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거점 타격 (2)
모용국이 빙그레 웃더니 대꾸했다.
“마침 피풍의만으로는 부족했는데 잘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용국도 바로 상의를 탈의했다. 아직 삼십 대 후반인 그의 상체는 날렵하지만 근육이 알맞게 잡힌 모습이었다.
“하핫. 상체 근육 자랑하는 시간이라면 제가 빠질 수 없지요.”
“제 몸매도 어디 가서 자랑할 수준은 됩니다, 허허.”
“첩보조원 중에 여인들이 있어서 부끄럽긴 하나…….”
유굉 대사와 모용국 근처에 있던 정협단의 무인들이 그렇게 말하며 하나둘씩 상의를 탈의하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이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나가,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정협단원들이 상의를 탈의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정협단원들의 수라고 해봐야 제오대와 제육대로 구성된 백여 명이었다.
석실 한 곳당 삼십 명가량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석실이 총 여덟 군데였다. 그 사람들 모두가 남녀를 불문하고 전라 상태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정협단원들이 두르고 있던 피풍의만으로는 수가 부족하여, 모두가 상의까지 탈의해야만 임시로라도 조치를 취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굉 대사가 모용국에게 말했다.
“먼저 여인들에게 조치를 취한 후, 그녀들부터 이곳을 벗어나게 하시오. 남자들은 여인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 내보냅시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모용국이 또다시 선화란과 호문혜를 불렀다.
“여인들을 맡아줄 인원이 현재는 자네들밖에 없으니 계속 수고를 좀 해줘야겠네. 피풍의는 우선적으로 여인들에게 지급해주고, 그녀들이 먼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조치하게.”
“당연히 저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선화란이 그렇게 대꾸한 후, 호문혜와 함께 피풍의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미타불, 길 조장.”
제오대주인 원광생과 제육대주인 모용국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부저런히 지휘를 하고 있을 때, 뒷짐을 진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유굉 대사가 진평을 불렀다.
진평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대사님.”
“자네들 특수첩보조는 혈천맹에 대해 오래 조사했을 테니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저 시설은 무슨 용도일 것 같은가?”
처음 봤을 때부터 유굉 대사는 진평을 높게 사, 이번 작전에서 참모진으로 활동해주길 부탁했었다.
“저도 이런 시설을 직접 접하기는 처음입니다. 하지만 정황을 따져보면 벌거벗은 사람들을 저곳에 담가, 사이한 수법으로 그들의 신체를 다스리려 함이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저것 말고도 또 여러 단계가 있겠지요.”
“아미타불…….”
유굉 대사가 불호를 읊조릴 때 진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적의 수법으로 짐작할 때, 인간의 이지를 상실하게 하려는 용도일 수도 있고, 그들의 몸에 독소를 심는 용도일 수도 있습니다. 저들이 파신폭멸공의 수법을 응용하여 독공을 가한다는 사실은 대사님께서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보다 자세한 건 전문가를 통해 이 액체의 성분을 조사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유굉 대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침음을 삼켰다. 그러다가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 우리와 대적하던 자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무런 감정이 없더군. 그들도 이런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겠지, 아미타불.”
유굉 대사는 경험 많은 강호의 명숙이자 노련한 고수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런 참담한 광경을 직접 접하기는 처음일 것이다.
당연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런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또 인지하고 있었다 해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대사님께서는 부처님을 섬기시는 분이시니 여러모로 불편한 마음이 크시겠지요. 저희들이 지금껏 파악하고 상대해왔던 적도들도 대부분 저러했습니다. 상대 자체가 되지 않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저희들을 공격해왔지요. 결국은 숨을 끊어놓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평이 바로 말을 이었다.
“직접 확인하셨다시피 적도들의 수법은 흉악합니다. 저희들이 여태껏 파악한 적도들은 더 흉악했습니다. 그러니 대사님께서도 마음을 단단히 가지셔야 합니다. 이 환란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만이 더 이상의 피해자들을 낳지 않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유굉 대사가 힘이 들어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대사님과 여러 영웅들께서 직접 구한 사람은 이백오십 명가량이지만, 그 파급력을 생각해보면 수천, 수만 명을 구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작전을 수행할 때만큼은 단호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유굉 대사가 진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문상께서는 훌륭한 수하를 두었군.”
“문상 어른의 휘하에는 저보다 훨씬 뛰어난 수하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 * *
정혼단의 제일대부터 제사대까지의 전력이 어두운 동굴 안을 빠르게 달렸다. 동굴은 굽이굽이 위쪽으로 이어졌다.
처음에 정혼단이 진입했던 곳이 골짜기 쪽이었으니, 고도를 따져보면 산 위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물론 땅속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중간중간에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지만 역시나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정혼단은 아무런 인명 피해도 없이 쭉쭉 나아갔다.
[우리가 파악한 적의 퇴로도 산등성이에 있었으니, 이대로 퇴로로 향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그 공간의 시설과 석실들 말고도 분명히 뭔가가 더 있을 분위기인데.]
계속 나아가도 딱히 중요한 시설이 보이지 않자 서백풍이 그렇게 전음을 보내왔다.
[그러게.]
단유소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서백풍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조장님은 아예 확신하고 계시는군요. 뭐, 당연하겠지요. 퇴로로 이용할 동굴을 이런 식으로 파놓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 정도로 시설 투자를 했으면 분명히 뭔가가 더 있는 게 정상일 거고요.]
서백풍도 그간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잠시 후에 서백풍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그나저나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일이 쉽게 풀리니 다들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분위기를 느끼고 이미 정협단에 넌지시 주의를 당부했었다. 이검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 의견이 그다지 먹히지는 않았다.
잠시 더 동굴 안을 달리던 단유소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그가 바로 서백풍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 냄새, 뭐지?]
[예? 무슨 냄새 말씀입니까?]
그 즈음, 더욱 좁혀져 가던 단유소의 눈동자가 일순간 번쩍 떠졌다.
[이건……, 유황 냄새야……!]
유황.
다양한 분야에서 유익한 용도로 쓰이는 이 물질은 때때로 매우 위험한 용도로도 쓰인다. 화약, 즉 벽력탄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단유소가 맡아보니 어딘가에서 직접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유황 냄새라기보다는, 동굴 안에 미세하게 배어 있는 냄새였다.
이곳에서 벽력탄을 보유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제조하는 곳일 가능성은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단유소가 곧바로 이검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검인은 현재 특수첩보조의 부조장으로 위장하고 있기에 그에게 말한 것이다.
[검인, 벽력탄을 제조하는 곳일 수 있다. 벽력탄이 있을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일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유소는 이미 이곳에 벽력탄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곳이 동굴이기 때문이다.
유사시에 거점을 파괴하여 증거를 인멸할 용도라면 벽력탄만 한 게 없었다. 가뜩이나 벽력탄을 제조하는 곳이라면, 적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증거를 인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설이라면 최소한의 대비도 해두었을 것이다. 기관 장치 같은 게 발동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 또한 철저히 해야 한다고도 말해.]
[알겠습니다.]
이검인이 경공을 더 빨리 펼쳐, 선두에서 이동 중인 지휘부에 다가갔다. 그리고 곧바로 단유소에게서 들은 말을 전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빠르게 동굴을 달리고 있네. 지금까지 이동한 거리도 짧지 않지. 만약 이곳이 그렇게 중요한 시설이어서 적이 기관 장치를 설치해두었다면, 발동을 해도 이미 발동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정협단의 제삼대주를 맡은 하북팽가의 장로, 팽야창의 대꾸였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달리던 육아룡(陸雅龍)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이미 기세를 탔네. 게다가 팽 장로의 말씀처럼 빠르게 이동했으니, 벽력탄을 제조하는 둥의 위험 시설이 있다면 더 빨리 진입하여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육아룡은 종남파의 장로로, 장문인인 사종경의 사제였다. 무림맹 장로회의에는 사종경이 참석했었지만 장문인이 문파를 비우기가 쉽지 않은 관계로 정협단의 일은 육아룡이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정협단이 제사대주를 맡고 있었다.
종남파가 친무림맹 성향을 보이는 곳이니 육아룡의 성향도 비슷했지만, 그는 역량에 비해 야심이나 욕심이 큰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두 장로님들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곳은 동굴이니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검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제사대까지의 전력이 빼곡하게 뭉쳐 있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진입조로 활약하고 있는 최정예들이 먼저 가서 상황을 본 후, 안전이 검증되면 그때에 나머지 전력이 합류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검인이 그렇게 말하자 또 다른 인물이 대꾸했다.
“아직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 동굴이 단순히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용도일 수도 있네. 게다가 만약 최정예들만 먼저 보낸다 해도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하지. 그 경우에는 잡을 수 있는 적들만 놓아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네.”
그의 이름은 황보균(皇甫均)으로 무림맹 무상 황보무(皇甫茂)의 아우였다.
무상 황보무는 두루두루 존경받는 빼어난 무인이나, 황보균은 다소 고지식한 성향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번에 정혼단의 제이대주를 맡았다.
“일단은 이대로 이동하다가 낌새가 이상할 때 바로 후퇴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네. 이곳에 있는 무인들은 모두가 각파에서 내로라하는 정예들일세.”
단유소가 뒤에서 들어보니 정혼단의 무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지휘부도 흥분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모두가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 난 모습이었다.
이 기회에 확실히 공을 세워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싶은 것이다. 이곳의 지휘부를 맡고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각파와 세가들의 이인자들인 탓이다. 언젠가는 일인자가 되기를 꿈꾸는.
게다가 이들은 서로 간의 관계도 동료이기 이전에 경쟁 관계였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공을 세우기 위해 안달일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앞두고 있는데 이검인이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그의 의견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인간사의 단면이기도 했다.
다만, 저들을 이해해주기에는 이 상황이 너무 위험할 뿐이었다.
“아니, 그의 말이 일리가 있소.”
그렇게 말한 이는 선두에서 달리며 여태껏 듣기만 하던 인물이었다.
바로, 무당파의 장로인 왕운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