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와 그녀 (1)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무림맹 절강지부의 비마대원들 몇 명이 창고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후 대기조에 속한 인원들이었다.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와, 인마. 한설연 소저처럼 유명한 분들에게 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때 스쳐간 인연일 뿐인 거야. 물론 얼굴 보면 알은체야 당연히 하겠지. 그런데 얼굴 볼 기회가 어떻게 생기느냔 말이야.”
“그렇지. 게다가 내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한설연 소저가 이번에 무림맹 부문상으로 임명될 거라더라. 문상 제갈윤 대협이 이제 본인의 업무 대부분을 한설연 소저에게 맡길 거래.”
교월 한설연은 이전에도 천하제일미로 유명했지만, 혈천맹 사태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문상 제갈윤 때문이었다.
제갈윤은 혈천맹 사태를 종식시킨, 가장 빛나는 영웅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데 제갈윤은 모든 게 본인의 수석 보좌역 덕분으로, 그 인물이 없었다면 이 강호는 여전히 혈천맹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라며 공을 돌렸다.
제갈윤이 언급한 그 수석 보좌역이 한설연이었다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실제로 그녀가 제갈윤과 함께 모든 정보 취합, 전략 수립, 작전 진행 등의 과정에 동참했으며, 제갈윤의 부재 시에는 그녀가 문상의 업무를 대신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일이 그렇게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한설연의 명성이 이제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것이다.
비마대원들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 한설연 소저는 당연히 더 바빠지겠지? 일도 바쁘고, 사람들 상대하느라 바쁘고, 주변 인간관계 챙기느라 바쁘고. 이제 무림맹 본맹에서 일하느라 현월곡에 찾아올 시간도 거의 없을 거라고.”
“설령 현월곡에 온다고 해도 바쁠걸? 절강에서 이름 좀 알려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현월곡에 가서 한설연 소저에게 인사하려고 할 테니까.”
“상황이 그럴 텐데 무림맹 지부의 일개 비마대원이 찾아간다고 해서 만나줄 시간이 날까? 난 아니라고 본다, 필아. 현실이 그래.”
동료들 네 명이 돌아가며 그렇게 말했을 때쯤, 오필의 입술은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선배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한 소저는 아무리 바빠져도 약속은 지킬 사람이라니까요?”
오필이 항변하자 통통한 체구의 동료가 대꾸했다.
“그거 한설연 소저가 직접 한 약속도 아니라면서? 네 지인이라는 그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인가 하는 그 사람이 약속한 거라면서?”
“단 형이 약속한 거긴 한데, 한설연 소저가 단 형하고 친하다니까요? 한 소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항상 구해준 게 단 형이었다고요. 한 소저라면 단 형의 부탁을 당연히 들어줄 거예요. 게다가 단 형은 약속을 안 지킬 사람이 아니고요.”
그러자 다른 동료가 한숨을 내쉬더니 오필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필아, 우리도 네가 부러워. 한설연 소저와 동행도 해보고, 한설연 소저의 아름다운 용모도 직접 보고, 대화까지 나눠보고.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야. 그래서 네가 자랑하는 것도 다 이해하고.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건 현실이야.”
“현실이고 뭐고, 진짜로 약속은 지키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아 답답해!”
오필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그렇게 말하자 다른 동료가 오필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쯧쯧. 순진하기는. 얘가 아직도 이렇게 어려요.”
오필이 또다시 뭐라고 대꾸하려 할 때, 밖에서 다른 비마대원이 들어왔다.
“뭐야? 필이 저놈, 또 한설연 소저 타령하고 있냐?”
“예, 선배. 말도 마요.”
그러자 방금 들어온 동료가 오필에게 말했다.
“내가 방금 들었는데 한설연 소저, 어젯밤에 현월곡에 도착했다더라. 필이 네가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이참에 아예 현월곡에 직접 찾아가 봐. 맨날 우리 앞에서 약속 타령만 하지 말고, 증명을 해 보이면 되잖아?”
“그러면 되겠네. 어차피 필이 너 내일 휴무잖아? 모레는 오후 근무고. 말 타고 갔다 오면 시간도 충분할 거고.”
동료들의 말에 오필이 위축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그게…….”
주저하는 오필을 보며 동료들이 피식 웃었다.
“거봐. 막상 해보라니까 자기도 자신 없으면서.”
“네가 겪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부러우니까, 평생 기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 그리고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사는 세계가 다른 거야.”
동료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또 한 명의 인물이 비마대의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등장에 모든 비마대원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최, 최 부단주님……!”
“아, 고생들이 많네.”
부단주라 불린 중년 사내의 이름은 최익.
원래는 절강지부 천망단의 제이 타격대주였으나, 얼마 전에 절강지부 천망단의 부단주로 승진했다.
최익이 오필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필.”
“예, 부단주님.”
“손님이 찾아오셨다.”
“예? 누, 누가 저를…….”
오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을 때, 최익이 창고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인물을 확인한 오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상대가 오필을 향해 먼저 인사했다.
“여어! 오랜만이야.”
“다, 단 형……!”
오필이 얼른 단유소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포옹을 풀자마자 오필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단 형!”
“그래, 인마. 잘 지냈지?”
“그럼요! 단 형도 잘 지냈죠? 나쁜 놈들 상대하다가 다치고 그런 건 아닌지 걱정했다고요!”
“다치기도 했었지. 보다시피 지금은 다 나았지만.”
단유소가 빙그레 웃어 보일 때 최익이 오필에게 말했다.
“한 분 더 계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 안으로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비마대원들이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하늘거리는 연분홍 색 봄옷을 입은 여인, 아니, 선녀였다.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는 존재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사람일 리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
꿈일 것이다, 이건.
현실이 아닐 것이다.
여인의 시선이 오필에게 고정되었다. 오필을 확인한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비마대원들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 존재가, 더 아름다워진 것이다. 환한 빛이 비추는 것만 같았다.
“하, 한 소저……!”
어조에서 드러났듯, 오필도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그러자 한설연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오필에게 다가왔다. 말없이 오필의 앞에 다가온 그녀가 양팔을 벌리더니 오필을 포옹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비마대원들의 입이 쩍 벌어진 가운데, 오필을 끌어안은 상태에서 한설연이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오 공자님.”
“하, 하, 한 소저…….”
잠시 후, 한설연이 포옹을 풀고 오필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오 공자님.”
“저, 저, 저도요. 엄청, 많이요!”
“잘 지내셨죠?”
“다다다, 당연히 잘 지냈죠!”
“후훗, 여전히 씩씩하시네요.”
최익이 한설연을 소개했고, 비마대원들은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나누는 비마대원들은 모두가 몽롱한 표정이었다.
창고에 잠시 머물렀던 한설연이 비마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오필을 데리고 나갔다. 최익과 단유소가 그 뒤를 따랐다.
네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비마대원들은 멍한 표정들이었다.
“설마 한설연 소저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저렇게 예쁜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는 거군요. 괜히 천하제일미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아, 그때 파견 근무를 녀석한테 미루는 게 아니었어!”
“앞으로 필이 녀석한테 더 잘해줘야겠어요.”
그 후로도 비마대원들 사이에서는 한설연에 대한 얘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오 공자가 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한 가지 제안할 것도 있고 해서 온 거예요.”
한설연의 말에 오필이 대꾸했다.
“제안이라시면…….”
“제가 이번에 무림맹에서 직책을 하나 맡게 됐거든요.”
“저, 저도 들었어요. 부문상에 내정되셨다고…….”
“네. 부족하지만 그렇게 됐어요. 그러면 제 전용 마차가 생길 텐데……, 그걸 오 공자님께서 맡아주셨으면 해서요. 오 공자님이 맡아주시면 든든할 것 같아서요.”
한설연의 말에 오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제, 제, 제가요? 부문상 전용 마차를요?”
“네.”
“저야 정말 영광이죠! 하지만…….”
환호할 듯 기뻐하던 오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러자 한설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여동생……, 때문이신 거죠? 단 공자님에게서 들었어요.”
“예……. 맞아요. 그 아이가 좀 많이 아파서요. 한 소저를 모시려면 제가 숙소로 들어가거나, 본맹 근처로 아예 이사를 가야 하잖아요. 숙소에 그 아이를 둘 수는 없으니 집을 얻어야 하는데, 본맹 근처에 집을 구할 만큼의 여유는 없어서…….”
“그것도 들었어요. 여동생 약값이 많이 든다고…….”
그 말에 오필이 엷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한설연이 말했다.
“거처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본맹 가까운 곳에 현월곡에서 사용하는 저택이 있어요. 남는 방도 많고…….”
한설연이 말을 줄이며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오필에게 말했다.
“나도 큰 집으로 옮겼다. 마당도 넓고 사랑채도 따로 있지. 사랑채만 해도 둘이 지내기에는 넉넉할 거야. 주변에 내 지인들도 많이들 살아서, 심심하지도 않을 거고. 한 소저의 거처에서도 가깝고.”
오필이 놀란 표정으로 단유소에게 물었다.
“우와! 그 정도면 집이 상당히 크다는 건데, 단 형 돈 많이 버나 봐요?”
“내가 위험한 임무를 많이 수행해서 말이지. 목숨 거는 일이 많다 보니 생명 수당이 월봉보다 훨씬 많거든.”
“하긴, 단 형의 그 실력이라면 뭐.”
오필은 단유소가 묵룡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비밀감찰단원이며, 수준급의 고수라는 정도로 알고 있다.
오필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러자 한설연이 말했다.
“그리고 오 공자님의 여동생이 앓고 있는 병 말인데, 치료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게요.”
“그, 그렇게까지…….”
오필이 감격한 표정으로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할 때, 한설연이 말했다.
“조만간 발령을 낼 거예요. 그럼 나중에 봐요, 오 공자님.”
* * *
그로부터 나흘 후.
단유소와 한설연은 강서의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백리세가의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혈천맹 사태가 수습되자마자 무림맹주 백리우는 휴가를 내어 세가로 돌아갔다. 근일간 백리세가에 꼭 들르라는 말을 단유소에게 남긴 채였다.
안에 기별을 넣자 두 사람에게 다가온 사람은 표익이었다.
“백리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두 분의 안내를 맡은 표익이라 합니다.”
그러자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 그 목소리는…….”
“예. 소저께서 생각하시는 바로 그 목소리가 맞을 겁니다. 일전에 제가 소저를 묵룡조의 회식 장소에 모셔다드렸었지요.”
“표 대협,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백리세가의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이 표익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걷는 와중에도 단유소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하자 한설연이 전음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뭔가 이상한가요? 표 대협은 맹주님의 수호위인데.]
[아,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늘 맹주님 근처를 맴돌던 기운이라서. 다만…….]
[다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인데 왠지 낯이 익은 느낌이라서.]
한데 언제 봤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잠깐을 더 걸었을 때, 두 사람은 아담한 마당이 딸린 초옥 앞에 도착했다. 백리세가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었다.
“이곳입니다. 전대 맹주님과 맹주님께서 계십니다. 안에 말씀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표익이 두 사람을 향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초옥의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들어오라고 하게.”
백리우의 목소리였다. 단유소와 한설연이 신발을 벗고 초옥의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전대 맹주님과 맹주님을 뵈옵니다.”
예를 취한 한설연이 곧바로 백리우를 향해 말했다.
“한데 맹주님의 용모가 약간…….”
분명히 백리우의 생김새이긴 한데, 원래 알고 있던 얼굴과는 미묘하게 달라 보였던 것이다.
“아, 소저가 알고 있던 얼굴은 약간의 역용술이 가미되었던 얼굴이라네. 이게 본래의 얼굴이고.”
“아…….”
옆에 있는 단유소는 아직까지 두 사람을 향해 예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여 한설연이 단유소를 돌아보았다.
한데 단유소의 표정이 이상했다. 크게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백리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단 공자님……?”
백리인이 단유소를 바라보며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알아본 모양이구나.”
단유소는 여전히 놀란 표정일 뿐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자 백리인이 말했다.
“미안하구나. 언젠가 널 다시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단유소는 입만 뻥끗거릴 뿐,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리인이 한설연에게 말했다.
“일단 앉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우리 집안의, 아니 내 개인적인 과오에 대한 이야기이나, 소저도 들어야 할 내용일세.”
백리인의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한설연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백리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단유소는 침묵했다.
“미안하구나.”
백리인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 후에는 백리우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단유소가 어렸던 시절, 두 사람이 서로 함께했던 짧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그때의 감정이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지. 그리고 그 당시의 어렸던 나는, 네 어머니도 미웠다. 너라는 존재도 미웠지.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가 분노를 못 이기고 네 어머니에게 했던 험한 말들을 너도 기억할 거다.”
백리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때도 후회했지만,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곧 돌아가실 분에게 굳이 뭐 하러 그랬을까. 가뜩이나 어린 네가 옆에서 다 듣고 있었는데……. 이후에, 맹에 들어온 너를 볼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지금도 그렇다. 미안하구나. 여러모로.”
그 말을 마친 백리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래저래 충격이 크겠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할 테니, 편히 있거라.”
백리우도 방을 나섰다.
잠시 후에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단유소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많은 상념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런 단유소를 한설연이 끌어안더니, 말없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날 저녁.
네 사람이 다시 한곳에 모인 자리에서 단유소가 백리우에게 말했다.
“제가 형님의 입장이었어도, 제 어머니가 미웠을 겁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제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할 분은 형님이 아니십니까. 어머니를 대신하여…….”
“되었다. 네게 사과를 받자고 부른 게 아님을 알지 않느냐.”
단유소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일어서더니 이번에는 백리인에게 말했다.
“절 받으십시오……, 아버지.”
“그러지 마라. 아비 소리 들을 자격…….”
그러나 단유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리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단유소가 자세를 바로한 후에 말했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사랑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게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후우우우우…….”
백리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렇고 저렇고를 떠나서, 아버지는 아버지시고 형님은 형님이십니다. 두 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제 평생에 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밝혀져서 좋을 일도 없을 듯합니다.”
“양자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자주 찾아뵐 것입니다. 그러나 백리유소가 아닌, 단유소로 살아가는 게 여러모로 나을 듯합니다.”
그러자 단유소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백리인이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네 결정을 존중하마. 이미 너만의 삶도 있을 터이니. 그러나 생각이 바뀌거든 언제든 말하려무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백리인이 백리우와 단유소를 한 차례씩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에게 부탁이 있다. 함께 술 한잔하자. 그리고 오늘은 셋이 함께 자자.”
백리우와 단유소가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설연이 말했다.
“방해가 안 되신다면 술은 소녀가 따라드리겠습니다.”
백리인이 대꾸했다.
“방해일 리가. 소저는 내 둘째 며느리가 될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