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
표영이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눈을 뜨자 창에서 비춰오는 햇살이 따갑게 다가와 눈을 부시게 했다.
하지만 오늘의 햇살은 다른 날과는 사뭇 달랐다. 절망적으로 왜곡되어 비추던 햇살이 그렇게 따사롭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눈을 돌려 이부자리를 보니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옷도 바뀌어 있었다. 소매가 길게 늘어진 것이 조량의 옷임이 분명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표영은 밖으로 나가 길게 숨을 들이켰다. 마음이 변하자 세상도 달라져 있었다. 표영은 한 모금의 숨으로 기를 운행했다. 그러자 모든 진기가 거침없이 온몸을 주유하는 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전보다 내공이 더 진보한 것 같았다. 손을 휘젓고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고 있을 때 뒤에서 조량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지님, 일어나셨군요. 어젠 피를 토하시더니 괜찮아지신 건가요?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표영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돌봐주신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답니다.”
조량은 깜짝 놀랐다. 말을 한 것이다.
“어라? 거지님도 말을 하실 줄 아는군요? 하하하, 전 벙어린 줄 알았답니다. 야, 뜻밖인데요.”
아직 어린 조량의 악의없는 말이었다.
“하하하, 그러셨군요.”
표영도 밝게 웃었다. 조량은 거지님의 얼굴이 비록 더럽긴 해도 그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왠지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듯했는데 그건 피부 색깔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거지님, 말 편하게 하세요. 전 덩치는 이래도 아직 어리답니다. 동생같이 대하세요.”
“하하, 그래도 될까.”
“그럼요. 야∼ 이제 나도 형이 생겼네. 이곳에서는 또래 친구도 없고 엄마와 누나만 있으니 너무 심심하답니다. 자, 우리 여기 앉아서 얘기나 할까요?”
그때부터 조량은 쉴 새 없이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덩치는 곰처럼 큰데 작은 입술에서 쫑알쫑알 새어 나오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조량은 말 못하고 죽은 귀신이 붙기라도 한 듯 자신에 대한 이야기며 누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산의 풍경이며 산책하기 좋은 곳 등등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표영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다.
“근데요, 저에겐 걱정이 한 가지 있답니다. 이건 정말 큰 비밀인데 형에게만 이야기해 줄게요. 절대 이 이야기는 누나나 엄마에게 해서는 안 돼요. 알겠죠?”
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량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주로 약초를 캐러 다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좀 떨어진 산에까지 갈 때가 있어요. 저기, 저 산 보이죠? 꼭 말 머리 모양같이 생긴 곳 말예요.”
조량은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산을 가리켰다. 그곳의 정상은 조량의 말대로 말 머리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저 산 이름은 말 머리 모양이어서 마두산(馬頭山)이라고 불러요. 근데 저곳에는 아주 나쁜 산적들이 살고 있지 뭐예요.”
“음, 산적들이 너를 괴롭힌 모양이로구나.”
“많이 괴롭혔죠. 처음엔 산적들과 대판 싸웠어요. 서너 명 정도는 이겨볼 수 있겠는데 10명 남짓 달려드니까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더라구요.”
표영이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조량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힘 좀 쓰거든요.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어요. 산적들은 저를 때리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때리진 않더라구요. 저는 잡히자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죠. 근데 산적 두목이 제게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너, 우리와 같이 산적하지 않을래?’라구요. 전 화들짝 놀라 절대 할 수 없다고 했죠. 제 솜씨를 보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던 모양이에요. 짜식들, 그래도 사람 볼 줄은 알아가지구. 어쨌든 제가 산적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어르고 달래며 산적질도 할 만하다며 계속 꼬시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께 부탁받은 게 있어 그들 말이 아무리 꿀처럼 달아도 따를 수가 없었답니다. 아버진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제게 엄마와 누나를 지켜주라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제가 끝까지 산적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들도 포기했는지 절 그냥 보내주더라구요. 근데 마두산에 갈 때마다 저를 보면 산적하자고 졸라대서 요즘은 그곳으로 잘 가질 않아요. 그 산적 두목 말로는 일이 년 후에 두목급으로 만들어 주겠다고까지 하더라구요. 하지만 두목 같은 거 하면 뭐 하겠어요. 전 가족과 오순도순 있는 게 좋은데요.”
“하하, 동생은 마음이 아주 착하군. 음, 그럼 내가 오늘 형 된 기념으로 약속을 하지. 산적들은 내가 손을 봐주기로 말이야.”
표영의 말에 조량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정말요? 약속하신 거예요? 하하하.”
조량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농담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럼, 약속하구 말구.”
하지만 표영은 조량의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형! 내가 한 이야기는 절대 말해선 안 돼요. 알겠죠? 만약 이 이야기를 누나나 엄마가 듣게 되면 크게 걱정하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약초를 캐지 못하게 하실지도 모른다구요.”
표영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기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강호엔 정파들이 많이 있으면서도 그런 무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일까? 말만 정파일 뿐이지 않은가. 무공을 익힘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내가 방주가 되는 날에는 깨끗하게 정리를 해야겠다.’
그 후 조량과 표영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조영이 아침 식사하라며 부르자 안으로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자리를 일어서기 전 표영은 조량의 모친 연가려에게 공손히 말했다.
“이제 몸도 좋아진 듯하니 이만 떠나볼까 합니다.”
뜻밖의 말에 연가려는 걱정스런 얼굴로 만류했다.
“어떻게 그런 몸으로 떠나겠다는 거예요? 부담을 갖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혹시 우리가 뭐 서운하게 한 것이라도 있나요?”
“서운한 것이라뇨. 가족처럼 대해주셔서 마음이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답니다. 단지 이제 몸도 좋아지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연가려도 가만히 보니 표영이 전과는 다른 모습임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뭔지 모를 밝은 기운이 감싸고 있는 듯 보인 것이다. 그건 마치 어둠 가운데 있다가 밝은 햇살아래 나온 것만 같았다. 그녀는 표영의 말에서 단호함을 읽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동안 지켜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더군요. 하지만 아직은 젊은 나이임을 잊지 말아요. 젊었을 때의 고생은 오히려 값진 것이랍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용기를 잃지 말길 바래요. 저도 부족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길 두 손 모아 하늘에 빌어드리겠어요.”
“형, 정말 가실 거예요?”
표영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형이 생겨 좋았는데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떠나버리는 게 어디 있어!”
“하하, 량아. 나중에 만나거든 너는 이 형을 못 본 체하진 말거라.”
“그럼 당연하구 말구. 우리 나중에 꼭 만나자구. 형.”
표영은 정오가 되기 전에 조량의 집을 나섰고 조량은 표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표영은 조량의 집을 나와 언덕을 몇 개 넘은 후 산 위로 향했다. 진기가 충만한 상태라 한 발 한 발 떼는 게 마치 구름을 밟고 지나듯이 가볍기만 했다. 잠시 후, 산 정상에 오른 표영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끝자락에 섰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펄럭였다. 표영은 온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크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두 손을 입에 모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 멀리까지 소리가 나갔다가 다시 길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제자, 이제 강호로 나갑니다. 지켜봐 주실 거죠∼”
양떼구름 한 조각이 표영의 눈에 들어섰다. 순간 바람이 일었는지 구름은 그 모양을 바꾸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나타내겠습니다. 함께 가시는 겁니다. 알겠죠∼”
구름은 어느새 모양을 바꾸었는데 그건 껄껄껄 웃는 사부의 얼굴이었다.
-그래, 나는 너와 함께 하마. 하하하하.
표영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가시죠, 사부님. 하하하하!”
제8장 개방 방주로서의 위용
마두산(馬頭山)을 근거지로 두고 있는 칠마단(七馬團)은 오랜만에 그럴싸한 건수를 올리고 낮부터 술을 마셔대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꽤나 부잣집 것으로 보이는 아낙네들의 마차를 급습해 호위무사들과 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귀부인들과 하녀들까지 모두 가두어둔 터였다. 이제 실컷 술을 마신 후 여인들과의 잠자리만이 남은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칠마단의 최고두령인 양축의 45번째 맞는 생일이기도 했으니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크하하하! 술맛 기가 막히는구나.”
“얼마 만에 보는 여자더냐.”
“벌써 온몸이 근질근질하구먼. 컬컬컬컬.”
칠마단의 일곱 두령은 한마디씩 큰소리치며 한껏 들떠 있었다. 두목들의 기분이 그러하니 밑에 부하들도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자신들까지 그 여인들을 차지하진 못할지라도 이런 날은 통상 마을에 내려가 계집질을 하도록 두목들이 선심을 썼기 때문이었다. 질펀하게 먹고 마시며 정신이 없을 때였다. 삼두령 무대명이 언뜻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그의 눈에 10여 장(대략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떨거지 하나가 서 있음을 본 것이다.
‘어라? 저 거지새끼가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어찌나 추접한 몰골이던지 무대명으로서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술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고함쳤다.
“야! 거지새끼야! 거기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워낙 큰 소리였던지라 술을 마시던 산적들은 하나같이 놀라 무대명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갑작스레 등장한 거지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잡치기는 무대명과 같았다.
“어라, 웬 거지지?”
“클클, 요즘 거지는 산적에게까지 구걸을 하러 다니는 건가? 별 놈의 거지새끼를 다 보는구만.”
“말세야, 말세. 우리 산적을 뭘로 보고 이곳까지 와서 추접을 떤단 말이냐.”
“요즘 거지들은 영 싹수가 없군.”
“머리통에 쓰레기만 들어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 거냐! 콱 그냥 머리통을 빠개 버릴까 보다.”
역시 산적들이라 입이 거칠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거지는 그저 씨익 하고 웃을 뿐 그 외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때 최고두령인 양축이 호탕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으하하하하……. 거지 녀석이 배포가 있구나. 오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니 다른 날과는 달라야 되겠지. 야, 새끼야! 이리 와라. 오늘 기분이 좋으니 너도 한잔해라.”
최고두령의 말이 이렇게 나오자 다른 두령이나 부하들은 킬킬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거지를 타박하진 않았다. 하지만 거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심장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자식, 꼴깝떨고 있네.”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입술을 작게 오물거리며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는 또렷하게 모두의 귀에 박혔다. 이토록 자비를 베풀었건만 한낱 거지가 비웃어 버린 것이다. 너무 황당한 말이 거지의 입에서 나왔기에 모두는 아주 잠시 동안 시간이 정지한 듯 몸이 굳어져 버렸다. 술을 따르던 손도 중도에서 멈춰지며 술만 잔을 넘어섰고, 웃던 사람도 그 모습 그대로 정지해 버렸으며, 고기를 씹고 있던 게걸스러운 입도 고기가 절반 정도 삐쳐 나온 채 멈춰 서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잠시 후 모든 산적은 앞에 놓인 상을 뒤엎고선 광분에 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하들이 일시에 옆 자리에 놓아두었던 도끼며 사슬, 칼등의 무기를 들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멈춰라.”
최고두령 양축의 명령이었다. 양축은 젊은 거지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산적들의 숫자는 대략 100여 명이 넘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음은 거지의 정체에 대해 고심하게 만들었다.
‘뭐지, 저놈은? 대단한 고수이거나 미친놈일 것이다. 만에 하나 뜻밖의 고수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지의 나이가 새파랗게 젊다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고수일 가능성은 그만큼 적은 것이다. 그는 부하들 앞쪽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양축은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역시 두목다웠다. 두목이 정색을 하고 묻자 나머지 두령과 부하들도 왠지 모를 긴장에 사로잡혀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다렸다.
“나는…….”
고요가 사방을 장악했다.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꽤나 긴장했던지 침을 꿀꺽 하고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워낙 고요한지라 커다란 소리처럼 모두에겐 들렸다.
침 삼키는 소리는 마치 전염성을 지닌 듯 이곳저곳에서 연달아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다.
‘과연 누구일까…….’
산적들은 뚫어져라 거지의 입을 주시했다.
“나는… 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