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8장 (4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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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14장 동굴, 그리고 비참

표영은 오늘 낮에 느닷없는 방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개방의 지타주인 이진구라고 소개했다. 이미 일각두와 양조포를 통해 이진구가 자신을 죽이려 했음을 알고 있던 표영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이진구의 얼굴이었다. 지난날 사부님의 부탁을 받고 개방의 내부 사정을 알아보려 갔을 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던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오늘 밤 소하산 중턱 곤천암 아래로 오거라.”

이진구는 이 말만 남기고 홀연히 왔던 것처럼 홀연히 가 버렸다. 그로 인해 지금 표영은 곤천암 아래에서 나무 밑동을 발로 툭툭 차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비가 오려나.’

표영이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하늘에서 후드득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훗, 진짜 비가 오네. 재밌는걸.’

시원한 빗줄기가 온몸을 타고 내려오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늘은 힘을 좀 써야겠다. 이진구는 건달들을 동원한 것이 실패하자 직접 손을 쓰기로 한 것이 분명해. 하하,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일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과거 네놈이 무자비하게 행동한 바로 그놈인 줄 알았다면 진작 손을 봐주었을 텐데. 짜식, 오기만 해봐라.’

표영이 그처럼 단단히 벼르고 있을 때 빗방울 소리 사이로 스스스슥-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오는군.’

잠시 후 신형을 빠르게 날리며 이진구가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도착했다.

“후후, 먼저 와 있었군. 거지 녀석이 약속은 잘 지키는걸.”

자기는 철저히 거지임을 부인하고 있는 말투였다.

“선배 거지님을 기다리는데 후배 거지된 도리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진구가 발끈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바로 거지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 말하는 것이 영락없이 죽을 놈의 발작과도 같구나. 하긴 죽을 놈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느냐. 캬캬캬!”

쿠르르- 쾅쾅!

이진구의 음산한 목소리와 괴이한 웃음소리에 이어 번개가 일며 뇌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번개가 칠 때 한 번씩 비추인 이진구의 얼굴은 살인 직전의 잔인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김빠진 소리를 내질러야만 했다.

“거지새끼가 거지인 것을 부끄러워하다니. 쯧쯧, 네놈이 말하니까 하늘도 기가 막힌지 우렛소리를 내지 않느냐.”

“헉!”

이진구는 잔뜩 쫄아야 할 놈이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자 순간 주위를 돌아보았다. 일각두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말도 마십시오. 1,000마리의 개하고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이건 일각두가 궁여지책으로 변명하듯 한 말이었다.

‘이런, 제길.’

물론 개를 모조리 데려왔다 해도 자신의 무공으로 깨뜨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추접스러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너, 너 혹시 개 데려왔냐?”

그 말에 표영이 털털거리며 웃었다.

“짜식, 겁은 많아가지구.”

‘짜식?!’

원래 싸움을 더욱 격하게 만드는 것은 싸움 전의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다. 당신이라는 말을 하면 ‘뭐라고? 나보고 당신이라고?’, 혹은 ‘이 양반이’ 하면 ‘니가 언제 봤다고 나보고 양반이라고 하냐’며 주먹이 교환되는 것이다. 그런 이치로 이진구는 ‘짜식’이라는 말에 심장이 벌렁거리고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달구었다. 이제 막 입방(入幇)한 개방의 신참이(비록 자신은 개방의 일원으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지타주에게 ‘짜식’이라니.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거지새끼가 명을 재촉하는구나!”

빗줄기가 거세진 속에서 이진구가 신형을 날려 표영을 공격했다. 표영은 이미 방비하고 있던 터라 주먹이 뻗어옴을 보고 오른손을 쭉 뻗음과 동시에 회전시켰다. 이것은 타구봉법의 인(引)자결을 장법으로 응용한 것으로 잡아 끌어당기는 힘이 적용되는 수법이었다.

이진구는 자신의 주먹이 소용돌이 속에 빠진 것처럼 쭉 앞으로 당겨지자 깜짝 놀라 오른발을 들어 표영의 얼굴을 갈겼다. 슈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발길질이 가해지자 표영은 끄는 힘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한 번의 교전이 마쳐진 후 이진구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수의 교환이었지만 명백히 자신이 몰린 것이다.

‘아니야, 아냐. 이건 어쩌다가 그냥 일어난 일일 거야. 저놈이 고수일 리는 없어.’

그는 애써 부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표영은 그가 부인하든 말든 오늘 회선환(回善丸)을 꼭 먹여야겠다고 작정한지라 어리벙벙해 있는 이진구를 향해 파옥권을 전개했다. 지금 표영의 무공 수준은 사실 이진구가 당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분타주인 묵백보다 한 수 위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파옥권 중 위군위선파(僞君僞善破)를 펼치자 단번에 주변은 표영의 주먹으로 가득 차버렸다. 이진구는 개악신권(凱惡神拳)으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표영의 경험 부족은 이진구를 상대함에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실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나 노련한 경험도 통하는 법이지 그 차이가 많으면 고작 잔머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일 다경(15분) 정도가 되면서 이진구는 한두 대씩 얻어맞다가 급기야 몰매를 맞는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헉헉, 이게 대체…… 으윽!”

표영은 기를 적절히 조절해 가면서 이진구의 몸을 다져 놓으려 했다. 진정한 골병은 이렇게 착실하게 다져야지 나이가 들어도 두고두고 고생하는 법인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 이르길 ‘잔 매에 골병든다’는 말이 있잖은가.

퍼퍽! 퍼퍽!

일 식경(30분)이 되면서 이진구는 가슴이며 얼굴이며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허나 표영은 아직까지 걸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서 일 식경 정도는 더 주물러 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진구는 서서히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옅은 미소를 띤 채 두들겨 패는 모습은 성난 표정으로 패는 것보다 더욱 무서웠다.

‘어쩌면… 오늘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안 돼∼!’

그는 이런 식으로 방어한답시고 버터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주먹이 가슴에 닿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과장되게 나자빠졌다.

‘도망쳐야 해, 어떻게든!’

그는 혼절한 척하며 기회를 엿봤다. 그때 표영은 자신의 주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라, 그렇게 세게 때렸나? 어허허.”

이젠 깨워서 회선환을 먹여야 할 차례였다. 표영은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어 큰 뭉텅이의 때를 동그랗게 만든 후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의 크기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녀석도 이것을 먹으면 착하게 변하겠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흔들어 깨우려고 고개를 숙일 때였다. 느닷없이 이진구가 품에서 손을 꺼내며 하얀 분말을 뿌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푸스슥.

“으아악! 이거 뭐야.”

비가 내리는 상황이었지만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 탓에 하얀 분말은 그만 표영의 눈에도 상당수 들어가 버렸다.

‘이때다!’

이진구는 지금이 아니면 자기에게 남는 건 죽음뿐이라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로선 조금 비열한 짓을 하긴 했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흔히 악한 자들일수록 다른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여기면서 자신의 목숨은 금쪽같이 여기는 법이다. 이진구도 그런 범주에 속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백혼산을 상비하고 다녔다.

백혼산은 비록 소량이라도 눈에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었다. 대개 뿌림과 동시에 몸을 빼 달아나거나 상대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할 때 사용되곤 했다. 이건 강호에서 비열한 자들의 필수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공격을 당한 표영은 눈앞이 캄캄해졌으나 다행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는지라 얼마 되지 않아 거의 대부분을 빗물로 씻어낼 수 있었다.

“허허, 의외로 겁이 많은 놈이었군.”

표영은 어쨌든 회선환을 먹일 각오가 분명했기에 연쌍비를 시전해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봐, 같이 가야지. 어딜 가는 거야. 멈춰∼”

한참 죽을 둥 살 둥 도망치던 이진구는 멀리서 표영의 음성을 듣고 화들짝 놀라 젖 먹던 힘까지 뽑아 달음질쳤다.

‘따라오지 마, 이 자식아.’

그로선 저승사자가 따라붙는 것처럼 여겨졌기에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거기다 비로 인해 땅이 미끄러웠던지라 가다가 넘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럴 때면 그는 강시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가시나무에 긁히고 나뭇가지에 얼굴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염두에 둘 입장도 못 되었다. 그의 별호가 백결서생인 점을 감안할 때 참으로 처참한 지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그는 점점 힘이 부침을 느꼈다. 이렇게 한없이 달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일단 숨을 곳을 찾도록 하자‘

이곳이 도무지 어딘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은신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때 무슨 조화인지 모르나 그의 눈에 시키먼 아가리를 떡하니 벌리고 있는 동굴이 보였다.

‘아, 하늘이 날 도우시는구나. 감사합니다.’

현재 위치는 상당히 외진 데다 지금은 사방이 어두운지라 동굴은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그저 큰 바위로만 여겨질 것 같았다.

‘일단 이곳에 숨어 기력을 돋운 후에 날이 새면 떠나도록 하자.’

이진구는 동굴의 제일 끝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히도 내상을 입지 않은 것이 확인되자 그나마 안도하는 마음이 일었다. 운기행공에 들어가면 부상당한 몸을 빨리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운기행공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니 그건 운기를 급작스럽게 중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중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를 정리한다고 해도 그 시간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절정의 고수가 아닌 바에야 거의 모든 무인들에게 적용되는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운기행공에 몰입한 이진구는 어느덧 중요한 지점을 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천지개벽이 일 듯한 우렛소리가 나더니 동굴 입구가 폭발하고 말았다. 벼락이 동굴을 강타해 버린 것이다. 그 소리가 어쩌나 크던지 운기조식하던 이진구가 번쩍 눈을 떴다.

우드드- 콰광! 푸스스-

큰일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동굴 입구가 매몰되고 있는 것이다.

‘어… 어… 저러면 안 되는데…….’

이진구는 당장 뛰쳐나가야만 했지만 지금 운기를 중단하면 심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지라 그저 마음만 졸이며 동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세… 이게 아닌데…….’

그의 마음이 조급해지자 몸을 감돌던 기가 탁해지며 요동쳤다. 잠시 후 그는 커억 하고 피를 토하며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흔히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을 때 기(氣)가 막힌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지금 이진구의 처지가 말 그대로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실제로 기가 막혀 내부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돌더미에 의해 입구가 완전히 봉쇄되고 어둠이 동굴에 가득 차게 되었을 때 그는 옆으로 고꾸라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편 표영은 풀과 땅의 흔적을 보고 차근차근 추적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진구가 도망치고 있는 방향은 산 밑이 아닌 산 위로 도망가고 있는 형편이었던지라 굳이 서두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더불어 비가 와서 질퍽해진 땅은 발자국을 또렷하게 남겨줘 추적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이젠 지칠 때도 됐겠거니 생각하며 여유있게 뒤쫓던 표영은 엄청난 굉음의 벼락 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번개가 어느 한 지점을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표영은 가까이에서 돌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비껴섰다. 그리고 잠시 후 단말마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안 돼∼!’라는 이진구의 처절한 외침 소리였다. 표영이 이진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가까이 이르렀을 땐 이미 굵직한 돌무더기가 가득 쌓인 후였다.

“허허, 이거 참. 매장돼 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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