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재회 (7)
조원들의 분위기를 확인한 한설연이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 그게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일이라서…….”
그러자 진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습니다.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지요.”
진평이 말하는 투가 애매하여 모두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러자 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문제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까닭입니다. 특히 소저와 같은 강호 초출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소저께서 지금 이 자리에 저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그 용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모든 이들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던 중에 한설연이 말했다.
“저는 사실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개념은 더 없었죠.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고요.”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조원들이 모두 놀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설연이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방법을 찾아내는 냉철함, 두려움을 이겨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겠다는 근성. 그것들 모두 다……, 단 공자님과 함께하면서 배운 거예요. 직접 가르쳐주시진 않지만 옆에 있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단 공자님에게는 그런 게 있죠.”
조원들이 미소를 지었다. 공감한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단 공자님과 함께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저도 아까와 같은 용기……, 내지 못했을 거예요. 이미 당한 후에야 신세를 한탄하며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겠죠. 정말이지 이 모든 게 단 공자님 덕분이에요.”
그러자 단유소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당신이 그간 힘들긴 힘들었나 보군. 아침부터 그런 민망한 소리를 서슴없이 하는 걸 보니.”
이윽고 단유소가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곽승추가 말했다.
“원래 남들이 대놓고 본인 칭찬하는 분위기를 못 견디십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 저렇듯 자리를 피하시지요.”
“예.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한설연이 웃으며 대꾸하자 이번에는 서백풍이 입을 열었다.
“조장님이 저희들을 가르치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직접 가르쳐주시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발전해 있는 식이지요. 그래서 말씀인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서 공자님.”
“조장님과 함께하시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간혹 단독 호위 임무에 나설 때가 있는데 아직 미숙한 면이 많습니다. 단독 호위 임무를 수행할 때의 조장님이 어떤지를 알면 제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위기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그때마다 어떻게 위기를 빠져나왔는지, 그런 과정과 과정들 속에서 조장님이 한 소저를 어떻게 이끌었는지, 그리고 한 소저의 반응이나 느낌은 어땠는지, 그 모든 게 궁금합니다. 최대한 상세하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최소한 며칠은 함께하게 될 테니 시간도 충분할 것 같고요.”
순간적으로 진평과 곽승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백풍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서백풍의 의도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지금 그는 조장과 한설연이 함께 겪었던 사건들 자체를 궁금해하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서 둘 사이에 오간 세세한 감정과 분위기 같은 게 궁금한 거였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확실히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무서운 놈……. 집요한 놈…….’
‘아! 정말 존경합니다, 백풍 형님.’
진평과 곽승추의 눈빛이 각각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백풍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한설연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그렇게 할 게요.”
서백풍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소저.”
“감사는요. 오히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기쁜데요.”
이쯤 되면 거의 끝났다고 봐야 했다. 결국 한설연은 의심 없이 다 털어놓게 될 것이다. 특히나 여인들을 상대하는 언변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제일을 다투는 사내가 바로 서백풍이니까.
세 사람이 또다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번의 눈빛 교환에는, 이 일을 절대로 단유소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와 연소운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한설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고들 계세요. 잠시 단 공자님한테 가볼게요.”
단유소는 아래쪽으로 급경사가 시작되는 끝자락에 서 있었다. 산 아래의 경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한설연이 말없이 다가가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그 후에도 조용히 산 아래를 내려다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단유소도 말이 없었으니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단유소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한설연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이윽고 시선을 원위치시키며 입을 열었다.
“좋아?”
“네.”
“뭐가 그렇게나?”
“이 순간에 제가 느끼고 있고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요.”
한설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닭살 분위기 피해서 왔더니 여기도 썩 있을 곳은 못 되네. 다 커서 아주 그냥 소녀 감성이라도 폭발하는 모양이지?”
“원래 여자는 다 커도, 설령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돼도 평생 소녀인 법이에요.”
단유소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허이구, 그러셔.”
그러자 한설연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나, 눈 감고 계속 이러고 있는 거, 부담스러워 보이나요?”
그러자 단유소가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답이 정해진 질문을 굳이 하는 이유가 뭐야?”
그제야 한설연이 눈을 떴다. 눈을 뜬 상태에서도 그녀는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단유소도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먼 허공을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약간의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한설연이 말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유소가 대꾸했다.
“아니. 안 돼.”
단유소가 딱 잘라 말하자마자 한설연이 물었다.
“지난밤에 단 공자님이랑 함께 왔던 그 검은 옷 입은 분들 있잖아요. 누구예요?”
그 말에 단유소가 째진 눈으로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차피 아랑곳 않고 물어볼 거면서 처음에 물어봐도 되냐는 허락은 왜 늘 구하는 건데?”
“히히.”
“웃기는. 뭘 잘했다고.”
단유소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그분들도 저를 도와주신 분들이잖아요. 감사한 분들인데 누군지는 알아야죠.”
“그냥 내 지인과 그 수하들이야. 당신을 추적하던 길에 우연히 만났고.”
사실이었다. 흑풍대주인 송주와 마주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그들도 감숙 공동파의 일을 알게 된 탓에, 그 일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근처까지 오게 된 길이라 했다.
“단 공자님의 그 지인이라는 분, 대단한 분이시죠? 아마도 이름만 대면 대부분의 강호인들이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시겠죠?”
단유소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을 살핀 한설연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치! 표정 보니까 안 알려주실 모양이군요. 은인들이 누군지 알고 싶다는 것뿐인데.”
“살다 보면 때때로 모르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그 도움 자체를 고맙게 여기고, 나중에 당신도 종종 남모르게 도움도 베풀어보고.”
“네. 그건 그래요.”
웃는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한설연은 이미 그들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단유소와 그들이 나누던 대화의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그들이 풍기는 기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흑의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딱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들도 청룡조원들에 준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그 정도면 이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최정예들일 것이다. 그리고 단유소의 지인은 그런 최정예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다.
그런 최정예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단체가 이 강호에 몇 군데나 될까. 다섯 손가락을 꼽기도 쉽지 않다. 아니, 서너 손가락을 꼽기조차 쉽지 않다.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결국 천마신교다. 그리고 천마신교의 최정예 조직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 조직이다.
‘흑풍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단유소에게 그 이상 묻지 않은 건, 이 강호상에서 정과 마에 대한 문제가 얼마나 미묘하고 민감한 문제인지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 묻지 않은 더 큰 이유는 단유소 때문이었다. 그가 대답하길 꺼려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되었다.
그들의 정체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 이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소중한 이 사람과.
단유소가 돌아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 말이야. 청룡조를 따라가면서 표식도 남기고 결국 그들에게서 도망친 일.”
“네.”
한설연이 대꾸하자 단유소가 일행들이 머무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정말 잘했어.”
한설연의 표정이 더없이 환해졌다.
걸음을 옮기는 단유소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많이 컸어, 한설연.’
그녀가 청룡조에게서 탈출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그녀도 송주를 비롯한 흑풍대의 정체에 대해 대충은 눈치를 챈 느낌이었다. 현월곡에서 가장 빛나는 달이라 불리는 그녀에게 있어 그 정도의 추론은 그다지 어려울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예전의 그녀였다면 분명히 계속 질문을 해댔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바에 대해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알게 되었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청룡조와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단유소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컸어.’
* * *
사위가 깜깜한 밤.
건물들의 이곳저곳을 횃불이 밝히고 있는 가운데, 음영이 드리운 곳에서 미세한 파공음이 들렸다.
스윽―
그 소리와 함께 백의 인영이 허공으로 쑥 솟아올랐다.
툭.
곧 그의 발이 삼 층의 난간 위에 가볍게 올라섰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고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순찰하는 무인들이 장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백의 인영의 움직임을 눈치챈 자는 없었다.
난간에 올라선 백의 인영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스으윽―
약간의 틈이 생겼다 싶은 순간, 백의 인영이 지체하지 않고 어두운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창문이 소리 없이 닫혔을 때였다.
“헙!”
방 안에서 놀람을 참는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다름 아닌 백의 인영의 목소리였다.
그가 들어선 방 안의 어둠 속에 누군가가 목석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백의 인영을 주시하는 채로.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십니까. 꼭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방 안에 있던 자의 목소리였다. 고저가 없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백의 인영이 여전히 놀란 상태로 대꾸했다.
“니니니니니, 니, 니가 어찌 이곳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방도 아닌데 말이지요.”
방 안에 있던 자는 청색 옷을 입은 자였다. 청의 사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게 뭔지 아십니까. 자기 방에 들어온 방 주인은 깜짝 놀라 있는데 남의 방에 와 있는 손님이 오히려 당당하다는 겁니다. 주객전도도 이 정도면 너무 심하지요.”
청의 사내의 음성에서는 여전히 높낮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청의 사내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겨 방 한쪽에 있는 탁자로 향했다. 이윽고 그가 탁자 위에 마련된 촛불을 밝혔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백의 인영은 무림맹주 백리우, 청의 사내는 문상 제갈윤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곳은 무림맹 사천지부에 마련된 백리우의 처소였다.
백리우가 당황한 표정인데 반해 제갈윤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 평온하다기보다는 감정이 없는 쪽이라고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