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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39화 (39/200)

39화. 사천으로 (3)

단유소가 눈을 지그시 뜨고 대꾸했다.

“무조건 무기 위로 불쑥 솟아오른 빛무리만이 강기인 건 아니야. 물론 지금까지 이 강호에서 통용되어 온 상식만 가지고는 이해가 잘 안 가겠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갔다.

그의 무기에는 분명히 강기가 솟아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강기를 썼다고? 그런 강기가 있다고?

“나도 남들이 쓰는 방식의 강기를 못 쓰는 건 아냐. 하지만 그 방식은 공력의 소모가 너무 크거든. 그래서 안 쓰는 거야.”

“그럼 단 공자님이 쓰는 방식의 강기는 공력의 소모가 적다는 뜻인가요?”

“응.”

강기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된 건 사부 때문이었다.

혼원태극공을 수정, 보완하다가 신체 기능이 저하된 사부는 그 후로 무학 연구에만 몰두했다.

사부는 특히 대라유유선공에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대라유유선공이 가진 조화의 묘리를 극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강기의 새로운 활용법을 발견해낸 것이다.

한설연이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할 때, 단유소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깊이 알려고 하지 마. 더 이상은 내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으니까. 어쨌든 술도 다 마셨으니 가서 잠이나 자야겠어. 피곤해.”

“그래도…….”

한설연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즈음에 단유소는 이미 침대에 벌러덩 눕고 있었다.

“피이.”

단유소 쪽을 향해 입술을 삐쭉거린 한설연도 결국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누운 상태로 약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가만히 누워 있던 한설연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단유소의 침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숨소리가 느리고 고요했다.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늘 뒤통수만 대면 잠드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한설연이 다시 똑바로 누웠다. 그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매우 조용히.

“나……, 헛똑똑이였어요. 자신감만 넘치고 의욕만 앞섰어요. 그런 나 때문에 많은 소중한 목숨들이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분들의 모습이 종종 눈앞에 아른거려요.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저주스러워요.”

참으로 오랜만에, 속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술이 들어가서 감상적이 된 모양이었다.

강호는 초출인데 그간 충격적인 일들과 아픈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그것도 단시간에.

그래도 단유소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밝은 모습만 보이기 위해 항시 노력했다.

자신이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있는 단유소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힘들고 아픈 심정을 마냥 속으로만 삭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정신이 먼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러고 싶어서 단유소에게 술을 마시자고 졸랐던 건지도 모른다. 마침 약간의 여유가 생긴 김에.

“물론 원정을 나서기 전에도 위험할 수 있다는 예상은 했었어요. 하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까지 참혹할 줄은 몰랐어요.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면 절대로 곡을 나서지 않았을 텐데…….”

조용한 목소리이긴 하지만 다분히 한탄이 섞인 어조로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언제든 어디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강호인데, 그걸 머리로 안다 해서 현실로도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강호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지금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죠. 그리고 깨달았어요. 곡을 나선 순간부터는 내가 가진 지식도, 명성도, 현월곡이라는 배경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렇게 말한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돌려 단유소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는 편안한 얼굴로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다시 바로 누운 한설연이 천장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됐어요.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무공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죠. 왜냐하면 이곳은 강호니까. 무림이라고도 불리는, 바로 무인들의 세상이니까. 이곳의 절대 명제는 바로 무(武), 그것이니까. 그 부분을 게을리했을 때 이 강호가 내게 얼마나 처절하고 혹독한 경험을 안겨주는지, 확실히 알게 됐어요.”

조용히 한숨을 내쉰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처럼 경험 없이 나올 거였으면 무공 실력이라도 더 갈고닦았어야 했어요. 강호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평소에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나. 무공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한 순간부터였을 거예요. 공부에만 신경 쓰고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기 시작한 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그게 너무 후회돼요. 수련하기 좋은 조건에서도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게……. 만약에 내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지금보다 더 강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단 공자님도 덜 힘들었을 텐데.”

한설연이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한설연이 단유소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 강해질 거예요, 단 공자님. 강해지고 싶어요. 나, 더 이상 한심해지지 않을 거예요. 나, 더 이상 후회하지도 않을 거예요. 나 때문에 죽은 우리 식구들과 천망단원들을 위해서라도 나, 열심히 수련할 거예요. 강해져서 그 힘으로 더 좋은 일 하면서 살 거예요.”

의지가 가득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이윽고 따스함을 담아갔다. 그녀가 그 상태로 마지막 말을 했다.

“정말 고마워요. 단 공자님이 있기에 살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어요. 단 공자님 덕분에 이 모든 걸 깨닫고 느낄 수 있었어요. 평생…… 감사하면서 살게요.”

* * *

“……소저. 한 소저.”

한설연은 잠결에 들려온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한 소저, 일어나. 빨리.”

단유소였다. 낮은 음성이었고 다급한 음성이었다.

눈을 뜨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직 사위가 어두웠다. 방 안에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느낌상 새벽쯤인 듯했다.

어쨌거나 단유소의 음성이 다급하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

정신을 번쩍 차린 한설연이 매무새를 추스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단유소가 침대 맡에 있었다.

“왜…… 그래요?”

한설연이 잠긴 목소리로 묻자 단유소가 심각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행적이 발각된 것 같아.”

한설연이 눈동자가 커졌다.

“그럴 리가……!”

공동파를 벗어나서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빠르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딱히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거늘, 어찌 이렇게 빨리 발각되었단 말인가.

“그들이 우리의 종적을 추적해서 알아낸 건 아닐 거야. 아마 이곳에도 그들의 눈이 있는 거겠지. 시간을 지체할수록 적은 더 많이 몰려들 거야. 그러니까 빨리 짐 싸.”

“네.”

한설연이 서둘러 움직였다.

봇짐을 싸면서 보니 어제 단유소와 함께 보급한 물품들이 많았다.

만약에 어제 단유소를 따라 물품들을 미리 채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육포도 거의 다 떨어졌었으니 이후에는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

단유소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왼쪽 눈에 눈곱은 떼.”

한설연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녀를 향해 놀리듯 미소를 지어 보인 단유소가 돌아섰다.

빠르게 짐을 챙기는 와중에도 한설연이 단유소의 등을 향해 연신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래도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단유소가 농을 던질 정도면 아직까지는 큰 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멀지 않은 곳에 강줄기가 있어요. 아마 강줄기를 따라 배가 오갈 거예요. 그쪽으로 가보는 건 어때요?”

그러다 단유소가 한설연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약간의 놀람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이쪽 지리, 모르지 않아?”

한설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실은 어제 저자에서 물품 살 때 조용히 지도도 한 장 샀거든요. 잠들기 전에 그걸 좀 살펴본지라.”

단유소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제법이군.”

뭐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나도 그쪽으로 향할 생각이었어. 그러니 빨리 준비해.”

어둠이 점점 가셔가는 시각.

객잔의 후문을 이용해 조용히 빠져나온 단유소와 한설연이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객잔 후문 쪽의 거리에는 장이 서는 중이었다.

곡류, 구황작물, 절인 생선, 말린 과일, 고랭지 야채 등 식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주를 이뤘고 그 외에는 간단한 생필품 등을 파는 상인들도 보였다.

그야말로 생동감 넘치고 평화로운 새벽 풍경이었다. 면사로 가려진 한설연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네요. 새벽에 장이 서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거든요.”

그러자 단유소의 대꾸는 의외로 전음으로 들려왔다.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정신 차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전음을 사용하지 않는 그였다. 즉, 지금은 그가 전음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한설연이 단유소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할 때, 그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지금부터 내가 뭘 하든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맞춰주도록.]

한설연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일단 듣는 게 이로우니까.

그러자 잠시 후, 단유소가 한설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한설연의 눈동자가 면사 안에서 휘둥그레졌다.

[어허. 자연스럽게.]

[아……!]

[이쯤 함께 지냈으면 척하면 척이어야지. 연인처럼 보이게 행동하잔 말이야.]

[아, 네.]

그 상태로 잠시 걷던 단유소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잘 들어. 저 상인들 중에 자객이 다수 섞여 있어.]

한설연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단유소의 주문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그 놀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한설연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상인들로만 보였다. 다수의 자객이 섞여 있다는데, 대체 누가 자객이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명도 자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신이 찾아.]

[네에?]

[그리고 그 자객들, 당신이 상대해.]

[네에에에?]

갑자기 그가 왜 이러는 걸까.

[자객을 골라내지도 못하겠는데 그들을 상대하기까지 하라고요?]

[응. 참고로 난 가만히 있을 거야. 이번에는 당신이 날 지켜.]

[지, 지키라니……! 저는 한 번도 자객을 상대해본 적이 없다구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러자 단유소가 코웃음을 쳤다. 그 직후 그의 전음이 들려왔다.

[가능하지 않으면? 난 못 해요, 하고 그냥 포기할 셈인가? 나 없을 때 자객 만나면 그냥 그들의 칼이 들어오는 대로 몸을 맡길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러는 시간에 좀 더 예리하게 저들을 관찰해보는 건 어떨까?]

한설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다.

부족하다고 해서, 못한다고 해서 이 강호가 자신을 가엽게 대해줄 리 없다. 투정 부리며 거부한다고 해서 배려해줄 리도 없다.

해본 적이 없어도, 못해도, 어떻게든 해내야 할 때가 있다. 이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자세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어젯밤의 다짐도 그러기 위해서 했던 거였다.

한설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 후로 두 사람이 열댓 걸음 정도를 옮겼을 때였다.

호두 등의 견과류를 팔던 오십대 초반가량의 중년인이 양손에 호두와 잣, 땅콩 등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요. 헤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연인이신가 보군요.”

단유소가 멈추자 한설연도 멈춰 섰다. 그 직후, 단유소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서 인사 받아줘. 자연스럽게.]

눈앞의 중년인이 자객인지 아닌지까지 알려주면 좋으련만 더 이상의 전음은 없었다.

정말 안 알려주는구나. 아, 철저한 사람.

결국 단유소의 주문에 따라 한설연이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후훗. 우리 가가와 저의 관계를 단번에 알아맞히시다니. 대단하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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