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청성 괴사 (6)
한설연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단 공자님이 보였던 여유는 포원 대협 때문이었던 거구나.’
아마도 단유소는 처음부터 저 나무 위에 있는 포원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포원 또한 단유소의 실력을 눈치챘을 것이다.
‘언제고 포원 대협이 개입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단 공자님이 그렇게 여유로웠을 것이고.’
어쨌거나 포원의 서늘한 말 한마디가 청성파의 인물들에게 미친 파장은 컸다.
“헙!”
고중보를 비롯한 청성의 제자들이 헛바람을 들이켜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포원은 뒷짐을 진 채로 묵룡조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성의 제자들에게는 등을 보인 상태였다. 그 상태로 포원이 입을 열었다.
“지객당주라 했느냐?”
고중보가 얼른 대꾸했다.
“예, 태상장로님.”
“지객이 무슨 뜻이냐?”
“소, 손님을 안다는 뜻입니다.”
“너를 지객당주로 임명한 게 장문 사질(師姪, 사문의 조카)이렷다?”
“그, 그러하옵니다.”
“하면 내, 가서 간만에 장문 사질에게 쓴소리를 좀 해야겠구나.”
그러자 고중보가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대꾸했다.
“어,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손님을 알아야 한다는 자의 눈에, 정녕 이들이 무림맹에서 마차나 모는 사람들로밖에 안 보였단 말이냐?”
고중보는 당황스러웠다.
태상장로의 저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마치 저 젊은이들이 대단한 고수들이라도 된다는 듯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봐도 자신의 눈에는 비마대원이라고 밝힌 저 젊은이들이 고수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저들의 지인이라는 여인의 경우에는 약간 실력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포원이 말했다.
“모르겠느냐? 이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못한 아이도 백도에서 이백 위 안에 드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고중보를 비롯한 모든 청성의 제자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포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도에는 구파일방과 팔대세가로 대표되는 거대 문파와 명문세가들이 존재한다. 거기에 두세 개 정도의 문파와 세가를 합해서 약 스무 곳 정도를 거대 세력이라 부른다.
그 거대 세력들은 명문인 만큼 고수들도 많으니 단순 계산상, 그곳에서 고수 열 명씩만 뽑아도 백도 서열 이백 위까지의 고수는 금방 채워진다.
하지만 그 거대 세력들이 다가 아니다. 그들을 넘어서려는 대규모 세력들은 훨씬 많고, 그 아래를 받치고 있는 중규모, 소규모의 세력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모든 곳에서 고수를 꼽다 보면 무공 서열 이백 위까지는 금방 채워진다. 그렇기에 백도에서 무공 서열 이백 위 안에 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강호의 어디에 가서도 어깨에 힘깨나 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한데 저 젊은이들이 이백 위 안의 고수들이라니.
고중보가 여전히 놀람을 감추지 못할 때 포원의 말이 이어졌다.
“겨우 그 정도로 놀랄 것 없다. 백 위 근처쯤인 아이도 있고 거의 오십 위 근처쯤 될 법한 아이도 있으니까.”
포원은 백 위 근처인 사람을 말할 때는 진평을, 오십 위 근처인 사람을 말할 때에는 서백풍을 바라보았다.
그의 추측은 거의 정확했다.
묵룡조 내에서의 서열 자체야 진평이 높지만, 단유소를 제외하면 조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난 조원이 바로 서백풍이었다.
어쨌거나 그 말에 청성파 측 인물들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백 위 안의 고수들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백 위, 나아가서는 오십 위 근처의 고수도 있다니.
백도에서 백 위 안에 드는 고수들은 보통 강호명숙으로 통한다. 백도의 어디에 가도 대접을 받는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저 청년들 중에 그런 고수가 있다고?
현실적으로 전혀 와 닿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포원이 이번에는 단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저들 중에 한 명이…….”
[그 정도면 된 듯합니다, 어르신.]
순간적으로 들려온 전음에 포원이 말을 멈췄다. 입술을 조금도 뻥끗하지 않은 채로 단유소가 전음을 보낸 것이다. 그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포원이 빠르게 전음으로 되물었다.
[아이야.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인 게냐? 실제 정체가 무엇이냐?]
물론 포원 또한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전음이었다. 단유소가 빠르게 대꾸했다.
[원래는 투신 어르신께도 밝히면 안 되는 신분입니다만, 어르신 앞에서는 감추는 것도 의미 없겠지요. 신룡대입니다.]
[신룡대가 대단한 줄이야 안다만, 너 정도의 실력자는 역대 신룡대원 전체를 통틀어도 없었을 듯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단유소를 향해 웃어 보인 포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뭐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지.”
포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청성에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는 자가 정녕 그 정도 안목밖에 없단 말인가?”
고중보를 향한 말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태상장로님.”
“무공 수준 차이가 많이 나면 상대의 경지를 못 알아볼 수도 있지. 그런 부분이야 얼마든지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러나 모르면 일단 정중함이라도 갖춰야 할 일이 아니냐! 가뜩이나 다른 이들도 아니고 무림맹의 동도들이라면 더더욱! 그 자체가 청성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왜 모른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고중보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저쪽에서 몇 명의 인물들이 빠르게 초가 쪽으로 다가왔다.
백의 도포를 입은 중년인 한 명이 선두에서 달려오고 있었고 청의 도포를 입은 네 명의 사내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청의 도포를 입은 자들은 초로의 노인과 중년인들이었다.
포원의 몇 걸음 뒤에서 그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백의 사내가 포원을 향해 예를 취하며 말했다.
“포 사숙을 뵈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네 명의 청의 도인들도 일제히 예를 취했다.
“태상장로님을 뵈옵니다!”
여태껏 등만 보이고 있던 포원이 그제야 그들 쪽으로 신형을 돌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오랜만일세, 장문 사질.”
그 말에 백의 사내가 자세를 풀며 대꾸했다.
“이게 얼마 만이십니까, 사숙! 오셨으면 저부터 찾으시지 않구요……!”
“그러려고 했네. 그 전에 이곳에 먼저 들르고 싶었을 뿐이네.”
“이게 몇 년 만입니까, 사숙. 한 삼 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간 무탈하셨지요?”
“벌써 삼 년이나 되었군. 나는 잘 놀다 왔다네. 그간 사질도 별일 없었는가?”
“예. 사숙.”
대강의 인사가 끝나자 청성 장문인이 말했다.
“오면서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숙. 분명히 지객당주가 잘못한 일이나, 근래에 약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일단 자세를 풀게 하고, 소질과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포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성 장문인이 말했다.
“제자들은 예를 풀고 물러가라.”
“예!”
“지객당주도 물러갔다가 나중에 나 좀 보세.”
“알겠습니다.”
모두가 물러가자 장문인이 포원과 단유소 일행들 쪽으로 다가왔다. 네 명의 청의 도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단유소 일행의 앞에 선 장문인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모든 일행들을 확인한 그의 시선이 마지막 즈음에는 단유소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더니 말했다.
“자네가 책임자겠군.”
과연 장문인은 장문인이었다. 가만히 있는 단유소를 알아본 것이다.
단유소가 빙그레 웃더니 장문인에게 예를 취했다.
“청성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무림맹에서 온 단유소라 합니다. 이쪽은 제 동료들입니다.”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꾸했다.
“장문인 목종림이네. 만나서 반갑네. 아울러 아까 우리 지객당주가 실례를 범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내 부덕의 소치이니 이해들 해주시게.”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단유소가 그렇게 대꾸했다.
목종림의 시선이 한동안 그에게 머물렀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고수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함께 있는 젊은이들은 상당한 실력자들인 게 확실한데, 유독 그만은 고수라는 느낌 자체가 없는 자였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이 딱히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기만 했다.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자였다.
다만 그에게는 묘한 존재감 같은 게 있었다. 물론 그 존재감에 대한 근거를 대라면 그러기는 또 쉽지 않지만.
목종림이 말했다.
“조만간 청성에 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했다던데. 빠르면 이 밤중일지도 모른다고?”
“동이 트기 전까지가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나 모레라도 올 겁니다. 그래서 경계를 강화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단유소가 대꾸하자 목종림이 말했다.
“알겠네. 대비를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이(李) 장로가 수고해주시게.”
“지금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청의 도인 중 한 명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목종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단유소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비마대원은 아닌 것 같군?”
“사정이 있어 그렇게밖에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목종림이 단유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포원에게 말했다.
“가시지요, 사숙. 제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물론 이 젊은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아니. 장문인은 바쁜 사람인데 그곳에까지 가서 방해를 할 수는 없지. 그냥 이 젊은이들이 있을 동안에는 이곳에 머물겠네. 마침 이곳에서 이 젊은이들을 만난 것도 인연인 듯하고. 한적한 곳이니 불편함도 덜할 것이고.”
“사숙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그리하십시오. 다만 저도 이 젊은이들에게 궁금한 점들이 있으니, 잠시 함께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초가의 안방으로 이동하여 모두 함께 앉았다.
장로들은 일단 돌아가서 청성의 경계 태세를 정비하기로 하여, 남은 이는 장문인 목종림뿐이었다.
포원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내, 생각을 해봤는데, 이곳에서의 일이 잘 진행되려면 최소한 장문인에게는 너희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단유소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목종림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먼저 정체를 밝히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이 경우는 상황의 특수성이 충분히 인정될 듯합니다. 저희들은 신룡대원입니다, 장문 어른.”
그 말에 목종림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신룡대라고……?”
명문거파의 장문인마저도 저토록 놀라게 만들 수 있는 조직. 그게 바로 이 강호에서 신룡대라는 이름이 가지는 파급력이었다. 괜히 강호 최강의 소수 정예 무력 집단이 아닌 것이다.
“그렇습니다. 맹의 지휘본부가 절강지부에 꾸려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이름을 담아 맹주님 앞으로 전서를 보내시면 확인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자 목종림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의심해서가 아닐세. 나 또한 오랜 세월 강호에 몸담았지만 신룡대와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어서 놀랐을 뿐이네. 어쨌거나 그래서 정체를 감추고 비마대원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게로군.”
“그렇습니다. 저희들의 정체에 관한 사안은 두 분께서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네. 그리하겠네.”
얼른 대꾸한 목종림이 다시 물었다.
“신룡대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