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
“눈치 보지 말고 푹 쉬도록 해라. 골방이 불편하면 따로 방을 하나 얻도록 해. 숙박비는 내가 줄 테니까 염려 말고 말이다.”
화경루 주인 설만호가 하루 정도 쉬었으면 싶다는 옥현기에게 한 말이었다 옥현기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편하게 바깥바람을 쐬고 돌아오겠다고 한 후 걸음을 당가 쪽으로 옮겼다.
아침이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을 지나면서 옥현기는 산책하듯 걸었다. 그의 얼굴이 평범으로 가득 차 있듯, 발걸음도 사람들 눈에 띌 리 없는 평이한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그가 인적이 끊어진 샛길로 접어들어서는 달라졌다.
옥현기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사람의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놀림은 그냥 달린다, 라고 하기엔 조금 표현이 모자랐다. 한 발 한 발 땅을 딛고 박찰 때 땅이 뒤로 죽∼ 죽∼ 물러났으니 말이다.
그건 바로 무림인의 경신법이었다.
그것도 고도로 숙련된 신법을 갖춘 무림인의 모습. 방금 전까지 별반 특별할 것 없던 일개 점소이가 무림고수의 신비스런 발걸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옥현기가 다시 발걸음을 늦춘 것은 당가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서였다. 그는 언제 경신술을 펼쳤냐는 듯 다시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만큼은 매우 예민하게 곤두선 채였다. 이제부터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혹시나 있을 그 무엇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약 일식경(30분) 정도를 느리게 걷던 옥현기는 당가의 동쪽 외벽에 이르렀다.
그의 신경은 날카롭게 서 있었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그저 산책 나온 사람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그만큼 그의 가장은 완벽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동쪽 외곽을 걷던 옥현기는 달리 특이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하긴 엿새 정도 늦는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직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쨌든 당가를 한 바퀴 돌아본 후에 다시 생각해 보자.’
옥현기의 발걸음은 서쪽 외곽을 향했다. 유유히 걷던 그의 발걸음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마치 얼음 조각이라도 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야가 닿는 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옥현기는 자신이 지금 너무도 큰 반응을 보이고 있음도 잊은 채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바라보았다.
‘소, 송 대주!’
그가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걸려 있는 사람의 몸이 몸은 어디 가고 머리만 있다는 점과 그 얼굴이 낯익은 자신의 직속상관인 혈사대주 송도악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옥현기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지만 바로 정신을 수습했다.
‘내가 보이는 반응은 그저 겁 많은 보통 사람이 잘려진 머리를 보고 두려워하는 모습으로만 비춰져야만 한다!’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이 안 되고 있지만 분명 당가의 수비대들의 이목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분노를 터뜨린다든지 목을 수습하려 했다가는 도리어 일을 크게 만드는 일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옥현기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허겁지겁 도망치는 모습으로 당가에서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겁에 질린 연약하고 소심한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천천히 이 믿기지 않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침착하자, 옥현기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한다.’
그는 먼저 대주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뭐가 문제였을까? 대체 무엇이…….’
사실 혈곡에서 당가를 장악하기 위해 파견된 건 혈사대주 송도악과 옥현기 자신이었다. 그중 혈사대주 송도악은 천면마공을 이용해 독운신군 갈조혁으로 역용해 당가 내로 직접 잠입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옥현기는 원래 이름이 옥기로 혈사대의 일급 살수였다.
그가 맡은 일은 혈사대주 송도악이 당가에서 진행하는 일을 혈곡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대주인 송도악은 성공리에 당가에 들어가 조만간 장로 직을 받을 상황이었다. 그 성과는 대단한 것으로 곡주도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차였다.
이제 일정 시간이 지나 당가의 가주 당문천의 습성을 파악하면 곧바로 암살하고 다시 천면마공으로 당문천으로 둔갑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편 옥기는 부근 마을의 점소이로 들어가 송도악이 보름(15일)에 한 번씩 찾아와 음식을 시킬 때 정보를 듣고 비밀리에 혈곡에 소식을 전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주의 목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는 수하로서 상관의 목도 수습하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럽고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으로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연 누가 대주의 목을 벨 수 있단 말인가. 곡의 모든 계획이 다 드러났더란 말인가?’
옥기가 알고 있는 대주 송도악은 이렇게 허무하게 목이 잘려 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잔인함과 냉철함을 겸비한 대주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 따라 대처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어야 되지 않던가.’
옥기에게 있어서 대주 송도악은 대주임과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 살수로서 일격필살의 무공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평범함을 갖추어야 하는지와 또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고 정에 얽매이지 않아야 함을 배웠었다.
그런 가르침을 준 스승인 대주가 저 지경이 된 것이다.
그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예상해 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떤 고문에도 혈곡의 계획을 발설할 대주가 아니다.’
차라리 팔과 다리가 끊어지고 신경이 하나하나 뽑힌다 해도 비밀을 누설할 대주가 아니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사태를 파악해야만 한다. 이대로 곡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날 저녁 무렵.
옥기는 시냇가 부근에 자리한 고목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봉화를 지켜보았다.
‘잘 있어라.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를 만난 건 내겐 큰 행운이었다.’
봉화는 옥기가 점소이로 일하던 화경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집이 그리 넉넉지 않아 여러 가지 잡일을 하며 생계를 돕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둑해지는 때임에도 미처 집안의 빨래를 하지 못했는지 부지런히 방망이를 움직여 가며 열중이었다.
옥기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봉화는 미모가 뛰어나거나 몸매가 기가 막히게 매끈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상냥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할 만큼 재밌었다. 하지만 옥기는 혈곡을 버리고 한 여인에게 얽매일 입장이 못 되었다. 그것은 혈곡의 살수에게 있어서는 사치였다.
‘나는 널 사랑하고 지켜주기엔 부족한 남자일 뿐이다. 부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려므나.’
비록 그녀와는 짧은 입맞춤이 고작이었지만 옥기에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옥기는 흐트러지려 하는 마음을 다잡고 신형을 날렸다.
이미 화경루 주인 설만호에겐 서신을 남겨두고 온 터였다. 그는 비록 혈곡에서 살수 훈련을 받고 강호의 험난함을 배웠지만 이번 작전을 통해서 의외의 세상을 보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고아로 자라나 어릴 적 혈곡에 들어간 그에겐 봉화같이 자신을 향해 활짝 웃어주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화경루 주인 설만호에겐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았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믿지 말라고 교육받아 온 그에겐 또 다른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을 둘러싼 혈곡의 테두리는 너무도 크고 두터웠다.
옥기는 봉화를 등지고 달리다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돌아봤다. 거기엔 두 남자가 풀숲에 몸을 웅크린 채 봉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놈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옥기는 기척을 죽이고 두 사람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지켜보았다.
“흐흐흐… 형님, 어떻소? 아주 맛있지 않겠소.”
“낄낄낄, 녀석. 좋은 건수를 물어왔구나.”
옥기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했음인가. 둘은 마침 봉화의 뒷모습을 보며 군침을 삼키며 이곳에 웅크리고 있는 의도와 앞으로의 계획을 목소리를 죽여 가며 드러냈다.
더 들어보지 않아도 무엇을 하려 함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옥기는 그렇지 않아도 발걸음이 무거웠건만 이런 녀석들을 보게 되자 기분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내가 이 녀석들을 발견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로구나.’
옥기는 두 건달의 뒤로 바짝 다가가 그들처럼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물었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소이까?”
느닷없이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에 두 건달이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뭐, 뭐냐!”
옥기는 낙막한 표정으로 두 건달의 마혈을 제압하고 목덜미를 잡아 봉화가 있는 곳에서 반대 방향으로 데려갔다.
얼마쯤 갔을까.
이 정도면 어지간한 소리가 들려도 봉화가 들을 수 없을 만큼 왔다 생각 드는 곳에서 옥기는 두 건달을 내려놓았다.
“한심한 녀석들, 그렇게도 할 짓이 없더란 말이냐?”
이미 두 건달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데다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손에 한 명씩 공깃돌 들듯이 이동한 것을 본지라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바람이나 쐬려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입니다.”
아혈이 찍히지 않은 터라 해보는 데까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변명에 ‘오호, 그랬군’하고 놓아줄 옥기가 아니었다.
“요즘은 바람을 쐴 때 풀숲에 잔뜩 웅크리나 보지?”
“그, 그게 아니라…….”
옥기는 더 들을 것도 없다 여겼는지 이미 발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슈욱∼
파팍, 파파팍…….
“으악!”
“커억!”
나란히 세워진 두 건달이 뻗어온 발길질에 턱을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미 마혈이 찍혀 온몸이 빳빳하게 굳은지라 손을 들어 어루만질 수도 없는 둘은 그저 입을 벌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전부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협과 잘 알고 있는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요.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겠습니다요. 제발… 제발…….”
하지만 다시 옥기의 발은 넘어져 있는 두 건달의 복부를 걷어차고 있었다.
퍽퍽- 퍽퍽-
“대협이라… 후후, 나는 그런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으윽…….”
“커어억!”
한참이나 일방적인 발길질을 가하던 옥기는 어느 정도 화가 풀렸는지 행동을 멈추고 두 건달에게 말했다.
“똑똑히 들어라. 앞으로 그녀에게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그땐 사지를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그녀 곁엔 늘 내가 있음을 명심해라.”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에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둘은 간신히 대답했다.
“으으윽…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억… 목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옥기는 이 정도면 쓴맛을 보았으리라 생각했다. 두 차례 발길질을 통해 마혈을 풀어준 옥기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섯을 세겠다. 그때까지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목이 어디로 갔는지 찾게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둘은 옥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에 불이라도 붙은 듯 달음질쳤다. 뛰다가 넘어지기도 했지만 마치 용수철에 의해 튕겨지듯 벌떡 일어나 줄행랑을 쳤다.
그들의 놀랄 만한 달음질을 보건대 앞으로의 인생도 그런 각오와 행동으로 살아간다면 필시 성공하리라.
옥기는 멀어져 가는 두 건달에게서 시야를 거두고 다시 시냇가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새 봉화는 빨래를 다 끝냈는지 어디에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문득 아쉬움이 가득 밀려들었다.
“휴우∼ 내가 왜 이러지……. 이런 마음을 가질 때가 아니잖은가.”
두 건달이 노리고 있던 것을 보게 되자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누가 그녀를 지켜준단 말인가. 그는 걸음을 봉화의 집 쪽으로 옮기려고 세 발자국을 뗐다가 다시 멈춰 섰다.
“그녀와 나는 근본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야.”
옥기는 멀리 봉화의 집 쪽을 한번 본 후에 몸을 돌려 당가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