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조각배 (1)
‘와아……!’
도무지 놀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빠르게 달리며 부지런히 일행을 돕는 와중에도 한설연의 시선은 습관적으로 한 사람에게 향하곤 했다.
단유소였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한설연은 계속해서 감탄하는 중이었다.
‘뭐야, 저 사람……?’
지금의 그는 마치 전투의 신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지, 직접 목격하면서도 의아할 정도였다.
사실, 이전의 전투들을 보면서 그가 사형보다 강할 것이라는 결론은 이미 내렸었다. 다만 사부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사부는 명석한 두뇌로 유명하지만 무공도 고강했다. 강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고수였다. 괜히 사형과 자신 같은 제자들을 키워냈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짐작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둘 중에서 누가 더 높은 경지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실전에 있어서만큼은 단유소가 훨씬 강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단유소는 혈로를 뚫는 와중에도 종종 뒤쪽으로 검기를 날리곤 했다.
구홍립과 석문 그리고 자신이 열심히 일행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전에 마주쳤던 자들보다 지금의 흑의인들이 더 강한 데다가 숫자도 더 많았으니까.
그렇기에 일행 중 누군가는 세 사람이 돌볼 수 없는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단유소가 도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혈로를 뚫는 속도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다. 전방의 적들을 상대하면서도 연계 동작으로 이어지는 도중에 한 번씩 지원해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단유소의 그런 모습이 마음속에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의 강함에 대한 경외심과는 별개로.
‘저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힘들고 피곤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동료라도 더 살리기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저 모습이, 그 배려심이,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장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단유소의 움직임이 맹렬해지며 더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전방으로 나아가며 초승달 모양의 날카로운 기운들을 연신 쏟아내던 단유소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구홍립의 전음 때문이었다.
단유소가 즉시 대라유유선공을 극한까지 운용하며 호신강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이윽고 그가 전방을 향해 사선으로 도약했다.
그 상태에서 단유소가 빠르게 쌍소검을 털어냈다.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한 차례, 정점에 이르러서 한 차례 그리고 정점에서 내려오면서 한 차례.
총 세 차례에 걸쳐 그의 쌍소검이 검기를 쏟아내자 수십 가닥의 검기가 사선으로 쏟아졌다. 마치 검기의 비라도 내리는 듯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구홍립이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실력을 알게 된 후로 참 많이도 놀랐었다. 그렇기에 더 놀랄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 놀라고 있다.
아까, 쏟아지던 화살비를 삼분지 이 이상 막은 사람도 단유소였다. 이후에는 선봉에 서서 혈로를 뚫고 있다. 정신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내공도 보통 많이 소모된 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절기들을 계속해서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의 단전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도 된다는 건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런 의심이 들 정도였다.
착!
단유소가 땅바닥에 착지했다.
허공에 떠올랐던 이유는 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구홍립의 말마따나 두 개의 인영이 배에 올라 있었고, 배와 연결되어 나루터에 묶여 있는 끈을 누군가가 풀고 있었다.
단유소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전방을 향해 횡으로 쌍소검을 내질렀다.
초승달 모양의 검기 두 개가 시간 차를 두고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지면과 수평을 이룬 채로.
이전과 딱히 달라 보이지 않는 공격이었다.
오히려 검기가 날아가는 속도 자체는 그전보다 느린 느낌이었다.
뒤에 있던 구홍립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
슈아아아아악―
검기에 가속도가 붙는 듯하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흑의인들에게 날아가는 게 아닌가. 결국 흑의인들에게 닿기 직전의 순간속도는 이전의 공격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결국 검기에 닿은 흑의인들의 몸이 갈라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면에 있는 흑의인들을 가른 검기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적들을 관통하며 나아가는 게 아닌가. 그것도 처음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허……!”
결국 구홍립이 탄성을 토해낼 때쯤, 단유소는 검기가 관통하고 지나간 곳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시체들을 뛰어넘으며 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측면에서 공격해오는 적들을 향해 쉬지 않고 검기를 날리는 중이었다.
단유소가 또다시 초승달 모양의 검기를 전방으로 발출해내고 그 뒤를 빠르게 달려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덕분에 일행이 나아가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아직도 고민하는가?”
뒤에서 따라오던 구홍립이 낮은 음성으로 외쳤다.
검을 휘두르던 단유소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이어진 구홍립의 말에 단유소의 양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고민이 담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그러니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선택을 해야 한다고.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 상황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그 말은 사실, 백번 옳은 말이다.
무인으로 살면서 이런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럼에도 늘 고민하게 된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그 말로, 희망의 일정한 부분을 미리 포기하고 들어가는 건 아닌지에 대해. 자기 위안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닌지에 대해.
물론 잘 알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모두를 구하려 하는 건 욕심이자 오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국 모두를 구하려다가 누구도 구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무림의 구 누구도, 설령 전설 속의 무신(武神)이 온다 해도 이 상황에서 우리 모두를 구할 수는 없네. 지금까지만 해도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자네의 마음, 우리 모두가 잘 아네.”
검으로 다가오는 적 두세 명을 벤 후에 구홍립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 바보같이 굴지 말게.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게 일의 경중을 다시 설명하게 하지 말게.”
싸우며 달려가는 와중에도 구홍립은 단유소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구홍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배가 이미 나루터에서 떨어졌네. 시간이 너무 없어.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이전에 내가 했던 부탁을, 최선을 다해 들어주는 걸세.”
구홍립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이라뇨? 그 부탁이라는 게 설마…….”
한설연이었다. 그러자 구홍립이 답했다.
“그런 게 있습니다. 소공녀님께서는 모르셔도 됩니다.”
그러자 잠시 머뭇하던 한설연이 말했다.
“구 대주님, 저 바보 아니에요……. 이 상황에서 꺼낸 그 부탁이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가 모를 것 같나요?”
결코 탓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심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구홍립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신다니 잘되었군요. 예, 제 부탁은 단 공자에게 하는 부탁이기도 하지만 소공녀님께 하는 부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소공녀님께서는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럴 수는…….”
그러자 구홍립이 고개를 홱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 상황, 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단 공자라도 우리 모두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다 죽을까요? 정녕 그걸 원하십니까?”
“하,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여태껏 죽어간 우리 식구들, 모두가 소공녀님을 지키기 위해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한설연의 눈빛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또다시 두세 명의 적을 벤 후에 구홍립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다 죽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왕 다 죽게 된 마당이니 누군가라도 살리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다른 말씀 마십시오!”
기어이 한설연의 면사 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즈음 적을 베며 앞으로 빠르게 달리던 단유소가 구홍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곧 강변에 다다릅니다. 그러면 일행 모두 나루터 쪽으로 도약하라 하십시오. 나루터에 착지하면 바로 도움닫기를 한 후, 최대한 멀리 뛰어 강물 안으로 입수하라 하십시오. 이 상황에서는 그게 생존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이곳의 나루터는 강의 중심부 쪽으로 길게 돌출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니 강변에서 입수하는 것보다는 나루터에서 입수하는 게 탈출하기에 더 수월하다. 강의 중심부로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네, 기어이…….]
구홍립이 답답하다는 듯 전음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전방을 향해 강력한 검기를 발출해낸 단유소가 구홍립을 돌아보며 전음을 보냈다.
[대주님의 부탁,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분들에게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시 멈추더라도 대주님은 다른 분들과 함께 바로 입수하십시오. 한 소저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단유소의 눈빛이 또렷했다.
그가 이러는 건 구홍립을 포함한 모든 일행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설연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래야 그녀 또한 마음속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 테니까. 헤어지는 마당에, 조금이라도.
물론 물속으로 뛰어든다고 해서 이들이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적들도 준비했던 배를 띄우던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차후의 일.
무인들이라면 일반인보다 훨씬 오래 잠수할 수 있고 헤엄도 빨리 칠 수 있으니, 그 점에라도 희망을 걸어보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보다 높은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결국 구홍립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보겠네.]
그렇게 대꾸한 구홍립이 일행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후로는 모두 내가 하는 대로 똑같이 하며 내 뒤를 따른다!”
적진을 뚫고 강변에 이르렀을 즈음 단유소가 구홍립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나루터에 서 있는 적들의 느낌이 심상치 않습니다. 제가 먼저 그들을 처리하겠습니다. 곧 그쪽으로 도약할 테니, 제가 뒤돌아보면 그때 제 발밑으로 장력을 한 번만 날려주십시오. 강하게. 그 후에는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곧바로 나루터의 끝 쪽으로 향하시면 됩니다.]
대충 단유소의 의도는 알 것 같은데 과연 그래도 되나 싶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상황.
결국 그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구홍립이 대꾸한 순간, 단유소가 빠르게 서너 차례 회전하며 전방과 좌우측을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벽이 허물어지듯 주변에 있던 적들이 우수수 쓰러지며 드디어 강물이 보였다. 단유소가 그곳으로 나아가자 일행이 지체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강변에 이른 단유소가 강을 등진 채로 주변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일행을 엄호하기 위해서였다.
구홍립은 조바심이 났다.
배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일행을 보호하려 하기보다 빨리 한설연을 데리고 탈출해야 할 때였다. 각오가 대단하기에 믿어줬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곧 일행 모두가 강변에 모였다. 그러자마자 단유소가 강변을 따라 나루터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달리는 와중에도 단유소는 계속해서 강변의 적들을 향해 초승달 모양의 검기를 날렸다.
그러던 한순간.
파앗!
단유소가 불룩 솟아 있는 돌부리를 밟으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도약한 그의 신형이 나루터를 향해 날았다.
그 와중에 단유소가 몸을 웅크리며 쌍소검을 종아리 옆의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후부터 도약하여 쌍소검을 넣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찰나간에 이루어졌다.
나루터 위에 있던 적들이 반응한 건 그 즈음이었다. 그들이 단유소를 향해 검기를 떨쳐내었다.
슈슈슈슈슉―
십수 가닥의 검기가 단유소라는 한 점을 향해 모이며 날아들었다.
검기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여태껏 상대해왔던 흑의인들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른 고수들이었다. 일전에 홍의 청년과 함께 왔던 갈색 무복 차림의 적들이 제법 강력했는데, 이들의 수준이 그자들과 엇비슷해 보였다.
허공을 날던 단유소가 양손바닥을 펴서 한데 모았다.
곧 그의 양손바닥에서 장력이 발출되었다.
슈웅―
뒤따르던 구홍립 등의 눈이 부릅떠졌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나루터 쪽으로 날아가는 그 장력은 구체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