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작전 연장 (2)
“보아하니 저들의 공격이 시작된 후로 적의 진형이 단숨에 무너지고 있소. 아마도 천마신교의 정예 조직이 투입된 모양인데……, 만약 저들이 적도들을 처치한 후에 우리를 덮치면 그때는 어찌하오?”
황보균의 음성에서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천마신교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과 불신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었다.
강호의 명숙이라고는 하나, 마교와 직접 마주하는 건 그에게도 처음일 테니까.
진평이 대꾸했다.
“천마신교도들에게 있어 교주의 말은 명령이기 이전에 법(法)입니다. 천마신교주와 총군사 마연문이 동시에 미치지 않은 이상, 황보 대협께서 우려하시는 상황은 벌어질 일이 없습니다.”
공감한다는 듯 모용국이 고개를 끄덕였고 진평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들과 우리는 동맹 관계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우리 측의 대응입니다. 이제 전선에서 우리 정혼단은 천마신교 측의 무인들과 마주치게 될 겁니다. 혹시라도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악감정을 갖게 할 발언이나 행동은 하지 않도록 확실히 주지시켜야 합니다.”
그 말에 모용국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굉 대사를 향해 말했다.
“십분 공감합니다. 소수의 철없는 언행으로 인해, 어렵게 성사된 동맹 관계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이 상황이 오월동주라 해도, 함께 배에 타고 있는 한은 분란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즉시 이 뜻을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미타불, 당연한 말씀이오. 그렇게 하시오.”
그러자 모용국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무인들에게 다가가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무인들이 빠르게 각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 즈음 유굉 대사는 조용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을 때쯤, 팽야창이 갑자기 놀람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헉! 대, 대사님……! 저, 저곳에 누군가가……!”
유굉 대사와 참모들이 있는 위치에서 이십 보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잣나무 몇 그루가 우거진 작은 수풀 사이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유굉 대사가 차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고 있소. 소란 떨지들 마시오. 그리고 주위를 좀 물려주시구려.”
유굉 대사의 대처를 보며 단유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체 모를 자들이 저곳에 서 있었던 건 마음속으로 열을 세기 전쯤부터였다. 그들은 매우 은밀하게 다가왔는데, 저 위치에 도착해서는 굳이 몸을 숨기지 않았다.
보란 듯이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인물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은 어두운 밤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저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마도 수라단주겠지.’
이미 그들의 존재를 파악했고 정체까지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유소가 가만히 있었던 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대처가 어떤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역시나 유굉 대사는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마저도 대강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머지 인원들이 나중에야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것과는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전장을 지휘하느라 이곳에 없는 무당파의 왕운석 장로 정도면 아마도 알아챌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굉 대사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미타불, 어려운 발걸음들을 하셨구려. 아마도 빈승을 보고자 오신 듯한데, 이쪽으로 오시구려.”
그러자 사내가 걸음을 떼었고, 두 명의 수행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앞서서 걸어오는 사내는 오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강인한 인상에 기골이 장대한 자였다.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부터 남다른 풍모를 풍겼다.
유굉 대사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로 그를 맞는 가운데, 나머지 백도 명숙들의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용국 정도만이 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앞서서 걸어오는 사내의 존재감이 그 정도로 대단했던 탓이었다.
이윽고 유굉 대사의 앞에 다다른 사내가 먼저 포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대사님 말씀처럼 쉬운 걸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반겨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소생은 계사평(桂思平)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입니다.”
역시 단유소의 짐작대로였다.
계사평이라는 이름이 바로 천마신교 수라단주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름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천마신교 오대 고수에 당당히 올라가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백도의 명숙들 중, 그 이름을 모를 인물은 없었다.
“그, 그렇다면 귀하가 바로……!”
황보균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그렇게 말하자, 계사평이 대꾸했다.
“그렇소. 황보 대협. 그쪽은 팽 대협이시겠고, 옆에 계신 분은 모용 대협이시겠구려. 반갑소.”
수라단주 계사평은 처음 접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 맞혔다.
모용국이 계사평을 향해 짧고 절도 있게 포권해 보이는 가운데, 황보균과 팽야창은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한시적인 동맹 관계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적대 관계이다. 즉, 그들은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당당한 모습이라니.
일전에 무림맹 장로회의 때 보았던 천마 혁련강도 딱 저랬다.
저 천마신교의 인물들은 대체 무엇을 믿고 항상 저리도 당당한 건가 싶었다.
계사평이 신형을 돌려 다시금 유굉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굉 대사가 그를 향해 합장했다.
“아미타불, 어쨌거나 잘 오셨소. 이렇게 발걸음을 하신 이유는 대강 짐작하고 있소.”
유굉 대사는 시종일관 태연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으나,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정혼단 수장의 입장이다 보니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뿐이지, 솔직히 처음에는 긴장도 했었다. 계사평의 경지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높아, 자신의 경지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덕분이었다.
계사평이 본인의 정체를 밝히던 순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두 청년.
바로 특수첩보조의 조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길평과 그의 옆에 서 있는 청년이었다.
즉, 그들은 계사평의 대단함을 몰라서 반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빤히 알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룡대니까.
신룡대.
저 천마신교가 자랑하는 흑풍대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강호상의 유일한 조직.
그렇듯 두 청년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까지도 안정이 되었던 것이다. 과연 신룡대는 신룡대였다.
‘특히 저 청년…….’
길평이라는 청년의 경지는 처음 본 순간에 이미 가늠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청년의 경지는 아직까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희한할 정도로 예측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계사평이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도 예상하고 계시듯 소생이 온 것은 혹시 모를 분란을 막기 위함입니다. 저희들은 애초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먼 곳에서 몰래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대기만 하다가 편하게 돌아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유굉 대사를 대하는 수라단주 계사평의 태도는 매우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굉 대사의 연배가 계사평에 비해 한참 윗줄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굉 대사의 높은 명성 때문이기도 했다. 유굉 대사가 강호 전통의 명문인 소림에서도 방장 다음으로 인정받는 강호인인 탓이었다.
‘물론 그 모든 이유들에 우선해서 천마신교주와 총군사 마연문으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은 탓이 더 크겠지.’
누가 봐도 유굉 대사가 어른이니, 공손히 대해주라는 주문을 받고 왔을 것이다.
단유소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굉 대사가 말했다.
“계 시주께서도 오면서 보셨겠지만, 적들이 본인들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살수를 펼치는 탓에 약간은 곤란한 입장이었소. 그러던 차에 시주들께서 적시에 나타나 도움을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려.”
“방해나 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제 수하 녀석들이 민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는 중입니다.”
“아미타불, 지나친 겸손의 말씀이시오. 허허허.”
그 후, 두 수장은 나란히 서서 산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수라단이 투입된 후로, 전황은 급격하게 정마연합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혈천맹의 무인들이 아무리 목숨을 도외시한 채로 달려들고 있어도 상대는 무림맹의 정예와 천마신교의 정예였다. 이 상태로는 정마연합이 질 수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대사님,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유굉 대사의 후방에서 그렇게 말한 사람은 진평이었다. 단유소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러자 유굉 대사가 신형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계사평도 신형을 뒤로 돌렸다.
미리 얘기했듯 또 다른 거점을 찾기 위해 떠난다는 뜻임을 알고 유굉 대사가 대꾸했다.
“그래. 수고들 해주게.”
대꾸는 진평에게 했지만 유굉 대사의 시선은 단유소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러면서 유굉 대사가 곁눈질로 보니, 계사평 또한 길평이라는 청년보다는 그 옆에 있는 청년을 더 눈여겨보고 있었다.
‘계사평 정도 되는 천마신교의 대표 고수도 의식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뜻이겠지.’
그렇기에 자신의 경지에서는 더더욱 저 청년의 경지를 쉽사리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곧 두 청년이 유굉 대사를 향해 공손히 포권해 보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유굉 대사와 계사평이 다시금 전장을 향해 신형을 돌렸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실상 두 사람은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요즘 젊은이들, 참 무섭습니다, 대사님.]
[헐헐. 계 시주께서는 갑자기 어인 말씀이시오?]
[방금 떠나간 그 친구 말입니다.]
길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청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본교에도 아까 그 청년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둘이 연령대도 비슷할 겁니다. 아까 그 청년을 보니 본교의 그 친구가 문득 생각나서 말입니다.]
계사평이 바로 전음을 이었다.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강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친구입니다. 더 큰 문제는 볼 때마다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아까 그 청년에게서도 왠지 본교의 그 친구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무섭다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헐헐. 그래서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들 하는 것 아니겠소. 어쩌면 위기감을 느끼기보다는 뿌듯해할 일일지도 모르오. 그런 후배들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강호에서 최소한의 선배 역할을 한 셈이 되니까. 욕심일랑 서서히 내려놓으시고.]
약간은 농이 섞인 어조로 유굉 대사가 그렇게 말하자 계사평이 대꾸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자고로 부처님 말씀 들어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하였으니까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