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5/199)

 # 4

4.

“자, 꿈을 통해 만성지체에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제 두 번째 작전으로 들어간다.”

천계의 주관자 대천신은 옥색 광채를 출렁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 천계의 구름 바다 화면을 통해 만성지체를 가진 아이의 탄식을 살펴본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아이 엄마의 꿈속으로 들어갈 테니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녹색 광채에 휩싸인 녹운신이 나서며 말했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거지가 되도록 해야 하기에 거지 차림새가 좋을 듯하옵니다. 서로 상호 작용을 일으켜 큰 효과를 발휘하리라 생각하옵니다.”

여러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음……. 좋은 생각인 듯싶습니다. 처음 꿈에 등장하는 장면만 멋지게 연출된다면 필히 그녀는 뜻을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구나.”

대천신도 수긍하듯 말하자 옥색 광채가 회오리쳤다. 그때 청운신이 나섰다.

“제 생각은 다르옵니다. 그녀는 아들이 거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에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도 모르옵니다. 세인들은 신비한 모습에 위축되는 경향이 있으니 부디 대천신님께서는 현명한 선택을 하시옵소서.”

대천신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머지 십삼성존이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청운신의 말은 맞지 않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내면을 들여다볼 것이옵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청운신을 몰아세우자 대천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됐다. 그만 해라.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따라 거지 차림으로 꿈속으로 들어가겠다.”

대천신이 결정짓자 모든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현명하신 선택이옵나이다.”

뭇 대신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표영에게 맞추어진 꿈의 좌표를 그의 모친에게로 다시 설정하고 대천신께서 입고 등장할 의복을 준비하는 한편 머리 모양을 가다듬는 등 정성을 쏟았다.

“오늘로써 그녀의 기원이 끝이 났다. 내 이제 처음으로 만나러 가는 길이니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야.”

“다 되었사옵나이다.”

대천신은 평상시 옥색 광채에 휩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지상계의 인간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녹운신의 말에 대천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화경(天華鏡)!”

천화경이라 외치자 푸른 물결이 출렁이며 허공중에 신비스런 모양의 거울이 둥실 떠올랐다. 거울에 전신을 비춰 본 대천신은 좀 추접스럽긴 했지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저분한 옷, 옆구리에 걸린 술 호리병, 머리는 산발이었다.

“아무래도 염소수염도 적당히 나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

대천신의 말이 떨어지자 천화경에 원하는 만큼의 염소수염이 비춰지며 모습이 변했다.

“음, 좋아∼. 자, 그럼 그녀에게로 가보자.”

오랜만에 직접 출연하는 것이니만큼 대천신도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5천 번의 정성 어린 기원을 마친 화연실은 아쉬움과 서운함, 그리고 한편으론 개운함을 느꼈다.

“수고했소, 부인.”

늦은 밤 표만석은 침상에 앉아 초췌해진 아내의 얼굴을 보고 따뜻이 손을 잡았다.

“정말 하늘도 무심하군요. 어찌하여 아무런 응답도 주지 않으시는지. 두 달 정도 쉬었다가 다시 기원을 올리도록 해야겠어요.”

화연실의 마음은 단호했다. 하지만 표만석은 또 하겠다는 말에 놀라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 다시 하겠다는 것이오? 이제 그만 하면 되지 않겠소. 넉넉한 마음으로 몇 년간 기다려 봅시다. 언젠가 하늘에서 기별이 오지 않겠소.”

화연실은 대수롭지 않게 들으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피곤해서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당신도 어서 주무세요.”

표만석은 두 달이 지나고 또 고생할 부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고집이 황소고집인 줄 알기에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후…….”

그저 한숨만이 나을 뿐이었다.

화연실은 침상에 눕자마자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꿈속에서 아련히 안개가 일며 흐릿하게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자 화연실은 가슴이 떨렸다. 이건 필시 하늘의 응답인 것이다.

가슴 벅찬 기대와 흥분 속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데 드디어 모든 안개가 걷히고 확연히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네가 그동안 부르짖어 찾았던 그 하늘이니라. 내 너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노라.

기대로 가득 찼던 화연실의 얼굴에 작게나마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하늘이라며 나타난 이가 거지 차림이라니. 게다가 술 호리병까지……. 신선의 모습을 상상했던 그녀로서는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진정 하늘이라면 외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여긴 그녀는 공손함을 잃지 않고 답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의 정성이 헛되지 않았군요.

거지 차림의 대천신이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너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고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으나 그 마음의 간절함이 어떠한지 보기 위해 기다려 왔던 것이다.

-부디 간청합니다. 저의 아들을 보통 사람과 같이 살아가도록 해주십시오.

그녀는 넙죽 절하며 간청했다.

-잘 들어라. 모든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함이 아무 의미 없이 이루어지는 것 같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바람 한 점, 티끌 하나가 움직이는 것에도 질서가 있음이야. 너의 간절함은 알지만 순식간에 변화시킨다면 우주의 질서가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너의 둘째 아이는 만성지체를 타고났으니 오직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굳게 마음먹고 세상에서 천한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라.

거지 노인의 음성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화연실은 기대했던 대답 대신 예전에 소공공이 들려준 말을 듣게 되자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이제까지 들인 공력을 생각했을 때 이런 대답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생각되길 나타난 노인의 차림새가 거지의 모습이라 이건 필시 하늘의 꿈이 아니라 단정했다.

-흥, 이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하늘은 무슨 하늘이냐. 넌 악귀지. 너의 그 거지 꼬락서니를 보고 진작에 알았어야 했건만 괜한 기대 속에 말대꾸를 해준 내가 잘못이다. 왜 하필 내 꿈에 나타나 장난을 치는 것이냐.

태도가 돌변하여 매몰차게 쏘아붙이는 화연실의 말에 대천신은 황당함으로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악귀라니……! 하지만 대천신은 곧바로 태연한 척 크게 웃었다. 원래 난처할 땐 크게 한바탕 웃노라면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과연 웃음은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대천신은 여세를 회복하고자 말을 이었다.

-하하하……. 어찌 여인이 되어 그리 입이 험할꼬. 나는 진정 하늘이니라.

하지만 그것은 대천신만의 착각이었다. 화연실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대꾸를 미루었을 뿐이었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천벌이 두렵지 않더란 말이냐. 악귀면 악귀답게 행동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농을 지껄이더란 말이냐!

대천신의 얼굴은 점점 검게 변해갔다. 일이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허허……. 나는 삼라만상을 다스리…….

미처 변명의 말을 화연실의 일갈에 끝맺지도 못했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내 꿈에서 어서 나가, 이 악귀야!

-나, 나는 지, 진짠데…….

-어허! 소금을 뿌려야 제정신을 차리겠느냐. 이 못된 놈 같으니라고.

-난… 난…….

대천신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황망히 구름과 안개 속에 휩싸여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화연실은 옆 탁자에 놓아둔 물그릇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며 씩씩거렸다.

“별 해괴한 악귀 놈도 다 봤군. 감히 하늘을 사칭하다니… 고얀 놈 같으니라고.”

한편 대천신은 꿈속에서 빠져나와 옥빛에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호통을 쳤다. 분노의 상징이었다.

“이놈들아, 거지 모습으로 가서 이 무슨 낭패냐!”

아까까지 거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던 열세 명의 대신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희들이 그러면서도 성존(星尊)이라 불릴 수 있더란 말이냐! 이 고얀 놈들. 받아라. 뇌성벽력(雷聲霹靂)!!”

순간, 공중에서 뇌성 소리와 함께 휘황찬란한 빛이 발생하며 벼락이 꽂혔다.

으르르릉- 꽈광-.

빠지지직-.

“으아악……!”

무지갯빛을 발산하는 대신들은 벼락에 맞아 온몸을 고통스럽게 뒤흔들다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오직 유유히 서 있는 이는 거지 차림을 반대했던 청운신뿐이었다.

푸스스…….

쓰러진 십삼성존은 각기 몸에서 희멀건 연기가 피어 오른 가운데 후들거리며 일어났다. 분노한 대천신이 말했다.

“내일은 제대로 준비하도록, 알겠나?”

“이 정도면 그럴싸해 보이느냐?”

대천신은 천화경 앞에 서서 만족한 듯 말했다. 천화경에 비친 모습은 그야말로 선풍도골의 신선이었다. 그 속엔 절로 존귀함이 묻어났고 얼굴 가득 덕망과 신비함이 품어져 나왔다.

“아주 훌륭하옵나이다.”

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대천신은 이번에는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숨을 골랐다.

“좋다. 이제 들어가도록 한다.”

천화경에서 백색 광채가 뿜어 나오며 대천신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천화경이 화연실과 대천신을 연결해 주었다.

-오호… 하늘이시로군요.

꿈속에서 화연실은 휘황찬란한 신선의 모습을 보고 감동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질 순간인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답니다. 어제는 이상한 악귀 놈이 와서 마음이 심란했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기쁜 일이 있을 것을 안 악귀 놈의 시샘이었나 봅니다.

대천신은 뜨끔하여 눈빛이 흔들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대층 웃음으로 마음을 털어내고 말을 이었다.

-어제 악귀가 너에게 찾아갔음을 알고 있다.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역시 하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군요.

대천신은 여유를 찾고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익히 하늘에서 너의 간절함을 들어 왔다. 너의 아들은 만성지체를 타고났음을 잘 알고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운명의 굴레에 매인 사람들이 참으로 많으니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우주 삼라만상의 조화 속에서 나타난 현상들이기에 단순히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너의 간절함을 듣고 이렇듯 나타났으나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크게 없느니라. 부디 내가 명한대로 힘써 보도록 하여라. 아이를 천한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라. 얼마나 험한 길을 가느냐에 따라 삼 년, 혹은 오 년 안에 만성지체의 업보가 풀리고 그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니라.

화연실이 공손한 태도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젯밤에 꾼 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분명 얼굴과 차림새는 하늘과 땅 차이었지만 말의 뜻은 오십보백보였다.

대천신은 말을 끝내고 가만히 보고 있는데 화연실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음…….

화연실의 불편한 듯한 소리에 대천신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너…… 어제 그놈 맞지? 이게 이젠 신비스러운 척하고 나타나 사람을 홀리려 하다니……. 내 아들이 거지꼴이 되는 것이 그리도 소원이더란 말이냐! 이 고얀 놈 같으니라고. 썩 꺼지지 못할까! 앞으로 한 번만 더 나타났다가는 내 평생토록 잠들지 않겠다!

-헉! 아,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냐.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네놈이 악귀가 아니라면 어찌 어제 그놈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건 천계의 질서 때문에…….

목 메인 소리를 내봤지만 화연실은 분노로 더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꽥∼ 입 닥치지 못해. 어서 꺼지란 말이야. 이 나쁜 악귀야!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대천신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녀석들이 악귀건만……. 왜 이리도 일이 안 풀리는 거냐.

대천신은 힘없이 스르르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천화경의 빛이 거두어지고 대천신은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못한 채 넋을 잃고 멍해졌다.

“허허…….”

천계의 대신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눈치만 살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어떻게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이 방법으로는 안 되겠다. 끙…….”

한참을 고민하던 대천신은 힘겹게 입을 얼었다.

“청운신과 녹운신! 당장에 지상계로 내려갈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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