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의문의 청년 (2)
검집에 검을 넣은 단유소가 허리를 숙여 자신의 양쪽 종아리 옆을 더듬었다.
그 순간, 흑의인 한 명이 단유소에게 달려들었다.
그 공격을 시작으로 적들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뒤쪽에서는 허공으로 도약하여 단유소를 공격해오는 자들도 있었다.
빠르게 허리를 편 단유소는 양손에 한 자루씩 소검(小劍)을 들었다. 똑같은 모양의 검들로, 한 자가 약간 넘는 길이었다.
색깔이 특이했다. 대체 무슨 재질의 금속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묵색(墨色)이었다.
그 즈음에는 이미 몇 자루의 창검들이 단유소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단유소의 몸이 흔들리며 잔상을 남겼다.
스륵― 스릉― 스르르릉―
단유소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광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묘한 소리가 흘렀다.
쇠붙이가 마주치는 소리라기보다는 마찰하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흑의인들이 뭔가에 찔리거나 베여서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몸에 서로의 무기가 꽂힌 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흑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단유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동료의 몸에 무기를 찔러 넣거나, 동료의 무기에 몸이 찔리며 계속해서 쓰러져 나갔다.
흑의인들이 더 맹렬하게 단유소에게 달려들수록 그들이 쓰러져 나가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단유소의 신형은 마치 춤추듯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갈수록 빨라지는 중이었다.
그가 양손에 들고 있는 소검들은 적들의 무기와 절대로 강하게 부딪히지 않았다. 단지 쏟아지는 무기들을 누르거나 튕겨내며 진행 방향만 바꾸고 있을 뿐이었다.
단유소에게 달려들던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모두 쓰러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더 이상 서 있는 적이 남지 않았을 때 단유소가 두 자루의 소검을 제자리에 꽂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행이 근처까지 다가온 것이다.
챙!
단유소가 다시금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이제는 그들을 도우러 갈 차례였다.
그쪽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던 단유소가 갑자기 홱 돌아섰다. 어느새 그의 시선이 이십 보 밖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낮은 가지 위로 향해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음을 음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가지 위에서 나무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 있는 자였다.
이윽고 그쪽에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대단한데?”
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단유소가 그 방향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후 단유소 쪽으로 걸어왔다.
정면에서 드러난 얼굴을 보니 실제로도 서른 전후로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희고 갸름한 얼굴.
외모만 따지면 상당한 미남이었다. 특히 옆으로 쭉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옆으로 찢어진 눈매 때문인지 그 미소가 사악하게 느껴졌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보고 있었을까?
아무리 흑의인들과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도 그의 존재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고수가 마음먹고 기척을 죽이고자 하면 알아채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눈앞의 청년이 그 정도로 고수라는 뜻이니까.
그가 대단하다고 했던 건 아마도, 자신이 늦게나마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걸어오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단하던데?”
대단하다는 말만 두 번째였다. 아마도 이번에 대단하다고 한 건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두고 한 말이리라.
그 즈음, 상대가 약 열 걸음 앞에 멈춰 섰다.
청년은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은 채로 단유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 자세, 기세 할 것 없이 모든 면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반면에 단유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청년을 응시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 달랐다.
‘적어도 두 명이 더 있다……!’
기운이 느껴졌다. 청년이 처음 앉아 있던 그 큰 나무보다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아마도 청년의 조력자들일 것이다.
정확히 그들의 경지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그들 또한 여태껏 자신의 감각에 잡히지 않은 자들이었다. 수준 이상의 고수들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그 두 명뿐인지도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로 준비했을 줄이야.
그제야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 중에 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러자 청년이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아까 마지막에 그 무공 뭐야? 정말 깜짝 놀랐거든.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 이화접목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쓸 수 있는 거지? 완전 예술이던데?”
그의 말대로 이화접목의 수법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이화접목과는 달랐다.
보법과 체술을 극한으로 이용하여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수법으로, 사부가 창안한 무공이었다.
상승 고수라면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내공 소모였다. 부드러움과 조화의 묘리를 담고 있는 대라유유선공이 바탕이 되어야만 내공 소모를 확연히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강호가 재밌어. 특히 정파 사람들은 더 재밌어. 예상 밖의 강자들이 예상치 못한 대단한 무공들을 들고 어디에선가 꼭 튀어나오거든.”
청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번만 해도 그래. 이쪽에 당신 같은 고수가 끼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거든. 당신, 누구야? 현월곡 쪽은 아닌 것 같고. 무림맹이야?”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뭐, 무림맹이겠지. 역시 무림맹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그러자 단유소가 흑의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흑의인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무슨 짓은 무슨 짓? 죽인 건 당신이라고.”
“원래 말귀를 못 알아듣는 편인가?”
“푸하하하하하!”
단유소의 말에 청년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좋아, 좋아! 재미있어! 당신, 아주 마음에 들어!”
단유소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청년을 바라볼 때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충실한 부하들이라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자들이고.”
가장 약한 자들이 일이류급 무사들이라고?
보아하니 청년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을 때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만약 이 위기를 넘긴다 해도 앞으로 만날 흑의인들은 더 강한 자들이라는 뜻이니까.
단유소가 물었다.
“당신들, 정체가 뭔가.”
“그쪽 입장에서는 불온한 무리들이지. 강호 전복 세력이자 척살해야 할 사악한 악당들일 거고. 어차피 무림맹과 정파에 해를 끼치려 하는 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그쪽 아닌가?”
청년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비아냥대는 투였고 가시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어차피 쉽사리 답을 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결과도 역시였다.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우리를 노리는 목적은 뭔가.”
“빤하잖아? 당신들 중에 천하제일미 말고 볼 게 뭐 있어?”
“어쩌려고?”
“나야 모르지. 윗선에서 까라니 까는 거야. 당신도 무림맹에 있으니 잘 알지? 조직이 다 그렇다는 거. 그런데 방금 당신에게도 흥미가 생겼어. 그래서 둘만 살려서 데려가려고.”
단유소가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건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저들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사소한 것들도 정보가 될 수 있었다. 그 내용들을 전하면 맹에서 알아서 정보를 취합할 것이다. 그런 의도였다.
청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정보 수집에 약간은 도움이 된 거지?”
역시 상대도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단유소가 그렇게 대꾸할 즈음, 뒤쪽에서 일행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구홍립과 한설연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분명히 전방에서 파악된 기척은 훨씬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려드는 숫자가 확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는 아까 느껴졌던 전방의 그 많은 기척들이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다.
지휘부의 세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은 최익뿐이었다. 그로서는 대충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 더 공격해오지 않는 걸까요? 함정일까요?”
한설연이 구홍립과 최익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최익이 대꾸했다.
“함정이었으면 처음부터 매복을 하고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겁니다. 굳이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난 지금에 와서 이럴 필요가…….”
맞는 말이었기에 구홍립과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익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마냥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뒤에서는 여전히 적이 추격해 오고 있고, 이 시체들이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회로도 없는 마당이니 계속 나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려면 만약의 사태에 주의하되, 최대한 빨리 나아가야 합니다.”
그 말에도 한설연과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홍립이 뒤쪽에 집합해 있는 일행을 향해 낮게 외쳤다.
“상황 끝! 적과 조우하기 전까지 최대한의 속도로 다시 달린다! 이동!”
그 말에 일행이 일제히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인원은 이제 사십 명도 되지 않았다.
다시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 한설연 일행은 또 멈춰야 했다.
“헛! 일단 정지!”
선두에서 달리던 구홍립의 목소리였다.
한설연과 최익이 빠르게 구홍립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에 두 사람도 눈을 부릅떴다.
얼핏 봐도 백 명이 훌쩍 넘는 흑의인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먼 어둠 속으로 두 사람이 보였다.
아직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 많은 흑의인들을 쓰러뜨린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적은 아니라는 뜻이니 일행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후방에서 추격하고 있는 수많은 기척들이 뚜렷하게 감지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조력자가 있다면 협력해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가가면서 보니 정면으로 얼굴이 확인되는 자는 처음 보는 자였다. 젊은이였다.
그리고 그와 마주 서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일행에게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왠지 익숙한 뒷모습이었기에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 뒷모습의 주인공이 연상된 순간, 그녀의 눈이 더 커다란 놀람을 담아갔다.
‘단유소……!’
뒷모습의 주인공이 단유소라는 건 알겠는데 그 외의 다른 모든 상황들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유소가 저곳에 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가 저곳에 있단 말인가?
그녀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여어! 어서들 오십시오!”
단유소와 마주 서 있는 청년이었다.
마치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그는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친근감이 가득했다.
‘단유소 저 사람의 지인인가?’
확실치는 않으나 지금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단유소가 이 많은 흑의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으니까.
한설연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오지 마십시오!”
다급한 외침의 주인공은 단유소였다.
그러자 그와 마주하고 있던 청년이 미소 띤 표정으로 단유소에게 말했다.
“왜 그래? 그 유명한 천하제일미 좀 보자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유소의 외침이 다시 한번 들렸다.
“모두 산개해서 탈출하십시오! 지금 즉시!”
그러자 청년이 씩 웃으며 단유소에게 말했다.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말을 마친 청년이 두 손가락을 입술에 대더니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익― 휙!
단유소의 눈동자가 커졌다.
여태껏 청년의 뒤쪽에서 감지된 기척은 두 개였다. 설령 더 있다 해도 한두 명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런데 청년의 휘파람 소리에 반응하여 움직인 기척은 다섯 개였다.
쉬쉬쉬쉬쉭―
그 다섯 명이 경공을 펼치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코 구홍립보다 아래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청년과 단유소가 있는 지점을 살짝 우회하여 일행을 향해 신법을 펼치고 있었다.
어느새 일행과 가까워진 후방의 적들도 문제였지만 저들이 더 문제였다. 일행은 결코 저 다섯 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결코 등을 보여서는 안 되는 상대와 마주하고 있다.
고민은 잠시였다.
어차피 답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단유소가 이를 악물었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