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
제9장 장성한 자가 되어
한편 표영과 능파 등이 나간 후 제갈호는 아버지를 모시고 뒤뜰로 나갔다.
교청인과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기가 조금 어색한지라 제갈호가 그녀를 위해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갈 부자가 나간 뒤 교운추는 딸을 보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휴우∼.”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낼 수 있는 한숨 소리였지만 지금 뱉어낸 교운추의 한숨엔 수없이 많은 말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다. 교청인이 그런 마음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어느덧 그녀는 표영을 따라 걸인의 길을 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한숨 속에 배어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본 아버지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버려 재만 남은 것처럼 황량한 상태였다.
“애야, 이제 이곳엔 아비밖에 없으니 아무 부담도 갖지 말고 자세히 이야기해 보렴. 도대체 지금 너의 모습은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구나.”
교운추에게 있어 딸은 세상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세인들은 보물을 어떻게 보관하고 관리하던가?
혹여 먼지라도 묻을까 보물 상자를 특수하게 제작하고 애지중지하며 한 번씩 볼 때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기쁨을 느끼지 않던가.
만일 천고의 위력적인 무공비급을 얻었다면, 또는 천하의 명검을 얻었다면 그것이 더럽혀지고 흉측해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교운추는 딸의 변화를 용납할 수 없었다. 만일 딸의 입에서 단 한 마디라도 억압과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이 나온다면 전쟁을 치를 각오가 서 있었다.
하지만 교운추의 말에 청인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크게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누가 시켜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말을 믿을 교운추가 아니었다.
“왜 이 아비에게마저 숨기려고 드느냐. 남궁진창과 주약란이 날 찾아와서 다 이야기해 주었다. 그 젊은 거지 놈이 억지로 너희를 잡아갔다고 했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냐?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것이더냐?”
교청인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해코지는요… 아버지도 제 성격 아시잖아요. 제가 어디 누가 억지로 하라고 한대서 할 사람이에요?”
사실 바른말을 하자면 표영이 억지로 독약을 먹이고 거지 노릇을 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답했다. 이것은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만약 표영과 함께 있을 초기 때였다면 필시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청인의 마음은 많이 변해 있었다. 거지 수련과 해적 소탕, 그리고 당가에서의 일을 거치면서 그녀의 마음은 외양의 꾸밈을 벗어던졌고 점점 마음에 깨달음이 일고 있는 것이다.
교청인의 말이 너무도 망설임 없이 나온지라 교운추는 자신이 지금 환청을 듣고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아이가 어찌 이렇게 변했을까.’
교청인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께서는 이해하시기 힘들겠지만 전 칠옥삼봉으로 불리며 지낼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방주님을 따라다니는 것도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가 굳이 함께 가겠다고 우기는 거라고요. 방주님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영락없는 거지처럼 보이지만 배울 점이 많아요. 전 그동안 칠옥삼봉의 한 명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성만 얻었을 뿐이지만, 방주님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악한 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교청인은 말을 하면서 왠지 간지러운 말이 계속 나와 속이 조금 느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간직해 오던 생각인지라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껏 ‘협’을 행한다고 말은 했지만 늘 안일한 길만 갔음을 느꼈어요. 비록 지금은 진개방의 이름이 보잘것없지만 조만간에 천하에 이름을 떨칠 날이 오게 될 거예요. 방주님의 무공은 고강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도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기에 언젠가는 강호에서 천선부를 능가하는 위명을 드높일 때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버지 교운추는 잔잔하게 말하는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파오기도 했다.
기특함이란 이제껏 이런 식으로 어른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늘 무공에 집착해 좀 더 강한 무림인이 되고자 노력했을 뿐 진정 자신을 돌아보진 않았던 터였다.
하지만 오늘 차근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여간 대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또 한편 거지의 몰골로 다니는 것을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교운추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청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전 방주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뭐, 뭐라고? 그 거지 놈을 말이더냐?!”
교운추는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와 탁자에 뒹굴게 되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콧대 세고 눈 높은 딸의 선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실 교청인은 아버지를 설득시키려고 한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었지만 그 말속에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것만도 아니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랄 수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청인은 표영에 대해 호감이 점점 싹트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 진심이에요. 매일 잠도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걸요.”
교청인이 말하는 것은 한 침상에서 잠을 이루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들에서 산에서 야숙을 할 때 함께 근처에서 잠을 잤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아버지 교운추에겐 그 말이 제대로 이해될 리 없었다. 교운추는 거지들의 생활이 집도 없이 떠돌고 아무 데서나 잔다는 것을 언뜻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교운추는 할 말을 잃고 청인을 바라보았다.
청인이 거기에 다시 기름을 끼얹었다.
“저는 또 이미 방주님께 온 목숨이 맡겨진 상태라 저의 몸은 방주님의 것이나 다름없답니다.”
사실 이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회선환을 복용한 교청인으로서는(그녀는 그것이 그저 표영의 몸에서 벗겨낸 때라는 것은 모르고 있기에) 해독해 주지 않는 한 표영에게 귀속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교운추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정녕… 하늘은 날 버리시는 겁니까. 그 거지 놈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을……!’
교운추는 당장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혼란스런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나는 이 녀석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까? 화를 내야 할까? 그럼 어떻게 화를 내야 하지? 이렇게 해볼까? 너는 어찌하여 그리 몸을 함부로 놀린 게냐. 여자로서 조숙하지 못하고 그 무슨 해괴한 짓이냔 말이다. 아니야, 아니야… 이미 함께 자고 지금도 자고 있다고 하니 화를 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 어쩔 수 없구나.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 정녕…….’
교운추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그럼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참이냐?”
처음과는 달리 맥이 다 빠진 듯 힘없는 음성이었다.
“무공을 배움에 있어서는 그 쓰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마땅히 써야 할 곳에 저의 힘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너는 그런 몰골로 다니는 것이 정녕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교운추는 딸이 얼마나 용모에 신경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작은 티끌만 묻어나도 아주 큰일 날 것같이 행동하던 아이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씻어내면 언제든지 다시 깨끗해질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저는 외적으로는 많은 더러운 것들을 묻히고 다니지만, 마음속은 반대로 더욱 깨끗해지고 있답니다.”
부쩍 어른스러워진 듯한 딸의 말과 행동에 교운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하오문을 뒤져 천 리 길을 한달음으로 달려왔건만 정작 딸을 만나 일이 이상하게 변하게 되다니…….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세요. 나중에 제가 집에 돌아갈 때는 더 장성한 모습이 되어 보이도록 할게요.”
교운추가 긴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좋다. 정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내버려 두마. 그럼 혹시 이 아비에게 가기 전에 부탁하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도 좋은걸요.”
활짝 웃는 청인의 표정은 진짜 만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으음…….”
아버지는 그저 신음성만을 낼 뿐이었다.
뒤뜰에 나가 대화를 나누는 제갈 부자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지난 시간 지붕 위에서 교청인과 이이기를 나눌 때처럼 제갈호는 담담히 아버지에게 지금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렇게 방주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저에게 있어서 앞으로 제갈세가를 이끌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이때가 아니면 이런 고생을 할 여건도 없을 테니 이는 필시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소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무공을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죠? 강 하류에 있는 돌들이 매끈매끈 보기 좋게 변해 있음은 상류에서부터 모난 큰 돌들이 물결을 따라 여기저기 부딪치고 부서지며 모난 부분이 깎여지면서 결국에 이르러 보기에 좋은 모습이 되었다고 말이죠. 아버지, 그러니 지금의 이 시기는 저에게 있어 조금 더 깎이고 다듬어지는 시기라고 생각해 주세요. 제가 온전히 다듬어지면 그땐 방주님께 말씀드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갈호의 말엔 단호함과 굳센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은 아버지 제갈묘에게 변화된 아들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벌써 이렇게 컸단 말인가. 녀석… 그래, 더욱더 연마되고 연마되어 큰사람이 되렴.’
제갈묘는 아들의 궁색한 몰골 안에 장성한 기운을 보고 흐뭇함이 가슴 가득 밀려듦을 느꼈다.
교운추는 딸을 두고 떠나기 전 표영과 단독으로 만났다.
그의 얼굴엔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애써 웃음 지으며 표영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잘 부탁하네.”
손이 잡힌 표영은 이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표영을 바라보는 교운추의 눈은 타오르는 불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지금 한 명의 거지를 보고 있음이 아니라 사위를 보고 있음이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위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다름없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표영에게 교운추가 힘 있게 말했다.
“언제고 남해검파의 힘이 필요하다면 연락을 하게나. 우리가 이제 남이 아니잖은가.”
“…….”
표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뭐냐, 대체 이건?’
속으로 궁시렁 거릴 때 다시 교운추가 헛기침을 연발하더니 조금은 소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곧 떠나는 마당에 자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험험… 이제 와서 내 딸이 자네를 따라다니는 것은 뭐라고 할 마음은 없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글쎄요…….”
표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교운추가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법이야. 내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한 가지네. 그건 말일세. 일 년에 열 번 정도만 딸아이가 목욕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야. 여자가 청결하면 자네도 기분이 좋지 않겠나.”
교운추로서는 영락없이 둘이 함께 잔다고 생각했기에 뒷말도 한 것이었지만 표영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표영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청인이 깨끗한 것과 제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어? 거참…….”
워낙에 단호하게 하는 말에 교운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야. 이놈은 대체! 함께 자기도 했다면서 더러워도 상관없다는 말이더냐.’
교운추가 다시 용기를 내 말했다.
“내가 생각할 땐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여전히 표영은 단호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그건 안 됩니다.”
교운추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좋네, 여덟 번으로 하세.”
“안 됩니다.”
“으음… 그럼 일곱 번.”
“안 됩니다.”
이제 둘은 거의 눈과 눈을 마주 보며 서로의 얼굴이 철썩 달라붙을 것같이 가까이 이르렀다. 둘은 눈싸움을 하며 먼저 눈을 깜박이는 사람이 내기에서 지기라도 하는 듯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네 번.”
“음…….”
표영은 길게 침음성을 흘린 후 말했다.
“한 번은 꼭 약속드리죠.”
“세 번.”
“좋습니다. 두 번으로 하죠. 더 이상은 안 됩니다.”
표영의 말에 교운추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일 년에 두 번이라니… 정말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렇게 더러운 놈을 봤나. 아무리 진개방이니 뭐니 한다지만 이렇게 거지같이 살아야 한단 말인가.’
교운추는 딸의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