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인연(因緣)
백산은 풍신개와 철목승 일행과 함께 비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비무대에서는 색면마후(色面魔侯) 설귀후와 빙혼마녀(氷魂魔女) 조천영과
의 투신전이 준비중이었다.
"야, 대통 몸은 괜찮은 거냐? 갈수록 힘이 없어 보인다."
"엥! 대통?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나보고 대통이라 한 거요?"
"그래, 이놈아! 네놈의 별호가 운수대통 다쇠불알이다. 남들의 별호는 길
어야 네 자인데 네놈은 무려 여덟 자. 무림에서 별호가 여덟 자인 사람은
네놈이 최초일 거다. 크크크 운수대통 다쇠불알이 뭐냐 이놈아. 운수대통
다쇠불알. 운수대통… 크 하하하!"
눈물까지 흘리며 풍신개가 웃자 옆의 소운과 냉추렴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씨! 어떤 새끼야. 감히 이 백산님의 별호를 운수대통 다쇠불알이라 붙
인 놈을 만나기만 하면 정말 불알을 부숴버리겠어. 개자식들."
주위를 향해서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발끈한 백산은 그의 철구를 퉁
퉁 튕겼다.
"그러기에 비무 때마다 왜 상대방의 그곳을 노리느냐? 다른 곳도 많은데
허구한 날 그곳만 박살내니 그런 별호가 붙지. 이런 것을 두고 자업자득이
라 하는 것이다. 이겨도 좀 깨끗하게 이겨라."
"영감, 그리고 소운아. 제발 부탁인데 둘이라도 나를 광풍노룡(狂風努龍)
이라 불러주면 안 되냐? 왜 있잖아, 변화를 원하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
하라고 하는 말. 두 사람이 나를 광풍노룡이라 부르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나도 멋있는 별호를 가질 수 있을 텐데. 소운아, 부탁 좀 하자. 응?"
자신의 별호를 바꾸기 위한 백산의 노력은 처절했다. 맛있는 것을 사주겠
다. 돈을 주겠다 하면서 꼬셔도 보고 을러도 보았지만 소운과 풍신개는 웃
기만 하였다.
이미 만들어진 별호라는 것이 자신이 바꾸려해서 바꾸어지는 것인가.
세상물정 모르는 뇌룡현(雷龍縣) 촌놈의 별호 바꾸기는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으악! 돌아버리겠네. 정말! 운수대통은 그런다고 치고 왜 다쇠불알은 계
속 따라 다니냐고. 오! 나같이 무공도 잘하고 멋있는 놈한테는 다쇠불알이
고 그 싹수없는 금뎅이 새끼는 왜 정천무룡(正天武龍)이냐고!"
백산은 콧김을 씩씩 품어대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토로하고 있었으나 원래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남의 흠은 오래오래 기억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라나
모르겠다.
운수대통 다쇠불알, 이 여덟 자의 별호는 백산의 강호행에 영원한 동반자
가 되고 말았다.
백산이 자신의 별호를 가지고 발악하고 있을 때 비무대에서는 빙혼마녀 조
천영과 색면마후 설귀후의 비무가 시작되고 있었다.
"설귀후, 겨우 이런 곳에서 남의 개 노릇이나 하려고 그렇게 도망을 쳤더
냐? 퍽이나 오랫동안 기다렸다."
조천영의 눈에서는 대지를 태워버릴 것 같은 분노의 열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나 그와는 상반되게 몸에서는 주변을 얼려버릴 듯한 북풍한설 같은
차가운 한기가 몰아쳤다.
"아쉽구나! 그때 끝까지 따라가서 죽음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우리
둘 사이는 제법 괜찮았잖아? 밤마다 나 없으면 죽는다고 외쳐대던 교성이
지금도 귀에 선하군. 킥킥킥!"
"닥쳐라! 이 더러운 놈!"
조천영의 몸에서 나오는 한기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그녀의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십 년 전.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소성주였던 조천영은 모든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닌
꿈 많은 소녀였다. 설귀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설귀후를 처음 본 것은 북해의 어느 계곡에서였다. 눈 속에 쓰러져
있던 설귀후를 구하고 치료해주는 과정에서 싹튼 열병은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었고, 빠져드는 사랑에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결코 아깝지가 않았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유달리 서책 모으는 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책 중에 색색만요공이란 무
공기서가 있었다.
무공의 위력은 막강하나 그 연공 방법이 처녀의 순음지기를 흡수해야만 하
는 사악한 사공이기에 폐기시키려 했으나, 희귀서라는 유일함과 강력한 무
공을 연구하고자 하는 무인으로서의 욕구가 보관하게끔 종용했다.
그런데 설귀후는 그것을 원했고 조천영은 갈등했다. 결국 그녀는 사랑을
선택했고 그것을 훔쳐 설귀후와 함께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주었고 혈육마저 배신하게 했던 그 남자는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져다 준 색색만요공을 다 암기하고는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그녀
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거의 죽어가는 그녀를 근처의 이름 모를 얼음 계곡으로 던져버렸
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뜻밖에도 그 죽음의 장소에서 천 년 전
에 사라졌던 빙궁의 조사인 빙모 천예설의 유물을 습득하고 빙모의 독문무
공인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을 익혔다.
엄청난 무공이었지만 결점이 있었다. 십이성을 대성하지 못하고 무공을 사
용하게 되면 여자로서의 기능이 점점 상실되어 종내는 석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무공을 익히기 칠 년여, 칠성까지는 익혔으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을 나왔다. 그녀에게는 이미 여자니 뭐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사랑을 철저하게 이용한 설귀후란 놈에게 복수만이 남았을 뿐이었
다.
설귀후를 찾아헤맨 지 삼 년, 중원의 모든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그 놈은
없었다. 설귀후를 찾는 과정에서 여자를 겁탈하는 놈들은 물론이고 색마라
고 불리는 이들을 보이는 대로 격살하고 다녔다.
그래서 빙혼마녀라는 별호도 얻게 되었다.
으드득!
조천영이 이를 갈며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삽
시간에 그녀의 삼장 주위가 허연 서리에 뒤덮이고 냉랭한 기운이 퍼져나갔
다.
빙무 속에서 그녀는 설귀후를 향해서 살기를 피워올리며 원독에 찬 목소리
로 소리쳤다.
"설귀후, 네놈을 씹어버리고 말겠다!"
설귀후는 그런 조천영의 기세에 내심으로 흠칫했으나 겉으로는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년의 얼굴은 별 볼일 없지만 몸매 하나는 죽여줬는데. 지금이라도 마음
을 바꾸면 내가 다시 즐겁게 해주지. 그때보단 밤 기술이 훨씬 늘었거든.
네년은 몸이 뜨거워서 혼자서는 잠을 자지 못하잖아, 안 그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하얀 빙무 속에서 조천영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빙천수라참(氷天修羅斬)!"
주변의 공기가 급속하게 냉각되어 가면서 조천영이 장심에서 새하얀 빛 무
리가 터져나와 설귀후를 향했다.
조천영의 강기를 바라보던 설귀후의 입에서도 '색색만마색(色色萬魔色)!'
이라는 외침과 함께 달콤한 향기를 동반한 분홍색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콰-앙!
두 사람의 중간 지점에서 커다란 폭음과 함께 조천영과 설귀후는 뒤쪽으로
한 걸음씩 밀려났다.
"비열한 놈. 끝까지 야비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설귀후가 쏘아낸 장력 속에 최음분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천영이
크게 외쳤다.
"비열? 크크크. 뭘 모르는군. 비열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지금
까지도 잘 살았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설귀후를 찢어버릴 듯한 조천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신형은 거의 육안으로도 잡히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접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천영의 의복은 여기저기 찢겨져 속살이 드러나 보였고, 설귀후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가슴까지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연신 공격을 하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들을 주시하
고 있던 관중석도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최후의 한 수를 쓰려는 듯 조천영이 비장한 얼굴로 설귀후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설귀후, 이제 네놈의 마지막이다. 빙백수라무(氷白修羅武)…!"
순간 그녀의 주위는 온통 얼음 천지로 덮여버렸다.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렸음인지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지만 그녀
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무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뻗어짐에 따라서 주변의 대기가 빙결되어 얼음의 화살로 변하
고 그것은 곧장 설귀후를 향해서 날아갔다.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녀의 분노였다. 자신의 삼십 년의 인생이었다.
이어서 설귀후도 거칠게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색-색-만-만-천!"
그도 최후의 수를 던진 것이다. 그들의 주변에는 얼음의 강기와 분홍색의
강기가 소용돌이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저 누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비무대에서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던 백산은 아무래도 조
천영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비무장에서 다른 사람의 죽음
에는 덤덤해하던 백산의 마음이 갑자기 다급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대뜸 풍신개에게 물었다.
"영감! 빙공을 익힌 사람이 내상을 치료할 때 먹는 좋은 약 같은 것 없소?
"
"물을 걸 물어라. 나 같은 거지한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있느냐? 그런 것
은 먹고 죽자 해도 없다."
입이 툭 튀어나온 풍신개가 백산을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그럼 이건 뭐야? 이런 것이 있으면 빙공을 익힌 사람에게 좋은 약 하나
정도는 있을 것 아냐?"
또다시 언제 훔쳤는지 저번의 그 피독주를 들고서 백산이 풍신개를 닦달했
다.
"이것이 좋은 것이라고 했지? 이것이 있으면 좋은 약하고 바꿀 수 있나?"
"야, 이놈아! 그것은 또 언제 빼 갔냐? 이리 안 내놔! 그건 여기 있는 철
동생이 준 거란 말이다. 어서!"
풍신개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현 강호에서 자신과 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어느 누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서 물건을 빼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 상태에서. 이건 방심이니 뭐니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이놈은 마치 제 품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듯이 자신의 품에서 피독
주를 빼내갔다.
도대체가 이놈의 능력은 파악이 안된다.
그 옆에 있던 철목승도 흠칫 얼굴색이 변하며 백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말이 맞네. 네가 십 년 전인가 구 형님께 드린 것이라네. 그런데 자네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구먼."
"아! 이거요."
백산은 자신의 손을 풍신개의 품속으로 가볍게 집어넣었다가 도로 빼내는
손짓을 해보이며 철목승을 향해서 웃었다.
"이런 것은 우리 조직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것에 속합니다. 지금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혹시 철 대협에게는 좋은 약 없습니까?"
무림의 초고수의 품속을 뒤지는 것을 일반 양민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백산
은 다른 일행들의 눈이 커지든 말든 아무것도 아니라는 행동을 해 보였다.
"나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철목승도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으나 이 청년이 이 난관을
해결하는 것을 즐기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흠- 이것 정말 큰일이네. 이미 저 누님의 내부는 완전히 망가졌는데, 그
럼 이거라도 팔아서 구할 수밖에 없겠네?"
백산이 하는 짓거리를 쳐다보고 있던 풍신개가 피독주를 빨리 달라며 손을
내미는 순간 콰앙…!
요란한 소리가 비무대를 흔들었다.
색면마후 설귀후와 빙혼마녀 조천영이 피를 흘리며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
었다. 그것을 본 백산은 자신에게 피독주를 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던 풍신
개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는 비무대 쪽으로 힘껏 던지면서 외쳤다.
"가서 조 누님 좀 구해줘요!"
"야, 이 새끼야! 이게 무슨 짓이냐?"
백산의 갑작스런 행동에 욕을 바락바락 하면서도 그의 독문 경공인 취선보
를 전개하며 의식을 잃고 비무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조천영을 안아내
렸다.
그때 조천영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던 설귀후는 거칠게 바닥으로 떨어져
서는 '네년이! 네년이!'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그대로 바닥에 푹 처박았
다.
"이놈은 완전히 죽었는데, 영감?"
어느새 내려왔는지 백산이 설귀후의 머리를 툭툭 차보았다.
"이크!"
자신의 발길질에 따라서 조각조각 얼음으로 부서져내리는 설귀후의 머리를
보면서 깜짝 놀란 백산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조천영의 빙공 화후가 약한 탓에 빙천수라마공에 격중된 설귀후의 몸뚱이
가 지금에서야 완전히 결빙된 채로 부서지는 것이었다.
"이놈아! 그 녀석 죽은 것은 놔두고 이 애를 먼저 보아야지. 이 소저도 곧
숨이 넘어가게 생겼어. 이 녀석아."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하는 거야? 일단 자리를 옮기자고 영감!"
백산은 재빨리 조천영을 받아 안고는 비무대에서 뛰어나갔다.
백산과 풍신개가 떠난 비무장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설귀후와 조천영이 동패구상한 것도 한 것이려니와 그런 조천영을 백산이
라는 녀석이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는 광경이 더욱 아연했던 것이다.
"소운아, 저 백산이란 청년과 빙혼마녀와는 무슨 관계냐?"
풍신개와 백산의 하는 양이 철목승 자신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소운을 향
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물었다.
"글쎄요, 만두를 권하는 정도밖에는…."
"만두?"
소운의 엉뚱한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철목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소운이 알고 있는 것이라 해봐야 백산이 먹다 만 만두를 들고서 조천
영에게 치근덕거렸다는 사실밖에 없다.
"아! 그렇지, 만두!"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소운은 철목승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밖으로 빠
져나갔다.
* * *
바람결에 하느작거리는 갈대밭 중앙에 자리 잡은, 연인들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면 딱 좋은 정도의 공터.
"그러니까 이 누님을 치료하는데 영감은 안 된다는 거야? 영감은 공력이
높다며? 그리고 이런 경험도 많을 테고. 그러니 잔소리하지 말고 치료 좀
해봐."
기절해서 쓰러져 있는 조천영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백산이 풍신개
를 향해서 떼를 쓰고 있었다.
"이놈 정말 답답하구나. 나는 뭐 치료하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느냐?
이 소저의 무공 기반은 빙공이야. 빙공의 빙자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치료
를 하냐고?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같은 계열의 무공을 익힌 사람이어야 해.
특히 지금과 같이 중상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돼. 아무 공력이나
이 소저의 몸 속으로 밀어넣게 되면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 이놈아!"
풍신개도 답답했다. 빙공이 아닌 일반 내공을 익히고 있다면 자신이 어떻
게든 응급조치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빙공이나 화공 같은 특이한
내공을 익히고 있는 상대는 아무 내공이나 불어넣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
다.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화후가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내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더더욱 손을
쓸 수가 없다.
백산 또한 풍신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무공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 무공을 이용해서 누구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다
는 것은 그의 사부인 팽무도에게서도 들어본 적도 없고, 행여 가르쳐주었다
했을지라도 자기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백산의 성격상
그것을 깡그리 무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치료하는 거야?"
"뭐라고?"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거냐고?"
"이놈아! 네 녀석의 무공이 강한 것은 알지만 빙공을 익힌 것은 아니지 않
느냐. 이 소저를 죽이고 싶은 게냐?"
"그럼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건가? 잔소리하지 말고 치료 방법이나 불
러 보라니까."
백산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책인지도 모
른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경우는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능력과 힘이 없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지만 이제는 힘이 있
다. 자신의 주위의 어떤 것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경우란 말인가? 자신에게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
을 알려주지 않은 사부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놈의 영감쟁이가
사부와 너무나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난지
도 모르겠다.
자신의 사부가 마령호 내단만 가져가지 않았어도 지금 유용했을 거란 생각
에 미치자 사부가 더욱 미워졌다.
"꼭 빙공이 아니더라도 극빙(極氷)의 기운이면 안 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빙천비(氷天匕)를 생각하면서 풍신개를 향해서 물었다
.
"극빙의 기운이면 가능하기는 한데 이 소저의 내공보다 월등히 강해야 한
다. 어중간한 빙(氷)의 기운 가지고는 둘 다 죽는 수가 있어."
백산이 자신의 내공을 이용해서 치료를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풍신
개가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명문혈에 내공을 불어넣어 일단 제자리를 이탈
한 장기들을 제대로 맞추고 내부 출혈이 있는 곳의 피를 멈추게 해야 돼.
그리고는 그녀의 정신을 깨워서 너의 내공을 유도할 수…."
주위의 대기가 급격하게 이상해짐을 느낀 풍신개는 깜짝 놀라며 백산을 쳐
다보았다.
몸 속에 가두어두었던 내공을 풀어버린 백산의 주변으로 극심한 대기의 파
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파동은 점차 범위를 넓혀가더니 급기야는 풍신개를 조금씩 뒤쪽으로 밀
어내고 있었다. 너무 놀란 풍신개는 자신의 입이 벌어져 있다는 것도 인식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저러한 경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완전하게 자연과 동화되지 않으면
공기의 파동을 공명시키는 현상이 나올 수가 없다.
경이의 눈으로 백산을 바라보고 있던 풍신개의 눈이 다시 한번 찢어질 듯
치켜 떠졌다.
백산의 몸 주위에서 나오던 파동이 완전하게 주변의 대기와 일치되자 그의
발목과 팔목에서 도합 열두 개의 비도가 튀어나온 것이다.
튀어나온 비도들은 하늘을 향해서 수직으로 서 있다가 잠시 후 일제히 땅
속 깊숙이 박혔다.
가부좌(跏趺坐)를 한 백산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쓰러져 있던 조천영이 둥
실 떠올라 백산의 바로 앞에 등을 댄 상태로 내려앉았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어. 아까 일러주던 치료법이나 마저 일러
주고 호법을 서야될 것 아냐. 저기 오고 있는 소운을 빼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경계나 잘 서요."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는지 풍신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법을 서
기 시작했다. 백산은 조천영의 명문혈에 자신의 양손을 밀착시키고는 서서
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얼음이던 불이던 어차피 자연의 산물. 물이 차디찬 바람을 만나면 그것이
곧 얼음. 빙천비를 통해서 들어온 찬 기운으로 누님을 치료하면 되겠지.'
백산은 혼자 중얼거리며 서서히 조천영의 몸 속으로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
했다. 뒤틀려 있던 모든 장기들의 위치를 제대로 맞춘 백산은 그녀를 향해
서 강하게 내공을 밀어넣으며 소리를 질렀다.
"누님, 그만 자고 일어나요!"
무엇인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고통에 정신이 든 조천영의 귀에 누군
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어쩌고 하는 것 같았다.
'누님?'
그녀에게 누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
환청이란 생각에 다시금 정신을 서서히 놓고 있는 와중에 '딴 생각 그만하
고 빨리 내공이나 끌어올려 봐요!' 하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이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그제야 희미한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은 설귀후와 싸웠고 마지막에 칠성밖에 안된 빙천수라마공으로는 결코
펼칠 수 없는 빙백수라무를 자신의 진원지기까지 뽑아내어 목숨을 걸고 펼
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는데 누가 있어 자신을 구하려 하는가!
"그놈, 설귀후는 죽었어요?"
자신의 목숨보다 설귀후의 생사가 더 중요했는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네. 완전히 얼음 조각이 되어서 뒈졌어요. 이제 말 그만하고 치료나 하자
고요."
백산이 더욱더 강한 내공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누구이신지 모르지만 괜한 수고를 하고 계시네요. 그냥 절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할 일도 다했고 이제는 쉬고 싶어요."
생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생각에 삶의 의욕을 상실했는지 힘없이 말한 조천
영은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아이고 누님, 계속 그러고 있으면 저도 죽어요. 이번에 이기면 저랑 같이
만두 먹기로 했잖아요. 제발 정신 차리고 내공 운용 좀 하세요. 네?"
"만두?"
순간 조천영의 머릿속에 엊그제의 일이 떠올랐다. 다 먹고 한두 개 남아있
는 만두를 들고 와서는 먹겠냐고 묻던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청년. 그의 가
식 없는 미소에 그저 기분이 좋아져 살아나면 만두를 같이 먹자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조천영은 자신도 모르게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별안간 단전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움찔했으나 한번 운용된 내
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그리고 저 등뒤에서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내력이라니. 그것
도 자신이 그렇게 갈구하던 빙극지기(氷極之氣)였다.
'저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던 빙극지기가 역류하게
되고 그럼 저 사람도 무사하지 못한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백산이 주입해주고 있는 빙극지기를 받아들여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이죠?"
호법을 서라는 말은 진작 잊어버렸는지 넋을 잃고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풍신개 곁으로 다가온 소운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로 하면 뭐하냐.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 저것이 바로 저놈의
능력인가 보다."
풍신개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만난 지 벌써 이 개월이 넘었지만 정말
알 수 없는 놈이었다.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저 정도인지는 풍신개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이 팔십이 넘었지만 아직도 무인으로서의 피는 뜨거운지 저러한 경지가
부럽기도 하고, 한번도 이뤄보지 못한 경지이었기에 부러워는 자신을 보며
내심으로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아직도 내 자신을 무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풍신개가 백산을 쳐다보고 있을 때 조천영은 또
다른 이유로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내상은 거의 치료가 다 되었다. 빙공을 익힌 자들에 있어서 영약이
라는 것은 별개 아니다. 다른 모든 무인들이 원하고 찾게 되면 기연을 얻었
다고까지 하는 그런 영약이나 기물들의 내단은 그저 단순한 약 정도로밖에
치부되지 않는다.
오로지 극빙의 빙극지기만이 최고의 영약이고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한 빙극지기가 끊임없이 자신의 몸 속으로 주입되고 있었다. 그 빙극지
기의 영향으로 빙천수라마공이 구성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그만 멈추
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명문혈에서는 끊임없이 빙극지기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운공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던 그녀의 신형이 한순간 움찔했다.
"죽고 싶어서 그래요? 나는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계속해요. 빨
리 하는 것이 날 도와주는 것이니까요."
사실 치료를 하고 있는 백산도 조천영의 지금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
했다. 다만 풍신개의 말 중에 내상이 완치되면 자신이 주입하던 내공을 밀
어내는 힘이 조천영의 몸에서 생기게 된다고만 했다. 그때 내공 주입을 그
만두면 된다고.
그러나 아무리 내공을 주입해도 반발력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내
공을 밀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풍신개의 실수 아닌 실수 때문에 기인한 것이었다. 백산의 수준이
이 정도일 거라는 짐작도 못했고 일상적인 치료법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것
이었다.
요컨대 백산의 성격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말이다. 사람을 치료해본 적도
없고 상대방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까지 파악하면서 치료를 할 만한 성
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백산이 주입하고 있는 빙극지기가 바다라면 조천영의 내공은 시냇물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시냇물이 아무리 바다를 향해서 흘러간다 해도 바다가
시냇물이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섬세함과는 담을 쌓은 백산이고, 당장은 조천영을 치료해야 한다는
조급한 심정이었으니… 조천영의 상태는 파악하지도 않고 풍신개가 말한
반발력만 기다리며 내공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백산의 무지로 인하여 조천영은 일대 기연을 얻게 되는데….
백산의 외치는 소리에 조천영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 상태로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그녀의 몸에서 강력한 냉기(冷氣)가 쏟
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냉기는 백산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그제야 치료가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한 백산은 이를 악물고 더욱더 강하게
그녀의 내부로 빙극지기를 밀어넣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냉기가 점점 더 강해져 백산의 내력을 밀어내기 시
작하자 재빨리 손을 떼고 물러나 있던 풍신개와 소운 곁으로 다가갔다.
빙천수라마공의 위력은 가공했다. 운기만으로도 주변 오십여 장이 얼음덩
이로 부서지며 초토화되어 버렸다.
"영감, 칠성밖에 안 되는 빙천수라마공이 저렇게 강한 거야? 그래서 고금
오천무인가?"
칠성의 화후가 저 정도라면 십이성 완벽하게 되었을 경우엔 자신도 감당하
기 힘들다는 생각에 심각한 표정을 한 백산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 녀석아! 저건 칠성이 아니라 완성된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이다.
이놈아! 어떻게 했기에 칠성밖에 안 되는 무공이 십이성이 됐냐고? 그 무
서운 빙혼마녀에게 이제는 날개까지 달아주었으니 세상 남자들은 다 죽었다
, 어쩔래?"
가공할 만한 빙천수라마공의 위력에 온몸을 부르르 떨던 풍신개가 백산을
향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풍신개도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백
산의 무공수준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자신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저것이 완성된 것이었어? 영감이 반발력이 생길 때까지 내공을 밀어 넣으
라며. 그래서 그렇게 한 거지, 강해지면 더 좋지 뭘 그래?"
이 정도 수준이 고금오천무의 완성형이라는 풍신개의 말에 심각한 백산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표정이 밝아졌다.
"오! 오! 오…!"
갑자기 백산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영감, 고개 돌려! 아니지."
퍼억!
백산이 풍신개의 뒤통수를 가격해서 기절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조천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 조천영은 내공심법의 운용이 극에 달하여 무림
인이 꿈에도 그리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옷들이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고 새하얀 그녀의 나신이 백일하
에 드러났던 것이다. 널따란 갈대숲을 배경 삼아 나신으로 떠있는 조천영의
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것도 백산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가부좌를
튼 채로 공중에 떠 있었으니 백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퍼억!
이번에는 백산의 뒤통수에서 나는 소리였다. 입가에 한줄기 침을 흘리며
백산은 그대로 앞에 넘어져있는 풍신개 위로 쓰러졌다.
침흘리는 발정 난 개 한 마리가 쓰러지는 와중에도 조천영의 운공은 끝나
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환골탈태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어느 순간부터
주위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내뿜던 냉기가 빙천수라마공의 완성과
함께 몸 안으로 완전히 갈무리된 것이었다.
빙천수라마공(氷天修羅魔功)의 십이성 대성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조천영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
다.
아무리 여자이기를 포기했다지만 엄연히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여자이기를 포기한 것하고 여자가 될 수 없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그녀가 무공을 완성함으로 해서 완전한 여인으로 돌아온 것
이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인지, 그동안 힘들었던 삶에 대한 서러움인지 조천
영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언니, 힘들었죠?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요."
소운이 백산에게서 벗긴 장포를 조천영에게 입혀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동생. 그런데 그 백산이란 남자는 어디 있죠?"
"그 색마는 저기 기절해있어요.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말이죠."
백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간 소운은 발로 툭툭 차면서 기절해있는 두 사람
을 깨웠다.
"이봐요! 색마 아저씨!"
"끄응!"
백산과 풍신개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으악! 왜 영감이 내 밑에 있는 거야? 그리고 내 옷은 어디로 갔고? 내가
아무리 장가도 가지 못한 약관의 팔팔한 나이라 해도 팔십이나 먹은 노인네
를, 그것도 남자를 탐할 정도로 밝히는 놈은 아니라고요. 영감 제대로 설명
못하면 오늘 나랑 끝장 봐야할 거요."
자신이 풍신개를 기절시켰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흥분했다.
"이놈아,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왜 내가 여기 누워있는 건지 그리고 네 녀
석이 왜 나를 베고 누워있는지 설명 좀 해봐!"
순간 백산의 머릿속에 조금 전의 상황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조천영이 운공을 하고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도 없고, 바로 곁에 자신의 장포를 입고 있는 조천영과 소운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지 않겠는가.
백산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서리더니 조천영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리
고 소운을 향해서 소리를 팩 질렀다.
"너지! 소운 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내 뒤통수를 까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것을 방해한 것이 맞지?"
백산의 분노는 대단했다. 스물다섯 해 동안 여인의 나신을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자세히 보지 못해 억울할 지경이다. 이마에 역 팔자를 그리며
소운을 쳐다보며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 백산을 풍신개가 제지했다.
"백산아, 이왕 여기까지 나왔으니 우리 이야기 좀 해보자. 그리고 소운이
너는 조 소저랑 같이 가서 술 좀 사오고. 조 소저 옷도 갈아입어야 할 테니
."
"거 영감, 조용히 좀 하쇼. 지금 나랑 얘기하고 있잖소."
백산이 풍신개를 향해 인상을 팍팍 쓰면서 뇌룡현의 건달 폼으로 노려보았
다.
퍼억!
또다시 백산의 뒤통수에 고통이 밀려왔다.
"이번엔 또 왜?"
백산이 뒤통수를 긁적대며 의아한 표정으로 소운을 쳐다보았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너무 심하잖아요?"
이제는 완전히 여자로 돌아오기로 했는지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로 소운이
백산에게 소리를 쳤다.
"할아버지? 그게 뭔 말이야? 그러니까 소운 너 말은 이 못-생-긴 노인네하
고 예쁘게 생긴 너하고 이웃집 할아버지도 아니고 친척도 아닌 조손지간이
라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지금? 어떻게 저 얼굴에서 이 얼굴이 나오냐고
?"
풍신개와 소운을 번갈아 가리키던 백산이 말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
풍신개가 사부와 알았던 사람이었다는 것도 찜찜해서 사부의 이름도 가르
쳐주지 않았는데 이제는 소운의 할아버지란다.
세상이 자기편이 아니라며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던 백산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신세한탄을 했고, 소운과 조천영은 술을 사러 간다며 저
만치 멀어져갔다.
어느 사이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먹물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갈대밭에 모
닥불을 사이에 두고 백산과 풍신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 아직도 말을 못한다고? 왜? 도대체 사부가 누군지 말을 못하는 이유
가 뭐냐?"
소운과 조천영은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풍신개는 답답했다. 이 녀석은 저번에 팽월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그것은
변형되어 있었고 위력 면에서는 팽가도법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강했지만
분명 자신이 알고 있었던 도법, 바로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이었다.
자신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도법인데 아무리 변형되어있다 할지라도 어
찌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것인가!
그것이 팽가도법이었기에 그 자존심 강한 팽가의 후손이 비무를 포기하고
이곳을 떠난 것이리라. 그리고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팽가도법을 그 정
도로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다. 그가 지난 오십 년간이
나 찾아 헤맸고 또 찾기를 원했던 '팽무도' 바로 그였다.
화가 난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던 풍신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무엇인
가 결심한 듯 나직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백살대의 입단식 때였다. 백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유독 그녀만이 눈에 띄었다. 단 한 번의 마주침이 그를 사랑의
열병 속으로 몰아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연공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자신이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것도, 지금이 전쟁의 시기라는 것도 모두 그에게는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녀가 연공을 끝내고 나왔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팽무도에게 부탁해
서 그녀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천사맹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서로가 꽤나 바쁘고 시간이 없었지만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을 싹틔우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들의 사랑에 시련이 닥쳐왔다.
정의의 표상이었던 백살대(百殺隊)가 하루아침에 백살마대(百殺魔隊)로,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강호 공적이 되어서 쫓기고 있었다. 그들을 쫓는데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단체가 그가 수장으로 있었고 최고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던 개방이었다.
그는 맹을 뛰쳐나와서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 달여, 정사(正邪) 무림인들에게 쫓기어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발견했고 그 길로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
그리고 어느 산 속에다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행복했다. 자식도 낳았다. 그들의 행복이 영원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생활한 지 일 년 반 정도 지난 후부터 그녀가 변하기 시작했다.
미쳐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괴로웠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이 저주스러웠다.
그녀의 눈에서 혈광(血光)이 비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광기는 도를 더해
갔고 급기야는 자신의 손으로 낳은 자식마저도 해치려고 했을 때 그녀는 그
에게 부탁을 해왔다.
이제 그만 보내달라고 더 이상 힘들어서 살기가 힘들다고, 이러다가는 자
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마저 자신의 손으로 해치게 될까봐 두렵다
고 했다.
그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고작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는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이 모
든 것을 버릴 테니까 그녀를 구해달라고.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하늘에 비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그녀
의 광기는 점점 더 심해져갔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가 거의 없다시
피 했다.
하루 중 잠시잠깐 정신을 차릴 때면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부탁을 했다.
이곳에서 죽고 싶다고, 황야를 홀로 떠돌면서 죽고 싶지는 않다고. 광기가
강해질수록 그녀의 능력도 강해졌고 풍신개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어졌을 때
드디어 그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윽고 비 내리는 하룻날 그녀를 안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하며 원앙곡(
鴛鴦谷)이라 이름 지었던 계곡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으로 검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
야 잠시 동안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그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어보냈다.
"괴로워하지 말아요. 당신에게 너무 고마워요. 하늘이 나에게 또다시 태어
날 기회를 준다면 그때는 더 오래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내 일생을 통
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잘 있어요, 내 사랑!"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떠났다.
풍신개는 분노했다. 자신을 원망했다. 개방의 방주면 무엇하랴, 가장 사랑
했던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풍신개는 서서히 피폐해져 갔다. 팽무련의 죽음이 그에게서 삶의 희망을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
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결정되었다.
자신의 행복을 깨뜨린 인간들을 찾는 것, 오로지 그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다.
이야기를 마친 풍신개의 얼굴에는 통한의 눈물이 흘러내렸고, 불끈 쥔 그
의 손에서는 회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팽무도를 찾고자 하는 것은 그 녀석에게 뭔가 부탁하려는 것이 아니
다. 다만 무련이의 오라버니이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 녀석을 만나고 싶
을 뿐이다. 또한 소운이도 보여주고 싶고…."
"할아버지!"
소운이었다. 조천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다 돌아온 소운
이 풍신개의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며 걸어나왔다.
"다 들었느냐? 그동안 너에게 미안했구나. 아무런 이야기도 못 해주어서…
."
소운은 말없이 풍신개의 품에 안겨서 흐느꼈다.
어둠만이 감싸고 있는 갈대밭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말을 마치고 이
를 악물고 있는 풍신개나 이를 듣고 있던 백산은 아무 말 없이 술잔만 응시
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멍해있던 백산이 남아있던 술을 마시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신을 낳아주신 아버지의 검을 받은 사부나 자기 부인의 가슴에 검을 박
은 어르신이나 다들 참 불쌍한 사람들이구려. 처음 저에게 백살마대(百殺魔
隊) 이야기를 해주신 사부도 그런 말을 합디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 한번 듣고 잊어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백살마대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되는군요."
잠시 풍신개를 건네다본 백산이 다시 술을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네, 맞습니다. 영감님의 생각처럼 제 사부님의 성함이 팽무자 도자를 쓰
십니다. 그리고 백살마대도 천무맹의 음모로 탄생한 것이 맞고요."
"정말이냐 무도가 아직도 살아있단 말이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
풍신개가 백산의 손을 잡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
없이 물어댔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자신에게 이런 기쁨을 주려고 이
녀석이 그간 그렇게 뜸을 들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기쁘
기 그지없었다.
"이곳에 살고 계십니다. 남궁세우 사숙과 함께요."
"뭐라? 남궁아우도 살아있다고? 잘됐어, 정말 잘되었어. 이곳에 와서 그들
을 만나다니 죽기 전에 그들을 만날 수 있다니! 크 하하하! 하하하!"
풍신개는 마치 혼이 빠져나가 버린 듯이 웃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웃어보
는 통쾌한 웃음인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좌절과 사랑하
는 이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자책, 그리고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세
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토해내듯이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그의 눈에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팔십이 넘은 노 기인이 울
고 있다. 한 많은 세월을 다 쏟아내려는지 펑펑 울어댔다. 저절로 숙연해지
는 마음을 감추려는 듯 백산이 슬그머니 일어나면서 조천영에게 눈짓을 했
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사연을 간직한 채 사는 것 같아요!"
"그래요. 누구나 가슴 아픈 사연 하나씩은 다 있겠죠. 어떤 이는 그 아픔
을 가슴속 깊이 꼭꼭 묻어서 잊어버리려 하고, 또 어떤 이는 스스로 자멸해
가기도 하죠."
백산은 가만히 조천영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당신이 그랬지 않았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백산의 눈빛을 받은 조천영은 그의 말투가 마치 자신을 나무라는 것 같아
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비켰다.
"이곳 뇌룡현(雷龍縣)에는 특히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중원에서
실패한 많은 이들이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로 이곳을 택하기도 하고, 여기
우리가 있는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기도 하죠. 심지
어는 목숨까지도 말이에요. 이곳에 비가 많이 내리는 이유가 그런 인생패배
자들의 한과 눈물이 비가 되기 때문이래요…."
백산이 조천영을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조천영이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그도 어
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연에 설귀후가 있다는 것도.
"그래도 말입니다. 죽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것이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이
바람, 공기, 술 그리고 여인네의 향기 이런 것들은 죽어버리면 못 느끼잖
아요?"
조천영의 귓가로 코를 들이댄 백산이 킁킁거리며 마치 이제는 죽을 생각일
랑 하지 말라는 듯이 속삭였다.
"이놈의 자식은 시간만 있으면 작업을 해요. 무도가 있는 곳이 어디냐?"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풍신개가 좋았던 분위
기를 확 깨버리면서 백산의 뒤통수를 갈겼다.
"우씨! 어떤 놈이 분위기를 망치는 거야! 이봐, 영감! 분위기 파악 좀 하
고 끼어들어요. 지금 영감 때문에 산통 다 깨졌잖아요. 이래서 늙으면 죽어
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니까…."
화가 났다. 저번에 황홀한 구경을 하려고 했을 때는 소운이가 방해를 하더
니 이번에는 이 영감이 산통을 깨고 있는 것이다. 누가 조손지간 아니랄까
봐 꼭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한다.
백산이 인상을 팍팍 쓰면서 풍신개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눈에 힘을 주고 달려드는 백산의 행동에 풍신개는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
도 자신이 사부 친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대하는 것은 저번과 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기회에 버릇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풍신개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놈 말하는 것 보게? 나는 네 사부의 친구야.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네 녀석의 사부가 나의 처남이야, 알아들어? 그럼 네가 나를 뭐라고 불러야
돼? 사백! 사백이야. 냉큼 사백이라 부르고 절을 해라 이놈아. 몰랐으면
모르되 알았는데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냐?"
이제는 저 싹수없는 놈을 눌러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간 받은 괄시를 모
두 갚아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풍신개의 입이 귀밑에 걸려서 내려올지
를 몰랐다.
일그러지는 백산의 표정을 보며 조천영과 소운은 키득거렸고 특히 소운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거봐, 이래서 내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만 곧 관에 들어갈
것 같은 노인네가 우는 모습이 불쌍해서… 아이고 이 병신. 지 무덤을 지
가 파놓고. 아이고, 이 돌대가리…."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치면서 탄식을 하던 백산은 하는 수 없이 풍신개에
게 절을 올렸다.
"사…백…님!"
이를 갈고 있는지 사백이란 말이 정확하게 발음이 되지 못하고 띄엄띄엄
끊어지고 있었다.
백산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하던 짓이 지위가
바뀌었다고 달라진다는 것은 그의 성격상 맞지도 않았다.
"크 하하하! 저리 가서 술이나 한잔 더 하자. 소운아, 조 소저랑 가서 술
좀 더 사와라. 오늘같이 좋은 날 밤새도록 마셔보자."
풍신개의 말대로 두 사람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주변에는 자신의 임무
를 다한 빈 술병들만 나뒹굴고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마신 술 탓인지 풍신
개는 인사불성이 되어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으면서도 백산을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음냐! 그러니까 내 나이가 팔십 아니냐. 음….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그러니 젊은 네놈이 소운이를 책임져야 돼, 알았냐? 왜 대답이
없어? 알았냐고…."
"네, 알았다고요. 책임지면 될 것 아뇨."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술이 좀 취했다 싶을 때부터 줄곧 저 소리만 반
복하고 있다. 곁에 있던 소운도 당혹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풍신개의
말이 싫지는 않은지 간간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띠었다. 영악한 여심이여
….
잠시 후 풍신개가 잠이 들자 백산은 그를 들쳐업고 일어서며 떠오르는 태
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 또 다른 한이 더해졌음을… 사부, 남궁 사숙, 표운 그리고 풍신
개 사백, 백산은 가슴 한켠에서 아련한 통증을 느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남보다 뛰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일까? 주어진
그대로 즐겁게 살면 그대로 족한 삶인 것을….
왜 인간들은 다른 이들을 짓밟고 올라서려고만 하는 것일까? 또다시 시작
되는 하루를 위해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하고 객실로 향하는 백산,
그 뒤를 소운과 조천영이 나란히 손을 잡고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