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0
귀환 마교관
650화(외전 23)
쿠우오오오!
거대한 수룡이 계곡을 따라 굽이치며 덮쳐 왔다.
촤아아아아아!
“크우웃!”
“으아악!”
어마어마한 물줄기에 복면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휩쓸려 내려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 물줄기를 이용해서 지금 상황을 벗어나려는 속셈이 더 강했다.
흑립인과 수장 복면인 역시 물줄기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계곡물이 왜 이렇게 불어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등가휘가 하늘로 신호탄을 쏘아올린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연우경과 석탄강은 정체불명의 적들을 뒤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계곡을 따라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폭포수가 너무 거셌다.
제아무리 무공 수위가 뛰어나더라도 자연의 힘을 이기기는 어렵다.
수상비를 펼쳐서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법이다.
강기를 아무리 부린다고 한들, 이렇게나 많이 쏟아져 내리는 물길에 휩쓸렸다가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만큼 급류는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사비란 역시 사부들의 추격을 말렸다.
연우경과 석탄강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확실히 달아나기에는 좋은 기회가 될지 몰라도, 추격하기에는 까다로운 상황.
쿠쿠쿠쿠쿠쿠쿠쿠!
거대한 수룡은 연신 몸을 뒤틀어대며 계곡 주변을 초토화시켜 갔다.
마치 산신이 계곡에서 칼부림을 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오른 사비란 곁으로 등가휘가 내려서며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하군요. 이 정도일 줄이야.]
[피는 못 속이는 법이지.]
사비란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내심 놀라고는 있었다.
옹수령이 이렇게 커다란 수룡을 만들어낼 줄은 몰랐기에.
그리고 정령술은 다시 봐도 쉽게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어쨌거나 덕분에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고는 있었다.
한 차례 거대한 수룡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다시 평소처럼 계곡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휘리릭, 탁!
바닥으로 내려선 연우경이 계곡 끝자락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저놈들의 정체를 밝혔어야 했는데. 아쉽게 됐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그의 곁으로 내려선 석탄강도 이를 빠득 갈았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슬쩍 서로를 보고는 곧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때 한쪽에서 유송령이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해 보아라. 네가 어째서 본문의 비기를 알고 있느냐?”
“아… 실은… 석 공자와 몇 번 펼쳐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과?”
유송령이 눈썹을 치뜨자, 연설연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송령이 대번에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몰래 내 아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냐?”
그러자 마침 목단화가 다가오더니 날카롭게 따졌다.
“야! 너 지금 누구한테 큰소리를 치는 거니?”
“흥! 보면 몰라? 교육이 제대로 안 된 어느 집 딸년을 계도하는 거잖아?”
“뭐가 어쩌고 어째? 네 아들은 교육이 잘 돼서 남의 귀한 딸을 꼬드기는 거냐!”
“꼬드기긴 누가 꼬드겨! 네 딸이 먼저 꼬리를 쳤겠지!”
“하! 기가 막히네. 네가 봤어? 봤냐고!”
“흥, 안 봐도 뻔하지.”
“오냐, 오늘 내가 네년 모가지부터 따야겠다!”
“기다렸다! 칼 맛 좀 보여주지!”
두 중년 여인이 사납게 기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사비란이 한숨을 내쉬고는 나섰다.
“두 분. 이제 그만 하시죠?”
“싫다!”
“안 된다!”
목단화와 유송령이 동시에 소리쳤다.
사비란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등가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들으라는 듯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부단주, 이건 내 힘으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니, 아빠한테 전서 좀 보내 줘.”
“알겠습니다! 궁주님께 즉각 알리겠습니다!”
그러자 연우경과 석탄강이 나서며 말리기 시작했다.
“어허, 뭐 그런 일을 보고하고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싸움인 것을….”
“그렇고말고. 당신도 이제 그만해. 모처럼 비란을 만났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좀 그렇잖아.”
그제야 목단화와 유송령이 분을 삭이고는 씨근거리며 물러났다.
유송령이 사비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데, 백화단이 여긴 웬 일이냐?”
“그러게. 원래 다른 목적이 있어 이곳으로 왔다던데.”
석탄강도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사비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우선 자리를 옮기지요. 네 분 모두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비란의 말에 네 사람은 영 불편한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
“절대 안 된다!”
“그렇고말고. 불가!”
연우경과 석탄강이 동시에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사비란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유가 뭘까요?”
“그 임무에 석검영이 함께 한다는 게 이유다.”
“연가의 자식과 내 자식을 같은 물에서 놀게 할 수는 없지!”
사비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물에 제가 있습니다, 석 사부님.”
“커험! 그렇다고 해도 불가다.”
“네 분은 이번에 힘을 합쳐 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정체불명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그렇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연우경과 석탄강이 차례로 말했다.
옆에 앉은 목단화와 유송령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란아, 네 뜻은 알겠지만 우린 아직 받아들이기가 힘들단다.”
“그래,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담을 쌓고 살았지. 그게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진 않는단다.”
사비란이 네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시는 거예요? 한때 네 분은 누구보다도 돈독한 사이였잖아요.”
“그건….”
연우경이 말을 하다 말고 침묵했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가 서로를 이렇게도 미워했을까?
네 사람이 서로 아는 게 있냐는 듯 번갈아보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유송령이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 감정만 남는 경우가 많지. 이유도 모르지만, 분하고 괴로운 감정만. 우리가 그런 경우인가 보다.”
“그럼 좋은 감정도 남아 있겠군요?”
“글쎄.”
유송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탁자 옆에 세워 둔 거신도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곱게 땋은 수실의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사비란이 말했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석검영과 연설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석검영이 빠진다면, 내 딸을 보내 주마.”
연우경의 말에 유송령이 이에 질세라 말을 이었다.
“누가 할 소리! 저 연가의 딸이 집구석에 처박혀 있겠다면 내 아들을 보내 주마.”
“송령…! 말을 함부로 하다간 제 명에 못 죽어.”
목단화가 고리눈을 뜨고는 으르렁거렸다.
“어디 네 명줄은 얼마나 긴지 시험해 볼래?”
유송령 역시 미간을 팍 구기고는 목단화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서로의 자식을 보내겠다고 싸워대기 시작했다.
“란아, 흑천도가의 사술 따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내 딸이라면 분명 임무에 도움은 될 것이다.”
“란아, 그 말 들을 필요도 없다. 섬검목가의 검술은 개나 줘버리렴. 애초에 너도 그걸 배우는 게 아니었어. 오히려 네 무공 수양에 방해만 될 뿐이란다. 그러니 내 아들을 데려가라.”
연우경의 말끝에 유송령이 말했다.
연우경과 목단화는 연신 흑천도가의 무공을 깎아내리며 힐난했고, 석탄강과 유송령은 섬검목가가 옛 위명에 기댄 채 조금도 발전이 없다며 무시했다.
사비란은 네 명의 사부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어찌 보면 힘들게 일을 꾸민 보람이 없는 것 같아서 힘이 빠질 만도 했지만, 그녀는 시종 담담했다.
어차피 유송령의 말대로 수십 년 동안 쌓은 담벼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원한 것은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다.
오래 전 네 사람이 쌓은 우정의 탑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처럼.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이들 사이에 쌓인 담벼락에도 미세한 균열이 생겼음은 분명하리라.
이제 그 담벼락을 완전히 무너뜨릴 강력한 한 방을 날려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방은 역시….
‘이럴 땐 아빠의 방식이 최고지.’
생각을 마친 사비란이 불쑥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말이냐?”
네 사람이 사비란을 돌아보았다.
사비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기를 하는 거예요.”
“내기?”
“네. 비무를 하는 거죠. 비무를 통해서 이긴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거죠. 이게 무인답고 좋지 않나요?”
“음….”
네 명의 사부가 서로를 번갈아보며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를 무시하고 힐난했지만, 막상 서로에게 도검을 겨누자니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끼리 비무를 해서 이긴 사람의 자녀를 데려가겠다는 뜻이냐?”
그러자 사비란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비무 상대가 다릅니다.”
“하면?”
네 명의 사부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비란을 보았다.
사비란이 딱 부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저와 비무하시는 겁니다. 네 분이.”
“뭐라고?”
“네 분이 저와 비무를 해서 이기면 제가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저를 제압하신 분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지요.”
사비란이 다시 한 번 말하자, 네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번갈아보았다.
연우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네. 대신 제가 이기면 제 의견에 무조건 따라주세요.”
“허어!”
연우경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비란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아닌가?
아무리 청출어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녀가 사비강의 딸이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한다.
그렇다곤 해도….
사비란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저는 섬검목가와 흑천도가의 무공만 사용하겠습니다.”
“뭐라?”
“어때요? 해보시겠어요? 제 제안이 싫으시다면 두 자녀를 모두 데려가겠습니다. 궁주님의 명이니까요. 저는 두 분께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허어, 맹랑한 것.”
석탄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우경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제자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랜만에 이 사부와 대련을 해보자꾸나.”
“나도 받아들이마. 이 기회에 똑똑히 보고 배우렴. 섬검목가는 흑천도가에 견줄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유송령이 거신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비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모두 받아들이신 걸로 알겠습니다. 참고로 전 섬검목가와 흑천도가의 무공만 사용할 겁니다.”
**
휘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다섯 사람이 너른 공터에 서 있었다.
네 사람이 한 사람을 포위한 듯한 모습이었다.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란이었다.
연우경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비무보다는 수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려무나.”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럼 란아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게 어떻겠나?”
연우경이 석탄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석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을.”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사비란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그 순간 네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저건… 본가의 무공이 아닌데?’
하지만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사비란이 말을 덧붙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네 사부님께 배운 무공만 사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