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탈출 (2)
구홍립의 뒤를 따라 습관적으로 경공을 펼치고는 있었지만, 한설연의 뇌리에는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일행은 지금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러 가는 꼴이었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애초에 곡을 나선 것 자체가 잘못이었나?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이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정도로?
그나마 남아 있는 일행이라고 해봐야 스무 명 정도였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 중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울고 싶었다.
불안감만이 가득했다.
저 멀리로 보이는 핏빛 노을이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별안간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때였다.
퍼러러러럭―
갑자기 측면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올라 일행의 선두에 착지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뒷모습.
단유소였다.
그는 착지하자마자 일행을 돌아보지도 않고 선두에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달렸다.
이상했다.
분명히 울고 싶었고 불안했고 포기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그런 마음이 점점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세차게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니, 상념으로 가득했던 머리도 조금씩 냉정을 찾아갔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봐야 해.’
일행은 금세 산자락에 다다랐다.
바로 아래가 평지였고, 그 너머가 강줄기였다.
선두에서 달리던 단유소가 몸을 낮추며 한 팔을 수평으로 뻗자 일행도 몸을 낮추며 걸음을 멈췄다.
“우리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적이 매복하고 있습니다.”
단유소의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홍립, 한설연 그리고 은월조장 석문이었다.
“지금이 마지막 휴식이 될 겁니다. 뒤에서 추격해오고 있는 적들과 약간의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그들은 길어봐야 일각도 안 되어 이곳에 당도할 겁니다. 그러니 휴식 시간은 반각 정도입니다. 그동안 모두 육포 등을 충분히 섭취하고 수분을 보충하라 하십시오. 그리고…….”
“화공을 쓰는 게 좋겠어요.”
단유소의 말을 끊으며 나선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단유소의 앞이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음성을 변조하지도 말을 중간에 늘어뜨리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단유소의 눈동자에 이채가 담겼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변화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유소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한설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원래 자신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도 화섭자나 점화석을 있는 대로 동원하자는 내용이었다.
화공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늦가을이기에 자잘한 나무들과 마른 풀들이 지척에 널려 있었고 마침 산 위에서 바람이 불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설연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과연……! 그게 좋겠군요.”
구홍립이 무릎을 치며 대꾸하자 석문이 말했다.
“일단 제가 가서 지시하고 오겠습니다.”
석문이 무인들 쪽으로 사라지자 구홍립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위에서 보아하니 나루터에 배가 한 척 있었네. 배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배이긴 한데…….”
단유소와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야 서너 명 정도가 탈 수 있을 법한 조각배였다.
“아마도 적의 수뇌부가 이용하려고 준비해둔 배일 겁니다.”
“그 배를 노려보는 건 어떻겠나?”
그렇게 묻는 구홍립의 눈빛이 결연했다.
단유소는 구홍립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일행은 약 스무 명.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서너 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홍립이 그 배를 노리고자 하는 건 결국, 목숨을 걸어서라도 한설연과 자신을 그 배에 태우겠다는 뜻이었다. 구홍립 본인은 상황을 봐서 함께 타든지, 적을 막든지 하겠다는 뜻이고.
“일리 있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그러려면 적진의 중앙을 돌파해야 합니다.”
“화공이 성공하면 적들은 혼란에 빠질 걸세. 그 상황에서 자네가 빠르게 혈로를 뚫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어찌어찌 돌파를 했다손 치더라도 이미 적들이 배를 띄운 후라면 그때부터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겁니다. 결국 시간 싸움입니다. 화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기도 하고요.”
“알고 있네. 도박이긴 하지. 그러나 강을 건너지 못하면 어차피 저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도 없네. 적들의 천라지망 안에서 결국 우리가 먼저 지쳐 쓰러지게 될 게야. 아무리 강변을 따라 달려도 인근에 배는 없을 걸세. 저렇게 치밀한 자들이 인근 강변에 다른 배를 남겨뒀을 리가 없잖은가.”
맞는 말이긴 했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홍립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헤엄쳐서 건널 수도 없네. 저들은 그 경우에도 분명히 대비를 해뒀을 게야.”
단유소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강폭은 넓었다. 일반인이라면 헤엄쳐서 건널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수준 이상의 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가능한 거리였다.
구홍립의 말마따나 적들은 그 상황에 대한 대비도 해뒀을 것이다. 시야에 확인되는 배는 더 이상 없지만 상류의 어딘가에서 배를 띄워놓고 대기 중일 가능성이 컸다. 헤엄쳐서 강을 건너기 전에 그 배들이 먼저 도착할 것이다.
구홍립이 말했다.
“어차피 답이 정해진 문제는 아니지. 나 또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네. 그러나 때때로 도박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네. 이렇듯 다른 선택지가 없다시피 한 경우에는 더더욱.”
단유소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불확실한 요소들이 너무 많으니 결단을 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할 사람은 자넬세.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네뿐이네. 그러니 결정도 자네가 내리게.”
“하, 하오나 저는…….”
단유소가 놀라며 그렇게 반응하자 이번에는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어떻게 되든, 결코 단 공자님을 탓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제 뜻도 구 대주님의 뜻과 같고요.”
그녀의 말에 단유소가 눈을 감았다. 그가 그 상태로 말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일행이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후로 반각이 지났을 때.
이제는 땅거미가 진 산자락의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작은 불빛들이 보이기를 잠시, 불길은 이내 바람을 타고 거세어졌다.
불길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번져갔다.
“화공은 성공적인 것 같군.”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는 장검 대신 양손에 두 자루의 소검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제 뒤를 바짝 따르셔야 합니다.”
구홍립과 한설연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단유소가 땅을 박찼다. 그러자 일행들 전원이 신속하게 그 뒤를 쫓았다.
단유소는 빠르게 번져가는 불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어느 시점이 되자 불길의 뒤쪽으로 수많은 인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흑의를 입은 자들이었다.
창검에 찔려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던 자들이 지금은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그들에게 걸려 있는 강력한 정신금제도 이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불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쓴 화공이지만 그로 인해 드러난 광경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불에 타 죽은 시체들이 가득했고 일대에는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일행의 움직임도 슬슬 바빠졌다.
불길이 닿지 않은 공간을 이용해 흑의인들이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온몸에 불을 뒤집어쓴 상태에서 공격해오는 자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위협이 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때때로 두세 방향에서 적이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구홍립과 석문이 적절히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식으로 빠르게 나아가길 잠시.
단유소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일행에게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화살 공격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새까만 점들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일행이 나아가고자 하는 전방, 즉 강변 쪽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전방의 우측과 좌측에서도.
그 즈음 단유소는 이미 쏟아지는 화살비를 향해 도약한 상태였다.
소검을 든 그의 양손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격렬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구홍립과 석문이 좌측 전방과 우측 전방을 맡았다.
티디디디디디디딩!
수많은 화살들이 세 사람의 검에 의해 튕겨 나갔다.
“커윽!”
“큭!”
뒤쪽에서 들린 신음에 구홍립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 명은 화살이 가슴에 박힌 채 쓰러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화살이 박힌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바닥에 착지하여 단유소의 뒤를 따라 달리는 와중에 구홍립이 외쳤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 쳐내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다! 적과 싸워도 최대한 단 공자의 뒤쪽에 붙어서 싸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단유소가 외쳤다.
“또다시 화살 공격입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단유소가 또다시 도약했고 구홍립과 석문도 이어서 도약했다. 이전처럼 화살을 쳐내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앞서서 구홍립이 주의를 줬기 때문인지 다행히 이번 화살 공격에 당한 아군은 없었다.
오히려 근처에 있던 흑의인들이 화살에 맞고 수십 명씩 쓰러져 나갔다.
지독한 자들이라며 혀를 내둘러야 정상이겠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하들의 몸을 터트려서 독공을 가하는 자들에게 이런 것쯤 대수롭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충분히 이러고도 남을 자들이니까.
이후로도 계속해서 화살비가 쏟아졌고, 그로 인해 일행이 나아가는 속도도 더뎌져만 갔다.
갈대밭에 이른 불길은 그야말로 집채라도 태울 듯 거대해졌다. 어마어마한 불길이 순식간에 갈대밭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자 갈대밭 너머의 모습이 한눈에 드러났다.
흑의인들이 새까맣게 강변의 모래사장을 메우고 있었다. 예상했던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아마도 불길이 번지는 것을 보고 뒤쪽으로 물러난 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화살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진 만큼 화살이 날아오는 각도도 매우 완만해져, 거의 직사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하는 중이었다.
단유소, 구홍립, 석문 등이 달리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화살을 쳐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인원은 이제 열 명 남짓이었다. 앞선 세 사람이 열심히 화살을 쳐냈지만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한 번씩 새어 나간 화살들에 당한 것이다.
구홍립의 이마와 콧잔등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다. 석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검으로 화살을 쳐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수백 발의 화살을 쳐낸 만큼 지치는 게 당연했다.
반면 단유소의 움직임은 처음과 차이가 없었다.
‘대체 그는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구홍립이 혀를 내둘렀다. 그런 만큼 단유소에 대한 믿음도 더 커져 갔다.
이윽고 거리가 완전히 가까워지자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흑의인들이 일제히 일행들을 향해 달려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스러울 정도의 숫자였다.
결국 일행과 적들이 마주쳤다.
단유소가 빠르게 양손을 움직였다.
이전에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처럼 이화접목을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쌍소검에서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기운들이 발출되는 중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신속하게 길을 뚫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강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단유소의 신형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구홍립과 석문조차도 단유소의 움직임을 정확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단유소의 앞을 막아서는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예외 없이.
구홍립과 석문도 단유소를 보조하며 부지런히 적을 쓰러트리는 중이었다. 세 사람을 지나친 적들은 남은 일행들이 처치했다.
모두가 결연했다. 마치 생의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렇듯 일행이 정신없이 싸우며 나아갈 때였다.
쉴 새 없이 적을 상대하고 있는 단유소의 귓전으로 구홍립의 다급한 전음이 흘러들었다.
[배가……! 배가 떠나려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