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
제13장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다
심신평정을 끝으로 모든 수련이 마쳐졌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어느덧 2년이라는 기간이 지났다. 표영의 나이 이제 18세. 역대 최연소 견왕 등극자의 탄생이었다.
원구협과 표영은 마주 앉아 서로 말없이 차를 마셨다. 이제 내일이면 이별이다. 수만 가지 생각이 겹쳐 서로는 선뜻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표영은 찻잔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처음 얻어맞으며 어쩔 수 없이 제자가 되었던 때로부터 자신을 위해 호랑이와 늑대 등을 잡아오시던 사부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견왕지로를 이룬 후에는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뒤에서 한숨을 내쉬던 모습들. 그때는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니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사부님, 이제 저는 떠나지만 저에게 베푸신 하해와 같은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원구협은 굳게 입술을 닫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은 아쉬움으로 많은 말보다 더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놈하고 정이 든 게야. 이젠 혼자 지내야 하나.’
표영은 사부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의 울림을 느끼고 작으나마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부님, 제가 개방에 들어가면 그토록 원하시던 소원을 반드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원에는 반드시 저를 능가하는 인재가 있을 겁니다. 단지 지금은 이렇듯 훌륭한 사부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지 못하고 있는 것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허허… 녀석, 쓸데없는 소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기뻤다.
“제가 반드시 꼭 마음에 드는 놈으로 삼 년 안에는 보내도록 할게요. 그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아시겠죠?”
그 말에 끝내 원구협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이런 눈에 뭐가 들어갔나 보구나.”
그는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뒤돌아섰고 표영의 가슴도 뭉클해졌다.
“늘 견왕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도록 하여라. 내 비록 너를 떠나보내자니 아쉬움이 남으나 후회는 없다. 개방에 들더라도 배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기 전 너의 명성이 중원을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느냐?”
표영은 길을 가는 동안 사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다짐했다.
‘내 반드시 후계자를 찾아 보내드리고야 말리라.’
그런 다짐으로 한나절을 걸어갈 때였다. 표영의 눈에 두 중년인이 십여 마리의 개를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그저 사람만 걸어온 것이라면 표영의 관심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개가 따라오는 것이라 견왕으로서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개장수들인가? 이 길로 쭉 따라가면 사부님의 거처가 나올 텐데 이들은 사부님을 뵈러 가는 걸까?’
표영은 일단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길가에 앉아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개들이 아주 훌륭하군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두 중년인은 젊은 거지가 말을 걸어오자 약간 떫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개가 훌륭하다는 말에 다소나마 상대가 되겠다 싶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그중 한 명이 말했다.
“그래도 자넨 개를 볼 줄 아는군. 이 개들은 보통 개들이 아니지.”
표영이 개들을 자세히 보니 덩치는 호랑이만 했고 눈의 매서움은 늑대를 닮아 있는 것이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개들은 표영을 노려보며 약간은 긴장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보통 사람을 만났더라면 이미 으르렁거렸을 것이지만 상대의 기도가 상극의 기운을 은은히 발산하고 있음을 감지한 탓에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실제 표영이 심신평정의 단계까지 완성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그 기운을 온전히 쏘아냈다면 이처럼 개들이 뻣뻣하게 바라보지도 못했으리라.
“우린 구천쌍인(狗天雙人)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개장수지. 사천성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들어보았나?”
“아하∼ 구천쌍인!!”
표영의 감탄사에 그들의 얼굴이 화사하게 변했다. 하지만 표영의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못 들어봤는데요. 흐흐, 그런데 이렇게 먼 곳까지 특별히 오실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개장수들은 농락당한 것 같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거지의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우스운 모양이 될 듯싶어 꾹 눌러 참고 말했다.
“하하… 거지 친구, 자넨 아직 견식이 짧기 그지없군. 구천쌍인을 모르다니.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려주지. 장령 땅에 헛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개장수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실력을 보여주려고 가는 길이라네.”
이들의 명성은 사천에서는 그런대로 이름을 날리는 개장수들이었다. 둘은 형제로 형의 이름은 청후(晴朽), 동생은 청보(晴洑)라 하는데 구천쌍인(狗天雙人)이라는 별호도 스스로 지은 것으로 고작 마을에서만 알아주는 인물들이었다. 개장수를 시작한 것도 이제 10여 년 정도 되었을 뿐이지만 나름대로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한데 지금은 중원에서 큰 명성을 날리고 있는 원구협에게 도전해 천하 제일의 개장수라는 명예를 얻고자 이렇게 길을 나선 것이었다. 이렇듯 허망한 생각을 가지고 원구협을 찾아가는 무리들은 1년이면 대여섯 무리들이 꼭 있었다. 하지만 정작 돌아갈 때는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 깨닫고 모두들 쓸쓸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표영은 두 사람의 허황된 말에 한 손으론 입을 틀어막고 또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개장수들이 견왕인 사부님과 맞먹으려 하다니… 쯧쯧, 봉천산의 비천폭포를 대적하기 위해 오줌발을 세우려 함과 반딧불들이 달빛을 이겨보겠노라고 작당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실력을 어떻게 보인다는 겁니까? 가서 싸움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하하, 우리가 어찌 무뢰배들처럼 주먹다짐을 하겠나. 진정한 개장수를 가리기 위해 각기 가장 용맹한 개들을 풀어 서로가 얼마나 그 개들을 잘 다루느냐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지. 원구협이라는 노인네도 이제 개들에게 물려 처참한 몰골로 변할 시간도 멀지 않았다네.”
“푸하하하하……!”
표영은 하잘것없는 개장수들이 사부님의 존함을 들먹거리자 가소로움을 느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바로 머리를 굴렸다.
‘사부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왔는데 네놈들을 선물로 바쳐야겠구나.’
개장수 청씨 형제들은 원래 우유부단한지라 젊은 거지의 돌연한 웃음에 일순 분노해야 할 것인지 참아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했다. 그 틈에 표영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런 시건방진 녀석들, 감히 어디를 찾아가겠다는 것이냐!”
당장 말투가 하대(下待)로 바뀌었다. 높임말 따윈 쓰고 싶지도 않았다.
“이 거지 같은 놈이 미쳤나. 갑자기 웬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
개장수 청후가 표영의 하대에 화를 참지 못하고 당장에라도 개들에게 명령을 내릴 기세로 소리쳤다.
“흐흐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너희들이 찾는 원구협 어르신의 수제자인 표영 어르신이시다. 내 너희에게 진정한 견왕의 길을 보여주마.”
“오호라! 그래서 이렇게 시건방진 행동을 보였구나. 흥, 좋다! 썩을 놈아, 먼저 네놈의 그 흉측하게 움직이는 턱에 이빨자국을 남겨주마.”
청씨 형제는 ‘오냐, 잘 걸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열 마리의 개들에게 명령했다.
“저놈을 물어뜯어라.”
그들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개들은 호랑이 추적용으로 쓰일 만큼 용맹하고 사나운 성정을 지녔기 때문에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개들은 주인의 명령을 받자 두려움을 떨쳐 내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표영은 확실한 솜씨를 보여주어야만 이들이 다시는 허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구혈잠혈의 묘용을 운용해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은 핏빛 살기로 가득 차며 개들을 감쌌고, 덤벼들던 개들은 온몸을 두렵게 만드는 진한 피 냄새로 인해 달려오다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양 부르르 떨더니 땅바닥을 구르며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끼깅… 끼깅…….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명의 개장수는 이 황당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뭐, 뭐냐……!’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은 표영이 이런 묘용을 일으켰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단지 개들이 갑작스럽게 미쳐 발작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몽둥이를 들고 개들을 후려 팼다.
“가서 물어, 이놈들아! 우리 꼴을 우습게 만들다니. 이게 무슨 추태냐!”
하지만 개들은 전혀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깨갱대며 땅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하하하… 이 어리석은 개장수들아, 이 개들은 미친 게 아니다. 단지 내가 두려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거지같은 놈아, 조용히 해라. 이 개들이 미친 것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이라고 뽐내다니, 이런 비열한 자식.”
“하하하. 그럼 내가 멈추도록 하지.”
표영이 살기를 어느 정도 거두고 개들을 향해 말했다.
“이리 와라.”
살기가 거두어지자 개들은 아주 오랫동안 길들여진 것처럼 표영에게로 다가가 헥헥거리며 꼬리까지 살랑거리며 아양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발작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게다가 덩치가 호랑이만하고 얼굴이 험악하기 그지없는 개들이 어떻게 하면 귀엽게 보일까 노력하는 모습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다.
“이런 개새끼들을 봤나! 이제껏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육시킨 주인은 안중에도 없고 뭔 짓거리들이냐!!”
그래도 개들은 청씨 형제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헥헥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듯 표영의 다리에 비벼댔다.
표영이 각기 머리를 만져 주자 개들은 좋아 죽겠다는 듯 앞발을 들고 온갖 어리광을 다 떨었다.
“하하, 착한 녀석들이로구나.”
“으어억… 이거 뭐냐, 대체…….”
청씨 형제는 경악성을 토해내며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얼마나 피땀 흘려 훈련시킨 개들이던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배신하다니…….
그들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이 개새끼들아… 니들이 그럴 수 있어. 그러고도 개새끼라고 할 수 있냔 말이다.”
그때 표영이 개들을 향해 근엄하게 말했다.
“자,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저기 두 사람을 혼내주거라.”
표영이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와앙 물어버리라는 시늉을 하자 개들은 흉악한 기세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곤 있는 힘껏 달려 청씨 형제를 사방으로 몰아치며 물어버렸다.
쿠아앙… 으르르… 그르르……!
“으악! 사람 살려!”
“이놈들아, 정신 차려!”
허벅지며 가슴이며 팔이며 10마리의 개들은 인정사정없었다. 개들의 행동으로 보건대 각오가 아주 남다른 듯했다. 오로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물어뜯는 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견왕에게 잘 보여야만 된다.]
[말 잘 들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행동하면 그것으로 바로 국그릇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주인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내가 먼저 물어뜯을 거야.]
[아니야, 내가 먼저야.]
이런 투철한 사명감과 불타는 의지로 덤벼드는 개들 앞에 청씨 형제는 온몸을 물어뜯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는 거야, 이 개새끼들아. 흑흑… 으아악……!”
“정신 차려… 개새끼야. 그동안 내가 너희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었지 않느냔 말이… 크억…….”
그들의 말은 아무런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 개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자각하고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믿었던 개새끼들한테 배신을 당하… 흑흑…….’
둘은 온 힘을 다해 개 이빨을 뿌리치고는 오던 길로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흑흑… 내 앞으로 다시 개를 키우나 봐라.”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개새끼들아!”
절규하듯 외치며 도망가는 청씨 형제를 개들이 그 뒤를 맹렬히 추적하려 할 때 표영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돌아와.”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개들은 견왕의 말이었기에 바로 뒤돌아서 다가오더니 꼬리를 살랑거렸다. 방금 전까지 흉폭함을 드러낸 개들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푸하하하하… 어느 누가 있어 견왕지로의 길을 따를 자가 있겠는가.”
표영은 가까이에서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개들의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 개들은 사부님께 갔다 드리자. 오늘 있었던 이야기도 해드리고 나의 정성 어린 선물로 드리는 거야. 흐흐흐.’
생각을 정리한 후 표영은 개 중에 덩치가 제일 큰 놈의 등에 올라탔다. 다른 개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견왕을 태우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부러운 시선으로 동료 개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견왕을 모시다니… 우워워… 좋겠다.]
표영이 견왕봉을 꺼내 들고 크게 외쳤다.
“가자, 개자식들아. 음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