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신 차리세요.”
“이 괴물이 누굴 보고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냐. 너나 정신 차려라. 이놈아!”
능파의 손이 앞으로 쭉 뻗어가며 능혼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다. 능혼은 황급히 신형을 날려 피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더불어 서늘한 한기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천극간시공해체대법이 풀리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란 말인가.’
이것 외에는 달리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형님, 접니다. 저라고요.”
수비에 치중하며 연신 몸을 피할 뿐 공격을 감행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능파는 진짜 괴물을 죽여야 한다는 사명을 받은 사람처럼 매서운 살수를 펼쳐 냈다.
‘왜라니… 이거… 혹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분명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자신보다 두 배는 지혜롭고 뛰어난 형님이지 않던가.
이렇듯 막연한 물음을 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자신을 알아본 것으로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휴우∼ 점점 좋아지겠지.’
여기저기 터져 나오려는 생각들을 대충 구겨 넣고 능혼이 입을 열었다.
“형님, 이곳에서 우리가 기다렸던 교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섬에는 거지 녀석만 있을 뿐이니 잡아서 정황을 알아봐야만 합니다.”
능파가 개구쟁이처럼 양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그렇다면 잡아야지. 고얀 놈, 잡으러 가자∼”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표영이 사라진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능혼은 휑하니 달려가는 형님을 보고 잠시 얼이 나갔다.
‘거참…….’
능파의 모습은 십절쌍마의 가공할 살기가 담긴 것이 아니라 숫제 어린아이가 술래를 잡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휴…….”
다시 길게 한숨이 토해졌고 능혼의 신형도 능파가 사라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때쯤 표영은 해안가에 이른 상태였다. 하지만 이곳에 이르렀어도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걸어서 바다를 건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기다려라, 거지야! 여기 능파가 나가신다!”
‘아까 그 노인이군. 이거 참.’
표영이 다시 도망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할 때 어느새 능파의 신형이 가까이 이르렀다.
‘처음 상대했던 백의노인보다 훨씬 신법이 뛰어나구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 수 있었다.
“괴물 같은 녀석은 어떻게 하고 오셨습니까?”
표영의 물음에 능파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괴물? 괴물 따위는 없었어. 능혼은 내 동생일 뿐이야.”
표영은 상대가 백의노인처럼 살기를 띠지 않고 말하는지라 혹시 말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능파가 길게 휘파람을 불며 장력을 날렸기 때문이다.
“이 거지야, 어서 교주님을 내놔라.”
능파의 공격은 삽시간에 주변의 공간을 압도했다. 그가 즐겨 쓰는 장법 중 마혼장법이라는 것이었다.
상하좌우(上下左友)가 손 그림자로 뒤덮여 당장에라도 표영의 온몸은 격타당할 것만 같았다. 그런 찰나.
쐐애액-
능파의 장세에 갇혀 도무지 빠져나을 수 없을 것 같던 표영이 모습을 드러났다. 어느새 표영의 손엔 타구봉이 들려 있었다.
방금 능파의 그물 같은 장세를 갈라 버린 것은 타구봉법의 절초 중 벽자걸을 이용한 수법이었다.
날카로운 바늘이 넓은 천의 중앙을 뚫고 나오듯 타구봉이 춤을 추자 능파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위협적인 적수를 만났다라는 것보다는 심심치는 않겠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거지 친구, 막대기를 잘 쓰는군.”
능파는 더욱 매섭게 장세를 펼쳤다.
표영은 상대의 손이 분명 두 개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수백여 개로 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변화를 일으킴에 있어서 타구봉법만큼 복잡한 것도 드물 터이지만 아직 타구봉법을 경지에 이르렀다 할 만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인지라 순간순간 버거움을 느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오십여 초를 교환했을 때 표영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뒤따라오던 능혼이 싸움에 가세한 것이다.
안 그래도 벌써 여섯, 일곱 차례나 위기를 맞이했던 상태였기에 이젠 매 순간 위기에 놓였다. 단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은 타구봉법의 오묘한 묘리 때문이랄 수 있었다.
표영은 숨이 가빠오며 곤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사부님께서 마교는 200년 전에 사라졌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들은 마교 교주니 지존이니 떠들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고강한 무공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개방 장로 이요참에게 난타당한 후 이차 각성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렇게 버터내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표영이 곤혹스러운 것이 능혼의 곤혹스러움에 비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누군가, 교주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역할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무위를 지닌 십절쌍마가 아닌가 말이다. 마교 천하를 이룩하기 위해 준비된 우리들이 이런 젊은 놈 하나에게 이리도 많은 시간을 써야 할 줄이야…….’
그는 2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강호의 무사들이 모두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익히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교주님을 배알하지도 못하고 젊은 거지새끼조차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한편 함께 손을 쓰고 있는 능파는 그러한 심각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놀러 나온 사람마냥 신바람을 낼 뿐이었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지났다. 표영이 제 아무리 날고뛴다 해도, 그리고 타구봉법이 아무리 신묘롭다 해도 두 사람의 연수합격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껏 뛰어난 신법과 타구봉법이 아니었다면 이미 싸움은 끝이 났을 것이다.
“어서 교주님을 내놔라. 이 나쁜 놈아! 어서어서……!”
능파가 고함을 치고 밀려드는 타구봉을 향해 두 손을 가슴께에서 교차시키며 기를 운용했다. 타구봉은 두 팔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고 회전하는 기의 힘에 의해 중도에 멈춰 서고 말았다.
‘큰일이다.’
타구봉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중에 뚝 멈춰 선 채 잡아채려 해도 빠지지 않았고 밀어보려 해도 밀리지 않았다.
그 틈을 능혼이 놀칠 리가 없었다. 순간 눈이 빛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장력이 표영의 어깨를 때렸다. 표영이 황급히 왼손을 들어 강룡십팔장 중 항룡유희로 막았다. 외부적인 요인 없이 그저 정상적으로 장력을 교환해도 버거울 터였다.
헌데 지금은 절반의 힘은 타구봉에 집중하고 나머지 절반의 힘으로 맞선 것이라 그 손해는 심히 컸다.
파팡!
“윽.”
두 장력이 부딪치자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통증이 혈맥과 근육을 타고 찌르르하니 전달됐다. 더불어 그 충격으로 오른손에 들고 있던 타구봉을 놓치고 뒤로 연달아 다섯 걸음 물러섰다.
‘제길… 이렇게 뼈를 묻을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황은 좋다고 볼 수 없었다. 아까 장력을 교환할 때 받은 충격으로 왼손에 힘이 모이지 않았고 움직이라고 뇌에서 명령을 내려도 듣질 않았다. 또한 타구봉은 모래사장에 맥없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표영은 타구봉이 없는 상황에서는 단 몇 초도 버터내기 힘들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표영의 눈에 비릿한 웃음을 짓는 두 노인의 모습이 잡혔다. 둘의 미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젠 다 끝났지 않나, 거지 친구.
표영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이를 악물었다. 다리 쪽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계속 밀려나다 보니 바다에 들어선 것이었다.
“이젠 끝내 볼까?”
능파의 신형이 마치 제비처럼 유연하게 비상하며 표영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머리 위에 이르렀을 때 능파의 장력이 뿜어졌다. 표영은 두 다리를 굳건히 하고 오른손을 들어 태산을 들어 올리는 듯한 모양으로 장력을 쳐냈다.
하지만 능파의 공격은 허초에 불과했다. 능파는 위에서 찍어 누를 듯 시늉만 했을 뿐 장력을 내뻗지 않고 허공에서 두 바퀴를 회전하여 표영의 등 뒤로 내려앉으며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표영은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퍼지는 걸 느꼈다. 뒷덜미에 위치한 우명혈이 살짝 찍히며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이제 손가락조차 까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불쑥 두려움이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다.
만일 합당한 대결이었다면, 그리고 만일 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까닭이라도 안다면 이렇게 두렵지는 않을 것이리라.
‘설마 여기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
표영의 눈동자 가득 매섭게 짓쳐들어오는 능혼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안 돼∼!”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능혼의 동작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으하하하… 안 될 것은 없지.”
능혼은 달려드는 기세를 죽이지 않고 꼼짝 못하고 붙들려 있는 표영의 복부에 장력을 날렸다.
파악.
“우욱…….”
표영의 몸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복부에서 시작된 충격이 차례로 온몸으로 번졌다. 그건 마치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수면에 파문이 일며 번져 나가는 것과 같았다. 본래 충격을 받으면 충격의 여파로 뒤로 넘어지거나 운동의 방향대로 쓰러지게 됨으로 인해 그 통증을 완화시키는 법이다.
하지만 표영은 뒤쪽에서 붙들고 있는 능파로 인해 고스란히 선 채로 모든 장력을 몸 자체에서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고통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 했다. 게다가 맥문이 잡힌 상태라 호신강기는 일으킬 엄두도 못 내는 무방비 상태가 아니었던가. 표영의 몸은 서서히 시퍼렇게 물들며 살색을 잃어갔다.
그리고 힘없이 눈이 감겨왔다.
‘엄마…….’
환영이 보였다. 표영의 어머니 화연실이었다. 뒤뜰에 정화수를 떠놓고 온 정성을 기울여 기원을 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표영이 다시 중얼거렸지만 그건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엄마…….’
뒤쪽에 있던 능파가 붙들고 있던 뒷덜미를 놓자 표영의 몸은 맥없이 허깨비처럼 무너져 물에 처박혔다.
“크하하! 거지야. 맛이 어떠냐.”
능파가 득의로 가득한 웃음을 내질렀다. 하지만 능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죽진 않을 것이다.
크게 중상을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숨이 끊어지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교주님의 행방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물에 둥둥 떠 있는 표영을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건질 요량으로 접근했다.
그때였다. 능혼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심지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물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초록빛 광채였다.
“저, 저건…….”
아직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능파의 눈도 경악에 부릅떠졌다.
“으아악! 저건 건곤패다……!”
그들의 눈은 거지의 목 부근에서 유유히 떠 있는 건곤패에 사로잡혀 뗄 줄을 몰랐다. 표영은 등판을 보이고 물에 처박힌 채 미동도 없었고 목에 걸려 있던 건곤패만이 물결에 출렁거리고 있었다.
건곤패는 물속에서 푸른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능혼의 뇌리로 건곤패의 특성이 빠르게 떠올랐다.
“건곤패는 만년온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물에 닿으면 초록 광채를 발하게 된다. 만년온옥은 내력을 북돋는 공능을 지닌다. 오직 건곤패는 지존만이 소유할 수 있으며 모든 마교인들은 건곤패 앞에 무릎 꿇을지어다.”
이 건곤패로 말할 것 같으면 표영이 과거 독무행의 몸에서 얻은 것으로 사부의 강권에 못 이겨 목에 차고 다니고 있던 터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마교 교주를 나타내는 신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