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최후 (3)
자욱했던 먼지가 서서히 가시며 일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땅의 이곳저곳이 움푹 패어 있었고, 근처의 바위들은 바스러져 있었다.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인근이 완전히 초토화된 모습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대지의 중앙으로 두 사람이 보였다.
척조강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댄 모습이었다.
“크윽…….”
척조강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몸에 두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다.
하나는 그의 등에, 또 하나는 그의 허벅지에 꽂힌 상태였다. 두 자루의 검 모두 똑같은 모양의 흑색 소검이었다.
단유소는 척조강에게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묵묵히 서 있었다.
척조강이 단유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지막 수는 너무도 멋지더군……. 쿨럭!”
말을 하던 척조강이 마지막 순간에 결국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귀하도 대단하시더구려.”
결과적으로 척조강은 단유소가 마지막에 펼쳐낸 절초를 모두 막아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야말로 인간 같지 않은 강력함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이 후방에서 날아간 단유소의 쌍소검만큼은 막지 못했다.
척조강에게서 진기의 파동이 끝나자마자 도달한 쌍소검이었다.
그게 승부를 결정지었다.
“백리우나 혁련강은 그대가 본인들을 뛰어넘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겠지. 이 강호에서 그대의 그 엄청난 경지를 그나마 제대로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 걸세. 즉, 그대와 싸우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나는 너무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지. 아마 자네도 알고 있었겠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단유소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척조강이 돌연 역수검의 형태로 검을 쥐더니, 검극을 본인의 심장 위에 대는 것이 아닌가.
자결하겠다는 뜻.
척조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그 어마어마한 경지로도 내 가슴에 닿아 있는 이 검을 막을 수는 없네. 이 또한 서로가 잘 아는 사실이고.”
단유소의 눈매가 좁아졌다.
“끝까지 비겁하게 가시겠다, 그거요?”
그러자 척조강이 회한이 깃든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내게는 편하게 죽을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네. 그렇기에 끝까지 비열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겠지만, 나만 나쁜 놈이 되어 이렇게 죽는 게 모두를 위해 가장 낫다네. 자네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척조강이 그렇게 말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척조강이 막 검병을 쥔 양손에 힘을 가하려던 찰나였다.
[귀하가 황궁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단유소가 보낸 전음에 척조강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척조강이 여전히 검을 거꾸로 잡고 검극을 가슴에 댄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과거에 그 안에서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그 상처 때문에 귀하가 이렇게 되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하고 있소.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자, 자네가 어떻게…….”
척조강이 놀란 어조로 말하자 단유소가 또다시 전음을 보냈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문상 어른께서 귀하에게 몇 마디를 전하라 하셨소. 내가 방금 전에 했던 황궁에 관한 얘기는 사실, 문상 어른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귀하가 아까 싸우기 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통해 어림짐작으로 말씀드린 것에 불과했고.]
“제갈윤이라…….”
척조강이 말끝을 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갈윤과 황궁이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을 척조강도 잘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태자 저하의 전언이라고 하시더구려. 황상으로 인해 벌어졌던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근래에 알게 되신 바, 그 일에 대해 태자 저하께서 대신 깊이 사과드린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에 자상하게 대해주셨던 일에 대해 감사하며, 최소한 저하께서는 평생 귀하를 잊지 않으실 거라고……. 그렇게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거라 하셨소.]
그 말에 척조강이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 상태로 있던 척조강이 전음으로 대꾸했다.
[그런가. 결국 저하께서도 아셨는가.]
눈을 감은 척조강의 얼굴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아마도 황태자가 어렸던 시절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척조강이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에서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해드리게나. 그 시절의 나는 모든 게 위선이었지만, 저하를 대하는 시간만큼은 소중했노라고. 또한 황상의 과오는 저하의 잘못이 아니니 그 이상 마음 쓰실 필요는 없다고. 천고에 다시없을 불충한 작자가, 이렇듯 저하의 말씀을 듣고는 하염없이 부끄러워만 하다가 떠나가노라고, 성은이 망극하다고 꼭……, 전해드리게나.]
전음을 마친 척조강이 마치 의관을 정제하듯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자세를 바로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방향은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척조강은 내내 엄숙한 표정이었다.
그런 척조강을 향해 단유소가 말했다.
“한 가지, 귀하께서 착각하고 계신 게 있소.”
척조강이 고개를 돌려 단유소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착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지금도 나는 귀하의 가슴에 닿아 있는 그 검이, 귀하의 심장을 파고들기 전에 막을 수 있소.”
단유소의 말에 척조강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상태로 잠시 동안 말없이 단유소의 눈을 바라보던 척조강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말, 사실이군. 자네의 경지는 대체…….”
단유소는 묵묵히 척조강과 시선을 맞출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척조강이 허탈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척조강이 입을 열었다.
“즉, 이 죽음을 마치 내가 선택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단유소는 여전히 또렷한 눈동자로 척조강을 바라보기만 할 뿐,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척조강이 다시금 고개를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돌리며 말했다.
“고맙네. 선택권을 줘서.”
말을 마치자마자 척조강이 상체를 숙이며 검병을 쥔 양손에 힘을 가했다.
푸욱―
검신이 가슴을 파고들어 등 뒤로 빠져나온 순간, 척조강이 양손을 땅바닥에 대었다.
척조강은 그렇게,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죽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에 여전히 별이 가득했다.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리우였다.
“다친 덴 없고?”
“예, 맹주님.”
그러자 백리우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말없이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단유소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혀, 형님…….”
그제야 백리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다쳤으면 되었다.”
“형님께서는…….”
“보다시피.”
단유소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백리우의 상태도 멀쩡했던 것이다.
백리우가 한동안 묵묵히 척조강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훌륭하더구나. 그 마지막 한 수.”
“과찬이십니다. 게다가 모든 게 맹주……, 아니 형님 덕입니다.”
백리우가 조용히 근처에 다가온 것은 척조강과의 결투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그 사실을 단유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 말에 단유소가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지금의 백리우는 이전보다 더 편하게 자신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어조에서도 느껴졌지만 결정적인 건 호칭이었다.
이전까지는 주로 ‘아우’라는 호칭을 썼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너’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척조강에게 시선을 둔 채로 백리우가 말했다.
“참으로 허망한 최후로구나. 그간의 그 난리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예…….”
그 후로 제법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있던 백리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내가, 부디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자 백리우가 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나는…….”
말을 꺼내려던 백리우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일단의 인물들이 두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단유소가 안력을 돋워 확인하니 그들은 소수궁의 무인들이었다.
백리우가 얼버무리듯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얘기하는 게 좋겠다. 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된다.”
단유소가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는 눈빛으로 백리우를 바라볼 때쯤, 소수궁의 무인들이 다다랐다.
“알겠습니다.”
백리우에게 그렇게 대꾸한 후 소수궁의 무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단유소가 눈을 부릅떴다.
“누, 누님!”
“동생! 괜찮아? 괜찮은 거야?”
“저는 괜찮아요. 그, 그보다도 누님이……!”
예교령은 황 노파의 등에 업힌 채였다.
단유소가 얼른 다가가서 보니 예교령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했다.
예교령이 말했다.
“한 방 크게 맞았지 뭐야. 그래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니 금방 나아질 거야. 백리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지만.”
창백한 얼굴임에도 예교령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단유소가 여전히 염려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옆에 있던 백리우가 말했다.
“내가 확인해봤다.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라.”
그제야 단유소가 안도했다.
예교령이 백리우에게 말했다.
“혁련 오라버니께서 오셨었어요.”
“그는? 그는 무사해, 예매?”
백리우가 다급한 표정으로 묻자 예교령이 대꾸했다.
“오라버니들은 늘 티격태격하면서도 이런 때 서로를 걱정해주는 건 똑같네요. 예, 혁련 오라버니도 무사했어요. 상황을 전해 듣고 나더니 본인은 장원의 상황을 살펴야겠다며 되돌아갔어요. 이곳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백리 오라버니와 유소 동생이 있으면 걱정할 필요 없다면서.”
백리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슬슬 가지.”
그로부터 이각 후, 척가장에서 들린 함성이 어두운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 * *
시간은 어느덧 사시초(巳時初, 오전 9시).
척가장의 내부는 밤새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정리된 모습이었다.
이곳저곳 파손된 시설들이야 당장 어찌할 수 없지만, 시체는 모두 수습된 상태였고, 병장기도 모두 회수하여 한곳에 치웠다.
지금은 장원의 중심부로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하여 핏자국을 없애는 중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정마 연합의 무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정리를 한 덕분이었다. 부상자를 제외한 전원이 투입되었다.
최정예 무인들이니만큼 정리를 하는 속도도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기관을 제어하는 장치는 발견했지만, 우뚝 솟아오른 척가장의 담장은 당분간 그 상태로 두기로 했다.
혹시 모를 위험 요소가 남아 있을 수도 있기에 척가장에는 당분간 정마 연합의 무인들이 머물기로 했다.
척가장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객잔으로 보냈다.
덕분에 천마신교에서 운영하는 객잔 두 곳은 갑자기 들이닥친 어린 손님들로 인해 붐비는 중이었다.
두 객잔의 규모가 애초에 컸던 데다가, 상대가 아이들이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두 곳 모두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영업은 당분간 중지하겠다고 했다.
척가장에서 온 아이들만을 돌보라는 혁련강의 지시 때문이었다. 물론 그곳이 천마신교에서 운영하는 객잔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 리 없었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두 객잔에 남아 있는 술은 모조리 척가장으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그 술들은 모두 백리우라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구입되었다.
승리 축하주였다.
사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피곤한 상태였다.
밤새 생사를 건 전투를 치른 후 장원까지 정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술의 힘은 위대했다.
가뜩이나 무림맹주가 사는 술이었다.
막 잠에 빠져들었던 정마 연합의 무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일제히 눈을 번쩍 떴다. 부상을 당해서 쉬고 있던 인원들이라 하여 예외는 없었다.
모두가 장원 중앙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 나무의 그늘 아래, 술 상자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쌓이는 중이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침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이리저리 어울렸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백도도, 마교도 아니었다.
전장에서 생사를 나눈 전우였다.
* * *
문을 열고 들어선 단유소의 눈에 보인 건 두 사람이었다.
낯선 한 사람과 익숙한 한 사람.
낯선 이는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었고, 익숙한 이는 빛이 잘 드는 창가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며 단유소를 맞았다.
“왔는가.”
제갈윤이었다.
“문상 어른을 뵈옵니다. 오셨다는 이야기는 아까 들었는데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갈윤이 웃으며 대꾸했다.
“뭐, 그건 내가 새벽부터 이 방에 머물며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지.”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술판이 벌어졌다지?”
“예, 맹주님께서 엄청난 양의 술을 사셔서…….”
“아, 나도 들었네. 원래 술값 아까워하는 분은 아니었지. 천마신교 측에서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우리 입장에서는 염치 문제도 있고.”
“예.”
짧게 대꾸한 단유소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누워 있는 그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으로, 전투가 끝나갈 무렵에 장원 본채의 지하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저렇듯 의식이 없는 상태로.
그가 발견되자마자 제갈윤이 그를 이곳으로 옮기고 방을 폐쇄했다고 들었다.
“이분이……, 진소학 공자입니까?”
단유소의 물음에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학.
현월곡의 대공자.
그리고 그녀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사내.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마도 생강시화의 초중반 단계가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야.”
단유소가 안타까움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후에 다시 물었다.
“회복될 수는 있는 겁니까?”
“확실한 처방은 없네. 다만 백방으로 노력 중일세. 일단 당가에서 전문가들을 호출했고, 마 군사도 천마신교에서 독마군(毒魔君)과 마라신선(魔羅神仙)을 불러주겠다고 하더군. 그들이 모이면 뭐라도 방법이 나오겠지.”
당가의 전문가들은 정파의 인물들이었고, 나머지 두 인물은 각각 천마신교에서 최고의 독공과 최고의 의술로 이름 높은 인물들이었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제갈윤이 전음으로 물었다.
[나도 대강은 들었고 또한 짐작하고 있네만, 그와 자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알고 싶어서 불렀네.]
제갈윤이 말하는 ‘그’란 척조강이었다.
[예, 보고하겠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 단유소의 보고가 전음으로 이어졌다.
척조강을 추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가 죽은 순간까지의 모든 일, 그 동안에 나눴던 모든 대화들이 빠짐없이 제갈윤에게 전해졌다.
보고를 모두 듣고 난 제갈윤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윤의 기색을 살피던 단유소가 말했다.
“더 하명하실 일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자 제갈윤이 전음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 궁금한 게 많을 터인데.]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영역인 것 같습니다. 알게 된다 해도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아서…….]
그 말에 제갈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전음을 보냈다.
[그는 황족이었네. 자네도 짐작했겠지만.]
[예.]
[현 황제 폐하와 가까운 황족이었네. 폐하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어린 사촌 동생이었지.]
[아…….]
[현재의 황태자 저하께서 말씀하신 선대의 불미스러운 일이란, 바로 현 황제 폐하와 연관된 일이었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단유소가 제갈윤을 향해 읍하며 육성으로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제갈윤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단 조장.”
“예, 문상 어른.”
“수고 많았네.”
“어디 저만 수고했겠습니까. 저보다 더 수고하신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저는 너무 멀쩡하여 그런 말씀을 듣기도 부끄럽습니다.”
“자네가 있었기에 그 사람들의 수고도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게지. 부끄러워하지 말게. 이미 자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일세.”
단유소가 난감함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짧게 읍하더니 문을 나섰다.
창가로 향한 제갈윤이 뒷짐을 진 채 두 눈을 감았다.
혈천맹에 대한 정보를 구하러 최근에 황궁에 들렀다가, 황태자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제자이기도한 황태자는 매우 괴로워하며 과거의 황실 비사를 말해줬었다. 물론 함구할 것을 약속한 채로 전해준 얘기였다.
그랬다.
척조강은 본디 현 황제의 어린 사촌 동생이었다.
그런 척조강과 서로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을 현 황제가 범해버렸던 것이다.
문제가 불거지려 하자, 현 황제는 그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 여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오래 전의 일이었고, 현 황태자 또한 나중에야 그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근래에 강호와 민간에 불었던 혈천맹의 거대한 피바람은 어처구니없게도, 현 황제의 과거 욕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네. 즉, 혈천맹주 척조강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 바로 현재의 황제였던 거네.’
황제의 다른 호칭은 천자(天子).
하늘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존재가 바로 황제다.
그리고 혈천은 피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척조강은 현재의 천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피의 하늘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본인에게 막대한 힘이 생기면 직접적으로도 현 황제에게 복수하는 게 가능하고, 설령 직접적인 복수를 하지 못한다 해도, 이 나라를 혼란과 도탄에 빠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간접적인 복수가 되니까.
‘단 조장, 자네의 말마따나 알게 된다 해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 그럴 것 같아서 나도 깊게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제갈윤의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했다.
곧 제갈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친인 황제의 과오를 전해준 황태자가 마지막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는 명백한 아바마마의 과오입니다. 그 일에 관련된 이들을 비롯하여, 이 땅의 수많은 백성들과 강호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당사자가 바로 아바마마십니다. 이 거대한 사달을 일으킨 척조강 또한 황가의 인물이었으니, 이 모든 게 우리 황가의 과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던 황태자는 스승인 자신 앞에서 울며 다짐했었다.
“그 무엇으로도, 이 일로 인해 희생당하고 상처를 입은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없을 겁니다. 과오를 저지른 황가를 대신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군이 되어 이 땅의 백성들을 내 가족처럼 아끼고 돌보는 것뿐이겠지요.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이 빚을 갚아야겠지요. 물론 갚고 또 갚아도 끝이 없을, 너무도 큰 빚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울며 고개를 숙인 채로, 황태자는 자신에게 부탁까지 했었다.
“저 또한 인간인지라 언젠가는 이 마음이 희미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 자주 찾아오셔서 제게 충고해주시고 조언해주십시오. 스승님이 오실 때마다 저는 버선발로 나가서 스승님을 모시겠습니다. 언젠가부터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저 스스로 나태해진 것이니, 그때마다 저를 꾸짖어주십시오. 제가 그릇된 결정을 내리거나 부조리한 타협을 할 때마다 저를 꾸짖어주십시오. 간곡히 청합니다, 스승님.”
당시에 황태자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던 제갈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예, 저하. 그리하겠습니다. 남겨진 자들에게는 남겨진 자들만의 짐이 있는 법이니, 그 짐, 저도 나눠서 져야겠지요. 그리고 제가 지켜봐 온 저하시라면, 분명히 그 다짐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