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
“그래, 맞아! 화골산…….”
하지만 그가 화골산의 ‘산’ 자를 내뱉을 땐 이미 그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천보갑을 녹일 수 있을진 몰라도 순식간에 비급도 사라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천보갑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답답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생각을.
그러다 문득 이런 상황이 그는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천보갑을 마구 짓밟았다. 마구 모욕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만 같았다. 마음껏 밟아준 다음 그는 다시 멍하니 자리에 앉아 빈 공간만을 주시했다. 그러다 그의 머리에 문득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가 떠올린 건 두 가지였다.
물과 불.
‘그래, 물에 담가보는 거야. 그래도 안 되면 달궈보는 거지.’
어떤 것은 물에 약한 성질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윗옷을 벗기는 데는 맹렬한 바람이 아니라 따사로이 비치는 햇살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것처럼 천보갑을 여는 데는 느긋하게 물에 담그고서 기다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전혀 천보갑이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만약 용의 껍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또 만일 그것이 안 된다면 불에 넣어도 봐야 했다. 아직 그에겐 두 가지의 희망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의 눈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는 등산객이 다니지 않을 만한 시내로 이동해 그곳에 천보갑을 집어넣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고 그의 배는 약간의 출출함을 느꼈기에 그는 품에서 마른 고기를 꺼내 입 안에 우겨 넣고 초조함을 달래며 지켜봤다.
고작 일 식경(30분) 정도가 지날 시간이 되었고 마른 고기를 세 번 꺼내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에겐 서너 달 정도가 지난 것같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시간이 늦게 간단 말인가. 어서 빨리 어둠이 임하고 새벽이 오고 다시 해가 솟기를 바랬다. 그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물에 담가둘 생각이었다. 왠지 중도에 건져 내면 부정 탈 것만 같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왕 하는 거 조금은 완벽을 기하고 싶었다.
그는 쪼그리고 앉았던 발을 편하게 하고 앉았다가 다시 쪼그렸다가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고 아침을 맞았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희망이 있고 기대를 품고 맞은 아침인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혹시 부정이라도 타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살그머니 천보갑을 건져 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잡는 순간, 즉 물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헛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제길…….”
뭔가 말랑거리긴커녕 도리어 딱딱해져 있었다. 금강불괴를 이룬 고수가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 버려 이젠 까마득히 높아져 버린 기분이었다. 정말 제길이었다.
아침 일찍 실망을 안겨준 천보갑에게 악풍은 불맛을 보여주었다. 마른나무를 모아 불을 지핀 악풍은 돼지를 잡아 꼬챙이에 끼워 굽듯 천보갑을 구웠다.
화르륵 타오를까 봐 그는 철저히 감시하는 눈빛으로 천보갑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세 시진(6시간)가량을 연속해서 나뭇가지를 모아다 달구었지만 천보갑은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벌겋게 달구어진다든지 혹은 틈이 조금 벌어진다든지 타는 냄새가 난다든지 하는 따위의 변화는 없었다.
그는 너무나 화가나 불을 사방 군데로 발로 차버렸다. 천보갑도 땅바닥에 맥없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그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에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널브러진 불씨들이 다 꺼져 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입술을 조금 움찔거리면서 무슨 말을 내뱉었다.
“…….”
그것은 너무도 희미해 잘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백미마군…….”
기관학의 대가이자 절친한 친구인 백미마군 황태의 이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세상에 그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천보갑을 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장 절친한 친구인 황태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수하들을 죽였을 때 그들은 모두 의아해했고 분노했었다.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황태가 암수를 쓰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졌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도 그들처럼 죽어갈지도…….’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또다시 모험을 해보는 수밖에.
악풍이 발걸음을 백미마군에게 돌리게 될 즈음 혈곡에서 파견된 추적자들은 소혼미랑의 흔적을 찾아냈고 죽은 귀영대의 흔적도 찾아냈다. 그들은 놀랍게도 악풍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추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제11장 석태산의 백미정
천보갑을 얻게 되면 세상은 새롭게 바뀌고
천지개벽이라도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비쳤고
저녁 황혼은 그 자태가 여전했다.
먹는 음식은 그대로였으며 숨 쉬기가 편해진 것도
결코 아니었다.
이런 젠장.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았더란 말이다.
- 황태를 만나기 전 석양 앞에 선 악풍
***
악풍이 이른 곳은 청해성과 감숙성의 경계에 자리한 석태산이었다. 그곳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는, 즉 천보갑을 여는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백미마군 황태.
만일 그조차 열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백미마군 황태마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게 된다면 악풍은 중원의 어느 은밀한 곳에 숨어 이젠 장식품의 하나가 되어버린 천보갑을 장식용 탁자에 올려놓고 하루 종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솔직히 말해 너무도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천보갑을 수중에 넣기 위해 죽인 소혼미랑과 스무 명의 귀영대원들의 원혼이 날마다 두렵게 느껴질 것이고 혈곡을 배반했던 것을 -늘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기에-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부디 어떻게든 황태는 천보갑을 열어주어야만 했다.
‘자넬 믿어보는 수밖에.’
백미마군 황태라고 하면 강호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신중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름이었다. 그는 기관학의 대가임과 동시에 서, 예, 화, 기 등 잡학에 능했다. 흔히 다재다능, 박학다식한 자라고 할 때 그는 첫손에 꼽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는 가히 천재라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천재인고로 보통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은둔자적 성향과 폐쇄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극도로 세상을 혐오해 강호를 드나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예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절친한 친구가 세 명이나 있었고 재능이 넘치는 젊은 제자를 두었으며 그가 머무는 백미정에는 다섯 명의 충실한 하인들이 있었다. 그는 이 정도에 만족했다.
악풍은 그 절친한 세 친구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단연코 악풍을 포함한 네 명의 친구는 혈육의 정을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깝다고 할 만했다. 서로에겐 어떤 비밀도 없었고 어떤 어려움도 발 벗고 나서줄 만했으며 수천의 적군을 맞설 때 함께 칼을 들어줄 친구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정확히는 천보갑을 수중에 넣은 후- 악풍에게 ‘정말 그러한가?’라고 묻는다면 악풍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소혼미랑이 10년 가까이 살을 맞대고 살았던 남편 맹공효를 살해한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제자나 다름없는 스무 명의 부하들을 죽인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천보갑 앞에서 세상의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맹공효가 죽을 때 느꼈을 그 허망함과 배신감을, 귀영대가 자신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성을 터뜨렸던 그 신음 소리를 이젠 자신이 느끼고 내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차례로 따지자면 세 번째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결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황태가 세상의 은둔자로서 무공 비급을 ‘그까짓 것들’이라고 말해 왔다 할지라도 방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황태는 악풍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적어도 악풍은 황태 같은 고수가 세 명 정도쯤은 동시에 맞서야만 평수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악풍은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그의 거처인 백미정 밖에서의 경우일 뿐 백미정 내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기관학의 대가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백미정 내부는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다고 봐야 했다.
건축물의 작은 장식 하나에까지 천재의 손길이 닿아 있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것이다. 아니, 거기에서 자라는 나무와 꽃, 심지어 먼지 한 톨까지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했다.
한마디로 백미정 내부에서 황태는 천하무적이라 할 만했다. 악풍이 은근히 두려워하는 데는 그저 노파심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삼 년 전의 일이었다. 1년에 한 차례씩 네 친구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침입자가 있었고 그들의 끔찍스런 죽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장풍이나 몸을 움직이는 따위의 공격이 아니었다. 그가 살짝 발을 구르거나 벽의 어느 지점을 누르는 것만으로 살상 무기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졌고 진세가 발동했으며 그 진 안에서는 처참한 죽음이 임했다.
어찌 보면 황태를 찾은 것은 도박이며 모험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말이다.
그나마 악풍이 조금 안심을 하는 부분은 천보갑에 대한 열정도 열정이지만 황태가 지난날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난 말야, 천보갑에 어떤 것이 들어 있어도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어. 아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겠지만 그런 것들은 내겐 아무 중요한 문제도 아니란 말이네. 오직 내 관심사는 ‘천보갑’일 뿐이지. 하지만 오해는 마. 껍질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보갑에 해당하는 것이지, 과일 껍질이나 고기 껍질 같은 것을 좋아하진 않으니까 말야. 알겠나? 하하하하!”
황태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로부터 간섭받는 걸 싫어했기에 다른 사람의 삶에도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연구해 보고 싶었던 천보갑에 대한 것도 마음뿐 천선부에 찾아가 요구하거나 뺏어올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가져다 준다면, 그것이 더 더욱 세 친구 중 한 명이라면 그는 기꺼이 하늘의 뜻으로 간주하고 기쁘게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악풍이 기대하는 것은 그가 말한 대로 천보갑에만 오로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점인 것이다.
악풍은 석태산의 동북쪽에 위치한 가파른 숲길을 지나 운무가 자욱한 곳을 뚫고 백미정 앞에 이르렀다. 눈앞에 평범한 숲길이 나타났지만 그는 이것이 화혼난심진(華混亂心陣)의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진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은 정상적으로 발길을 옮겨 전진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결국 백미정을 빙 둘러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에게 석태산에는 백미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풍은 진의 생문을 찾아 서서히 진행했다. 진을 지날 때는 미세한 차이가 큰 오차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황태가 알려준 방법을 떠올리며 한 발 한 발 진행해 갔다.
그렇게 중간 정도를 지났을 때 악풍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과연 내가 제대로 판단한 것일까? 황태를 믿을 수 있냔 말이다.’
그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마저 신뢰가 무너진 상태였기에 좀체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은가. 제길.’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고 갈등했지만 진을 지나면서, 진이 더욱 훌륭하다는 것을 느껴가면서 그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화혼난심진의 생문을 복잡한 과정을 거쳐 통과하자 익히 잘 알고 있는 하인 둘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생문을 거쳐 왔다 해도 고도의 능력을 지닌 침입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경고가 울리도록 장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보라색 복장에 비슷한 체형, 그리고 40대 초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악풍은 언제나 볼 때마다 쌍둥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쌍둥이가 아닌 쌍둥이 하인들은 상대가 악풍인 것을 알아보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악 나으리께서 오셨군요. 주인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렇게 말하고 한 명은 쏜살같이 소식을 전하러 갔고 또 한 명은 악풍보다 한 걸음 앞선 곁에서 조심스럽게 그를 인도했다. 먼저 간 하인의 방향으로 보건대 황태는 필시 연무장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알고 있기로 황태는 제자를 가르치는 데 꽤나 정열적이었다.
사랑채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태가 들어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란 말인가. 이 먼 길까지 어찌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