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마령호피(魔靈虎皮)
약 반 시진 정도 몸을 날린 백산은 뇌룡현에 있는 장 노인의 대장간에 도
착했다.
"저 왔습니다, 사부님!"
오랜만의 만남이라 백산은 최대한 공손하게 자신의 사부를 불렀다.
"왔으면 냉큼 들어오지 않고 뭐하냐."
마치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백산을 맞았다.
"저 노인네는 일년이 넘었어도 반가운 표정 하나 없어요."
백산은 쌜쭉거리면서도 사부라고 큰절을 올렸다.
"내놔라!"
가타부타 없이 백산의 눈앞으로 활짝 펴진 팽무도의 손바닥이 다가왔다.
"뭘요? 산에서 지금 바로 온 제가 무슨 선물을 가져왔을 거라고 내놓으라
는 겁니까?"
느닷없는 사부의 말에 백산의 표정이 흠칫했으나 그래도 할 때까지는 해보
려는 모양이었다.
"이놈이? 네놈이 마령호 잡을 때 수거한 것 있잖아? 마령호처럼 영물은 내
단을 가지고 있을 테고 분명히 네놈이 챙겼을 것 아니냐. 네놈 같은 좀생이
가 그걸 그냥 두고 올 리가 없잖아, 빨리 내놔!"
"나 참! 다 늙어 곧 저위로 올라갈 노인네가 내단이 왜 필요한데요. 예?
사부님보다는 저에게 더 필요한 것이 내단(內丹)이라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 앞으로 강호에 나가서 할 일이 태산인데 나쁜 놈 새끼들과 싸워 부상이라
도 당해서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는 어떻게 치료하냐고요? 그때 사용할 비상
약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백산이 마령호 내단을 하나라도 건져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두 개의 내단 중 하나는 사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백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꼭 먹고 싶은 생각에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쳐? 목숨이 위험해? 에라! 이 나쁜 놈아 네가 왜 다치냐. 왜 목숨이 위
험하냔 말이야 이놈아. 다치기도 전에 그 광풍노산(狂風努山)인가 뭔가 하
는 것을 펼쳐서 도망갈 놈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엥? 나만의 비전인 광풍노산을 어떻게 아셨어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재빠르게 자신의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했으나 씨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잔소리 말고 내단 빨리 내놔!"
팽무도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백산은 자신의 품에 있던 내단 하나를 꺼내
서 사부에게 내밀었다.
"왜 하나야? 빨리 내놔."
"알았어요, 주면 되잖아요. 전부 다 주면 되잖아요. 하여간 사부라는 인간
이 제자 잘되는 꼴을 못 봐요. 자요! 다 가져가라! 다 가져!"
백산이 팽개치듯 내단을 내밀자 그것을 붙잡고 천천히 살펴본 팽무도는 자
신의 품속에다 집어놓고서도 여전히 백산을 향해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또 뭐요?"
백산이 눈을 치켜뜨며 팽무도를 향해서 소리를 팩 질렀다.
"임마, 영물의 쓸개는 남자의 거시기에 무지하게 좋다는 소리 못 들었냐?
그것을 혼자서 다 처먹지는 않았겠지? 이 사부 주려고 남겨온 것 빨리 내놓
으라고, 장 노인 오기 전에 빨리 먹게."
백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빌어먹을 영감이 그것까지 원할 줄은 생
각도 못했다. 다 늙은 노인네가 힘 쓸 일이 어디 있다고. 속으로는 열불이
터지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나가기로 했다.
"아! 그 놈의 쓸개하고 간이요? 이 녀석 잡고 나서 힘도 들고 배도 고프고
해서 먹을 것을 찾는데 있어야죠. 살은 너무 질겨서 먹지도 못할 것 같고,
그때 쓸개와 간은 고기도 연하고 괜찮다고 해서 제가 다 먹었죠 뭐."
"뭐라고? 이런 나쁜 놈 그런 몸에 좋은 게 있으면 사부를 먼저 생각해야지
지가 먼저 처먹어! 그래 맛있더냐? 혼자 다 처먹으니 맛있더냐고. 호랑이
쓸개도 아니고 백호도 아니고, 그 영물 중에 영물이라던 마령호의 쓸개와
간을 지 혼자서 다 처먹어? 아-이-고! 아-이-고! 내가 제자 헛키웠지, 헛키
웠어. 무려 십 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뒷바라지 해놓으니까 그 귀한 걸
혼자서 먹어? 그래 이놈아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나쁜 놈아."
팽무도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저 녀석은 지가 잡은 마령호라고 이 세
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엄청나게 비싼 저 마령호 가죽을 자기 것이라고 우길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해놓지 않으면 자신에게 준다는 소리는 죽어도 하지 않을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백산은 미칠 지경이었다. 마령호에서 가장 중요한 내단까지 주었는데 그것
도 먹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던가. 그런 것을 꾹 참고 내놓았더니 이제는
쓸개 안 가져 왔다고 내놓고 억지다.
"그래도 사부님 생각해서 마령호 호피를 가져왔잖아요. 이것만 팔면 사부
님의 노후는 아무런 걱정 없을 것 같은데요?"
"형님! 누가 왔습니까?"
그때 밖에서 장 노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게, 아우."
"오! 백산이 왔구나. 그동안 많이 컸구나. 이 녀석 훌륭하게 자랐어. 너의
아버지도 저승에서 기뻐하겠구나. 정말 장하다, 이 녀석."
백산은 조용히 장 노인에게 큰절을 하자 장 노인이 백산을 껴안으며 눈물
을 글썽였다.
"그런데 밖에서 듣자하니 두 사제가 다투는 것 같던데 무슨 일입니까, 형
님?"
"아니야. 다투기는 누가 다퉈. 이 녀석이 나 준다고 마령호의 호피를 가져
왔어.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네."
그래도 타인 앞에서는 제자의 욕을 하기는 싫었던지 팽무도가 백산을 칭찬
하고 나섰다.
"아, 글쎄. 이것이 저놈이 가져온 호피라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팽무도가 백산이 가져온 호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 순간 그 안에 들어있던 마령호 뼈와 일곱 개의 유골들이 바닥으로 우수
수 떨어졌다. 팽무도와 장 노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황당함이 어리고 있을
때, 마령호의 뼈라도 지키기 위해서 백산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
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 이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서 제일 위로 모셨는데 저 소갈머리 없는 사부 때문에 이렇게 작살이 났으
니 어떻게 아버지를 찾아서 어머니 곁에 모실 수가 있습니까. 아이고! 아버
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이고!"
백산이 사부의 눈치를 보면서 '아이고!'를 연발하고 있자 난처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던 팽무도가 무척 아쉬운 표정으로 백산을 향해 소리쳤다.
"치사한 자식 같으니, 그래 알았다 이놈아. 이 마령호 뼈는 너 가져라."
백산이 입가에 미소를 배시시 지으며 마령호 뼈를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치
웠다.
"백산아, 그런데 이 살덩이는 무엇이냐? 그놈은 너무 오래 살아서 살은 질
기고 맛이 없을 텐데, 또 쓸개나 간이라면 모를까."
아직도 쓸개와 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팽무도가 백산이 가져온 마령호(
魔靈虎)의 상징을 보고 물어왔다. 하기야 이렇게 거대한 것을 보고 그것이
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참 이것을 잊고 있었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암시장에다 고기나 좀 팔
아볼까 하고 가져온 것이라고요."
자신이 먹는 것도 좀 찜찜하고 해서 암시장에 내다 팔려는 마음에 백산이
고기라고만 둘러댔다. 그러나 한때 의술을 알고 있었던 장 노인에 의해서
그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가만, 이거 그 호랑이 놈의 그것이구먼. 엄청 실하게 생겼네. 이런 대단
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써보지도 못했으니 그놈도 행복한 놈은 아니었
구먼?"
장 노인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말았다.
"그럼 이놈이 마령호의 그것이다 이 말이지? 지금."
엄청난 크기의 상징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장 노인을 쳐다보던 팽무
도가 백산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키웠구나. 이 사부를 위해서 쓸개보다 더 값진 것을
가져오다니. 수고했다, 백산아."
"사부 연세도 생각하셔야지요. 그 나이에 이런 것 드셔서 무얼 어떻게 하
겠다는 겁니까. 팔십 년 동안이나 녹슬어있는 검에 기름칠을 한다고 그것이
검 노릇을 할 것 같습니까?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것입니다. 사부! 그러
니 이것 암시장에 가져다 팝시다. 예?"
팽무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남자의 가장 아
픈 곳을 건드린 것이다. 물건 달고 있는 남자라는 동물은 모든 욕은 다 용
서해도 자신의 상징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게 되면 나이에 상관없이 참지를
못한다.
퍼억!
"잔소리하지 말고 나가서 술이나 사와! 새꺄."
벌게진 얼굴을 하고 백산이 술을 사러나가고 방에는 팽무도와 장 노인 둘
만 남아있었다.
"남궁아우, 이것은 육회로 먹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겠지?"
"아마 그럴 것 같은데요?"
"자네 혹시 빙공(氷功) 아는 것 없나?"
"저는 아는 것이 없는데. 형님, 그 빙공(氷功)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조금 불안해서 말이야. 이것 상하면 큰일이잖나. 또 너무
많이 얼리면 맛이 없어질 것 같기도 하고, 자고로 육회는 살짝 어는 듯했을
때가 가장 맛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야 효과도 가장 클 것 같고."
팔십이 다된 두 노인네가 마령호(魔靈虎)의 거시기를 놓고 어떻게 보관하
느냐 하는 것과 가장 효과적으로 먹는 방법에 대해서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
다.
좌우지간 남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똑같은 놈들이다.
모든 것이 수습되고 마주앉아 백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이 탄식
을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아우, 어떻게 방법이 없겠나?"
"뭐, 저 상태로는 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표시가 있
는 것도 아니고, 이거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경우를 당했군. 난감하군요
, 정말."
장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헛기침만 연발하고 있었
다.
"이 녀석아. 그러기에 평소에 마음 씀씀이가 좋아야지. 도대체 얼마나 성
질이 고약하면 이런 경우가 생기냐 그래."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때 사부님이 이놈을 잡았더라면 이런 개떡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요."
또다시 백산과 팽무도의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느라
연신 침을 튀기고 있었다.
"형님, 그만 하세요. 백산아 너도 그만두고! 그것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생각들은 안하고 뭘 그렇게 싸우십니까."
"글쎄 저녀석이 자꾸만…."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장 노인이 팽무도와 백산을 나무라며 말을 막았다.
"과거에 제가 들은 것이 있는데요. 천사맹의 사령귀혼대법(邪靈歸魂大法)
이라는 사술이 죽은 자의 혼백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 맞아. 나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될지는 모르지만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군."
옆에서 듣고 있던 백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천사맹인가 뭔가 하는 데서 사령귀혼대법을 익힌 놈을 잡아다가
시켜보면 아버지의 유골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이거죠? 확실한 거죠
?"
일단은 방법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는 백산이었다.
"참, 그리고 사부님이 아까부터 남궁 아우라고 말하는 것 같던데, 그것이
저에게 할 말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나요?"
백산의 물음에 팽무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작스레 근엄한 표정
으로 변했다. 사부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것을 몸
으로 체득한 백산은 조용히 사부와 장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 네가 장 노인이라고 알고 있는 이분은 원래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사람이다. 나와 같은 백살대(百殺隊) 출신이지. 그도 쫓기다 어떻게 목숨을
구하여 이곳으로 흘러들었고. 나와 만난 것이 이십 년 전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형님!"
백살마대의 일원으로 강호인들로부터 쫓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장강의
상류였다. 그곳에서 남궁세우(南宮細雨)는 일단의 무림인들과 조우하게 되
었다. 그 속에는 아버지인 남궁일몽(南宮一夢)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궁세우는 아버지를 향해서 전음으로 자신들의 결백을 밝혔다. 그의 아버
지는 그를 믿어주었고 너를 살리기 위해서 이곳에 왔노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게 해준 하늘에 감사한다면서 그에게 검을 던졌다.
아버지의 검은 심장 쪽으로 정확하게 박혔고 남궁세우는 장강으로 떨어졌
다. 그는 바로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쳐 장강 하류까지 밀려갔다.
심장이 오른쪽에 있었던 것 때문에 살아났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그
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남궁세우의 왼쪽 가슴으로 검은 던져버렸
다.
그곳에서부터 낮에는 굴을 파서 숨고 밤으로만 이동하여 이곳까지 흘러들
었다. 이곳에 와서 그는 이름을 장 노인으로 바꾸고 살아가다 이십 년 전에
사문의 일로 이곳을 찾은 팽무도를 만났다.
그 이후로 장 노인은 그렇게 피를 갈구하게 된 이유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때나마 신수신룡(神手新龍)이라는 별호로 불렸던 것처럼 그는 의
술에도 제법 조예가 깊었다.
천무맹(天武盟)에서 지급한 영단은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
간이 지나면서 나타난 증세는 사령마단(邪靈魔丹)을 복용했을 때와 같은 증
세를 나타내었다.
사혈마강시(邪血魔疆屍) 제조에 쓰이는 사령마단은 피를 보면 볼수록 인간
을 광기에 휩싸이게 하여 자신의 모든 잠력을 끌어올리게 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단이다.
천무맹은 그 마단에 보유하고 있던 영약을 섞어 영단이라며 백살대에게 복
용시켰던 것 같았다.
그 당시 그들은 완전하게 미치지도 않았고, 또한 잠력이 고갈되어 죽지도
않았다. 결국은 의술에 능한 사람이 마단과 영단을 섞어서 약을 만들어냈다
는 말이 된다. 그런 예측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천무맹에는 의천약가(醫天
藥家)라고 하는 의가가 편재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가
능했을 것이다.
"이건 단지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거의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천무맹에서 그런 마단을 어떻게 구했느냐 하는 것
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짜내보아도 그것만은 아직도 알 수가 없었
다.
기구한 사람들이었다. 죄라면 강호 최대 세력이었던 세가에서 태어난 것밖
에는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잃고 세상을 등진 채 이름마
저 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도 할 수 없는 그들
. 자신들의 원수가 부모, 형제들인데 누구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백산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가문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식을 내치면서까지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금수(禽獸)조차도 자식은 끔찍하게 아낀다.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어미가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식을 버리는 경우는 없
다.
가문을 지킨다는 것이 뭔지, 성씨를 내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姓)이
없는 백산으로서는 알 수는 없었지만,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강호에 나갔을 때 두 분을 내친 그곳에서 아직도 사부님과 장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으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가문이라는 것이 자식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가문을 지키는 것
입니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경우는 있어도 가족을 살리기 위
해서 자식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투박하고 무식한 말이지만 당연한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
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 살아야 하니까 네
가 나가서 죽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백산이 생각하기에는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하북
팽가라는 가문과 남궁세가라는 두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가문의 사람들이
작당을 하여 이들을 죽인 것이다.
"그래 어쩌면 네 녀석의 말이 다 맞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말이다
인간이 지켜야할 도리가 있듯이 가문이란 것도 지켜야할 가훈이 있는 것이
다. 나는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어겼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 누구를 원망
하고 그럴 처지는 못 된다. 그것은 아마 내 동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팽무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옛일을 회상하는지 그의 눈빛은 아
스라이 멀어지고 있었다.
"무련(武蓮)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죽었을 게야. 그 애는 무공이 약해서 그 마단(魔丹)을 견디지 못
했을 테니까."
"구 형님이 구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녀석이 구했다 하더라도 방법이 없었을 것 아닌가."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다 백산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참 사부님 저의 아버지를 해친 놈들에 대한 단서는 찾았나요?"
무공을 익힐 때 사부에게 부탁했던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해주마."
남궁세우가 그 일을 맡았었는지 백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백산의 아버지가 살해당했을 당시 이곳 뇌룡현에서는 투신전이 한창이었고
, 모든 무인들이 만상투인루에 있었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무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유력한 곳은 만상투인루의 부
하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당시에 새로운 무인들이 들어왔다면 바로 알려졌을 것인데 아무
도 없었다 하더구나."
팽무도에게 백산의 소식을 듣자마자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대장간의 단골
고객이라기보다는 이웃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서둘러서 알아보았다.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네가 가서 조사해 보아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고마움이었다. 자신과 하등의 관련도 없는 사람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바로 조사를 해주었고 자신이 무공을 완성하기를 기다려서 전해주었다.
"사부님. 이 호피 말입니다. 아무래도 중원을 나가야 팔 수 있겠지요?"
이제는 할 일도 정해졌고 다시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왔는지 호피 파는 문
제를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이곳에도 암시장은 있지만 그곳에다 팔자니 헐
값밖에 쳐주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니다, 이곳에서 팔면 된다."
팽무도의 침울했던 눈동자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며 백산에게 꽂혔다.
"이곳에 이것을 살 만한 그런 부자가 있습니까?"
"있는 것이 아니고 중원에서 이곳으로 와있다. 만금돈노(萬金豚奴) 석숭(
石崇)이란 자라고 하더구나. 그 자에게 가면 제값을 쳐줄 것이야."
"이할! 그 이하면 안 가요."
"이런 소도둑놈 보았나. 이할이면 얼마인지 알아? 은화로 천 냥은 된다,
이놈아. 순 날강도 같은 놈. 오부로 해 이놈아 오부도 많이 생각해준 거야.
"
"일할 오부 아니면 그 노구를 이끌고 직접 가든지요. 탁 까놓고 얘기해서
이게 제 거지 어디 사부님 겁니까. 저에게 강탈한 거지."
백산이 최후의 수를 던졌다.
"좋다 양보하마. 일할로 하자, 일할. 딴소리하면 정말로 내가간다. 알았냐
?"
취익!
"좋습니다. 제가 가죠. 나중에 딴소리 없깁니다. 아셨죠?"
백산이 침을 한번 뱉어내며 팽무도에게 확인을 하고 있었다.
'만금돈노 석숭이라… 만금돈노 석숭 ….'
석남장(石南場).
만금돈노 석숭의 별장 겸 휴식처이다. 석남장의 대문 앞에서 커다란 보자
기를 들고 백산이 대문을 차고 있었다.
쾅! 쾅! 쾅!
"아무도 안 계쇼?"
"누구요."
잠시 후 그곳에서 관리자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의 매부리코 장한이 나오
며 백산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에 석숭인가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드만. 우뢰봉(雨雷峰)에서 백산이
왔다고 좀 전해주쇼."
꼭 이런 놈들이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주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구걸을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거지같은 놈들. 사연도 많다. 자식을 팔게
되었다는 둥, 노모가 아파 죽는데 약값이 없다는 둥, 이런 저런 사연을 가
지고 주인을 만나기를 원한다. 또한 그 놈들의 특징이 지금의 저놈처럼 문
앞에서는 저렇게 당당하다.
우뢰봉의 백산. 소개를 한다고 하고 있으나 누구인지 알 게 무언가. 젊은
놈이 열심히 일해서 살 생각은 안 하고 부잣집을 기웃거리는 꼬락서니가 더
욱 화나게 하고 있었다.
"젊은이, 우리 주인은 자네 같은 사람 만날 일 없으니 그만 가보게."
일단은 정중하게 타일러서 보내야 한다. 성질대로 하면 하인들 몇 명 불러
서 물고를 내고 싶지만 주인의 체면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쓰발! 나 당신 만나러 온 것 아니니까, 들어가서 호랑이 껍데기 팔러 왔
다고 좀 전하쇼."
그러나 이 촌놈의 표정은 변화도 없고 되레 육두문자를 써가며 주인을 불
러줄 것을 종용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가. 이 집을 방문하는 인간
들의 전형이다. 처음에는 당당하게 나가다가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욕을 하
던지 내가 누구와 친분이 있다는 둥 하면서 협박을 한다. 이제는 힘을 사용
할 때이다. 놈이 욕설과 더불어 인상을 쓰고 있다.
"얘들아! 끝나고 잊지 말아라, 소금 뿌리는 것."
이제 자신은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하인들이 처리해줄 것이다.
매부리코 장한이 문을 열어놓은 상태 그대로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아마 안
쪽으로 들어왔을 때 처리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백산이 어슬렁거리며 들어갔고 안쪽에서 여섯 명의 장한들
이 몽둥이를 들고 나오며 백산의 앞을 막아섰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어딜 들어오고 있는 거냐."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불법 침입으로 간주해서 나쁜 놈으로
몰아버리는 것이었다.
"야! 야박하다, 야박해. 천하에 대부호라는 만금돈노 석숭이 집으로 찾아
온 손님을 칼로 위협하여 내쫓으려 하다니. 부자면 원래 다 이런 거야."
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백산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칼로 위협한다고
하고 있었다. 닳고 단 놈의 표본이다. 또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여섯이나
되는 장한들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장한들을 기
분 나쁘게 했는지 말투가 험악해졌다.
"헛소리하지 말고 그만 꺼지라니까, 이 자식이?"
여섯 명의 장한 중의 한 명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백산을 위협해왔다. 그러
나 상대를 너무나 몰랐다. 백산의 몸이 가볍게 움직이더니 달려들던 장한
한 명이 자신의 아랫도리를 붙잡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다쇠불알의 주특기. 십 년 전의 백산의 주특기가 다시금 발휘되었다.
"이봐 다친다고 다쳐. 그냥 너희 주인만 만나고 갈게. 그러니 길 좀 터줘!
"
남아있던 장한들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비록 몽둥이를 들고 나왔지만
자신들은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다. 대부호인 석숭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
와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일초에 당하고 말았다. 장한들의
표정이 신중하게 변했다.
"누구냐? 네놈은."
이름 없는 무명 잡배가 아니라는 생각에 각자의 몽둥이들을 신중하게 잡으
며 백산을 향해서 외쳤다.
"나? 우뢰봉에서 온 백산이라니까 그러네. 목적은 호랑이 껍데기를 팔러
왔고."
"쓸데없는 소리. 목적을 밝혀라!"
이제는 아예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했다고 단정을 지었는지 세 명의
장한이 백산을 앞뒤로 포위하며 들고 있던 몽둥이를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몽둥이에서 약간의 검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평범한 몽둥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진정하라고. 너희들 다치게 하기는 싫다고."
자신들이 엄밀하게 포위를 하고 있는데도 놈의 입에서는 유들유들한 말이
튀어나오고 있다. 이것이 배짱인지 만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산을 도망
가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인지 남아있던 두 명의 장한은 정문 쪽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잡아놓고 묻겠다, 누구의 사주로 이곳에 온 것인지."
앞쪽에 있던 장한 한 명이 오른 발을 앞으로 옮김과 동시에 검기를 가득
머금은 몽둥이를 백산의 상체를 향해서 휘둘러 오고, 뒤쪽에 있던 장한은
허리 쪽을 향해서 횡으로 베어왔다. 백산이 피할 곳은 나머지 한 장한이 있
는 곳밖에 없었다.
이미 그렇게 될 것을 노리고 있었던가. 피하기 위해서 그 쪽을 쳐다보는
백산을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던 마지막 장한이 몽둥이를 옆으로 힘차
게 뿌리자 지금껏 몽둥이로 보였던 부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며 검(劒)
이 나타났다.
그리고 백산의 어깨를 향해서 빛살 같은 찌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
절묘한 합격술. 피할 수 있는 방위를 남겨두고 그쪽으로 옮기려는 순간에
이어진 찌르기는 모든 방위를 완전하게 차단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순간 찌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장한 쪽으로 움직이려던 백산의 몸이 그 자
리에서 멈추며 뒤쪽에서 휘둘러진 몽둥이가 궤적을 그리고 지나간 곳으로
몸을 날림과 동시에 오른발을 상대의 하체 쪽을 향해서 날렸다.
"헉! 챙!"
찌르기를 시도한 장한과 백산의 상체를 베어오던 장한의 검이 부딪치며 나
는 소리와 함께 나머지 한 명의 장한이 자신의 하체를 붙잡고 그 자리에 쓰
러졌다.
그러나 백산의 몸은 그 자리에 서 있지를 않았다. 자신들의 검끼리 부딪침
에 놀라서 멈칫거리고 있던 두 명의 장한을 향해서 뛰어들며 자신의 상체를
베어왔던 장한의 멱살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오른 다리를 이용해 놈의 두
다리를 걸어 허공에 띄웠다.
두 번째 찌르기를 시도했던 인물이 동료의 몸에 막혀 멈칫하는 순간 허공
에 있는 사내를 향해 등각을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내의 낭
심에 백산의 앞 축이 그대로 박혀들었다.
순식간에 두 명의 사내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붙잡고 바닥을 기고 있었다.
백산이 보여준 행동에 사내들이 놀랐는지 정문을 막고 있던 자들이 나무
몽둥이 속에서 검을 뽑아 살기를 흘리며 신중하게 다가들었다. 단순한 박투
술을 이용하여 자신들 중 두 명을 가볍게 처리하자 보통 놈이 아니라 생각
한 모양이었다.
"누군가!"
밖에서 나는 기척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음인지 방문이 열리며 약간 뚱뚱하
고 후덕한 인상의 인물이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댁이 석숭인가 하는 사람이쇼?"
"그렇네만?"
"자네들 운이 좋구먼?"
자신에게 살기를 뿌리고 있던 나머지 세 명의 인물을 향해서 가볍게 웃어
보이며 백산이 몸을 돌려 석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자,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집에 온 손님을 문밖에 세워놓고 이러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문지기 양반 여기서 제일 좋은 차를 좀 내오쇼
."
수수한 집안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언제 주인의 부하들과 싸웠냐 싶
게 매부리코 장한을 시켜 차를 내오라는 듯 제멋대로 행동하는 백산이었다.
"이보게 젊은이, 이 집주인은 날세. 그리고 그 말은 내가 해야할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따, 그 양반 까다롭기는. 어차피 차 한 잔은 줄 것 아뇨. 안 그렇소?
자자, 손님 접대하는 곳이 어디요. 들어갑시다."
방으로 들어선 백산은 몸을 으스스 떠는 시늉을 했다. 사방에서 살기가 쏘
아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뭘 좀 팔러 왔다니까. 너무들 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자신의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보따리를 풀어놓았
다. 순간 온 방안에 가득 퍼지는 은색의 물결.
"얼마 주실 거유?"
은색의 백호피를 바라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석숭에게 단도직입
적으로 가격에 대해서 묻고 있다.
"자네가 잡았나?"
석숭은 백산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백산을 향해서 되물었다.
온 방안을 다 깔고도 남는 크기에다 저 은은히 빛나는 은빛 털. 전설로만
듣던 백호 중의 최고인 마령호란 놈이다.
"내가 잡았으니까 팔러온 것 아뇨. 어, 차 가져 왔으면 이리 주쇼."
차를 가져왔다가 방안에 펼쳐진 백호피를 보고는 넋이 빠져있는 매부리코
의 손에서 차를 채가듯 가져가는 것이었다.
"후르릅! 카아! 이거 뭐 이리 써. 이런 걸 왜 먹는지 모르겠네."
"이것 보게. 그 용설차는 말일세. 조금씩 혀로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거
라네. 그렇게 한 모금에 털어 넣으면 그건 물이지 차가 아니네. 그리고 상
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예의는 무슨 얼어죽을, 얼마나 줄 거냐고-요."
바로 그때 천장 세 곳에서 백산에게 쏘아지는 살기가 강해지며 그의 귓속
으로 '더 이상 무례하면 죽인다.'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엥? 석 대인, 물건 팔러오는 사람도 수틀리면 죽이는 거요?"
백산이 자신의 귀에 들려온 전음에 대해 그대로 석숭에게 따지고 들었다.
"물러가라."
석숭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보통 사람은 자신에게 전음으로 무엇
인가 들려왔다고 해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따지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몸가
짐을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상대에게 약간은 미안한 표정을 짓기도 한
다.
그런데 이 친구는 상대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바로 떠벌리면서 오
히려 상대방이 미안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천장의 한쪽을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석숭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
내 풀었다.
하는 행동은 어눌하고 엄벙덤벙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예리함은 자신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장사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인간들을 만나고 또 판단해서 사업을 확장시켜왔지만 이 청년의 내심은 알
수가 없었다.
무공만 해도 상당한 고수인 것 같은데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전혀 무공
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천장의 한 곳에 은신해있던 자신의 부하는 전부 네 명이다. 그중 세 명은
세간에서 고수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이 판별해내곤 한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은 일류 고수가 아니면 그 기척을 찾아내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이 어눌하게 보이는 청년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만 냥."
백산의 입에서 먼저 원하는 가격이 나왔다. 사실 백산은 이만 냥이 얼마만
큼 큰돈인지 모른다.
그 정도의 돈은 만져본 적도, 눈으로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부
가 만 냥 정도를 예상하는 것을 보고 무조건 그것의 배인 이만 냥을 불렀다
.
"동전 이만 냥이면 너무 싸다 생각하지 않나?"
상인은 상인인가. 백산이 원하는 것이 은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동전이란
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동전은 냥이란 말을 쓰지 않고 문으로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동이 아니고 은이었나, 자네?"
"그럼 동으로 아셨습니까? 통이 큰 분인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입니다 그
려! 밴댕이가 보면 울고 가겠네요?"
"허허! 지금 나더러 밴댕이 속이라 했는가? 황하에 홍수가 났을 때 이천만
냥을 희사한 이 석숭 보고 밴댕이라 칭한 사람은 이 세상에 자네밖에 없을
걸세. 그럼 자네 이것을 은 이만 냥을 받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한번 말
해보게."
"이유야 많지만 단 한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이건 덤인데요
. 저 상품을 보면 단 한군데도 흠이 없어요, 칼자국 하나도. 저 정도면 은
이십만 냥도 아깝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석숭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모름지기 장사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최고
라고 생각하면 원하는 가격을 반드시 받아낼 수 있는 배짱. 자신의 물건이
최고라는 자신감, 석숭은 이 어눌한 젊은이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특히 저 어벙한 표정 속에 숨겨져 있는 예리함이 자신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다.
"좋아! 좋네. 혹시 자네 나랑 사업할 생각 없나? 대단한 사업수단이 있을
것 같은데."
놀라운 일이었다. 중원 최대의 부호인 석숭이 비록 빈말이라 할지라도 백
산에게 동업을 제의해왔다. 엄청난 금력을 가지고 있다보니 하루에도 수없
이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구상하여 동업을 목적으로 석숭을 방문한다.
그 중에 석숭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투자를 하는 것이 몇 건이나 되
던가. 몇 년에 한 건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일 뿐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 그가 아무 것도 없는 백산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에이! 대인도. 나는 사업체질은 아니요. 사기치는 것이라면 모를까."
"좋네, 내 은 이만 냥에 사지. 거래는 성사되었네. 사업 이야기도 한번 생
각해 보게나. 문 총관, 여기 은 이만 냥짜리 전표 한 장 끊어오게."
"아니요. 천 냥짜리 열아홉 장하고 백 냥짜리 열 장으로 주시죠. 좀 쓸 데
가 있어서 말입니다."
"석 대인! 혹시 백호 뼈는 살 의향 없으십니까?"
"호! 뼈도 팔려고 하는가? 미안하지만 그것은 필요 없네. 하지만 네 그것
을 비싸게 사는 곳을 소개는 시켜줄 수 있네. 북경에 있는 만금상회(萬金商
會)로 가져가게. 그럼 적어도 은 이천 냥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걸세. 아마
다른 곳에서는 그 절반 값도 받기 힘들 테니 명심하게."
"감사합니다, 석 대인. 그리고 이건 덤입니다. 이놈의 이빨인데 장신구로
쓰면 좋을 것입니다."
백산은 자신의 품속에서 마령호의 어금니 두 개를 꺼내서 석숭에게 내밀었
다. 내심으로 이 돈 많은 부자가 마음에 들었다. 돈 많다고 거만하거나 뻐
기지도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니 돈을 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문 총관. 아까는 미안했소. 그리고 이것은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준
보답이요. 사양하지 마시오."
백 냥짜리 전표 하나를 문 총관에게 내밀었다. 문 총관은 석숭의 눈치를
보더니 석숭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하게 전표를 받아 들고는 감사의 표시
로 고개를 조아렸다.
석숭의 집을 나온 백산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만 냥이면 족하다던
것을 이만 냥을 받았으니. 그 돈을 어떻게 쓸까 하는 고민을 하느라 대장간
이 가까워오는지도 몰랐다.
눈앞에 대장간이 나타나자 재빠르게 돈을 분리한 백산은 사부의 몫인 구천
냥을 따로 두고 나머지는 자신의 품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대장간에 도착한 백산은 목에다 힘을 잔뜩 주고 대문을 힘차게 밀어 제쳤
다.
"저 왔습니다, 사부님!"
큰 소리로 팽무도를 부르며 대문을 들어서기 위해 오른발을 땅바닥에 놓는
순간. 그의 좌측에서 맹렬한 검세(劍勢)가 밀려 들어왔다. 그 검세는 마치
해일이 일듯이 백산의 전신을 향해서 지쳐들고 있었다. 절묘한 순간의 암
습이었다.
인간이 걷는 자세에서 심적으로 가장 느슨해지는 순간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들어올린 발을 바닥에 놓기 직전이다. 그때는 몸의 중심이 뒤쪽 다
리에서 앞쪽으로 내딛고 있던 다리로 옮겨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
르게 주의가 그쪽으로 쏠리게 되어 자신에 대한 방어가 가장 취약한 시기이
기도 하다.
그런데 이 암습자는 바로 그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검을 날린 것이다.
그것도 일반 살수들이 쓰는 찌르기 일변도가 아닌, 절대의 무공을 사용하
여 백산에게 기습을 가한 것이었다.
다가서지도 않은 검세에 의해서 백산의 옷은 여기저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순간 마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백산의 몸이 발을 딛는 자세 그대로 살짝
밀리며 왼발이 들려지고, 각천비(脚天匕) 중의 하나가 검세의 폭풍을 뚫고
날아갔다.
"헉!"
검세의 저편에서 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해일 같은 검세가 그대로 스러졌
다. 뜻밖에도 남궁세우였다.
"남궁 할아버지 아…허억!"
백산이 남궁세우를 부르려는 순간 또다시 피의 폭풍처럼 붉은 도강이 날아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강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 섬뜩한 뭔가가 포함되
어 있었다.
날아오는 도강을 바라보는 백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 영감이 제자 하나 있는 것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사부도 오늘 나에
게 한번 맞아보시오!'
사부인 팽무도였다. 백산은 자신에게 밀려드는 붉은 기운 사이로 몸을 날
렸다.
"저런!"
남궁세우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기습은 거의 완벽했다. 비록 무공을 극도로 펼치지는 않았지만 어
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자신의 검세보다 더 빠르게 녀
석의 무기가 이마에 닿아 멈추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산이 자신을 확인하고 놀랄 순간에 팽무도의 공격이 이어졌다.
팽무도는 전부 다섯 자루의 짧은 도를 가지고 도강을 시전함과 동시에 어도
술로 백산을 공격했다.
이 정도의 합격술(合格術)이면 강호의 누구라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백산은 도강과 어도술(馭刀術)이 난무하는 혈광(血光) 속으로 몸
을 던지고 있었다.
남궁세우의 눈에 비친 백산의 모습은 마치 날아오는 화살의 비를 향해 무
방비 상태로 뛰어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궁세우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리고 말았다.
백산의 양 손목과 발목에서 번쩍 하는 빛이 나오더니 폭발할 듯이 밀려들
던 혈광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그 속에서 몇 번의 타격음과 함께 누군가가
밖으로 튕겨 나왔던 것이다.
팽무도였다. 무엇에 당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점점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어라? 사부님이 왜 이 속에서 나와요?"
백산은 천연덕스럽게도 자신이 팽무도를 몰라보았다는 듯이 얻어터져서 얼
굴이 벌게진 사부를 보고도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사부인지 알았으면 조금 살살 팰 걸 그랬네?"
그래도 끝까지 안 팬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있다. 백산은 팽무도를 부축하
려는 듯 천천히 사부에게 다가갔다.
"치워라! 나쁜 놈. 나인지 알았으면서도 그렇게 세게 때리냐? 치사한 놈아
!"
팽무도가 백산을 노려보며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제가 사부님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무작정 공격하기에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쓴 거죠. 하마터면 제 목이 날아갈 뻔했다고요. 어이구, 얼굴
에 혹 좀 봐. 이거 상당히 아프겠네."
백산은 무엇이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시뻘게진 곳을
손으로 쓱쓱 문질러댔다.
"놔! 놔라. 이 나쁜 놈 새끼야! 처음엔 그냥 막기만 하려다 난 줄 알고 공
격의 강도를 더 세게 한 것을 내가 모를지 아느냐?"
팽무도는 백산을 냅다 팽개치고 악을 바락바락 질렀다. 자신이 공격을 해
서 당한 거니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백산이 강호경험도 없고 대전경험도 없는지라 이 기회에 강호의 무서움을
알려주고자 기습을 했던 것인데 남궁세우와 자신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
하고 말았다.
혼자서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팽무도를 바라보며 남궁세우가 백
산을 향해서 나지막이 말하고 있으나 팽무도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
"이놈아. 다 늙어서 힘도 없는 노인네를 살살 패지 그렇게 심하게 패면 되
겠냐?"
쾅!
방문을 닫는 소리가 유달리 요란스럽다.
"제가 사부인지 알았나요? 일휘나 석두인지 알았지. 그래서 옛날 사부에게
맞은 기억도 있고 해서 저의 고통을 좀 알아달라는 뜻에서 그렇게 한 거죠
."
방으로 들어간 팽무도에게 백산의 그 말은 나도 그렇게 맞았으니 너도 한
번 맞아봐야 나의 고통을 알 수 있다 이 늙은이야, 하는 말로 들렸다.
방안에서 헛기침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심술이 난 사부에게 달걀 한판과 마령호 호피 판 값 구천 냥을 준 백
산은 그동안 쌓인 것이 다 풀렸다는 듯이 휘파람을 휘휘 불며 뇌룡현을 걷
고 있었다.
십 년이 더 지났어도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과거
의 추억 속에서 헤매던 백산은 어느덧 홍루 앞에까지 왔다.
"아무도 없나?"
홍루는 조용했다. 백산은 가만히 서서 홍루 내부에서 흐르는 대기의 움직
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루의 가장 후미진 안쪽에서 한사람의 기
척이 느껴졌다.
"고수? 그것도 상당한 정도네. 누구지? 안에 아무도 안 계시오?"
백산의 목소리가 홍루 안쪽으로 넓게 퍼져나가며 고요한 정적을 깨우고 있
었다.
그 순간 백산이 느끼고 있던 기세가 강해지며 건장한 체격의 한 인물이 백
산 앞으로 나타났다. 섬전수(閃電手) 장한수(張漢洙)였다.
"오! 아우 왔구나. 그래 몸은 괜찮으냐? 그동안 정말 많이 컸구나. 이제
어른이 다됐어!"
섬전수 장한수는 마치 집나갔던 자식이라도 맞는 아버지처럼 백산을 맞이
했다. 예기치 못했던 장한수의 환대에 백산은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장한수의 환대는 사부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부는 마음만 있
을 뿐 표현에는 서툴다. 자신의 감정처리도 서툴고. 그래서 언제나 욕설로
서 반가움을 표시하여 숫제 가슴속에 있는 슬픔의 앙금 같은 것을 날려버리
게 하는 반면, 장한수 이 사람은 가슴속에 잔잔한 슬픔이 밀려오게 만들어
버린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조용히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백산이 무공을 익힐 때 이야기며 육포만 먹은 이야기 등등 백산의 말에
일일이 장단을 맞추면서 형님으로서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듯이 장한수
는 포근함으로 백산을 감싸안았다.
"그래서 지금 애들이 대월산(大越山)에 가있단 말이죠?"
자신의 사부가 다 보낸 거란다. 자신의 무공비급과 남궁세우의 비급을 주
어서 백산이 산으로 들어갈 때부터 지금껏 무공을 익히게 했던 것이다. 그
리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모두를 대월산에 밀어넣고 그곳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생활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벌써 삼 년 전이라고
한다.
* * *
"형님! 오셨습니까?"
일휘와 석두가 백산을 향해서 큰절을 올렸다. 무려 십여 년만에 만나는 사
람들이었다.
"강해졌구나."
십 년이란 세월이 백산은 물론이고 이들을 고수로 바꾸어놓았다.
더 이상 힘이 없어서 설움을 당할 일은 없을 성싶었다.
"수고들 했다."
"저희들이야 같이 있었지만 형님은 혼자였지 않습니까."
추측 불가, 석두와 일휘가 본 백산의 무공은 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흔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신들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으니 다른
사람의 무공 정도를 파악할 수는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꿈을 이룰 준비가 되었을 뿐이다."
언제나 가슴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아버지의 꿈과 자신의 꿈, 이것을 이
룰 준비를 마쳤을 뿐이다.
"자, 한잔하자."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느라 날이 밝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서늘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백산은 정상 근처의 한 동굴로 오구를
찾아나섰다.
"오 사부, 저 왔습니다. 백산입니다."
오구가 머물고 있다는 조그마한 동굴을 찾았다. 전에 어떤 맹수가 살았는
지 아직도 동물 노린내가 이곳저곳에 배어있었고, 간간이 배설물처럼 보이
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곳 가장 깊은 곳에 오구는 정좌하여 앉아있었다.
무슨 고초가 있었는지 과거보다 더욱 수척해진 얼굴의 오구는 마치 오랜
풍상을 겪은 동굴 밖의 바위처럼 거칠어 보이기만 했다.
백산은 가만히 오구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눈동자는 과거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서려있었고 어쩔 수 없는 자책감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누구야, 백산 아니냐?"
오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세를 풀면서 반갑게 백산을 맞아주었다. 자
신의 한을 풀어주었던 녀석이었다. 모든 뼈대며 혈도(穴道)가 굳어서 그에
게는 별반 소용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즐거웠다.
그렇게 익히고 싶었던 무공이었다. 이 나이에 자신이 익히고 못 익히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도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혀보고 싶다는 평생의 소망을
이루게 해준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무림인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신의 격투술을 익히고 사부라
고 불러준 녀석이었다. 고마웠다. 평생의 소원을 다 푼 것처럼 즐거웠다.
"그래, 어서 와라. 이제 수련은 다 끝났나보구나. 잘됐어, 정말 잘됐어."
"오 사부, 그런데 왜 오 사부는 진전이 없죠."
백산의 말은 비수가 되어 오구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자신
에게 찾아온 그 행운을 갖고 싶었다.
내공심법을 익혀보고 싶었고 그리고 도전했다.
끝없이 밀려드는 회의감. 왜 자신이 이것을 시작했던가! 따라주지도 않는
몸을 가지고. 앞질러가고 있는 일휘나 석두를 보면서 물밀 듯 후회가 밀려
왔다.
저들하고 같은 내공심법으로 할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도나 검을 쓸 자신이 없었다.
평생을 주먹만을 가지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백산이
처음 석두를 통해서 알려주었던 내공심법을 고집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자신의 객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 때문인지 생각대로 되지 않는구나. 괜히 시작한 것 같다."
말을 하는 오구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어려있었다.
"사부, 제가 도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극구 사양하는 오구를 되돌려 앉힌 백산은 그의 혈도를 자신의 내공으로
뚫어가기 시작했다.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오구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
았다.
이 정도 고통은 자신의 이십 년 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온몸으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은 그의 악다문 이 사이로 피가 흘러
내리게 하고 있었다.
"기왕 시작한 것, 오 사부의 몸에다 뇌(雷)의 기운이나 좀 심어놔야겠다."
생사현관을 제외한 모든 혈도를 타동시킨 백산은 오구의 몸 속에 뇌의 기
운을 심기 시작했다. 백산과 오구의 주위로 새파란 뇌의 기운이 춤을 추는
양 흘러다니고 있었고, 잠시 후 그 기운들이 오구의 몸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오 사부의 몫입니다. 나중에 뇌룡현에서 뵙지요."
운공을 하고 있는 오구를 바라보던 백산은 천천히 동굴 밖으로 빠져 나왔
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백산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담겨있었다.
절기(節氣)상으로는 가을의 초입에 있다지만 대륙의 남쪽에 위치한 이곳
뇌룡현(雷龍縣)은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다. 단지 계절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렇게도 자주 내리던 비가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밖에. 헌
데 오늘은 아침부터 빗방울이 뿌리고 있었다.
저 멀리 만상투인루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 백산은 지그시 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다.
'만상투인루야, 네가 간다. 이 백산이…."
백산의 모습이 아득히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