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7장 (12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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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제3장 혈곡의 방문

“곡함 님이 오셨습니다.”

아무런 불빛도 밝히지 않은 어둠 속 방주의 처소. 그곳에서 망상에 빠져 있던 노위군의 귓가로 수하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는 방문자의 이름이 곡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자 양쪽 입 꼬리를 불만스럽게 올렸다. 그에게 있어 곡함이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짜증스런 이름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약속된 때가 되지도 않아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죽일 놈들.’

간단히 날짜를 계산해 보아도 아직 20여 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 곡함이 혈곡의 사신으로 개방을 찾아오면서도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든지 찾아온 이상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매를 휘둘러 여러 등불을 밝혀 내전을 환하게 한 후 입을 열었다.

“반가운 손님이 오셨구나. 어서 안으로 모셔라.”

노위군은 ‘위선’이라는 틀로 자신을 두르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곡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곡함은 언제나 개방 제자들 앞에서는 선한 얼굴을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는 냉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의 표정은 냉막함 뿐만 아니라 은은한 노기까지 섞여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모습이 노위군에게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하하하, 어서 오게. 그런데 어찌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겐가?”

목소리는 따스했지만 얼굴은 살얼음을 연상시킬 만큼 차가웠다. 거기에 답례하는 곡함의 표정도 노위군의 표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반갑네, 그동안 잘 지냈겠지?”

“나야 언제나 잘 지내고 있다네.”

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엔 아주 두터운 얼음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충 가식에 둘러싸인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앉았다. 먼저 노위군이 싸늘하게 전음을 날렸다.

-그대는 무슨 일로 불쑥 찾아온 것인가? 내가 비록 혈곡에 빚이 있다고 해도 이건 개방과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그 말에 곡함이 흠칫했다. 비록 전음으로 듣는 말이라고는 하나 전에 볼 수 없었던 강함과 독함이 느껴진 것이다.

‘이 사람은 변했군. 우사신공 때문인가?’

곡함은 순간 긴장했지만 생각이 우사신공에 미치자 긴장이 풀리고 더불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비록 빠른 성취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혈곡의 누구도 온전히 연마할 수 없었던 우사신공이었다.

그로선 노위군의 처참한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그래, 지금 마음껏 만족해 보아라. 과연 나중에도 그런 표정과 마음을 갖게 될지 내 지켜보마.’

여유를 찾은 곡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낭중산 쪽에서 약초를 조금 캐고 다녔다네. 경치도 좋아 가히 신선이 부럽지 않더구먼.”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고 전음은 싸늘했다.

-말이 지나치시구려. 우리는 개방을 위해, 아니, 사실은 당신 노방주를 위해 여러 가지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었소. 하지만 지금까지 개방이 곡에 보답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오. 흥, 나는 이제껏 개방을 대단하다 생각했건만 모두 허명뿐이었던 것 같소이다. 노방주는 왜 불쑥 찾아온 것인지 진정 모르고 계시는 것이오리까?

노위군의 심사가 뒤틀리며 살심이 꿈틀거렸다. 그는 우사신공을 연마한 후 지금에 이르러선 마음이 그전보다 열 배는 독하고 악랄해져 있었다.

뱀의 눈처럼 사악함을 담곤 곡함을 바라보았다.

‘내 언젠가 기필코 혈곡을 발 아래로 두고 말겠다! 그땐 너의 세 치 혀를 직접 뽑아주마.’

노위군은 곡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혜화의 서신을 찢어발기며 분노하지 않았던가. 화산파에 대한 문제가 흐지부지하게 끝난 것을 가리킨 것이라 생각하고 답했다.

“낭중산이면 험하긴 해도 자네 같은 고수에겐 적당한 곳일 것 같군. 좋은 곳은 함께 좀 다니면 좋으련만 자네는 매정한 친구네그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전음을 날렸다.

-화산파 장문 매혼 진인을 은퇴시켰고 이제 곧 두 번째 계획에 들어갈 참이니 하룻강아지처럼 서두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하룻강아지?’

곡함의 왼쪽 눈꼬리가 가로로 누워 있다가 세로로 기를 쓰고 올라갔다. 감히 혈곡을 가리켜 하룻강아지라 칭하다니.

‘노위군, 진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 정녕 명을 재촉하는 것인가.’

하지만 또 불현듯 곡주 단천우의 말이 떠올랐다.

‘곡주께서는 우사신공을 주면 늦어도 3년 안에 스스로 죽게 될 것이라고 했고, 그때까지는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용하자고 하셨다. 내가 섣불리 분노할 일은 아니겠지.’

“나중에는 꼭 함께 가도록 하세.”

-오호, 그럼 화산파를 공략함에 있어 또 다른 비책이 있는 것이구려.

곡함이 전음을 발하고 왼쪽 입 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혈곡에서는 이미 화산파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틀려먹은 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위군의 눈이 이글거렸다.

-매혼진인 양백을 은퇴시키는 일이 그냥 앉아서 된 일이라 생각하는가?

곡함이 싸늘하게 코웃음 친 후 전음을 보냈다.

“흥!”

-우사신공을 건네받을 때 했던 말을 벌써 잊어버린 것이오. 노방주의 기억력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형편없구려. 아직도 내 귓가에는 ‘화산파를 봉문시킬 자신이 있으니 염려 마시오’라는 말이 생생이 들리는 듯한데 그때 말은 환청이었나 보오이다.

그 말에 노위군이 경직된 안색을 풀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하하, 낭중산에서 좋은 약초라도 혹시 캔 건가?”

편안한 말이었지만 노위군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을 뻗어 곡함의 맥문을 틀어쥐었다. 느닷없는 공격에 붙들린 곡함이 당황스런 눈으로 노위군을 바라보았다.

“뭐, 뭔가. 자네?”

노위군의 입가에 사악하면서도 살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곡함을 벽에 밀쳐 놓고 압박하면서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이 개자식아.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네놈의 목은 두세 개라도 된단 말이더냐.”

곡함은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바늘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단순히 말로 극단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도 그런 경험은 오직 곡주에게만 느끼고 있던 터였다.

‘어찌 이렇게 변하게 되었단 말인가!’

-마, 말을 심하게 한 것 같소이다. 용서하시오.

곡함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노위군의 손이 풀렸다.

“하하, 자네 어디 아픈 건가? 어째 혈색이 좋지 않군.”

노위군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곡함으로선 그것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저 작자는 나와 무공 수준이 비슷했건만 지금에 이르러선 나를 훨씬 능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우사신공 때문이라면 대단한 것이로구나. 게다가 저 넘치는 사악함이란…….’

곡함은 실제 찾아온 까닭이 화산파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오랜만에 보니 자네의 성취가 남다른 것 같네그려.”

-노방주는 진정하시오. 노방주는 곡에서 갑작스레 나를 보낸 것에 대해 상당히 당황스럽고 불만스러울 것이오. 하지만 노방주의 불만은 우리가 갖고 있는 불만에 비하자면 사실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단지 화산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외다. 오히려 화를 낸다면 우리가 내야 하는 것이오.

노위군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것이지?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 협박해 보는 것이라면 집어치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노위군은 친위대 십이밀의 한 명인 혜화의 일이 혈곡에 드러날 것을 염려했다. 그녀는 화산파 장문인 양백을 파멸시키러 갔다가 도리어 그와 정분이 쌓여 은거해 버린 것이다. 화산파를 강호에서 잠재우고자 했던 노위군의 구체적인 계획은 이러했다.

부인을 사별한 화산 장문 양백에게 혜화는 우연을 가장하여 접근하고 관계가 깊어지면 화산파 사람들에게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일은 장문인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혀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화산파가 봉문을 하게 만든다는 각본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과는 달리 혜화는 양백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양백 또한 혜화를 사랑하게 되어 장문인 자리에서 은퇴하고 강호를 떠나 은거해 버린 것이다. 화산파에서는 혜화의 존재를 모르는 가운데 재삼, 재사 권고했지만 결국 양백을 말릴 수 없었고 새로운 체계로 화산파는 정비되었다.

결국 노위군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믿었던 수하에게 배신만 당하고 만 것이다. 그로선 혈곡에 화산파 문제를 큰소리쳐 놨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난처함에 빠졌고 그 난처함이 분노를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곡함은 노위군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폼은 나름대로 잡고 있다만 아직까지 전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군. 개방 내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과연 혈곡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요즘 개방은 좀 어떤가?”

곡함이 말을 끝낸 후 전음을 날렸다.

-노방주는 전대 방주인 엽지혼만 제거한다면 개방이 자신의 것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뻔한 것이라 굳이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음은 사용치 않고 소리 내어 말했다.

“개방이야 언제나 평화롭고 기세가 늘고 있다네.”

곡함의 전음이 이어졌다.

-방주는 아직 사정을 모르고 있나 보구려. 지금 강호엔 스스로 개방을 표방하고 있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소이다. 이름 하길 진개방이라 한다는데 들어보셨소이까? 진짜 개방이라고 하고 다닙디다.

“진개방?”

노위군이 황당함에 젖어 전음을 사용할 생각도 못하고 불쑥 말을 토했다.

곡함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진개방이오. 우리가 파악한 바로 그들은 지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외다. 이미 그들은 당가를 장악한 상태라 하오. 그리고 예상하기론 다음 목표는 녹림십팔채가 될 듯한데 그 수법이 지극히 재빨라 순식간에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오.

노위군으로서는 자다가 봉창 뚫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표영의 행적과 당가의 변화는 강호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천선부의 수뇌급들과 옥현기를 통해 사건을 파악한 혈곡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곡함의 계속되는 전음에 노위군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그로선 믿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하하, 개방은 오직 개방일 뿐이네.”

겉으로는 허세를 떨었지만 전음은 살벌하게 뻗어갔다.

-감히 허튼소리를 지껄이겠다는 것이냐! 지금의 난 과거의 내가 아니다.”

노위군은 분노에 가득 찼고 그가 탁자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뜨거운 기운이 확 일어나며 잡고 있던 탁자 부분이 불타 재가 되었다.

그것은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절정고수들이라면 펼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나 노위군의 솜씨는 삽시간에 이뤄낸 것이라 곡함이 보기에도 그의 무공이 매우 고매해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노위군도 이미 반신반의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혈곡에서 굳이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으음.’

곡함은 속으로 긴장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방의 형편없는 정보력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곡주님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과거 엽지혼이 이끌던 개방이었다면 마땅히 그런 강호의 변화 정도는 쉽게 파악했을 터인데 이렇게까지 정보에 둔하게 되었다니… 개방이 정보에 밝다고 하는 것은 이제 옛말이란 말인가. 이렇게 아둔하다면 그동안 공들인 혈곡의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겠구나.’

하지만 곡함은 이런 생각을 모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개방을 이용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궁지에 몰린 쥐를 몰아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도 떠올랐다.

그가 전음을 날렸다.

-조금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진개방 무리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개방이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외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거지 차림에 추잡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점점 더 위세가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소.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제갈세가와 남해검파까지도 협력하고 있다고 하외다.

거기까지 말한 후 곡함은 일단 전음을 중단했다. 그리고 노위군이 잘 듣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다시 전음을 이었다.

-진개방이라는 곳의 문제는 근본 개방의 문제라 할 수 있지만 혈곡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소이다. 곡에서는 사파 계열을 차례로 흡수할 계획이었건만 그 자리를 진개방이라는 무림들이 끼어들고 있으니 말이오. 이 말들을 그저 간단히 듣지 말길 바라오. 참으로 곡주께서도 염려스러워하고 계시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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