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
“하하, 어떤 점이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갈호가 웃으면서 물었고 다시 그 백의인이 말했다.
“그저 머리에 떠오르기론 냉엄함 속에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들이 연상되었습니다만 지금의 모습들은 참으로 의외입니다. 이런 모양새를 꾸미신 것은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 말에는 무요가 답했다.
“이런 부분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안 되는 것이지만 두 분의 인상이 워낙 좋으시니 왠지 숨겨서는 안 될 것 같군요. 사실 지금 청막에서는 짧은 기간을 정해놓고 살기를 감추는 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다 보면 아무리 살기를 숨기려 해도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기운을 뿜어내게 되기에 자연과 일치하는 걸인의 삶을 통해 해소코자 함이지요.”
대충 둘러대는 말이긴 했지만 실제 이런 내용들은 무요의 깨닫고 느낀 바도 적지 않게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 중년 백의인들은 충분히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있던 왼쪽에 앉은 백의인이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개방으로 착각하겠습니다그려. 하하, 물론 지금의 개방은 이런 모습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렇지요.”
제갈호와 무요가 맞장구를 쳤고 백의인이 다시 말했다.
“하하… 아실지 모르겠소이다만 자칫 잘못하다간 요즘 개방을 사칭하는 진개방으로 오인될 가능성도 있겠소이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진개방이라는 말에 제갈호와 무요의 얼굴이 찰나적으로 꿈틀했다.
아직 강호에 진개방이 알려졌다고 보긴 힘들었는데 그다지 특이한 점이 없는 이들 두 중년인이 진개방을 거론했다는 점은 매우 뜻밖이었다. 하지만 제갈호와 무요는 상대방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아직 잘 모르는지라 얼른 안색을 바로하고 태연하게 물었다.
“진개방이라는 곳도 있습니까?”
다행히 중년의 백의인들은 제갈호와 무요의 짧은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듯싶었다.
“사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말씀드린 진개방과 관련이 있답니다. 아직 강호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진개방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지요.”
“진개방이라… 진짜 거지들의 모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이름도 특이하군요. 그런데 진짜 거지들과 살인청부와 무슨 관련이 있소이까?”
제갈호가 너스레를 떨며 은근슬쩍 묻자 오른쪽에 앉은 백의인이 방문의 목적을 뚜렷이 밝혔다.
“그렇소이다. 우리는 개방인이 아니지만 현 개방의 노위군 방주님과는 친분이 있지요. 얼마 전에 노 방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히 힘들어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원인은 진개방이라는 곳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개방이라고 외치며 무리들을 규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정도를 걷는 개방을 사칭하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진소림사라는 것이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진무당파라던지…….”
제갈호와 무요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노 방주께 왜 가만있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거대 방파인 개방에서 그런 조그만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강호인들로부터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단지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디다. 하지만 그 뒤에 소식을 듣자 하니 진개방은 소수의 무리지만 사실 무공이 뛰어나고 대수롭게 넘길 무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개방의 노방주님 모르게 청막으로 찾아온 것이지요. 그분께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이렇게라도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답니다. 사이비 무리들을 굳이 드러내 놓고 죽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개방의 방주를 청막에 의뢰하여 없애고자 함입니다.”
사실 이 말은 제갈호와 무요의 입장에서는 입을 뜨악하고 벌릴 만한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뒤로 돌아서 ‘허거걱’ 소리를 내지르고 다시 정면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으음… 진개방의 방주라…….”
제갈호는 괜히 진지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리는 부산하게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란 말인가? 개방? 천선부? 혈곡? 당가가 진개방의 분타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일까? 지금 개방의 정보력은 형편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건만… 어떻게 한담… 방주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까.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는 알아본 후에 보고를 드려야 할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던 제갈호는 일단 능파와 능혼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듯싶습니다. 두 분께서도 청막에서 청부를 받지 않는 부류에 대한 규칙을 알고 계시겠지요? 큰 걸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윗분들께 문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갈호가 나가는 모습을 보며 두 백의인은 약간 언짢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드러내 놀고 표시를 내진 않았다.
제갈호가 능파와 능혼에게로 들어갈 때 두 사람은 대머리에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을 패고 있는 중이었다.
퍼퍽퍼퍽!
“으억, 왜 그러시는 거예요… 살… 어억……!”
왜 그러냐고 물어도 살려달라고 해도… 잘못했다고 해도 능파와 능혼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패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제갈호가 안으로 들어왔지만 힐끔 쳐다보고 손 한번 흔들어주는 것이 고작일 뿐 계속 패는 데만 열중했다.
퍼퍼퍼퍽… 퍼퍼퍽……!
귀퉁이에 몰려 온몸을 움츠리고 얻어맞고 있는 대머리 중년인은 온갖 비명을 지르다가 간신히 한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앞으로… 으억… 다시는 청부하지 않을게요… 으게……!”
능파와 능혼의 손과 발이 비로소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고 녀석, 진즉에 그리 말할 것이지.”
“또 이런 짓 하면 아예 목을 분질러 놓을 테다!”
한마디로 무대포 작전이었다. 대게 이럴 경우엔 ‘청부하지 않겠다고 말해! 어서∼’라고 다그치면 못 이기는 척하며 그러겠다고 하는 것이 상식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능파와 능혼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우선 패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운 좋게 그 말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때리지 않으니 맞는 이로서는 무의식적으로 청부를 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마음 깊이 각인시키는 또 다른 획기적인 방법이랄 수도 있었다.
대머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가자 능혼이 벌줌하게 선 제갈호를 보고 물었다.
“자갈… 무슨 일이냐?”
자갈이란 과거 불귀도에서, 지금은 걸인도가 되었지만, 처음 자갈이라고 불린 후 일행 속에서 기분 좋을 때면 이름보다는 자갈이라 불리게 된 제갈호의 별명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제갈호는 두 사람에게 아까 두 백의인에 대해 들었던 것과 추측되는 바를 설명했다. 능파의 눈에 퍼릇퍼릇 살기가 돋아났다.
“뭣이 어쩌고 어째! 이런 싸가지 없는 놈들을 봤나. 내 이 자식들의 껍질을 벗겨 버려야겠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지존의 목을 청부했다는 사실은 능파와 능혼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둘 중 그래도 침착한 능혼이 능파를 만류하며 말했다.
“형님, 먼저 그놈들의 정체가 무엇이며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후에 묻어도 늦진 않을 테니까요.”
막무가내인 능파도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좋다. 먼저 그놈들을 제압하고서 밤에 고문하도록 하자. 일단 지존께는 비밀로 하고.”
이미 시간은 꽤나 흘러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어차피 오늘 모든 사람들을 다 해결할 순 없어 내일까지 이어져야 할 형편이었다. 약 천 명 정도 되는 인원에서 그나마 절반가량인 오백여 명이 돌아간 것만도 대단한 것이라 할만 했다.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는 4조의 전각을 나와 3조의 전각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무요가 어색하지 않게 두 백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두 문 장로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두 백의인들이 여유로운 자세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려 할 때 능파와 능혼이 주먹을 뻗어 턱을 강타해 버렸다. 무공 초식이고 뭣이고 없었다.
퍽! 퍽!
“으억∼.”
“컥……!”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탁자에 튕겨 나동그라진 두 사람의 혼혈을 제압한 능파가 무요에게 말했다.
“이놈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일단 처박아두어라. 조금 후 자세히 손을 봐줄 테니 말이다.”
다행히 각 전각마다에는 지하 밀실들이 갖춰져 있는지라 무요는 뒤쪽으로 가 바닥을 들추었다. 거기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고, 제갈호와 무요가 곧바로 한 사람씩 들고 아래로 옮겨놓았다.
“자식들, 호랑이 굴로 찾아와서 호랑이를 어떻게 잡는 게 좋겠냐고 물어보면 호랑이가 그냥 멍청하게 있을 줄 알았나 보지?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퉤∼.”
능파가 두 백의인이 지하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침을 바닥에 뱉었고 능혼과 함께 4조의 전각으로 향했다.
사실 이 두 백의인은 개방 방주 노위군의 직속 친위대인 십이밀 중 두 사람이었다. 콧수염이 난 자의 이름은 수여막이었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공초환이었다. 이들은 노위군의 명을 받들어 청막의 힘을 빌려 강호에 소문나지 않게 표영을 제거할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었는데, 그만 재수가 없으려니 표영이 먼저 와서 청막을 접수한 후에 오게 되어 결국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제12장 절정의 고문술
밤이 되었다.
그동안 살인을 요청하러 왔던 천여 명 중에 대충 절반가량이 청부에 대한 마음을 접고 돌아갔고 이제 그 절반만이 남게 되었다. 표영은 이들도 어차피 마음을 모두 돌이켜 각기 집으로 보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좋은 잠자리를 제공해 주도록 힘썼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에게 그전 청막의 살수들이 거했던 처소에서 편히 밤을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청막의 살수들이 잠잘 곳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표영의 명을 따라 두 달 전부터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보내는 훈련을 한 터라 별달리 서운하거나 아쉬운 마음 같은 것은 갖지 않았다.
표영은 대략 상황을 정리하고 다른 날보다 일찍 잠들었다.
1조에 배치된 사람들, 약 백여 사람의 사연을 들으면서 새로운 마음가짐과 깨달음을 느낀 탓이었다. 무언가를 깨닫고 마음으로 담아둔다는 것은 크게 심력을 쏟게 되는 것이기에 그것이 몸과 마음에 온전히 체득되느라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다른 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너무도 많은 손님들이 찾아온 것인데다가 그들을 통제하고 살피는 것으로도 피곤함을 느낀 살수들 역시 깊은 잠에 빠졌다.
실제 무공을 익힌다든지 수련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 생각되겠으나 실제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사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부대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당당히 깨어 모종의 의욕을 불태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서 속히 깊은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능파와 능혼, 그리고 제갈호와 무요, 지문환이었다.
2조의 전각 밑에 위치한 지하밀실은 과거부터 고문실로 사용되고 있었던 터라 방음이 매우 훌륭하게 되어 있어 고문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여러모로 백의를 걸치고 나타난 개방의 두 밀사인 수여막과 공초환은 재수가 없는 셈이었다.
지하 밀실의 일렁이는 횃불에 나타난 능파와 능혼의 얼굴은 분노의 마지막 선을 넘어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리한 칼날이 잠잠히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기에 제갈호는 물론이거니와 지문환과 무요는 뒤쪽에 떨어져 일단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능파와 능혼은 이미 어떤 방법으로 고문을 할 것인지 서로 이야기가 된 듯 바닥에 아무렇게나 혼절해 있는 두 사람의 혼혈을 풀어주었다.
“으으윽…….”
“으음…….”
깊이 잠들었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수여막과 공초환은 눈을 비비며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살폈다. 아까 얻어맞은 턱에서 얼얼한 느낌이 전해지자 비로소 그들은 후닥닥 일어나려 했다.
“왜 우리에게 이러는… 훕…….”
수여막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능파와 능혼은 두 사람의 아혈을 찍어버려 소리 내지 못하게 했고 이어 연달아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허리 쪽으로 손을 빠르게 움직여 기가 운행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