풍이었다. 바람이었다. 정파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사냥당하던 많은 마인
과 무도를 추구하던 무인들이 패천마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정파인들은 어느 미친 작자의 쉰 소리로 취
급했다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손을 쓰려 했을 땐 이미 너무 커버린 세력
에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궁무독은 이들 세력을 정비하여 천마맹이라 이름을 짓고 완전한 강
자존의 세계를 만들어버렸다.
그때가 벌써 백 년 전이다.
묘한 것이 세상사였다. 정파(政派)가 득세하고 있을 땐 강호상에 크고 작
은 싸움이 무수히 일어나더니, 마세(魔勢)인 천마맹이 득세를 하자 강호의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러한 평화가 강호 오대세가의 집합체인 오천맹(五天
盟)을 만들었고, 백살마대(百殺魔隊)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강호 최대의 세력으로 무림을 장악한 지 백 년, 중간에 오천맹에게
자리를 내준 적은 있었지만 천마맹의 힘은 더 강해졌다. 외부로 표출하지
못하는 힘이 내부로만 쌓여서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고 천마맹은 언제 터
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무림인이 손에서 검을 놓아버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 같은가?"
이야기를 하다가 철목승이 대뜸 백산을 향해서 물었다.
"음! 거 왜 쓸데없는 것은 묻고 그러쇼.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아무리 굴려봐야 나올 것도 없는 머리를 짜내다 결국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지 백산이 발끈하며 철목승을 노려보았다.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 하는 표정이었다. 이러한 백산의 표정에 무안해
진 철목승이 약간은 멋쩍은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바로 권력에 대한 집착일세."
이미 내부적으로 포화상태가 넘어버린 천마맹은 작금에 와서는 권력의 암
투장으로 변해버렸다.
그 암투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바로 천마맹의 핵심인 구마전(九魔展)의 전
주들인 구마들이다.
그들 중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이 검마(劍魔) 요대철(尿帶哲)의 검마전(劍魔
展)과 철마(鐵魔) 지청인(池靑燐)이 전주로 있는 철마전(鐵魔展)이다.
맹주인 개천신마(開天神魔) 악천(岳天) 또한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맹(
盟) 내의 사정상 묵인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명목상의 부맹주인 철혈전신
철목승은 구마들의 권력투쟁을 보다 못해 외유라는 핑계로 제자 냉추렴을
데리고 맹을 나와버렸다.
"저기 있는 혈검마는 검마의 제자이고, 마겸은 철마의 제자네. 맹 내의 위
치 또한 상당하지만 문제는 저들 두 사람이 젊은 층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지. 아마도 이번 비무의 승자는 맹(盟) 내에서 입지가 상당히
높아지겠지…."
이야기를 마친 철목승은 목이 마른지 술을 한잔 들이켰다. 권력이니 하는
것에 문외한인 그가 보아도 천마맹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짜식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걸로 만족하고 잘살면 될 일인데 왜 그렇
게들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누님, 우린 그런 식으로 살지 맙시
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 보자고요."
마치 자신의 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는 백산의 말에 조천영은 처음에
는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하니 백산을 쳐다보다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조 소저, 축하드립니다!"
갑자기 철목승이 축하한다는 말을 내뱉자 조천영과 냉추렴이 깜짝 놀라했
다. 마치 철목승이 한 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축하한다는 듯한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내공이 완전해졌군요? 새로운 빙후(氷后)가 탄생했군요."
"그게 무슨 소리죠, 사부님?"
철목승의 빙후 탄생이란 말이 궁금했던지 옆에 있던 냉추렴이 철목승을 바
라보며 물었다.
"조 소저의 무공이 천년 전 여인 최고 고수였던 빙후의 독문무공인 빙천수
라마공(氷天修羅魔功)이 아니냐. 빙천수라마공은 대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가 십이성 완벽하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다. 지금
의 조 소저처럼 말이다."
"아! 어쩐지 언니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니…."
빙천수라마공을 십이성 완성한 조천영은 이제 얼음의 마녀가 아니었다. 살
포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차가운 겨울 한기를 견디고 피어난
한 떨기 매화처럼 원숙한 아름다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짐을 덜었다는 안도감이랄까, 아니면 백산에 대한 신뢰감
때문일까, 그 무엇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가슴속이 차갑지는
않았다.
"자네 작품인가?"
네가 저렇게 했냐는 소리다.
"영감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를 않아서 그렇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거
죠 뭐. 나는 빙천마공인가 하는 것에 그런 제약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앞
으로 다칠 일 없으니 잘된 거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조천영
이 강해져서 더 이상 덤빌 상대가 없다는 것에 만족해했다.
이런 백산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철목승이 그의 머리를 향해서 손을
뻗으며 농을 걸었다.
"자네의 머리를 한번 갈라보고 싶구먼. 얼마나 더 많은 것이 나오는 지 보
게 말이야."
이제는 그도 백산에 대해서 알려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이 밝히기
를 꺼리는데 방법이 없다.
"에이그. 저 자식들 좀 살살하지. 같은 편끼리 왜 저리 거칠어. 무식한 것
들이 힘만 세 가지고."
무식한 것이 힘만 세다는 말이 백산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
도 모른 채, 비무대를 쳐다보던 백산이 혀를 끌끌 찼다.
비무대에서는 핏빛 강기를 내뿜는 두 개의 병기가 어지럽게 얽히고 있었다
.
마겸은 자신의 낫을 좌우로 쓸어가면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
나고 혈검마는 서로 간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순간 혈검마의 검에서 시뻘건 강기가 튀어 나왔다.
탐색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하려는 모양인지, 한때는 검마의 독문무공이
었고 지금은 혈검마의 무공이 된 철혈마검법(鐵血魔劍法)을 운용했다. 이것
을 본 마겸이 얼굴을 굳히며 혈검마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자신의 무
기에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의 손으로부터 시작된 붉은 기운이 쇠사슬을 타고 나아가더니 살기를 머
금고 있던 낫에서 붉은 광채로 터져 나왔다. 마치 한 마리의 혈용이 대가리
를 쳐들고 사냥감을 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 대치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서 뛰어들며 자신의 무기를 힘차게 뿌렸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두 사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잔상으로 남은 혈광뿐
이었다.
"어검술이닷!"
관중석에서 관람하던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붉은 검강이 솟아있는 혈검
마의 검이 마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창백해진 마겸은 재빨리 낫을 당겨서는 왼손으로 잡고 자신에게 날
아오는 검을 힘껏 내리쳤다.
서걱!
낫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혈검마의 검이 마겸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해 버
렸다.
생사투인전 때부터 단 한 명의 상대도 살려주지 않고 잔인하게 처리해 버
렸던 마겸은 자신 또한 투신전의 재물이 되어 그렇게 스러져 갔다. 동족의
죽음에도 즐거워하고 있는 인간들, 이미 추악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져버
린 이곳 비무장에는 생사와 돈만이 남았다. 거기에다 인간의 광기까지….
* * *
드디어 백산의 비무가 있는 날이다.
객잔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는 백산의 얼굴이 아침부터 심각했다.
역시나 식사는 또 만두였다.
전일 열렸던 광천마승(狂天魔僧) 요불과 혈목괴(血木怪)의 승부를 생각하
고 있었다.
'자식 머리에 털도 없는 놈이 아는 무공은 엄청 많아 가지고….'
광천마승 요불에 대한 것이었다.
천사맹(天邪盟) 출신인 혈목괴의 무공은 사이한 환술을 기반으로 하는 혈
목마공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상대가 허우적거릴 때 그를 격
살하는 무공이었고, 지금까지는 모두 성공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비록 파계승일지라도 소림사에서 무공을 익힌 요
불에게는 그의 환술이 전혀 먹히지를 않았던 것이다.
역시 소림이었다. 요불의 손에서 나오는 소림 칠십이권은 혈목괴를 꼼짝
못하게 묶어두고 있었고, 그의 몸에서 나오는 불심 서린 무공은 혈목괴의
환술을 무력화시켰다.
혈목괴로서는 자신이 가장 꺼리는 천적을 만난 것이다. 결과는 곧바로 드
러났다. 환술이 없는 혈목괴는 더 이상 고수가 아니었다. 요불에 의해서 계
속 밀리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었던 요불의 잔인함. 비록 파계승이기는 했지
만 한때 소림에 몸담았던 인물인데 어찌 그리 잔인해질 수 있는지… 혈목괴
는 온몸이 분해가 되어 찢겨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요불의 눈에 비친 사기 가득한 혈광에 백산은 저도 모르게 몸
을 부르르 떨었다.
'거참! 어떻게 정파 무공을 익힌 자에게서 그런 사기가 흘러나올 수가 있
지? 에이 풍신개 영감이라도 있으면 물어 볼 수나 있지… 개똥도 약에 쓰려
면 없다더니….'
백산이 머리를 긁적이며 식은 만두를 뒤적거렸다.
"인석아, 그동안 내가 없어서 심심했지?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술이냐?"
백산의 술을 가로챈 풍신개가 한 입 들이켜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 바꿔야 되겠구먼! 거지 새끼도 지 욕
하면 온다는 말로. 언제 왔어요?"
기다리던 풍신개가 나타났음에도 반갑다는 표정대신 거지 새끼라 욕을 해
대자 풍신개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붉게 변했다.
거기에다 대고 결정타를 날리는 백산이었다.
"뛰어온 모양이네? 얼굴이 벌게졌소, 나이 드신 양반이 뭐가 급하다고. 자
, 숨 좀 돌리쇼."
한잔을 더 따라주기 위해서 앞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었다.
"야. 이놈아!"
어째 이놈만 보면 좋았던 기분이 엿 같아진다. 그의 면상에다 대고 뛰지
말라며 나잇값 좀 하라고 한다. 소운만 아니었으면, 자신의 일에 이놈이 필
요하지만 않았어도 벌써 한바탕 했을 것이다.
더 이상 화도 내지 못하고 혼자서 씩씩대던 풍신개는 백산이 준 술을 거칠
게 마셔버리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운이는 어쩌고 영감 혼자 왔소?"
정작 보고 싶은 건 소운인데 왜 너만 왔냐는 소리였다. 금방까지도 풍신개
를 찾았으면서도 막상 본인이 앞에 있자 언제 찾았냐는 듯 떨떠름한 얼굴이
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친척인데 좀 모시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백산을 봐야 한다며 따라나서는 소운을 떼어놓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고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에 가장 필요한 놈이 이 백산이란 놈이다. 팽무도의 최고 도법과 남궁
세우의 검법을 벌써 십 년 이상을 익히고 있는 녀석들 이야기도 들었다.
거기에다 복수를 위해서 풍신개 자신이 만들어둔 세력을 합치면 세상에 무
서울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놈이 파멸안(破滅眼)의 소유자라는 것뿐.
하지만 그것도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놓고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풍신개는 백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형님! 오셨군요.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철목승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 냉 소저는 안 왔어요? 이왕 오는 김에 같이 오지…."
백산이 철목승의 뒤쪽을 줄곧 주시하다 냉추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쉬운 듯이 말했다.
"이 녀석아! 웬만큼 밝혀라. 뼈 삭는다, 뼈 삭어!"
그러자 옆에 있던 풍신개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백산을 노골적으로
헐뜯었다.
"그건 영감이 뭘 모르고 있는 거라고요. 제가 저번에 이야기 안 했던가요?
옛 성현의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무공이란 강하면 강할수록 좋
고, 돈과 여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캬야! 너무나 훌륭하신 말씀 아닙
니까? 철 대협! 정말 명언이야 명언…."
얼토당토않은 말을 명언이라 지껄이며 홀로 감격하는 백산을 풍신개와 철
목승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 성현이 누구냐 누구? 네놈이 언제 책을 보았다고 옛 성현을
들먹이는 게냐? 그런 말 한 놈 있으면 한번 데리고 와봐라! 나도 한번 물어
보자!"
풍신개가 백산의 헛소리에 제동을 걸었다.
"이 영감이 이른 아침부터 좋은 술 처먹고 왜 쉰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말했잖소. 옛 성현이라고. 옛 성현이란 이미 뒈져서 땅속으로 들어갔다, 이
거요. 그런 놈을 내가 무슨 수로 데려온다는 말이요. 이미 죽어버린 놈을
영감은 데리고 올 수 있소? 하여간 그런 말 한 놈이 있다면 있는 거지 따지
긴 뭘 따져요?"
"자자, 그만 하십시오, 형님! 그리고 자네도! 자네랑만 이야기하면 이상하
게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단 말이야."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철목승이 말렸다. 나이 먹은 풍신개나
백산이나 똑같은 놈들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뒤 무슨 심각하게 할 이야기
가 있는 듯 표정이 굳어진 철목승이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했다.
그러나 이 철없는 두 사람은 언쟁을 멈추지 않았다.
"아, 그 성현이란 놈 데리고 와 보라니까?"
"죽어서 없어졌다니까 그래요."
"네놈이 본 책이라고는 천자문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아는데 언제 책
을 봤어, 이놈아!"
완패.
천자문 한마디에 백산이 드디어 개박살이 났다. 그러나 이에 질 수는 없다
는 듯이 백산이 기어코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런 영감은 서역 글자를 알아? 그런 건 영감도 모르잖아?"
너나 나나 무식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두
손에 술과 안주를 들고 있는 백산과 풍신개는 걸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옥신
각신 말씨름을 멈추지 않았다.
"뭐,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 그 독덩어리 말인가? 독혈강시라고 불리는
그 마물?"
백산이 조천영을 치료했고 풍신개의 신세한탄을 들었던 그 갈대밭. 조천영
의 빙천수라마공의 영향으로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된 곳에서 경악에 찬 풍
신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목승이 어젯밤에 이곳 지하 사층으로 잠입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 귀혼마강시의 존재에 대해서 들었던 것이다.
그가 알아낸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곳에는 광천마승(狂天魔僧)이 있었고, 만상투인루 루주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의 내용 중에 귀혼마강시와 혈맹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더욱 놀라
운 사실은 만상투인루주가 삼십 년 전에 강호 공적으로 몰려 사라진 귀조수
(鬼爪手) 연동립이라는 것이었다.
"귀조수?"
만상투인루주라는 말에 풍신개보다는 백산이 먼저 나직이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시한 놈이고 또 다른 배후가 있다는 것을 백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층의 비밀 방에서 본 문서는 두 가지였다.
혈맹이라는 것 하나와 맹. 같은 맹이었지만 만상루주는 분명히 서로 다른
곳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도 상당히 많은 내용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
식하지 못했고, 더구나 관여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품속에 있는 책자에 대
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귀조수란 말일세 강호 삼대 조공(爪功) 중의 하나로, 그 연성방법이 너무
잔인해서 강호에서는 금기마공이네. 그것을 익히는 자는 신분여하를 불문
하고 강호 공적으로 분류되어 처단하게 되어있는 마공일세."
귀조수는 익히는 과정이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오성까지는 죽은 지 백일
이 안 되는 시체에서 사독(死毒)을 흡수해야 하고, 그 이후부터는 살아있는
사람의 간에서 생독(生毒)을 흡수해야만 완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귀조수(鬼爪手)를 극성으로 익히면 처음에는 손부터 금강불괴로 변해가다
가 마침내는 전신이 금강불괴지신으로 변하게 된다.
비록 마공이지만 그 위력 면에서만큼은 강호 일절(一切)로 불리기에 손색
이 없는 무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마공을 익힌 자는 뜻밖에도 천무맹 인물이었네. 연동립
이라는 자였지. 그것도 천무맹주의 대 제자.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던 그가
왜 그런 저주 마공을 익혔는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
네."
철목승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조용히 듣고 있던 백산이 한마디를 툭 던졌
다.
"그럼 연동립인가 하는 정파 놈은 이미 귀조수를 완성했겠네? 이곳에는 널
린 게 시체고 부상당해서 죽어가는 놈 천지니까 말이요.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었구먼. 천무맹도 연동립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모른 척했을 테고… 아니면 단단히 한몫 챙기고 있었는지도 …
."
사독(死毒)이라는 것은 비무에서 죽은 놈들의 몸에서 채취하면 될 것이고,
생독(生毒)이라는 것도 부상당해서 죽어가는 녀석들은 아직 살아있는 상태
이므로 그때 채취하면 된다는 소리다.
그래도 정파인이라고 풍신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백산의 말이 전부 그르
다고는 못한다. 어쩌면 천무맹에서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를
터.
이미 잊혀졌던 치부를 다시 들추어내 알리는 것은 체면을 중시하는 정파인
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전대 맹주의 대 제자였던 사람이다. 쉬쉬하면서 덮어버
렸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얼마든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이곳을 이용해서 한몫 챙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백산의 마지막 말.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천무맹에 대해서 드러나는 사실이 그 자신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곳에서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
을 것 같은데요."
그가 걱정하는 것은 이곳에 있는 귀혼마강시로 저질러지는 혈겁에 무고한
인명들이 죽어가는 것이었다.
"휴-우! 어떻게 하겠나. 중원으로 출발하려는 자들의 발을 묶을 방법이 없
으니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가게 하는 수밖에. 네놈은
어쩔 거냐? 이번에 우리랑 같이 중원으로 들어갈 테냐? 어차피 중원으로 갈
거면 같이 떠나라, 중인들도 도우면서."
그러나 백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거부의 뜻을 표했다.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
사실 백산 같은 건달 놈에게 무슨 처리할 일이 있겠는가! 그냥 몸만 떠나
면 그만이다. 또 그렇게 하려고 했었고. 그러나 풍신개가 같이 가자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어버리는 백산이었다.
이유는 귀찮은 일이 많을 것 같아서이다.
남에게 무료 봉사한다는 것은 백산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백산의 그러한 사고방식에 유일하게 제외되는 것이 있다면 시집 안 간 예
쁜 여자의 부탁이다.
"어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영감! 나 쌈하러 가야 돼. 먼저 가겠소.
"
광천마승의 눈에 비친 혈광에 대해서 물어보려 했던 백산은 더 이상 자리
에 있기가 거북스러웠던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세상사 모든 걱정거리는 기성세대의 몫이라는 것이 진리인가. 강호의 노기
인 둘이 남아서 앞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 * *
갈대밭을 떠나온 백산은 조천영에게 만두 두 판을 사주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서 옷장 안을 뒤졌다.
"오! 여기 있었구나!"
그 안에서 찾아낸 손톱크기의 알약 세 개를 꺼내서 입안으로 털어넣고는
오물거렸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창문 밖을 흘깃 쳐다본 백산은 가볍게 웃음을 짓
는다.
'오늘도 여전히 지키고 있군.'
그가 두 번째로 광혈단(狂血丹)을 복용할 때부터 지켜보던 자였다. 다른
때는 보이지 않다가도 백산의 비무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저곳에서 자신
을 주시하고 있다.
약효가 돌고 있는지 비무대를 향해서 걷고 있는 백산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변하며 온몸에서 청녹색 빛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미리 비무장에 나와있던 오행마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얼굴에 비해 유난히
작은 눈에서 귀화 같은 빛이 번쩍이고 산발된 머리털이 하늘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우! 우! 운수대통 다쇠불알이다! 이번에도 잘해라. 네 녀석의 운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이제는 백산에게도 돈을 거는 사람이 생겼는지 들려오는 야유 속에 백산을
응원하는 소리도 섞여있었다. 강구두 일행에게 무엇인가를 시켜서 밖으로
내보낸 후에 처음으로 듣는 격려의 소리였다.
귀화가 번뜩이는 눈으로 관중석을 쳐다보던 백산의 몸이 천천히 오행마 지
대철을 향해서 돌아섰다.
"오행마라고 했나, 얼마나 버티라고 했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백산의 물음에 지대철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무슨 말이냐?"
"모르면 그만이고."
피식 웃던 백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투귀 오구에게서 배운 싸움 방식 가
운데 하나가 폼잡는다며 선공을 놓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싸우
기로 했으면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앞으로 달려가는 탄력을 빌어 위로 떠오른 백산의 발이 전방을 향해서 힘
차게 뻗어지고 새파란 강기를 머금은 세 개의 철구가 오행마의 상단 중단
하단을 노리며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상당한 위력을 보이고 있는 백산의 발 공격에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지대철의 몸에서 적(赤), 청(靑), 황(黃), 녹(綠), 남(藍)
색의 운무가 피어나며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오행권(五行拳)!"
그의 주먹이 연속해서 다섯 번이 뻗어지고 정확하게 백산의 철구를 튕겨내
고 있었다.
튕겨나오는 철구의 힘에 의해서 뒤로 밀리던 백산의 몸이 오른쪽으로 회전
하며 회선각을 펼침과 동시에 오른팔도 쭉 펴진 채로 휘둘러졌다.
오행마의 전신을 향해서 여섯 개의 철구가 동시에 날아가며 색색의 운무
덩어리와 부딪쳤고, 그 충격으로 오색의 운무가 엷어지며 지대철의 신영이
약간 옆으로 밀렸다.
"오행참마선(五行斬魔扇)!"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내던 지대철이 백산을 향해 두 손을 거칠게 뿌려댔다.
자존심 문제였다. 처음부터 져주기로 한 비무였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
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의 공격을 하고 바닥으로 내려서는
놈을 향해서 자신의 절기 중의 하나인 오행참마선을 날린 것이다.
부챗살 같은 강기가 백산의 허리 쪽을 쓸어가는 순간 백산의 상체가 그대
로 뒤로 넘어감과 동시에 활 모양을 만들며 바닥으로 내려서던 두 다리가
앞으로 퉁겨졌다.
"크윽!"
"아이고!"
여섯 개의 철구 중 세 개가 지대철의 몸에 격중되어 그 충격에 의해서 내
지르는 비명소리와 한바퀴를 돌아서 내려서야 했던 백산이 완전하게 돌지
못하고 비무대 바닥에 안면을 박으면서 내지르는 소리였다.
"이봐! 재물이 될 사람을 너무 심하게 몰아치잖아. 그러다 광천마승과 귀
조수에게 혼날 텐데?"
오행마지(五行魔指)를 준비하고 있던 지대철이 귓가로 들려오는 말에 자신
이 하고 있던 행동을 망각했는지 놀란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 어디의 첩자냐. 삼천 중의 하나냐?"
"그냥 투신전 출신의 투신인지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그럼 너도 알고 죽
어야 덜 억울하겠네?"
사실 지대철은 광천마승 요불의 직속 수하로 귀조수 연동립을 감시하기 위
해서 투신전을 통해서 이곳에 와있는 자였다.
그런데 재물로 선택했다던 놈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들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고, 또한 뭔가 꾸미기 위해서 그동안 자신
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말이야 여기 있는 너희들에게나 관중들에게 약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백산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지대철의 얼굴이 급속히 굳어가고 있었다. 지
금껏 저놈이 해왔던 모든 것이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서 했던 행동이라 하고
있다. 피독주도 광혈단도 지금의 이런 상황을 유도해내기 위해서 사용했다
는 것이다.
"아마도 내일쯤 만금돈노 석숭이 내 앞으로 해서 돈을 걸 거야. 나에게 걸
리는 배당이 어느 정도 되려나, 열 배? 아니면 이십 배? 혹시 자네는 알고
있나?"
지대철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더 이상 놀랄 여력도 없었다.
자신들의 계획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또 이용하고 있었다. 연동립이나
종천수 그리고 상관인 광천마승 누구 하나 놈의 무공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직 운수대통이란 별호처럼 운과 약으로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무공
수준조차도 자신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운이 좋고 광혈단을 복용했다고 하나 투신전까지 올라 왔는데 좀
더 신중했었어야 했다.
백산은 오행마공이 풀린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지대철을 향해 마지
막 결정타를 날렸다.
"오행마 지대철, 너도 핼맹 소속이냐?"
말과 동시에 백산의 철구가 허공을 날았다. 지대철이 깜짝 놀라며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혼백이 떠난 후였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하여 공황
상태에 있던 지대철에게 혈맹이란 한마디는 그의 사고 기능을 마비시키는
데 충분했다. 그는 머리를 향해서 날아오는 두 개의 철구를 멍하니 바라보
기만 했다.
자신의 철구로 지대철의 머릿속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백산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혈맹이란 말이 무서운 말인가 보네? 요불에게도 한번 써먹어 볼까?'
중얼거리던 백산이 이미 죽어버린 지대철을 향해서 철구를 한방 더 날림으
로 해서 비무를 마무리지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군웅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고
개를 갸웃거리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운수대통을 몰아치던 오행마가 독이라도 중독된 것처럼 멍하니 서서 머리
를 향해서 날아오는 철구를 그대로 쳐다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어리둥절했겠
는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뻔하지 뭐. 운수대통 저 자식 또 독을 썼구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당해버린 오행마를 봐. 독이 아니라면 오행마 정도 되는 고수가 우
리 눈에도 보이는 저 철구를 못 피할 리가 없잖아."
관중석 여기저기서 오행마의 이상한 죽음을 놓고 분분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겼잖아. 그럼 된 거지 뭐."
"그래 맞아. 어떻게 이기든지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곳이 만상투인루라는 것을 다시 인식하고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 소
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승자와 패자가 있는 곳이 아니고 삶과 죽음만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산이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관중석이 조용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자 비무장 내로 백산의 걸걸한 목소리
가 울려 퍼졌다.
"이제 싸울 놈들은 나를 포함해서 과거 투신 세 놈 남았다. 그 중 가장 강
하다고 생각되는 놈과 나를 붙여주라. 그것으로 올해의 투신전을 마무리 짓
는 것이 어떤가?"
처음엔 백산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던 관중석에서 나중에
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동의하며 박수를 쳤다.
"옳소! 운수대통 말이 맞다. 어차피 우리는 이곳에 돈 벌러 왔지 무공 구
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라!"
여기저기서 백산의 말에 동의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과거 투신들끼리 비무
를 하게 되면 속임수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돈을 걸지를 못한다.
"어떤가 만상루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답을 주어야 될 것 아닌가!"
"어떻게 된 거냐? 연동립. 오행마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저놈이 강했나?"
관중석과 비무대가 내려다보이는 곳. 지금껏 어두운 공간이라 생각했던 이
곳에 연동립과 광천마승 그리고 종천수가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통령! 오늘도 저놈이 광혈단을 복용하고 비무에 나왔습
니다."
"그런데 왜 오행마가 죽나. 혹시 오행마에게도 독을 썼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동립을 바라보는 광천마승의 몸에서 스산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맹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독단적인 행동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
사실 귀조수는 지대철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이 기회를 빌어 제거하기 위
해서 약간의 독을 썼다. 그러나 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있음에도 불구
하고 오행마는 몸이 굳어지면서 저 백산이란 놈에게 당해버렸다.
연동립은 이빨을 깨물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놈이다. 그런 놈이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소림사를 뛰쳐나와 외부 감찰대의 통령을 맡았고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
아마 윗선에 큰 배경이 있는 놈임에 틀림없다. 무공면에 있어서도 자신이
밀린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그놈의 배경 때문이다.
'그래 지금은 내가 참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네놈의 숨통을 반드시 끊어놓
고 말겠다. 요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귀조수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저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배당률은 이십 배로 하고. 제삿날은 올해
의 마지막 날로 잡아라."
자신감이었다.
저런 하찮은 놈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조차 아깝다. 돈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내려가서 죽여버릴 수도 있는 것을, 광천마승의 눈가에 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살기였다. 죽음의 기운이 줄기줄기 새어나오는 진득한 살기였다
.
"예, 통령!"
잠시 후, 비무대 가장 위쪽에 검은 공간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복면을 쓴
만상루주가 나타났다.
"강호동도 여러분!"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비무장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히 귀조수 연동립의 무공수위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아들여 올해의 마지막 날에 전대투신인
광천마승 요불과 운수대통 다쇠불알 백산과의 투신 최종전을 열도록 하겠습
니다. 더 상세한 내용은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세모가 되기 바랍니다."
"와아! 와!"
관중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온 비무장 안에 진동하고 있었다.
기대감이었다. 만상투인루가 생긴 이래 오백 배의 배당률을 가졌던 자가
투신전 최종전에 올라온 것도 새로운 기록이었고, 그동안이 비무에서도 언
제나 최고의 배당률이었던 것이다.
심심풀이로 백산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여태 잃었던 모든 것
을 되찾아가는 진기한 광경이 계속해서 일어났었다.
그리고 최종전에는 과연 얼마의 배당이 걸릴까 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역대 최고의 배당이 걸릴 것이라는 사실이었
다. 최종전을 생각하고 있는지 상기된 얼굴의 군중들이 자신들의 숙소로 돌
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