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재회 (6)
사내의 이름은 송주(宋柱).
이름은 얼핏 평범한 느낌이나 그의 직위는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그가 바로 천마신교의 흑풍대를 이끌고 있는 사람, 즉 흑풍대주이기 때문이다.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된 일이지. 이렇게라도 돕게 되었으니. 아무리 친구지간이라지만 그간은 대부분 도움만 받아서 내심 미안한 마음이 컸거든.”
“뭘 미안한 마음씩이나. 그땐 상황이 그랬을 뿐이지.”
단유소의 말에 송주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사 년 전이었다. 새외 무림에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어 그곳을 조사하던 중에 우연히 만났다.
당시에 위험에 빠졌던 송주를 단유소가 구해준 데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강한 존재라는 사실만 인지한 채로, 인사만 나누고 통성명도 없이 헤어졌었다.
정보력에 있어서 최강인 천마신교와 무림맹이니만큼, 한쪽이 알 만한 사안들이라면 다른 한쪽도 대부분은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사안이 위험할수록 천마신교에서는 흑풍대를, 무림맹에서는 신룡대를 투입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리고 위험도가 최상인 임무들의 경우 천마신교에서는 결국 흑풍대주 송주를, 무림맹에서는 묵룡 단유소를 투입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 식으로 항상 최고 난이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두 사람이다 보니 간혹 임무지가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송주가 단유소를 알아보면서부터 친분을 쌓게 된 두 사람이었다. 차후에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친구 사이였다.
잠시 후 송주가 말했다.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은 왔지만 싸울 때 직접 보니 그새 실력이 더 늘었더군? 아니, 그 경지에서도 실력이 더 늘 수가 있긴 한 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네가 그런 엄살을 떨면 신빙성이 떨어지지.”
“어어? 엄살 아닌데?”
그 말에 단유소가 피식 웃어 보였다. 송주도 웃어 보였다. 그 상태로 잠시 말이 없다가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샌 어디나 변절자가 문제네.”
그 말에 단유소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가 곧바로 송주에게 물었다.
“그쪽에도 변절자가 생길 수 있나?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그럴 생각조차 못 할 것 같은데.”
“우리 쪽도 사람 사는 동네야. 그리고 세상 어디에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송주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주의 표정을 확인하던 단유소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배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저렇게 여유로운 모습이라면 그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이중 첩자를 심은 것이군.’
정과 협을 추구한다는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천마신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송주가 말했다.
“그래도 친구하기로 한 사이인데, 벌써 네 번째 보는 자리인데도 우리는 차분히 앉아서 술 한잔 제대로 기울일 새가 없네.”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그럴 날이 오긴 올까.”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나.”
단유소의 말에 송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도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송주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시간을 오래 뺄 수는 없어서.”
“고생 많았어.”
두 사람은 잠시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송주가 고개를 돌리며 옆에 있던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가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송주를 포함한 모든 흑풍대원들이 일제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흑의인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단유소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한설연은 조용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도 주변의 기척을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길 잠시, 단유소가 눈을 떴다. 그리고 한설연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한설연의 바로 앞에 선 단유소가 물었다.
“괜찮나, 한 소저? 다친 데는 없고?”
걱정 가득한 표정과 어조.
한설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갑자기 목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대꾸를 했다가는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버릴 것만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약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단유소가 더욱 걱정이 가득해진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때부터였다. 한설연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참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왜 눈물이 흐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의 곁에 있게 되니 그냥 눈물이 났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이제는 이슬비로 변한 가운데 한설연이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단유소는 울고 있는 한설연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었을 것이다.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어지간해서는 울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처음 겪은 강호가 더없이 가혹했음을 생각하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씩씩한 여인이었다. 만약 한설연이 아닌 다른 여인이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아마도 울다가 볼일 다 봤을 것이다.
기억하기로 그녀의 눈물을 보는 건 이번이 네 번째였다.
어쩔 수 없이 구홍립 등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한 번, 자신이 백의 사내에 의해 크게 다친 직후에 한 번, 그 일로 의식을 잃었던 자신이 황 노파의 동굴에서 깨어났을 때 한 번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또 울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쓰라려왔다.
왜일까.
잠시 후, 단유소가 한 걸음 더 다가가더니 울고 있는 그녀의 상체를 한 팔로 부드럽게 감쌌다.
단유소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설연이 더 크게 울었다.
그로부터 반의반각쯤 지났을까.
울음소리가 거의 잦아들었다 싶더니 한설연이 단유소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단유소가 말했다.
“이제 갈까?”
눈물을 닦는 와중에도 한설연이 단유소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손짓하자 근처에 흩어져 있던 묵룡조원들이 서둘러 두 사람의 근처로 다가왔다.
한설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울고 싶어서 운 건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곳에서 울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자 창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단유소가 말했다.
“서둘러 이동해야 하니 일단은 소개만 짧게 하지. 진평하고는 인사 나눴지?”
진평이 대꾸했다.
“예. 제 이름은 아십니다.”
그러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백풍과 곽승추를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에 키 큰 친구는 서백풍.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친구는 곽승추야.”
모두가 단유소와 함께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한설연이 정중하게 그들에게 예를 취했다.
“하, 한설연이라 합니다. 두 분의 도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이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한설연을 향해 목례했다. 그러자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고로 진평은 우리 부조장. 그리고 백풍과 승추는 우리 조원들이야.”
그 말에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유소의 지인들일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이들이 설마 묵룡조원들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설연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묵룡조원들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우는 모습이나 보인 것이다. 하필이면.
한설연이 결국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자, 정산들 합시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말을 한 사람은 서백풍이라는 사내였다. 그의 입술이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러자 진평이 살짝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아, 제길.”
그러더니 그가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에휴……. 그냥 백풍 형님 따라가는 거였어.”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곽승추라는 사내였다. 그는 후회 막심한 표정이었다. 그도 자신의 품속을 뒤지고 있었다.
이윽고 서백풍이 손바닥을 내밀자 진평과 곽승추가 차례로 그 손바닥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동전 꾸러미였다. 진평과 곽승추가 각각 동전 한 꾸러미씩을 서백풍의 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두 개의 동전 꾸러미가 들어오자마자 서백풍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핫! 요긴하게 쓰겠습니다요.”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유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 이번엔 또 뭐였냐?”
그러자 서백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보니까 한 소저께서 우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조장님이 안아준다는 쪽, 부조장님과 승추는 그럴 리 없다는 쪽이었지요. 하하핫!”
단유소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 화상들아. 그게 뭐라고 내기들을 해?”
서백풍이 대꾸했다.
“저희들한텐 매우 중요한 문제거든요. 헤헤.”
그러자 단유소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웬수들 하여간…….”
“얼른 가시지요. 공돈도 들어왔으니 도착하거든 제가 거나하게 한잔 사겠습니다.”
단유소를 향해 그렇게 말한 서백풍이 이번에는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한 턱 쏠 때 한 소저께서도 꼭 오십시오. 한 소저의 공이 가장 컸거든요.”
“아, 그, 그게…….”
그 이상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던 한설연이 잠시 후 고개를 숙이며 ‘풉’ 하고 작게 웃었다.
묵룡조의 다른 조원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했는데 이런 사람들이었을 줄이야.
단유소가 한설연에게 물었다.
“경공, 펼칠 수 있겠나?”
대꾸는 옆에 있던 진평이 했다.
“힘들 겁니다. 아까 보니 완전히 지친 모양이시더군요.”
그러자 한설연이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단유소를 향해 말했다.
“아니에요. 갈 수 있어요.”
그 말에 대한 대꾸도 진평이 했다.
“소저의 의욕은 높게 삽니다만, 무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소저의 몸에 탈이라도 나면 일행 전체가 더 곤란해집니다.”
“아…….”
그의 말이 맞다.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만 앞서서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유소가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한설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업혀.”
한설연이 순순히 단유소의 봇짐을 받아서 등에 메더니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단유소가 조원들에게 말했다.
“일단 청성파로 간다.”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청성파였다.
“예!”
조원들이 일제히 낮은 음성으로 외쳤고, 일행이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리던 단유소 일행이 걸음을 멈춘 건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약간 쉬지. 배도 좀 채울 겸.”
일행은 멀리로 민가가 보이는 야산의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가 편한 자세를 취하며 봇짐에서 육포를 꺼내었다. 단유소도 육포를 꺼내더니 적당한 양을 한설연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물었다.
“짐은 어쨌어?”
“놓고 왔어요. 도망치기 전에.”
단유소가 미소 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군.”
그러자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청룡조와 지낸 첫날부터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일까지, 그녀의 이야기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당할 거라면 다른 시도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도망쳤던 거예요. 짐을 놓고 온 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고요.”
한설연이 말을 마쳤을 때쯤 서백풍이 말했다.
“훌륭하신데요?”
서백풍뿐만 아니라 다른 묵룡조원들도 대견하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