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9
귀환 마교관
619화
사비강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거슬러 오르는 시간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모든 현상을 즉각적으로 이해하며 관망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관찰했다.
바리탄과 싸우던 순간, 멸마궁을 세우고 능운파와 싸워서 구윤을 구출하던 순간, 혈사련에 들어가 신생조를 계도하던 순간들, 천멸대를 이끌고 감찰대 활동을 하고, 정사대전을 겪었던 과정….
시간은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회귀 직후 특목반을 가르치던 시간들을 지나 회귀하기 직전 마왕에게 죽던 상황, 마계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 남았던 시간들과 마계로 납치되기 전의 상황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지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조금 주의를 기울여 보니 다른 자들의 인생도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보인다는 표현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저절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는 사비강에게 공력을 나눠 준 자들의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은 다시 문어발처럼 관계를 형성하며 퍼져 나갔고, 온갖 다양한 잡음 속에서 시간의 물결이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까지 지났다.
그렇게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지만, 사비강은 그 모든 시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고대 중원을 지나, 원시 시대를 지났고, 인류가 생존하기 전의 시간을 건너가 이 땅이 탄생하기 전까지 다다랐다.
어느 순간, 사비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이 온통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암흑은 어머니의 자궁처럼이나 포근하고 안락했다.
잠시 후.
꾸우우우웅!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저만치 어둠의 끝에서 빛이 파생했다.
다음 순간, 주변으로 우주가 확 펼쳐졌다.
수많은 별들이 사비강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허공에 뜬 사비강은 발아래에 아득하게 빛나는 푸른 별을 바라보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곳이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중원이 있는 별이라는 것을.
사비강은 양손을 바라보다가 활짝 펼쳤다.
‘이것이 만해경…!’
사비강이 두 팔을 벌리자,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양손이 흡입력을 가진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빛 무리로 변해 그의 양손으로 빨려들어 왔다.
빛은 곧 사비강의 온몸을 가득 채워 갔다.
마침내 그의 전신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어둠이 물러갔다.
타란트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웠던 그 존재들은 보이지 않았다.
레드 드래곤도, 마령혼도, 암흑의 악신도.
단지 사비강이 환하게 빛나는 몸으로 정면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주 잠깐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많은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꼿꼿하게 선 사비강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기운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존재감만 있을 뿐.
강함도 약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그의 존재감과 분위기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앞서와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사비강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그대로 선 채로 잠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위이이이이이잉!
베르타스가 몸을 떨었다.
타란트는 더 이상 사비강에게 시간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말을 섞는 것도 이제는 사치다.
뭔가 변했다.
눈을 감은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아냈다.
뎅그렁…!
화살촉 대신 장착된 기기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기기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사비강으로부터 어떤 변화를 이끌어낸 게 분명했다.
타란트는 베르타스를 움켜쥐었다.
죽인다.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타앗!
그가 바닥을 차며 빛살처럼 날아갔다.
쒸아아아아아!
베르타스가 무서운 속도로 사비강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사비강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뜨지 않았다.
‘끝이구나. 슈비츠!’
타란트는 사비강의 마지막을 확신했다.
베르타스의 검봉이 사비강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다.
따아아아아앙!
청명한 금속성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타란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분명 심장을 찔렀는데, 검이 더 이상 나아가질 않는다.
대신 검신을 타고 떨려오는 강렬한 진동만이 팔을 지나 온몸을 훑는다.
“크읏!”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타란트가 주춤 물러나려는데.
탁.
그가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사비강이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손으로 베르타스의 검신을 잡은 채.
마치 종잇장을 집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자세로.
타란트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시간 동안 마족들이 지겹도록 되뇌곤 하던 말이 스쳐 갔다.
‘어찌 한낱 인간이…?’
우우우우우우웅…!
사비강의 손에 잡힌 베르타스가 검신을 격렬하게 떨어댔다.
스윽.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검신을 옆으로 치웠다.
마치 주렴을 걷어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
타란트의 팔뚝을 타고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크이익…! 노옴…!”
어금니를 빠득 갈았지만 도저히 사비강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다.
마치 아이가 어른을 이기려드는 것만 같은 굴욕감.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안간힘을 쓰는 타란트를 노려보았다.
“그새 성격이 꽤나 급해졌군. 느긋하게 즐기면서 절망을 맛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닥쳐라, 슈비츠!”
타란트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그대로 몸을 회전했다.
휘이이이이잉!
돌풍을 일으키며 타란트의 몸이 빙글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배후에는 본능의 악신이 현신하면서 힘을 더했다.
그러나…
쩌어엉!
이번에도 베르타스는 사비강의 손날에 막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타란트의 눈동자가 커지는 순간, 사비강이 그대로 일장을 뻗어냈다.
꽈아아앙!
“크아아악!”
그대로 튕겨 날아간 타란트가 바닥을 구르면서 미끄러지더니 용암이 흐르는 곳으로 빠졌다.
철퍼덕! 치이이이익!
불길이 그의 전신을 휘감아 오르면서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타란트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는 폭열(爆熱)의 악신으로부터 가호를 받는 몸이었다.
“이런 건방진 노옴!”
타란트가 분노를 터뜨리면서 베르타스를 휘둘렀다.
쒸아아아아아앙!
그러자 이번에는 폭열의 악신이 현신하면서 거대한 손으로 용암을 집어 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아!
강줄기 같은 용암이 그대로 솟구쳐 오르면서 사비강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사비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고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쿠쿠아아아아아!
거침없이 쏟아지던 용암이 사비강에게 닿기 직전.
치이이이이이이익!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시커멓게 굳어 버린 용암은 그대로 연기를 뿜어내면서 현무암이 되어 버렸다.
타란트의 뺨이 씰룩였다.
‘어떻게 이런…?’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낱 인간이 아니던가?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사비강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너는 나와 싸우는 게 아니다.”
“무슨 소리냐?”
사비강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마족은 천년만년 살지. 어쩌면 그래서 그 무료한 시간을 보내느라 감정이 메말라 버린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인간은 달라. 백 년도 채 살지 못해. 그래서 조바심을 느끼고, 불안해하고, 늘 행복하길 갈망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지.”
“새삼 벌레 같은 인간에 대해 설교하겠다는 건가?”
“이래봬도 내가 교관이라서 말이야. 네가 모르는 걸 가르쳐 주고 싶은 욕구가 들어서.”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타란트는 콧잔등을 팍 구기고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저 웃는 면상에 검을 쑤셔 박고 싶은데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사비강은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게 한 평생을 산 인간은 나처럼 변한다.”
“네놈처럼?”
“그래. 평생 갈고닦은 지식과 재능을 물려주려는 거지. 천년만년 사는 너희들은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거다. 언젠가 때가 되면 천천히, 느긋하게 익히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것을 깨우치기도 전에 수명이 다해 버릴 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끊임없이 지식을 전수한다. 그것이 대물림되면서 문명이 발전하고, 인간은 점차 강해지는 거다. 결국 너는… 인간을 치기로 한 이상, 현 시대의 인간과 싸우는 게 아니라, 전 시대의 인류와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 넌 이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거다.”
“하찮은 설교 따위!”
파앗!
순간 타란트가 날아올랐다.
그는 현무암을 밟으며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더니 곧 허공으로 도약하면서 베르타스를 내려찍었다.
쒸아아아아앙!
그의 배후로 폭열의 악신이 함께 날아들었다.
베르타스는 순식간에 불덩이에 휩싸인 검이 되어 사비강의 정수리를 노렸다.
하지만.
따아아아앙!
이번에도 베르타스는 사비강의 손에 가로막히면서 금속성만 터뜨리고 말았다.
타란트의 눈동자가 커지는 순간.
“말했잖아. 이 몸에는 전 시대의 인류가 쌓은 극의가 담겨 있다고. 그러니 고작 마왕 따위가 전 시대의 인류를 당해낼 수 없단 말이다.”
슈우우욱, 꽈아아앙!
“커억!”
타란트가 포탄처럼 날아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떨어진 주변 바닥이 분화구처럼 움푹 파였다.
용암이 구덩이로 흘러들려는데.
슈우우우욱, 꽝!
혜성처럼 떨어진 사비강이 다시 한 번 타란트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기풍이 사방으로 훅 퍼져 나가면서 흘러들던 용암이 멀어졌다.
사비강이 타란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제 좀 알겠나? 인간은 운명에 굴하지 않는다. 네 말대로 미련하거든. 하지만 그 운명마저 극복할 힘을 가진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꽈앙! 꽝! 꽝!
사비강의 주먹이 연신 타란트의 안면을 강타했다.
천지가 격동했고, 기파가 사방으로 불어 나가면서 주변이 터져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주먹질을 퍼부었을까?
“음…?”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타란트의 두 눈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순간.
꽈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기의 폭발과 함께 사비강이 튕겨 날아갔다.
“큿!”
길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사비강이 재빨리 바닥에 착지하면서 미끄러졌다.
촤아아악!
그가 고개를 들자, 타란트의 몸이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두 눈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후후후. 하하하하!”
타란트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말했다.
“과연. 좋구나. 이 정도는 되어야 취할 맛이 나지!”
말을 마친 타란트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쉬이이이잇, 따앙!
사비강의 장력과 베르타스가 부딪치면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둘은 서로 튕겨 나가면서 멀찍이 떨어졌다.
확실히 타란트는 조금 전과 비교했을 때 뭔가 달랐다.
타란트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칭찬해 주마, 슈비츠. 나를 여기까지 몰고 오다니. 너를 회귀시킨 보람이 생기는구나!”
말을 마친 타란트가 양손을 활짝 펼치자, 사이한 기운이 폭발하면서 열 두 개의 형상이 나타났다.
‘열두 악신…?’
확실히 타란트의 배후에 나타난 것은 열두 악신의 형상이었다.
다음 순간.
슈우우우우욱!
열두 악신이 다시 타란트의 몸에 빨려들어 가듯 흡수됐다.
곧이어.
드드드드득! 쿠구구구궁!
꽈르르르르릉!
머리 위로 몰려든 먹구름이 연신 천둥번개를 울리더니, 마치 타란트에게 모든 기운을 쏟아 붓는 듯했다.
그 기운을 축적이라도 하듯 타란트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가 점점 펼쳐 갔다.
그의 체격이 무서우리만치 크고 단단해져 갔다.
쿠구구구구구…!
마왕의 덩치는 이제 대마괴를 넘어설 정도였다.
머리 위에 돋아난 두 개의 뿔은 허리춤까지 자라났다.
그야말로 신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존재.
마왕 타란트가 사비강을 내려다보았다.
“마족은 악신을 하나 이상 현신할 수 없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하나, 마왕인 나는 열두 악신을 내 몸에 녹일 수 있다.”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타란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뭐?”
타란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건방진…!”
“잘 됐군. 만해경에 이르러 깨달은 극의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까 봐 아쉬웠는데. 이만하면 충분히 즐길 수 있겠어.”
말을 마친 사비강이 히죽 웃으며 손을 불쑥 뻗었다.
쒸이이이잉!
쒸이이이이잉!
순간 베르타스와 귀혼도가 사비강의 손으로 휙 날아들었다.
우우우우웅!
두 자루의 도검이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곧이어 사비강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