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84)

제11장 살(殺) 마령호(魔靈虎)

 천천히 우뢰봉(雨雷峰)을 둘러보고 있다.

 자신의 이십오 년의 삶 중에서 절반 이상을 보낸 곳.

 사부와 추억이 서려있는 오두막, 풍뢰곡(風雷谷), 그리고 용미폭포(龍尾瀑

布), 그 모든 곳에 배어있는 것은 삶의 여정이다.

 평범한 사냥꾼에서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무공의 고수로, 순간순간 고통스

러웠던 자신의 삶이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으로 백산의 가슴속에 켜켜이 쌓

여가고 있었다.

 이제 이곳 우뢰봉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음속 화

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우뢰봉을 바라보던 백산은 아버지의 철궁(鐵

弓)을 들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지금부터 마령호(魔靈虎) 사냥이다.'

 백산은 묵림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마령호를 잡기 위해 이곳을 헤매고 다닌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넘게 흘렀건

만 그곳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마령호를 잡겠다고 함정을 설치했던 곳에는 새빨

갛게 녹이 슬어 곧 부서질 것 같은 쇠뇌와 거의 썩어서 제 모습조차 찾기

어려운 창살을 박았던 통나무만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네 마음은 그때부터 멈춰있었는데 네놈들만 세월을 건너고 있었구나.'

 자신이 설치했던 함정들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던 백산의 몸에서 서서히

기세(氣勢)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분다. 하늘거리는 미풍(微風)이 이내 강풍(强風)으로 변하여 사방

으로 흐른다.

 백산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그가 지나

가는 곳의 초목들을 찢어발기고 있다. 푸른색을 가진 눈꽃들이 몸을 날리고

 있는 백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당했던 그 자리. 백산을 둘러쌓고 있던 기운도 서서

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조금만 기다리세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하나씩, 차근

차근 해치울 것입니다. 전에 아버지가 그랬죠? 사냥꾼은 사냥감을 잡을 때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사냥감의 모든 것을 파악할 때까지는 자신의 모

든 기척을 숨겨야 한다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의 숨통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조여갈 것입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이

곳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던 두 부자의 꿈

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령호(魔靈虎) 이놈! 백산이 다시 돌아왔다!"

 내공이 실린 백산의 외침이 묵림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천년 묵림의 정적

이 조그마한 인간에 의해서 깨어지고 있었다.

 백산의 눈앞에 거대한 마수(魔獸) 마령호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한갓 미물에 의해서 침묵의 숲이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만수의 제왕

인가. 전혀 놀람이나 서두름이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백산을 내려

다보고 있다.

 "마령호! 나를 기억하느냐? 이 활을 기억하냐고."

 백산이 과거에 마령호와 싸웠을 때 들고 있었던 아버지의 철궁(鐵弓)이다.

 커…흥!

 철궁을 알아보았는가. 은색의 털을 빳빳이 치켜세우며 거대한 포효소리와

함께 마령호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 앞에 있던 이 조그마한 벌레가 수천 년간의 세월 동안 자신을 다치게

 했던 유일한 생물임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마령호의 하나밖에 없는 눈에서 거친 살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순간적

으로 몸을 세움과 동시에 마령호의 앞발이 백산을 쓸어가며, 새하얀 살기를

 머금고 있는 발톱이 튀어나왔다.

 백산의 몸이 그 자리에 선 채 뒤쪽으로 죽 밀려나고 그의 가슴 앞으로 강

력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옛날에는 내가 도망을 쳤지만 오늘은 아니야."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뒤로 물러났던 백산의 몸에서 일진광풍이 일며 훌

쩍 마령호를 뛰어넘어 뒤쪽으로 내려섰다. 예상 밖의 움직임에 놀랐는지 마

령호의 움직임이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서 재빠르게 돌아서는 마령호를 향해 회전하며 솟아오르던 백

산의 양발이 연속적으로 뻗어나갔다.

 퍽! 퍽! 퍽!

 자신의 발 길이도 안되는 인간의 발길질에 마령호의 머리가 홱 돌아가며

조금씩 옆으로 밀리고 있었다.

 커-엉!

 미물의 공격에 밀린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성난 포효소리와 함께 마령호가

 앞발을 발악적으로 휘둘렀다. 백산이 피하는 틈을 타서 뒤로 십 여 장을

훌쩍 물러난 마령호는 땅바닥에 배를 바싹 붙이며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

고 사냥하기 직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번에 도약해서 공격해보겠다 이거냐?"

 백산은 마치 인간에게 이야기하듯이 비웃음을 흘리며 한발 한발 마령호를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위세에 놀랐는지 백산이 한발 나아가면 마령호는 한발 물러나는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었고, 어느 사이 일인일수(一人一獸)는 백산이 파놓았

던 함정 부근까지 와있었다.

"기억하느냐? 이곳이 옛날의 그곳이다. 네놈의 눈을 빼버렸던 곳 말이다.

이곳에서부터 너는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백산의 몸에서 서서히 살기가 뿜어지며 주변의 나뭇잎들이 부서져 날렸다.

 갑자기 변화된 백산의 모습에 흠칫하는 마령호였으나, 살기에 반응하여 맹

수의 본능이 살아나는지 더욱더 그르렁거리며 백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간-다!"

 살기를 뿜어내던 백산의 몸이 앞으로 돌진하자 동시에 지금까지 온몸의 근

육을 긴장시키고 바닥에 배를 붙이고 있던 마령호도 힘차게 뛰어올랐다.

 마령호(魔靈虎)의 두 앞발이 백산의 온몸을 난자해버릴 듯이 내리 찍어오

고, 거대한 아가리는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백산의 머리를 향해서 내려

 꽂히고 있었다.

 "이제는 네놈의 어떤 수도 안 돼! 내 앞에서 네 녀석은 고양이에 불과해,

은색 고양이."

 백산의 양손과 발이 정확하게 마령호의 앞발과 머리를 막아내며 마지막 하

나 남은 머리가 마령호의 턱을 향해서 힘차게 박혔다.

 마령호의 턱을 받아버린 상태에서 두 발로 마령호의 가슴 위쪽을 차며 한

바퀴 회전한 백산은 놈의 낭심을 향해서 두 정권을 몸과 함께 찔러 넣고 있

었다.

 퍼-억!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리고, 마령호

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검불침이라는 마령호는 낭심이 완전히 박살

나자 꼬리를 바닥에 붙이고 고통스러운 듯 으르렁거렸다.

 "이제는 보내주마."

 더 이상 반항하지 않는 마령호를 향해서 그의 오른손이 투명한 강기로 뒤

덮여 마령호의 머리를 향해서 뻗어나갔다.

 퍼억!

 마령호의 거대한 몸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백산의 주먹을 맞음과 동

시에 마령호의 머릿속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버린 것이다.

 백산은 조용히 마령호의 시체를 응시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놈은 관련이

 없다. 단지 맹수의 본능으로 자신의 영역을 침입한 시체를 먹었을 뿐이었

다.

 아버지를 죽인 놈은 따로 있었다. 인간이다. 결국은 인간이 저지른 일을

마령호가 책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착잡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 마령호를 죽이는 데만

몰두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과연 이놈한테 복수한 자신이 잘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어버리는 백산이었다. 동정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놈이 아버지의 유골을 뱃속에 넣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죽을 수밖에 없

는 운명이다.

 잠시 후 백산은 아버지의 유골을 찾기 위해 마령호의 해체를 시작했다. 손

목에 차고 있던 천비 중 생천비(生天匕)를 꺼내서 목으로부터 시작하여 껍

질 쪽만 신중하게 아래로 죽 내리 그었다.

 찌이익! 찌이익!

 거대한 마령호의 가죽이 백산의 손에 의해서 천천히 들려져 한쪽으로 치워

지자 이제 마령호는 더 이상 위엄 가득한 만수의 제왕인 영물이 아니었다.

단순히 껍질이 벗겨진 붉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껍질이 벗겨진 희멀건 마령호를 응시하던 백산이 이번엔 빙천비(氷天匕)로

 배를 향해 힘차게 내리 그었다. 순간 안쪽에 있던 내용물이 땅바닥으로 주

르륵 흘러내리며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온다.

 "어휴! 이 자식 변비였나? 왜 이렇게 냄새가 심한 거야. 일단 아버지 유골

부터 먼저 찾자. 아직 있으려나 모르겠네?"

 뱃속을 뒤지던 백산은 한순간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손가락으로 내용물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저, 저 저게 뭐야? 왜 일곱 개나 있냐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 마령호 뱃속에서는 놀랍게도 일곱 개나 되는 사

람의 유골이 나온 것이다.

 "으-악!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겠네. 왜 이곳에 해골이 일곱 개나 있냐고.

에이 시팔 해골 복잡하게 이곳에서 아버지 유골을 어떻게 찾나? 이런 씨펄

놈의 고양이 새끼, 잠시 잠깐 동안 네놈을 동정한 내가 병신이었다. 이 고

양이 새끼야."

 백산은 마령호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발로 차면서 욕을 해댔다.

 벌써 반 시진 이상이나 자신의 앞에 있는 유골들을 이리지리 뒤적이며 고

민을 해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백산은 자신의 사부에게 물어보

기로 하고 일곱 개의 유골을 전부 챙기기 시작했다.

 "누가 내 아버지인 줄은 모르겠지만 아버지 조금만 참으쇼. 방법을 한번

찾아볼 테니까. 이제는 이놈의 뼈를 발라내야 하겠네. 아차차! 쓸개, 이런

놈의 쓸개는 거 뭐냐 정력 거시기에 무지하게 좋다는데. 옳지! 저기 있구나

. 그리고 간, 이것도 뜨뜻할 때, 그래 맞아 자고로 여자와 간덩이는 뜨끈뜨

끈할 때 먹어버려야 돼. 식으면 맛이 없어지거든. 놔두면 똥 된다, 똥."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백산은 쓸개와 간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덩치

가 있어서인지 간은 엄청나게 양이 많았다.

 "거 되게 맛없네. 소금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맛이 없다고 하면서도 혹시 바닥에라도 떨어질까 퍽이나 조심스럽게 잘라

가며 먹고 있었다.

 "그런데 영물이란 놈들한테는 내단이란 게 있다던데 이놈은 그런 게 없나?

"

 아버지와 사냥을 많이 다닌 덕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들어서인지 내단

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백산은 마령호의 뱃속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

다. 잠시 후 호두만 한 황금색 덩어리 두 개를 찾아낸 백산은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단인가? 내가 먹으면 내공이 무진장 증진될 텐데…그런데 그 노

망난 노인네가 문제란 말이야!"

 내단 두 개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던 백산의 머릿속에 심술난 표정의 사

부와 처량한 얼굴의 장 노인이 떠올랐다.

 "그 노인네들은 살 만큼 살았다 이거야. 살날이 더 많은 내가 먹어야 정상

이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해보지만 마지막에는 꼭 사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놈을 잡은 것을 사부가 알고 있다는 것에 생각에 미치자 내단 먹

는 것을 포기하고는 죽어있는 마령호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 새끼는 왜 내단이 두 개밖에 없는 거야. 좀더 많이 만들지 못하고, 쌍

놈의 쉐키, 추익!"

 이미 가죽이 벗겨져서 뻘건 속살만 남아있는 마령호의 몸통을 발로 차며

거칠게 침을 뱉어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조폭

시절의 습관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었다.

 결국 내단을 사부에게 가져다주기로 했는지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으면서

도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이러다간 늦겠다, 빨리 뼈나 발라서 내려가야지."

 아직까지 남아있는 간을 먹으면서 뼈를 다 발라낸 백산은 뼈와 유골들을

마령호의 가죽에 싸서 등에 걸머지고 자신이 작명한 광풍노산(狂風努山)의

경공으로 몸을 날릴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바람이 생긴다 싶더니 어느 사이 광풍(狂風)으로 변하고 백

산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정말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

 경공을 전개하여 막 떠나려고 하던 백산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며

죽어있는 마령호 쪽으로 걸어갔다.

 배가 반쯤이나 벌려져있는 거대한 마수(魔獸)는 푸줏간 고깃덩어리처럼 초

라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었다.

 가죽이 벗겨져 희멀건 마령호 하체 쪽으로 다가간 백산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것이 바로 내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야.'

 "자식 힘든 호생(虎生)을 보내고 있었구먼. 이렇게 실한 것을 두고도 써먹

을 데도 없었으니. 하기야 신검, 신도를 가지고 있으면 뭐 하냐. 베어낼 대

상이 없으면 있으나마나인 것을."

 백산이 주시하고 있는 곳에는 거대한 마령호가 수놈이란 것을 가르쳐 주는

 상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잔뜩 위축되어 있는 거대한 크기의 마령호의 상

징을 생천비(生天匕)를 이용하여 능숙한 솜씨로 잘라내고는 피가 빠지기를

기다린 후, 유골들과 함께 같이 싸서 어깨에 들쳐 메고 몸을 날리기 시작했

다.

 "자! 이제는 정말로 간다!"

 백산의 몸이 뇌룡현을 향하여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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