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파신폭멸공 (1)
최익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단유소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놀라웠고, 그가 말한 내용은 더 놀라웠다.
놀람도 잠시, 최익이 곧바로 외쳤다.
“모두 이곳을 이탈하시오! 지금 즉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하지만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구홍립마저도 그랬다. 왜 저러나 싶은 표정으로 최익을 바라보기만 했다.
“빨리 이탈하란 말이오! 빨리, 빨리!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최익이 음성에 내공까지 실어서 악을 썼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제야 일행이 하나둘씩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최익도 바람이 부는 방향을 찾아 신법을 펼쳤다.
그러길 잠시 후.
퍽! 퍼억! 퍼버버버버버벅!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흑의인들의 시체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최익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적의 시체뿐만이 아니었다.
세 포로의 몸마저도 터지려는지 이상 징후를 보였다.
터지기 직전에 최익과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섬뜩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강호에서 경험깨나 쌓아왔지만 이런 광경을 겪기는 처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체들이 터져 나간 자리에서 일견하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붉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진한 붉은색 안개가 순식간에 일대를 뒤덮었다.
최익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 다급한 순간에도 단유소가 왜 굳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피하라고 했는지.
‘앗! 그러고 보니……!’
최익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 단유소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가 금세 찾기를 단념했다.
이 상황에서 그를 굳이 찾아다니려 애쓰는 모양새도 이상할 것 같았다.
‘하긴, 자신을 드러내려 했다면 내게 전음을 보낼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소리쳤겠지.’
그러는 사이, 일행이 하나둘씩 최익 근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위험을 면하게 해준 사람이 최익이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한설연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구홍립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그녀의 커다래진 눈은 본래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최익의 곁에 도착해서도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시체가 터지다니.
생포했던 포로의 몸까지 터지다니.
소름이 끼쳤다. 파르르 떨리는 몸도, 쿵쾅거리는 마음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최 대협,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구홍립의 심정이 어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절정 고수인 그 또한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익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구홍립이 경외감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대체 어떻게 눈치채신 겁니까?”
“저도 문득 떠올랐을 뿐입니다. 예전에 공부했던 사이한 술법 중에 비슷한 경우가 있었던 것 같아서요. 왠지 느낌이 안 좋아서…….”
단유소의 전음을 듣고 그대로 전한 것뿐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구홍립이 말했다.
“최 대협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나저나 다 빠져나왔습니까? 혹여 그러지 못한 인원이라도…….”
최익의 물음에 구홍립이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대꾸했다.
“아직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몇 명은 못 빠져나온 듯합니다.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지금 조사 중입니다.”
“후우우…….”
최익도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불며 붉은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그러자 시체들이 폭발했던 지역의 광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안력을 돋워 그곳을 살피던 최익과 구홍립의 눈동자가 또다시 휘둥그레졌다.
안개가 걷힌 후 예상대로 참혹한 광경이 나타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정도에서 끝났을 테니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두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검붉은 땅만 보였다.
시체도 없었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조차 없었다. 풀 한 포기, 작은 나뭇가지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창촉이나 도신, 검신으로 추정되는 쇠붙이들뿐이었다. 그것들조차도 검붉은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죽은 땅이었다.
만약 저 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지독한…….”
“대체 누가 이런…….”
구홍립과 최익이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 즈음, 월혼대원 한 명이 다가왔다.
“보고드립니다. 방금 전의 시체 폭발로 인한 사상자는 아홉 명입니다. 다친 자들도 모두 사망했습니다. 월혼대에서 여섯 명, 천망단에서는…….”
보고를 하던 월혼대원이 말을 멈추고 최익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최익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머지는 천망단원이겠지. 비월단은 외곽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으니 다 피했을 테고.”
월혼대원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혼대의 피해가 더 많은 것은 두 단체의 수준 차이라기보다 월혼대가 인원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최익이 구홍립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에서 이렇게 있는 건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어차피 포로들도 죽었고 시체도 없습니다. 여기에 있어도 조사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언제 또다시 위험이 닥칠지 모릅니다. 본진으로 돌아가서 무인들을 쉬게 하고 우리는 대책을 논의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 * *
저 멀리 비마대의 야영지가 보였다.
아직까지 모닥불은 끄지 않은 상태였다. 불빛에 비친 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필과 두 천망단원이었다.
“헉, 허억, 허억…….”
그제야 단유소가 호흡을 추슬렀다.
전방의 일이 정리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최고의 속도로 달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들이 무사한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호흡을 추스른 단유소가 야영지로 들어서자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필이 앉은 채로 물었다.
“단 형,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예요?”
“저녁을 잘못 먹었나 봐. 속이 좀 안 좋아서…….”
단유소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대꾸하자 오필이 웃으며 말했다.
“푸흐흐! 고생 좀 하셨나 보네. 아닌 게 아니라 맥없어 보여요.”
“몇 번을 쏟아냈는지 모르겠다, 야.”
단유소가 힘없는 척 웃어 보이자 오필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만 얘기해요! 더러워서 원. 어쨌거나 두 무사님과 이 무사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 말에 단유소가 두의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러자 두의광이 책망하는 표정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부에서 모닥불 끄고 대기하라 했는데 당신 때문에 여태껏 지시도 어겨야 했잖소.”
혹시라도 단유소가 길을 헤매다가 못 찾아올까 봐 아직 모닥불을 끄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나름대로 마음을 써준 것이다.
“송구합니다.”
“당신은 본맹에서 파견 나왔다가 괜히 투입된 사람이고 하니 내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본인도 짜증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 개인 행동은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소. 혹여 당신이 없었을 때 출발 지시가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소? 우린 뭐가 되겠소? 적어도 단체에 피해가 가지는 않도록 해주시오.”
괜한 꼬투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두의광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최소한 비상식적인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소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무사님. 주의하겠습니다.”
두의광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오필에게 말했다.
“이제 모닥불도 끄지. 그리고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잠시라도 눈을 붙여놓는 게 좋을 게야.”
“예.”
두의광과 이태가 잠자리로 이동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오필이 주변에 준비해뒀던 흙으로 모닥불을 덮었다. 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단유소와 오필의 침낭은 모닥불 주변에 있었다. 참고로 무사들이 대충 봇짐을 베고 피풍의(避風衣) 등을 덮고 자는데 반해 비마대원인 단유소와 오필은 침낭을 이용할 수 있었다.
마차를 모는 비마대원의 특권이었다. 짐마차에 침낭 두 개 더 싣는다고 해서 말다리가 휘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침낭을 쓸 수 있는 것도 마차를 이용할 수 있을 때에 한해서였다.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 가며 오필이 속삭였다.
“탓하는 말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제가 옆에서 보니까 무사님들도 걱정하는 눈치더라고요.”
다정한 오필의 마음 씀씀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단유소도 침낭 안으로 몸을 넣으며 대꾸했다.
“알지. 내가 감사하지.”
“어쨌건 단 형도 눈 좀 붙여요. 나도 좀 자둬야겠어요.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는 모양이니까.”
“그래, 쉬어라.”
대답은 그렇게 해줬지만 어차피 이들은 곧 일어나야 할 것이다.
예기치 못한 위기를 겪었으니 본진에서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테니까.
스으으으―
사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혹시라도 더 큰 위험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 고도로 집중하여 주변의 기척을 확인했었다. 만약 강한 적이 있다면 비밀리에 처치할 심산으로.
아닌 게 아니라 몇 개의 기척이 감각의 영역에 잡혔다. 자신도 겨우 알아챘을 정도로 매우 은밀한 기척들이었다.
적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실제로 그들의 근처까지 조용히 이동했다. 상황 발생 시 즉각 대응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가만히 전장을 주시하기만 할 뿐 결국 나서지 않았다. 의아했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그들은 동시에 멀찍이 물러났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밀하게 뒤를 밟아보니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한설연 쪽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정도였다.
그들의 뒤를 더 캐려다가 그만두었다.
첫 번째 이유는 오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주변을 철저하게 확인한 후에 출발했지만 그 후에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또 모를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왠지 적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워 보였다. 마치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일행 중 누군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느낌이랄까.
‘만약 그들이 누군가를 보호하려 한다면 당연히 한설연이겠고.’
그렇다면 현월곡주가 자신의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몰래 파견한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한설연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은 더 확인을 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문제는 적이었다.
누가 봐도 그들은 우연히 한설연 일행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간에, 이 인적 없는 산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의도했다는 뜻이다.
이 일행을 노리고.
자신이 파악한 그 흑의인들의 무공은 대부분 이류에, 일류 고수가 간혹 끼어 있는 수준이었다. 의도적으로 노린 것치고는 어정쩡한 전력이었다. 일행을 완전히 압도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는데, 결국은 그 의심이 맞아 들어갔다. 시체가 폭발하며 아까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똑같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실전에서 비슷한 경우를 겪어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귀폭사황(鬼爆邪皇)이라는 사파의 고수를 상대할 때였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시체들이 폭발하는 바람에 조원들이 큰 위기에 처했었다.
당시에 순간적으로 검막을 펼쳤는데, 혼원태극공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물론 그 경우에는 시체들의 폭발력이 더 강했지만 이번처럼 독안개가 생기지는 않았었다.
그때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까처럼 최익에게 말해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별이 스치는 가운데 단유소의 눈동자가 어둠보다 더 깊어졌다.
‘아무리 봐도 이번 임무, 느낌이 너무 안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