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사천으로 (2)
저잣거리를 걸으며 한설연에게 규정이니, 원칙이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단유소도 반주 삼아 조금은 마실 계획이었다.
물론 신룡대의 규정 중에 임무 중 금주 규정이 있긴 있다.
하지만 신룡대원들은 때때로, 눈치껏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금주 규정 위반이 적용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룡대가 음주로 인해 실수하거나 임무를 그르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룡대원들은 모두 그만한 분별력과 절제력쯤은 기본적으로 갖춘 사람들이었다.
어쨌거나 그간은 단유소로서도 긴장의 연속인 나날들이었다. 이완이 거의 없는 나날들이었다. 술 생각이 간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아까 한설연에게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던 이유는 그녀에게 최소한의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 후로 한설연이 한 번 더 조르자 못 이긴 척 들어준 것이다.
그녀에게도 긴장의 연속인 나날들이었을 테니까. 몸도 마음도 힘겨운 나날들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가 될 수도 있으니, 과하지 않은 선에서 한잔하기로 한 것이다.
한설연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자! 먹어요, 이제 우리.”
“그래.”
단유소가 대꾸하자마자 한설연의 젓가락이 바쁘게 음식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 볼이 금세 두툼하게 부풀어 올랐다.
“우와! 진짜 맛있다!”
한설연은 먹는 와중에도 옹알거리며 연신 감탄했다.
단유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은 사문을 잘못 선택했어. 현월곡보다 개방이 훨씬 어울렸을 거야.”
그러자 한설연이 씹는 걸 멈추고 단유소를 째려봤다. 하지만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단유소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지만 한설연의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먹는 중간중간에도 단유소는 계속해서 놀란 표정이었다.
“체하겠다. 누가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좀 먹어. 먹는 거만 봐서는 아주 장정이네, 장정.”
그러자 한설연이 우적거리며 대꾸했다.
“체해도 내 몸이 체하고 고생해도 내 위장이 고생해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여자들 주선연 나와서 음식 깨작거리는 거 다 내숭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혀를 내두른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당신 몸 상태 안 좋아지거나 아프면 어차피 내가 고생인데.”
그러자 여전히 부지런히 음식을 입안으로 가져가며 한설연이 대꾸했다.
“나 원래 대식가예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 후로 한 식경이 지나기까지 한설연은 실제로 그 말을 증명해 보였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나자 그제야 한설연이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술잔을 들었다. 처음에 한 잔을 마신 이후로 이번이 두 잔째였다.
“이제 배 좀 불러?”
단유소가 묻자 한설연이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봐온 그녀의 미소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단유소가 질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술잔을 마주 들었다.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한설연은 단번에 목 안에 털어 넣었지만 단유소는 음미하듯 천천히 잔을 기울여 마셨다.
잔을 내려놓았을 때 단유소의 얼굴 앞에 한설연의 젓가락이 와 있었다. 안주를 집고 있는 젓가락이었다.
한설연이 짐짓 애교를 부리는 척 입을 열었다.
“아아.”
이에 단유소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뭐 하는 짓이지? 게다가 당신이 쓰던 걸로 더럽게?”
더럽다는 말 때문인지 한설연이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게 다 정이라구요. 그러니까 자, 아아.”
“정 같은 소리 한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치워.”
“성의예요.”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그러니 이런 건 당신 좋아하는 사람한테나 하라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도 이런 거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단 공자님한테 처음 해주는 거라고요. 나도 쑥스러운데 술기운 빌려서 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굳이 이럴 필요 없다고.”
“아, 몰라요. 드실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나, 팔 빠져요.”
단유소가 보니 한설연은 결코 그만둘 기세가 아니었다. 괜찮다는데 대체 왜 이렇게 계속 귀찮게 구는 건지 납득이 안 갔다.
결국 단유소가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나 원 참. 고집하고는. 이번만이야, 알았어?”
한설연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안주를 받아먹자 한설연의 표정이 더 환해졌다.
그녀가 단유소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내 목숨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맡긴 상태에서, 그 누군가가 나를 위해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거, 생각보다 답답하고 힘든 일이더군요. 차라리 내가 직접 싸울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라도 돕고 싶은데, 대부분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더군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상황이 되는…….”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왠지 씁쓸해 보였다. 단유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그때마다 무기력한 내가 한심하고 답답해요. 도울 수도 없고,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피해만 끼치는 것 같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만 가득해요.”
“미안해할 필요 없는데. 나는 단지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고 했잖아.”
돕기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무기력한 그 심정, 알고 있다. 그래서 부담 갖지 말라는 뜻으로 대꾸한 것이다.
그러자 한설연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내 입장은 또 다르거든요. 미안한 마음만 가득해요. 결국 단 공자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죠.”
한설연은 식탁 옆에 있는 호롱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일렁이는 불빛 때문인지, 빛이 반사된 그녀의 눈동자도 일렁이는 것 같았다.
단유소가 또다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한설연이 갑자기 단유소를 향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안주 집어 주면 그냥 좀 먹어요. 이런 거라도 좀 하게 해달라구요. 어차피 이번 일 끝나면 보고 싶어도 못 본다면서요. 그럼 난 고맙기만 하고, 아무런 보답도 못 해주고 끝나는 거잖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고마움은 맹에 공식적으로…….”
그러자 한설연이 단유소의 말을 끊었다.
“현월곡 대 무림맹 말고, 한설연 대 단유소로요. 나라는 사람 개인적으로 말이에요. 지금은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사소한 거라도 할 수 있게 해달란 말이에요. 그러니 이런 거, 다소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워도 그냥 못 이긴 척 참아봐요.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비아냥거리거나 핀잔을 줄 말들은 많았지만 단유소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희미하게 미소만 지은 채로 단유소가 술잔을 들었다.
두 사람의 잔이 또다시 마주쳤다.
“자, 아아.”
단유소가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고 안주를 받아먹었다. 그러자 한설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호. 이번에는 순순히 드시네요? 한 마디라도 투덜거리면서 못 이긴 척 드실 줄 알았더니.”
“당신 얘기 들으니까 문득 동료가 떠올라서.”
그 말에 한설연의 눈이 반짝였다.
단유소의 동료가 누구겠는가. 당연히 신룡대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흥미로웠다.
“동료가 왜 떠올랐는데요?”
“우리 조원들 중에 실력이 제일 뒤쳐지는 녀석이 있어. 그래서 조원들에게 늘 미안해하는 녀석이지. 별 도움도 안 되고 피해만 끼치는 것 같다면서 말이야.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데다가 마음도 여린 녀석이거든. 걔는 성격이 그래.”
그러자 한설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절대로 그분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그런 분이 그곳에서 버틸 수가 있어요? 그곳으로 하달되는 임무부터가 일단 쉽지 않을 테니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테고, 그러면 구성원들 모두가 확실한 분들이어야 할 것 같거든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간혹 부족하다 싶은 친구들도 있어. 조에 따라 성향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인품과 자질만 되면 되도록 키워 나가려는 쪽이거든.”
“아.”
왠지 단유소가 속해 있는 조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겪어온 단유소는 알면 알수록 배려가 깊고 심성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왠지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일 것 같았다. 유유상종이 괜한 말이 아니니까.
“녀석도 지금은 적응해서 잘 성장해가고 있지. 깜냥은 충분히 하면서. 어쨌거나 녀석도 종종 당신과 비슷한 심정을 내게 토로하곤 했어. 당신 얘기를 듣다 보니 왠지 그 녀석 생각이 났던 거고.”
연소운 얘기였다.
누이의 혼인 건으로 휴가를 냈었다고 들었는데, 녀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두 사람이 말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설연이 안주를 집어 주었다.
그러면서 한설연이 말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그 말에 단유소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여간 이 여자, 궁금한 게 참 많은 여자다.
그래도 오늘은 맞춰주자.
이런 여유, 언제 또 다시 누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술자리니까.
단유소가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한설연이 물었다.
“전에 귀쌍겸왕 이추와 패천혈극 두진 말이에요. 나 그때 정말로 마음 많이 졸였거든요. 누가 봐도 단 공자님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번쩍하고 나자 두 사람이 쓰러지고 있더군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간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고는 싶었는데 꾹 참았었다. 왠지 물어봐도 단유소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분위기도 분위기이고 하니, 왠지 은근슬쩍 물어봐도 대답을 해줄 것 같았다.
단유소가 어이없다는 미소를 보이며 되물었다.
“내가 스스로 내 밑천을 드러낼 것 같나?”
“쾌검술이겠죠? 그때 단 공자님은 두 노인의 공격이 몸에 닿기 직전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잖아요. 즉,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아도 단 공자님은 두 노인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던 거예요. 물론 필살기를 쓰기 위해 두 노인의 방심을 유도한 것도 있을 테고.”
“그렇게 알아서 결론을 내릴 거면서 질문은 왜 해?”
“나는 이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식이라.”
“주변 사람들이 피곤하겠군.”
단유소가 고개를 내저으며 또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한설연도 술잔을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초절정 고수 두 명을 한 번에 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강력한 내공과 함께 절기도 필요해요. 벼락이 치는 듯한 착시가 일어날 정도로 빠른 쾌검식이라면…….”
한설연의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뇌검신 만준.’
하지만 그는 몇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 뒤로 만준이 쓰던 쾌검식과 비슷한 쾌검식이 등장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었다. 소문도 없었다.
그렇기에 단유소가 쓴 쾌검식이 만준의 쾌검식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상대가 단유소니까.
잠시 속으로 고민하던 한설연이 결국 웃었다.
“헤헤. 기억이 날 듯 말 듯 안 나네요.”
단유소가 피식 웃어 보이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추와 싸울 때 말이에요. 그는 분명히 강기를 썼는데 단 공자님은 강기를 쓰지 않았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강기를 막을 수 있었던 거죠?”
그 말에 단유소가 술잔을 들었다. 한설연도 술잔을 들었고, 두 사람의 잔이 마주쳤다. 단유소는 또다시 한설연이 내미는 안주를 먹어야 했다.
“그런 거 알아내려고 안주 먹여주고 그러는 건 아니지?”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그러자 단유소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피곤한데 얼른 마시고 잠이나 자지.”
한설연의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쾌검술이야 나름대로 유추해볼 거리가 있었지만 단유소가 어떻게 맨 무기로 강기를 막아낸 건지는 도무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단서라도 좀 주면 안 돼요?”
한설연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단유소가 술을 한 잔 들이켜더니 대꾸했다.
“나도 강기 쓴 거야.”
“네에에?”
놀란 한설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
“단 공자님은 초절정 고수시니 당연히 강기를 쓰시겠죠. 하지만 제가 그때 확인하기로 단 공자님의 무기에는 강기가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