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5화 (15/200)

15화. 파신폭멸공 (2)

“파신폭멸공(破身爆滅功)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어요. 거기에 독공을 응용한 거죠. 잔인하고 사이하기 이를 데 없어, 오래 전부터 금지된 수법이에요. 물론 증거가 하나도 남지 않아서 확실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요.”

야영지로 귀환하는 도중에 한설연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모습이었다.

한설연의 양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최익과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해박함이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더욱 대견한 건 지금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의연한 모습들이었다. 오늘 하루 충격을 많이 받았을 텐데,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해내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에.

“지독한 자들이군요.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최익이 그렇게 대꾸하자 구홍립이 말했다.

“사실, 최 대협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그때 대협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면 이보다는 훨씬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 말을 듣던 한설연이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책의 한숨이었다.

구홍립의 말이 맞다. 결과론적으로 따지면 단유소 그 사람의 말을 듣는 편이 옳았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차피 결과론일 뿐입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운이 없었던 겁니다. 게다가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 의견도 아니었고요.”

최익이 그렇게 대꾸했다. 한설연과 구홍립의 심정을 생각해서 최대한 좋게 말해준 것이다.

“일단 야영지에 도착하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해야 할 듯합니다. 아울러 흩어져 있는 모든 일행들을 일단 불러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일까지 겪은 이상, 최대한 뭉쳐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구홍립의 말에 한설연과 최익이 고개를 끄덕인 가운데, 세 사람의 신형이 야영지를 향해 쭉쭉 나아갔다.

* * *

모든 일행이 한설연의 야영지 근처로 모였다.

한설연이 야영하는 곳을 본진으로 하여 외곽에 수행원들의 야영지를 배치했다. 그들의 야영지는 본진에서 걸어서 일각 정도의 거리 안에 있게 했다.

걸어서 일각이면 경신술을 펼쳤을 때에는 순식간이었다. 즉각 대처가 가능한 거리였다.

또한 정찰조와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적습을 받았었다는 사실도 모두에게 공개되었다.

그 부분에서 최익과 구홍립의 입장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감춘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게 한설연의 주장이었다.

“어차피 금방 밝혀질 일을 감춰 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밖에 안 돼요. 이런 식이면 누가 우리를 믿고 따르겠어요. 게다가 이건 도리의 문제이기도 해요. 전사자들에게나, 참전했던 생존자들에게나,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나. 이미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아직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사실, 아까의 일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결국 그녀의 뜻이 관철되었다.

의외로 일행 전체의 분위기는 크게 술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설연의 말마따나 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던 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르고 있던 자들이라고 해봐야 현월곡 측의 후발대로 짐마차를 끌고 오던 자들 십여 명에, 비마대 쪽의 인원들 네 명 정도였으니까.

한설연이 머무르고 있는 야영지 주변은 조용했다.

그녀를 지키는 무인들은 오십 보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한설연의 야영지에는 작은 천막 하나가 보이는 가운데, 그 앞에 작은 모닥불이 밝혀져 있었다.

모닥불 앞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설연, 구홍립 그리고 최익이었다.

세 사람은 대책을 상의하는 중이었다.

“오늘 우리가 입은 피해는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 보고에 따르면 전력의 반 이상을 잃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연락이 두절된 정찰조까지 포함하면 전력 손실은 더 커질 겁니다.”

구홍립의 말이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상황 보고를 이어갔다.

“우리는 여태껏 먼 길을 왔고, 목적지인 청해 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남아 있는 전력들이 모두 최정예들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채 안타까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최익과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홍립이 계속 말했다.

“크게 두 가지의 선택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이대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되돌아가느냐. 물론 어느 경우든, 일단 우리는 임시로 몸을 의탁할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재정비가 필요하니까요.”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최익이 말했다.

“일단 되돌아간다면 섬서겠지요. 이곳을 기준으로 봤을 때 화산은 너무 멀고, 종남산이나 서안이 되겠군요. 둘 다 여기에서는 방향과 거리가 비슷하지요.”

종남산에는 종남파가 있고 서안에는 무림맹 섬서지부가 있다. 일행이 안전하게 의탁할 만한 곳이었다.

최익이 말을 이었다.

“둘 중에 고르라면 괜히 종남파에 신세를 지기보다는 무림맹 섬서지부 쪽이 나을 겁니다. 본맹에서 지침이 내려온 것도 있으니 도움을 받기도 편하고, 이미 무림맹도 관여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에 의해 천망단원들도 죽었다. 그러니 이제는 무림맹도 어쩔 수 없이 진상을 조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최익의 말은 그 뜻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면 일단 이곳 감숙에서 재정비를 해야 할 겁니다. 감숙에는 공동파와 무림맹 감숙지부가 있지요. 아시다시피 공동파가 있는 공동산은 감숙의 최남단이자 사천과의 경계 지역에 있습니다. 무림맹 감숙지부는 감숙의 성도인 난주에 있지요.”

한설연과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곳 모두 이곳에서의 직선거리는 비슷합니다. 실제 거리가 약간 더 가까운 곳은 공동산입니다. 청해에 있는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생각해도 공동산으로 향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긴 합니다. 물론 실제적인 이동 거리로만 따졌을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익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모닥불 주변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돌아가야 하는가.

각각의 경우마다 일단 일행이 의탁해야 할 곳은 어디로 정해야 하는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위기를 겪었고 다수의 희생자가 생겼다. 그게 불과 한 시진도 안 된 일이었다. 게다가 남은 일행의 목숨까지 걸린 문제였다.

모두가 고심하던 중에 구홍립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지, 아니면 곡으로 되돌아갈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일입니다. 의탁할 곳을 선택하는 건 그 후의 일이 되겠지요. 결정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소공녀님.”

구홍립의 말에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구 대주님. 그런데 솔직히……,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렵네요. 그래서 두 분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어요.”

그러자 구홍립이 말했다.

“소공녀님의 심정, 이해합니다. 힘든 선택이겠지요. 그러나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선택에 따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어떤 경우라도 저는 소공녀님의 결정을 따를 겁니다. 그 결정을 정답에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것이 제가 할 일이니까요.”

그러자 최익도 입을 열었다.

“제 뜻 또한 구 대주님과 비슷합니다. 적어도 맹에서 다른 지침이 내려오기 전까지, 저와 천망단원들의 임무는 최선을 다해 두 분을 돕는 겁니다. 어려운 선택을 한 소저에게만 떠넘기는 모양새여서 송구합니다만, 결정은 제게 주어진 권한 밖의 일입니다.”

구홍립이나 최익 모두, 결국 결정권자는 한설연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매우 힘든 결정이겠지만, 그게 바로 결정권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이기도 했다.

한설연이라고 해서 두 사람의 말뜻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남은 두 사람도 침묵했다.

이번 침묵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바람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시간이 반각 넘게 흘렀다.

그러던 한순간 한설연의 눈빛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태껏 우리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다는 낌새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인적 없는 산지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죠.”

구홍립과 최익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방식을 써가면서까지 증거를 인멸했어요. 그들과 싸워봤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그들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노렸어요. 체계적인 계획하에 움직였다는 뜻이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몰래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맞는 말이었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는 천마신교나 사흑련의 방식은 아니었어요. 물론 아직 확신할 수는 없죠. 그들의 짓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암중 세력의 짓일 수도 있어요. 분명한 건, 이 평화로웠던 강호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일 거예요.”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수긍의 눈빛을 보내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월곡이 추구하는 가치는 우리의 지식으로 강호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에요. 일신의 안위만을 챙기고자 함이 결코 아니죠. 물론 희생당한 사람들 생각에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딱 한 번 위기를 겪었다고 해서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먼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자 진지한 눈빛으로 한설연을 바라보던 구홍립이 말했다.

“결정을 내리셨군요.”

“예. 왠지 이 일에 사형이 연관되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어요. 게다가 청해가 목전에 있어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대로 돌아가기는 싫어요. 물론 그 과정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가장 안전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하려고 해요.”

“안전할 수 있는 방식이라시면…….”

구홍립의 말에 한설연이 최익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림맹과의 공조예요. 최 대협도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겪으셨으니, 무림맹 쪽에는 대협께서 힘을 좀 써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여태껏 무림맹의 책임자로서 우리와 함께해주신 최 대협께서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주셨으면 해요.”

그러자 최익이 대꾸했다.

“저를 이토록 높게 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 두 분과 계속 함께하고 싶습니다. 다만 저와 천망단은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속한 몸인지라 상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상부에서 허락하시면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최 대협.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저도 무림맹 쪽에 부탁을 해볼게요.”

최익이 고개를 끄덕일 때 구홍립이 말했다.

“그러면 경유지를 결정해야겠군요. 무림맹 감숙지부와 공동파 중에서 한 곳을 택해야 합니다. 생각해 둔 곳이 있으신지요?”

“둘 중에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실제 거리가 공동파가 더 가깝다고 하시니 그쪽이 되겠죠. 그쪽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서 더 가깝기도 하고요. 무림맹과는 그곳에서도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까요.”

한설연이 그렇게 정리했다.

그러자 구홍립이 말했다.

“오늘은 일단 경계를 철저히 하며 이곳에서 묵고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혹시 공동산으로 향하는 경로 중에 지름길 같은 게 있는지, 좀 더 안전한 경로가 있는지, 최 대협께서 그 비마대원에게 한번 물어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 *

“지름길은 있을 수 있지만, 안전한 경로 같은 건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지휘부의 회의가 끝나자마자 최익이 단유소를 찾았다.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경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단유소가 한 말이었다.

“그들은 정확히 이 일행을 노렸습니다. 아까 보셨겠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교월인지, 아니면 우리 일행을 섬멸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짓까지 벌일 자들이라면 절대로 그냥 이렇게 끝내지 않을 겁니다.”

단유소가 이어서 그렇게 말하자 최익의 양 눈썹 사이가 급격하게 좁아졌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네만,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 여기는가?”

최익이 묻자 단유소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섬서로 돌아가든 공동파로 가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대협께서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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