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48화 (48/200)

48화. 수로행 (3)

단유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한설연의 전음이 이어졌다.

[계속해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 상황들이 지긋지긋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포기해서 이러는 것도 결코 아니에요. 그래서 오해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거였고요.]

그랬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결코 포기한 자들이 보이는 특유의 눈빛이 아니었다.

슬픈 눈빛도 아니었고 결연한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차분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어차피 둘 다 죽을 마당이면 당연히 한 사람이라도 사는 게 낫잖아요. 그리고 단 공자님은 혼자라면 충분히 저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분이잖아요.]

그녀의 어조 또한 침착했다. 감정이 격해진 것도 아니었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지도 않았다.

[이 강호는 곧 커다란 혼란에 빠질 거예요. 강호를 넘어 온 대륙이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그런 이 강호에, 이 세상에, 단 공자님은 꼭 필요한 분이세요. 저는 다만, 이 강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자는 것뿐이에요. 이 정도면 제 뜻, 충분히 알아들으셨죠?]

한설연이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조용히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묵묵히 그녀의 시선을 응시하던 단유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설연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단유소가 난간으로 이동하여 어두운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후방에 있는 백의 사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는 모양새였다.

한설연도 그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난간을 잡고 흘러가는 강물을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강물도 흘러갔고 시간도 흘러갔다.

백의 사내가 말한 일각 중에서 반각 정도가 흘렀을 즈음, 조용히 있던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러 생각들과 감정들이 오가네요. 여한은 별로 없는데,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미안함이네요. 저 때문에 목숨을 잃은 분들에게 미안하고 그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사부님, 사형제들 그리고 곡의 식구들에게는 해준 것도 없이 응석만 부린 것 같아서 미안하고…….]

잠시 말을 멈췄던 한설연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누구보다도 단 공자님에게 미안해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러자 한설연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마치 단유소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단 공자님에게 민폐를 너무 많이 끼쳤어요. 가뜩이나 헛똑똑이라서 말도 잘 안 듣고, 호기심은 많아서 해도 되는 질문과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구분 못 하고 끊임없이 질문만 해대고, 일의 경중도 모르면서 이래저래 보채기만 하고, 어떤 상황에서나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도움도 안 되고…….]

[풋. 알긴 아는군.]

그러자 한설연이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돌이켜보니 너무 창피하네요. 아무리 임무 때문이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강호 초출 데리고 다니면서 단 공자님은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까. 그래서 단 공자님에게 제일 미안한 거예요.]

[한 소저.]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한설연도 고개를 돌려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태껏 그가 보여준 표정들 중에서 가장 자상한 표정이었다.

[말씀하세요.]

[호기심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이래저래 보채고, 도움은 안 되고 그런 것들 말이야. 강호 초출들은 누구나 다 그래. 아무리 신공절학을 익히고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후에 강호에 나와도 처음에는 다들 실수를 해. 신룡대의 내 동료들도 처음에는 못 봐줄 수준이었어.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단 공자님도 실수를 했다고요?]

단유소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하는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대단한 고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그 풋내기들을 이끌고 보호해주는 게 바로 선배들이 할 일이야. 당신과 있었던 일은 임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기도 했어. 그러니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리고…….]

말을 줄인 단유소가 다시 고개를 돌려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이 강호는 많은 풋내기들에게 시련을 안겨주지만, 유독 한설연이라는 풋내기에게는 가혹했던 것뿐이야. 그 가혹함까지 고려한다면, 당신은 내가 지금껏 겪었던 그 어떤 풋내기들보다 훌륭했어.]

[나름 위안은 되네요.]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실제로 그래. 다른 풋내기들이었다면 백에 아흔아홉은 오줌을 지리거나, 울거나, 공포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거나,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의연했어.]

어두운 강물을 바라보는 한설연의 얼굴에 잔잔함이 떠올랐다.

‘이제 반의반각쯤 남았겠지?’

두렵다.

하지만 할 것이다. 해야만 한다.

죽어야만 한다.

미련 없이 죽을 것이다.

그게 단유소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게다가 저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마음을 다잡은 한설연이 말했다.

[단 공자님, 우리 마지막으로 연인 행세 한 번만 해요.]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했고, 한설연이 곧바로 다시 전음을 보냈다.

[한 번만 안아주세요.]

그 말에 단유소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미소의 의미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단유소가 한설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한설연은 이내 몸에서 힘을 뺐다.

자신을 꼭 끌어안은 그의 품이 따뜻하고 든든했다.

한설연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좋지 않은가.

그래도 마지막 순간을 이런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마워요, 단 공자님.]

[고마워할 것 없어. 나도 마침 이러고 싶었거든.]

[나 있잖아요. 철들고 난 후로 남자 품에 안겨보기는 처음…….]

[잘 들어, 한 소저.]

그 순간, 단유소가 갑자기 한설연의 말을 끊었다. 그의 전음이 바로 이어졌다.

[이 상태로 입수할 거야. 그러니 각오해. 호흡 조절하고.]

[네……?]

놀라서 그렇게 반응한 한설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

[안 돼요! 단 공자님이 수중에서도 빠르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 해도 저를 데리고는 결코 저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 이러지 말아요. 여태 제 말에 다 수긍해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예요?]

[수긍한 건 당신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뜻이었지 당신 말대로 하겠다는 게 아니었는데.]

한설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어조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 처음부터 내 의견에 따라줄 생각이 전혀 없었어!’

마침 끌어안고 싶었다는 그의 말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계획한 게 있어서 끌어안았던 것이다.

[내 목숨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는 알아서 잘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러니 지금은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하도록. 우리는 난간을 타고 넘어지듯이 입수할 거야. 셋 세고 들어간다. 하나, 둘, 셋……!]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로를 안고 있던 두 사람이 난간 밖으로 쓰러졌다.

풍덩!

두 사람이 갑자기 물에 빠지자 갑판 위는 난리가 났다. 승객과 선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또다시 몇 명이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백의 사내와 그 무리들이었고, 아직 곡류에 접어들기 전의 일이었다.

단유소는 물에 빠지자마자 천근추의 수법으로 몸을 무겁게 하여 빠르게 가라앉았다. 강바닥이 거의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단유소가 헤엄을 치며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설연은 단유소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일단 단유소는 적에게 발각될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는 생각일 것이다. 지금은 깜깜한 밤중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속 때문이겠지.’

흐르는 물줄기의 깊이를 따졌을 때 유속이 가장 느린 부분은 수면과 강바닥 쪽이다. 단유소도 그것을 알고 강바닥을 통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유소가 헤엄치는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한 손으로 단유소의 허리를 잡고 열심히 발을 구르는 와중에도 한설연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깊이 잠수했기에 아직까지는 적에게 발각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물살을 타고 내려갔는지, 거슬러 올라갔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로 쭉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두 사람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느샌가 두 명의 적이 뒤쪽에서 빠르게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는 그들의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단유소보다 더 빨랐다.

보아하니 그들은 수적들이 주로 쓰는 물갈퀴를 발에 착용한 상태였다. 당연히 빠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 백의 사내가 말하길 오늘 모든 걸 끝내겠다고 하더니, 과연 준비도 철저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던 어느 순간, 뒤쪽에서 두 개의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왔다.

물속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적들이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기운의 강력함과는 별개로 검기가 다가오는 속도 자체는 빠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속인 탓이었고, 그들의 검기가 흘러가는 물살을 거스르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물속에서는 대응도 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형을 비튼 단유소가 장검을 이용해 두 개의 검기를 쳐냈다. 물속이고 운신이 어려운 만큼, 피하는 쪽보다는 웬만하면 쳐내는 쪽이 안전했다. 한설연이 붙어 있는 상황이니 더욱 그랬다.

공격을 막은 즉시 단유소가 두 사람을 향해 연속으로 검기를 발출했다.

슈슝―

날카로운 두 개의 검기가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적이 날렸던 검기보다 단유소가 날린 검기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단순히 물살의 방향 때문만이 아니야.’

한설연은 놀라웠다.

단유소는 검기를 발출하던 마지막 순간에 손목과 팔을 강하게 비틀었었다.

그로 인해 단유소의 검기는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물살을 가르는 중이었다. 검기를 발출하던 순간의 속도를 더 오래 유지하면서.

흉내 낸다고 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수법이 아니기에 단유소가 더 대단해 보였다.

결국 두 명의 적들도 단유소의 검기를 피하지 못하고 검을 세워 막았다. 그 반탄력으로 인해 적들과의 거리가 순간적으로 멀어졌다.

적들이 아예 수면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위치를 확인한 데다가 상황이 만만치 않으니 동료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함일 것이다.

두 사람도 수면으로 떠올라 호흡을 골랐다. 이제는 적에게 위치를 들킨 마당이어서 그런지 단유소는 굳이 수면 아래로 하강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또다시 적들이 다가왔다. 네 명이었고, 모두가 물갈퀴를 착용한 채였다.

적들의 접근 방식이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정직하게 후방을 쫓는 게 아니라, 횡으로 넓게 퍼져서 빠르게 물살을 거스르는 중이었다. 단유소보다 더 상류 쪽으로 이동하여 본인들이 물살의 유리함을 점하겠다는 의중일 것이다.

강의 중심보다 강가 쪽이 상대적으로 유속이 느리다. 단유소는 강의 중심부로, 양쪽으로 두 명씩 나뉜 적들은 중심에서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적들은 물갈퀴까지 착용한 상태였기에 단유소와 한설연이 점점 뒤처지기 시작했다.

적들에게 추월을 당했는데도 단유소는 별다른 대비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또다시 강바닥을 향해 깊이 잠수했다.

한설연은 의아했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포위되는 형국이었다. 가뜩이나 저들은 하나하나가 초고수들이 아닌가.

어느 시점이 되자 한참을 나아가던 적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깊게 잠수하며 다가왔다. 그들이 더 상류 쪽에 있었던 탓에 다가오는 속도도 매우 빨랐다.

네 방향에서 검기가 쏟아졌다.

단유소가 어느새 꺼내든 쌍소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가 검기를 모두 막아냈을 때쯤, 또다시 검기가 날아왔다.

단유소가 또다시 모든 검기를 막아냈을 때는 이미 적들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들이 단유소를 향해 검을 쑤셔 넣었다.

검 네 자루에 모두 강기가 맺혀 있었다. 그 모든 검이 단유소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드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몸을 웅크렸던 단유소가 갑자기 자신의 양발로 한설연의 양 어깨를 강하게 밟았다. 그 즉시 단유소가 사선으로 떠올랐다.

‘컥……!’

한설연은 그 강력한 반작용에 의해 하류 쪽으로 밀려났다. 그녀는 강바닥을 발로 짚은 후에야 균형을 잡았다. 그 후에야 위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단유소는 수중에 있지 않았다. 벌써 수면 위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뛰어오른 궤적을 생각할 때 단유소는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적들도 같은 예상인지 하나같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본인들의 머리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니, 일단 아래쪽에서 검을 고쳐 쥔 채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직후.

퓨뷰뷰뷰뷰뷰뷰뷰뷰븅―

적들이 있는 곳을 포함한 넓은 범위에, 수십 개의 날카로운 기운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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