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8장 (189/199)

 # 188

188.

오른쪽 눈썹이 괴이하게도 온통 하얗게 된, 그래서 별호가 백미마군이라고 붙게 된 황태가 반가운 낯으로 반겼다. 누군가가 그를 멀리서 본다면 한쪽 눈썹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이르러 바라보면 그의 하얀 눈썹은 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거기엔 고집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고 나는 세상과는 다르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 보였다.

“하하하, 잘 지냈나?”

악풍은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워낙 신중하게 생각하고 들어온 까닭에 어색한 기운이 안면 근육들 사이에서 뻗어 나왔고 기묘한 마음의 변화가 눈빛에 조금 투영되었다.

천재적인 감성을 지닌 황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만무했다.

“으음… 문제가 있군, 문제가 있어.”

그는 약간은 과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의자에 앉아 탁자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문제가 있단 말씀이야.”

악풍은 친구가 편하게 대해주자 조금 어색함이 누그러졌다. 왠지 친구를 의심한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하, 이 친구,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무슨 소린가.”

“세상천지에 수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 황 나으리를 속일 순 없지. 아무렴. 자,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지 속 시원하게 털어놔 보게나. 우리 사이에 하지 못할 이야기가 뭐가 있냔 말이네.”

그때 하인 하나가 차를 내와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하인이 나간 후 황태는 오른발을 세 번 굴렸다. 그리 크거나 작지 않은 적당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랑방의 문들이 위에서 내려오거나 옆에서 닫히든지 자동으로 철커덕거리며 잠겼다.

악풍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벌써 소문이 난 것인가? 이런 제길.’

하지만 황태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자, 이제 우리 둘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해보자구. 그래, 자네의 고민거리가 뭔가. 우리 사이에 빙빙 돌려서 이야기할 게 뭐가 있겠나.”

황태는 말은 편하게 했지만 이번 방문은 심각한 문제라 짐작했다. 악풍은 성격이 꼼꼼한 사람이었다. 섣불리 원수를 맺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즉, 괜히 하릴없이 긴장된 표정 따위를 짓지는 않는 것이다.

“여자라도 생긴 거야? 아니면 어떤 추하게 생긴 여자가 지겹게 따라다니는데 너무 무공이 강해 떼놓을 수가 없는 건가? 어때, 이야기 좀 해보라구. 그것도 아니라면 혈곡 내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그럼 까짓 혈곡을 나오면 그만 아닌가. 자네가 숨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떤 놈이 겁없이 이곳을 찾아오겠나? 정 안 된다면 나와 함께 여기에서 지내면 되지. 그놈들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이곳에서 설치진 못할 테니 말이야.”

그의 말은 정감이 가득 배어 있어 절로 악풍은 긴장이 풀렸다. 악풍은 친구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자네, 예전부터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었지?”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하는데도 황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실실거렸다. 그것이 불안해하는, 무언가에 쫓기는 친구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근데 가지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잖는가?”

“놀라지 말게.”

약간 뜸을 들인 후 악풍이 말을 이었다.

“…천보갑이 내게 있네.”

천보갑이라는 단어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심각하면 얼마나 심각하겠냐는 투로 응대하던 황태의 얼굴이 악풍보다 더 심각해졌다.

“저, 정말인가? 정말 천보갑이란 말인가?”

과거부터 황태는 천보갑을 얻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에게 있어 천보갑 내부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의 호기심은 천보갑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그 어떤 강력한 비급이라 할지라도 그에겐 보잘것없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그의 보물은 천보갑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신기한 물건을 좋아했지만 그중의 으뜸은 단연 천보갑이었다. 천보갑에 대한 전설은 어쩌면 전설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용의 가죽을 얻어 백 년을 특수하게 연단하고, 한 번 잠그면 누구라도 절대 열 수 없는 것이 바로 천보갑이라고 했다.

‘만약에 천보갑이 사실이라면 난 도전해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천선부의 소유였다. 그는 천보갑에 대한 열망이 들끓어도 구걸하듯 천보갑을 구경할 수 있겠냐고 말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전혀 뜻밖에도 친구가 천보갑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친구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따져 가며 ‘당장 돌려주고 오게나’ 따위의 말을 할 백미마군이 아니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분명 그저 해보는 말이 아닐 것이다. 이건 진짜다!’

황태가 악풍을 또렷이 바라보자 악풍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굳이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네. 그래도 되겠지?”

황태가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하지만 어쨌든 난 자네 말대로 혈곡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네. 내 남은 인생에 있어 희망은 오로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란 말이네.”

“그럼 당연히 금환신공이겠군?”

황태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을 발했다.

“그렇지.”

“좋아, 그럼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네. 나는 천보갑을 갖고 자넨 금환신공을 갖는다.””그래.”

“일단 천보갑을 보기 전에 두 가지만 약속한다면 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보겠네. 하지만 자네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게. 난 자네를 보지 못한 것으로 할 테니까 말일세.”

“들어봄세.”

황태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첫째, 자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진심으로 나는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든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네. 금환신공이 아니라 금환신공보다 백배 뛰어난 비급이 있어도 중요하지 않단 말일세. 하지만 안에 있는 것이 보잘것없다고 해도 내게 천보갑을 넘기라는 거네. 지킬 수 있겠나?”

그건 원래부터 마음먹고 있던 것이라 어려울 것이 없었다.

“좋아.”

“두 번째는 천보갑을 열고 나서의 일이네. 자네와 나는 서로를 믿어야만 해. 이 문제는 간단하질 않아. 자네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막상 금환신공을 보게 된다면 필시 나를 해하려 들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써야만 해’라고 말이네. 자칫 우리 두 사람은 죽거나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단 말이지. 아무리 천보갑이 대단하고 금환신공이 천하제일 신공이라 알려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명이 붙어 있을 때의 일이지 않겠나.”

이미 황태는 악풍의 몸에 피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원인에서든 천보갑을 얻기 위해 살인을 자행했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렇기에 미리 모든 것을 터놓고 약속을 받아놓고자 함이었다.

“이것만 지켜준다면 난 당장에 천보갑을 여는 데 힘을 기울이겠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냥 지금 이곳을 떠나게. 그리고 나중에 따로 천보갑을 열어 무공을 익힌 후 편하게 예전처럼 내게로 오면 되네.”

황태의 진지한 말에 악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황태는 전지전능이었다.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피해를 입는 건 자신일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 주는 듯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약속하겠네.”

“좋아.”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의기를 다졌다.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약속을 맺었다. 믿음은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알아두게.”

“……?”

“나는 내가 열 수 있다는 보장은 못해. 그러니 자넨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좋을 거네.”

첫날은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는 셈치고 두 사람은 가볍게 환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틀째가 되어 황태는 본격적으로 천보갑을 여는 데 힘을 쏟았다.

황태는 전문적인 작업이 필요할 때는 늘 백마동(白魔洞)을 이용했다. 그곳은 매우 은밀하고 수많은 기관 장치가 손끝 하나로 조종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설치된 곳이었다.

천보갑을 여는 문제에 있어 황태는 홀로 백마동에 들어가려 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후 악풍과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비급을 빼돌린다든지 혹은 몰래 천보갑을 들고 또 다른 출구로 도망칠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 것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는 악풍과 함께 백마동에 있는 다섯 군데 연구실 중 연혼실(鍊魂室)로 들어갔다. 악풍으로서도 이곳 백마동은 처음 들어가는 곳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동혈을 살피니 좌우, 그리고 천장 쪽으로 야명주가 알알이 박혀 있었는데 악풍은 그저 신비로움에 빠져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혼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온갖 잡다한 기구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탁자 위에 천보갑을 내려놓은 후 드디어 연구는 시작되었다.

연혼실 내부에는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단지 식사만은 직접 해 먹을 수 없는 까닭에 황태의 유일한 제자인 구세경이 식사를 날라주었다.

구세경은 이제 23살의 나이로 고아로 떠돌다가 우연히 백미마군 황태의 눈에 띄어 제자로 받아들여진 터였다. 구세경의 얼굴은 순박한 청년의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그 얼굴 사이사이로 고집스러움이 조금씩 표출되곤 했다. 황태가 구세경을 거둬들인 데는 뛰어난 자질과 마음에 자리한 고집스러움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그가 강호를 눈 아래 내려다보듯이 자신의 제자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랬다. 세상에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자네 제자에겐 말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나?”

악풍으로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천보갑에 대해 모르길 바랬다. 아는 순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이 천보갑이었다.

“허허, 걱정 말게. 그 녀석은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 헛된 마음 따윈 품질 않는다네.”

워낙에 자신있게 말하는지라 악풍은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긴 천보갑이 워낙 대단한 것이니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침입자가 없으란 법도 없겠지. 그런 점에서 알려주는 것도 방비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구세경은 하루 세 끼 식사를 배달한 후에는 늘 백마동 부근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경계를 섰다. 만약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미리부터 진을 발동시켜야 했다.

천보갑을 열기 위해 노력하며 닷새째가 되었다.

그날도 황태와 악풍은 온 신경을 기울여 천보갑을 여는 데 열중했다.

“뭔가 될 듯 말 듯하면서 자꾸만 튕겨져 나오는군.”

황태로서는 수만 가지 기법을 통해 천보갑을 열어보려 했지만 그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것이 전설 속의 용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마 이것을 열 수 있는 것도 용의 몸에서 나온 것일 거네. 참 난해하군.”

말만 들어보면 거의 포기할 것처럼 보였지만 황태의 손놀림은 더욱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이 천보갑이 죽은 오비원의 넷째 아들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했던가?”

황태의 물음에 악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론 확실하네.”

“그렇다면 그에게 열쇠가 있는 것이 확실하겠군.”

“그렇지. 하지만 곤륜산 부근에 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네.”

“훗, 그럴 바에야 내 한 달간 심혈을 기울이는 게 낫겠지.”

황태는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보폭이라든지 발소리로 미루어보아 구세경이 확실했다.

‘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나?’

두 사람은 가끔 너무 푹 빠져 있어 늘 일도 하지 않고 밥만 먹는 것 같았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다.”

굳게 닫힌 철문은 위로 창살이 있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밀면 젖혀지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그곳으로 두 개의 식판을 밀어 넣었다. 연구에 몰두할 때 두 사람은 철문을 굳게 닫아놓았는데 밖에서는 열 수 없고 안에서 열고 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터였다.

“수고랄 게 있겠습니까? 두 분의 노고에 비하자면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태는 오늘따라 유독 제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생각했다. 그런 판에 박힌 겸양의 말은 그가 제일 싫어하던 것이 아니던가.

“그래, 어서 가보도록 해라.”

“네, 사부님도 안녕히 가십시오.”

느닷없는 궤변에 황태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황태는 황급히 철문을 열기 위해 벽의 모서리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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