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거점 타격 (1)
단유소가 다시금 서신을 읽어갔다.
제가 알아보니 황룡은 미모도 출중한 데다가 당찬 여인이라고 들었어요. 함께 싸우다 보면 서로 통하는 것도 많겠죠? 인간관계 중에 전우애만큼 강력한 신뢰 관계가 없다고들 하니까요.
신룡대의 동료로서 전우애가 생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요. 단 공자님이 아시다시피 난 마음이 넓은 여자거든요. 하지만 그 이상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알았죠? 헤헤.
그녀 특유의 농담임을 알 것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저 부분을 썼을지도 충분히 상상이 되었다.
다른 공자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제겐 단 공자님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분들이잖아요.
염려도 많이 돼요. 위험한 임무잖아요. 지금쯤 얼마나 고생들이 많으실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라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즐겁게 임무에 임하고 계시겠죠.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맡은 일을 확실히 해내시겠죠.
모두들 빨리 다시 만나고 싶어요. 이제 나, 공자님들과 조금은 어울려도 되는 상황이 됐잖아요. 다시 만나서, 함께 또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한잔하고 싶어요.
호위 임무가 끝난 후 조원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조원들과 즐겁게 어울리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다. 조원들에 대한 고마움을 갚으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들과 어울리는 상황 자체를 즐거워하는 느낌이었다. 조원들이 좋은 것이다.
어느새 서신은 마지막 부분에 도달해 있었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바라는 건 단 하나, 무사하게만 돌아와 주세요.
단 공자님은 본인만큼이나 조원들과 동료들을 생각하는 분이시라, 때때로 무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알아요. 단 공자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제가 이렇게 살아 있고, 또 그런 분이기에 제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래서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할게요. 다만, 어떤 경우에도 무사하게만, 무사하게만 돌아와 주세요. 나, 이 정도 부탁은 해도 되는 거죠? 그렇죠?
쓰고 싶은 말은 많은데 종이는 이렇게 작아서, 이제는 맺음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서신은 간직하지 말고 깨끗이 처리하시길.
몸은 이렇듯 먼 곳에 있지만, 마음만은 항상 함께하고 있답니다.
무운을 빌며,
당신의 설연.
서신에 쓰여 있는 말처럼, 한정된 종이에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그녀는 글씨도 매우 작게 썼다. 원래 명필이긴 하나, 그녀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이 서신을 작성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단유소가 읽고 있던 서신을 가슴에 대더니 그 상태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뜨고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외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이윽고 단유소가 서신을 활짝 펴서 허공에 띄웠다.
일순간, 서신이 나풀거리는 자리에 검광이 일었다.
검광이 한참 동안 지속된 후, 하얀 가루만이 먼지처럼 바람결에 흩날렸다.
* * *
그날 초저녁 무렵.
정협단의 정예들이 소리도 없이 혈천맹의 거점을 포위한 가운데, 협곡 위로 한 줄기 화시가 떠올랐다. 작전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신호가 보이자마자 정협단이 일제히 적의 거점을 향해 짓쳐들었다.
동굴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적의 보초들과 마주쳤다. 그들이 채 호각을 불기도 전에, 정협단의 최정예인 진입조가 그들을 제압했다.
정협단은 용맹하게 전진했다.
거점을 지키고 있는 적의 전력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점이 매우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다 보니, 적의 대비도 철저한 모습은 아니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동굴을 지나자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서도 적의 저항이 있었으나, 정협단의 정예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을 제압했다.
적들을 손쉽게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굉 대사가 혀를 내둘렀다.
죽을 걸 빤히 알 텐데도 정협단의 앞을 막아섰던 적들의 눈빛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던 탓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도망을 치거나 항복을 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방금 죽은 적들에게서는 최소한의 두려움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미타불, 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하지만 그러길 잠시, 유굉 대사의 눈동자가 이내 공간의 중앙에 머물렀다.
“한데 이게 대체 무엇이오?”
공간의 중앙에는 넓은 직사각형의 구덩이가 패어 있어, 그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채워져 있었다. 액체는 옅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는데, 공간 안을 가득 채운 기분 나쁜 느낌의 약향의 정체도 그 액체인 듯했다.
이미 향만으로는 독성이 없다는 보고가 있은 후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때 유굉 대사의 옆에 있던 모용국이 말했다.
“액체는 견본을 여러 개 수집하여 보관하고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될 듯합니다. 특히 당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무엇보다도 지금은 대처가 중요합니다, 대사님.”
모용국은 이번에 정협단의 제육대주를 맡았다.
제육대가 유굉 대사의 호위를 맡는 동시에 대주인 모용국이 참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직 다른 장로들에 비해 나이는 어리나, 매사에 냉철한 그의 역량을 높게 산 것이다.
유굉 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용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대처가 중요합니다. 적의 동굴이 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적들도 비상사태에 봉착했음을 알고 있으니, 그들이 저 안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 우리가 미리 적의 퇴로를 차단해두었다고는 하나, 또 다른 퇴로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속 말씀해보시오.”
“빠르게 전력을 나누어 일부는 동굴 안쪽으로 진입하게 하고, 일부는 이곳의 석실들을 조사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안으로 진입하는 쪽이 더 위험할 터이니, 그 부분을 고려해서 전력을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소. 제일대부터 제사대까지는 동굴의 안쪽으로 진입하게 하고 나머지는 이곳 석실들을 조사하게 하면 어떨까 싶은데.”
“적절한 듯합니다.”
곧 유굉 대사가 목소리를 크게 하여 명령을 내리니, 정협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유굉 대사의 명령이 들리자마자 단유소가 선화란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와 엽풍, 금추, 검인이 내려가지.]
선화란의 눈매를 좁혔다.
[나도……!]
선화란의 그러한 반응은 이미 단유소가 예상했던 바였다. 그녀는 자신과 최대한 많은 것을 함께하면서 배우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따라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단유소는 바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누군가는 남아서 이쪽 인원들을 살펴야지. 조장이 둘인데 한쪽으로 쏠리면 어떻게 해. 백운을 남겨뒀으니 충분할 거야.]
선화란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단유소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세 알아들은 것이다.
[알았어. 조심해.]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인 후 서백풍, 곽승추, 이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했다.
네 사람이 정협단원들의 뒤를 따라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남은 정협단원들은 이미 엄호를 받아가며 곳곳에서 석실의 문을 열고 있었다.
그르르릉―
가장 먼저 열린 석실 안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헉……!”
“저, 저런……!”
“아, 아미타불……!”
모두가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가운데, 유굉 대사가 불호를 외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럴 만한 광경이 석실 안에 펼쳐져 있었다.
제법 넓은 석실 안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는데, 모두가 젊은 여인들이었고 전라의 상태였다. 하나같이 수척하고 지저분한 몰골들이어서, 그 모습들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
여인들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웅크린 가운데 저마다 그렇게 외쳐댔다. 정협단원들이 모두 검을 뽑아 든 채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혈천맹의 인물들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모용국이 서둘러 정협단원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물러나서 피풍의를 벗어 넘겨주시오! 다른 석실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뭔가 걸칠 수 있는 게 있으면 협조를 부탁드리오!”
그 말에 정협단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빠르게 피풍의를 벗었다. 그동안 모용국이 선화란과 호문혜를 불렀다.
“동굴에 투입된 정협단원 중에는 여인이 없으니, 두 사람이 피풍의를 걷어서 저 여인들에게 걸쳐주게. 그리고 여인들을 안심시켜 주게. 우리는 그동안 다른 석실을 조사하고 있겠네.”
정협단에는 여성 무인들도 있지만, 그녀들은 모두 예비대에 포함되어 동굴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정협단이 동굴에서 위험에 처했을 경우 퇴로를 확보하는 역할과, 혹시 모를 적의 배후 공격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선화란이 얼른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선화란과 호문혜가 피풍의를 받아서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들도 이미 모용국과 선화란의 대화를 들었는지, 겁에 질린 표정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안심하세요. 우리는 무림맹의 무인들입니다.”
선화란이 여인들에게 피풍의를 보여주며 그렇게 말하자, 여인들이 놀람과 안도감을 동시에 표출했다.
“아아……!”
“무림맹……!”
“오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흐으윽……!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이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자 선화란이 여인들에게 피풍의를 건네며 말했다.
“그렇게 울고 계실 시간 없어요. 얼른 이것들을 받아 걸치고 밖으로 나가세요. 밖에도 맹의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분들이 알아서 조치를 취해주실 겁니다.”
여인들이 피풍의를 받아서 각각 몸에 걸칠 때, 선화란이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는 방향은 저쪽이에요. 갈림길이 없으니 쉽게 나갈 수 있을 거예요. 횃불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인들이 줄줄이 선화란에게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그 즈음 다른 석실의 문들도 열렸는지, 여기저기에서 놀람 가득한 외침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협단원들의 외침들이었다.
선화란이 얼른 다가가서 진평에게 묻자 진평이 전음으로 대꾸했다.
[방금 그곳처럼 여인들이 갇혀 있는 석실도 있었고 사내들이 갇혀 있는 석실도 있었습니다. 남녀로 구분해서 가둬두었고, 아직 소년, 소녀티를 채 벗지 못한 친구들로부터 삼십 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건장한 연령대의 사람들입니다.]
선화란이 대꾸했다.
[하면 그들도 모두 방금 그 여인들처럼…….]
벌거벗겨진 채였느냐는 뜻.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조용히 전음을 주고받을 때쯤, 유굉 대사의 노기 가득한 음성이 동굴을 울렸다.
“아미타불! 혈천맹이라는 작자들은 어찌하여 이리도 악독하단 말인가!”
곧바로 유굉 대사의 깊은 탄식이 이어졌다.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부처님의 자비만 빌고 앉아 있었다니, 그것이야말로 공염불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유굉 대사가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걸치고 있던 승복을 벗었다. 대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안에 입고 있던 상의까지 모두 탈의했다.
그렇게 유굉 대사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른 몸매에 아랫배만 살짝 튀어나온, 비슷한 체형의 일반적인 노인들과 다를 바 없는 상체였다.
“대, 대사님……!”
옆에 있던 모용국이 놀라서 제지하듯 말하자 유굉 대사가 방금 탈의한 상의들을 건네며 말했다.
“아미타불, 필요한 사람들에게 걸치게 하시오. 부족하다면 속옷만 남기고 바지까지 벗을 것이오. 그리고 모용 장로는 빈승이나 말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저들을 빨리 수습하여 내보낼 생각을 하시오. 그게 지금 모용 장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