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4
귀환 마교관
594화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무랑은 길어져 가는 땅거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무상무념인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누구보다도 복잡했다.
수많은 술법 구결이 그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그는 이따금씩 혼자 고개를 내젓기도 하고, 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물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예사였다.
“아니, 아니야. 그건 틀렸지. 그래, 맞아. 거기선 수신오호술(守身五護術)을 써야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경신주법(大警神周法)을 펼쳐야 해. 그렇지. 그러고도 부족한 부분은 천심합경(千心合境)으로 메우면 되려나? 어렵군… 어려워.”
정말이지 살면서 요즘처럼 어렵다는 말을 자주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기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살면서 자신이 이해 못할 건 별로 없었다.
모든 게 쉬웠다.
어려운 것이 있어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었다.
한데 요즘은 정말이지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해결해야 할 것도 많다.
사비강을 만해경에 이르게 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가 직면한 문제들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성공 가능성 이 할?
사실 거짓이다.
이 할은 무슨….
정말 잘 해봐야 일 할이 될까 말까다.
만해경의 경지는 정식 강호 역사에는 기록도 되지 않을 만큼 무신(武神)의 경지다.
천해경만 해도 이미 요즘 강호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경지가 아닌가?
한데 만해경이라니.
그걸 사비강이 이루고자 한다.
사실 가망성은 거의 없다.
십중팔구 실패가 아니다.
백중 하나 성공할까 말까다.
단 일 푼의 가능성도 없다.
하지만 사비강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이 할이 조금 안 된다고 말했다.
뭐,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아니다.
일 푼도 이 할이 못되긴 마찬가지니까.
“후우.”
무랑이 그답지 않게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도 이렇게 무랑전 후원에서 한숨을 짓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후원 복판에서 묘한 기의 파동이 일어나더니 구윤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깜짝 놀란 무랑이 구윤을 보며 물었다.
“자네가 여기엔 무슨 일인가?”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궁주님을 뵈러 왔지요. 시간이 없어서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한데 왜 하필 이곳으로?”
구윤이 지금 능운파와 함께 있다는 것은 무랑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사비강이 아닌, 자신의 거처로 왔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구윤은 주변을 잠시 훑어보고는 물었다.
“궁주님은 좀 어떠십니까?”
무랑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바리탄에게 부상을 조금 입었지만 괜찮네. 다만….”
“궁주님은 아직 부족하다고 여기시는군요.”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부족하네. 지금으로선 이길 수 없어.”
“방법은 있습니까?”
무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려워. 만해경에 이른다면 이길 수 있겠지만… 그 경지가 어디 그리 쉬운가?”
“남은 기간 이룰 가능성은요?”
“일 푼도 되지 않으이.”
구윤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무랑이 구윤을 보며 물었다.
“능 맹주는 어떤가?”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해야겠군.”
“전 기도는 믿지 않습니다.”
구윤이 잠깐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만.”
“뭔가?”
구윤이 대략의 이야기를 무랑에게 전했다.
무랑은 시종 착잡한 표정이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그가 별로 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두 가지가 걸리네.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는 점.”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방법이 있다면 모든 걸 쏟아 부어야지요.”
“알겠네. 준비해 보지.”
“그럼 전 궁주님을 잠시 뵌 후, 부군사에게 지시를 내려 두겠습니다.”
“그러게나.”
그 길로 구윤은 사비강을 찾아갔다.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무랑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중원인이 죽어 나가든 말든, 초야에 묻혀서 쥐죽은 듯 살아갔으리라.
한데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아마도 사비강에게 물든 것이리라.
그렇게 그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마침 대문이 열리면서 사비강이 무랑전으로 들어섰다.
무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준비는 됐나?”
“됐소.”
“어떤가? 한 바퀴 돌아보니.”
사비강이 잠시 생각하다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좋았소.”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네. 그럼 이제 영약과 장치는 마련되어 있으니, 두 사람을 기다리도록 하세. 그 아이들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니.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
“알겠소.”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옹기승은 가만히 검신을 내려다보았다.
창틈으로 스며든 석양이 칼날을 비추니, 마치 검신이 붉은 빛을 발하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무인으로서의 삶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매 순간이 위기였다.
그럼에도 잘 헤쳐 나왔다.
때론 갈고 닦은 실력으로, 때론 천운으로.
“그간 고마웠다.”
조용히 중얼거린 옹기승이 검신을 검집에 갈무리하고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의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입었던 무복은 침상 위에 정리되어 있었고, 지금은 평상복을 입은 옹기승이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다가 우뚝 멈췄다.
마치 옹기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자는 바로 구강룡이었다.
구강룡은 어딘지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툭 던지듯 물었다.
“정말 그래야만 하겠느냐?”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게다가 저 혼자 결심한 것도 아닙니다.”
옹기승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공을 잃겠지요. 평범한 일반인이 될 겁니다.”
“그걸 아는 놈이 그리 간단히…!”
“형님. 간단하게 결정한 사안이 아닙니다. 제 결정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급기야 구강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옹기승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이건 형님의 동의를 받을 문제도 아닐뿐더러, 이미 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어쩌면 이런 핏줄을 타고 태어난 것도 결국 이렇게 강호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승아….”
“걱정 마십시오, 형님. 이 중원에는 강호인보다도 일반인이 훨씬 많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
“삶의 방식이 많이 달라지겠지만,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전 늘 생각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이 피비린내 나는 강호를 이젠 떠나고 싶습니다. 어쩌면 좀 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옹기승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지는 동안 구강룡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어두운 얼굴로 서 있던 구강룡이 겨우 목소리를 흘려냈다.
“정녕…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진 않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전 진작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구강룡이 뜨거워진 시선으로 옹기승을 보았다.
“이 형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나는 널 죽이려고 했다.”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 뿐입니다. 다 지난 일이지요. 지금 이렇게 제가 형님과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옹기승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인사했다.
그는 그렇게 구강룡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승아!”
그의 등에 잔뜩 젖은 목소리가 와 닿았다.
“너는 내 동생이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다. 내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네가 무인의 삶을 버린다면, 나는 그 삶을 평생 지켜 주는 무인이 되겠다. 이 형이 너를 언제나 지켜 주겠다!”
옹기승의 입매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돌아서려고 하자.
“돌아보지 마라! 쪽… 팔리니까.”
옹기승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구강룡은 지금 눈물콧물 흘리면서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속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옹기승은 잘 알고 있었다.
옹기승이 나직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울음을 참는 구강룡을 뒤로 하고 옹기승이 발길을 옮겼다.
**
멸마궁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흑귀는 그곳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연무기행을 떠나면서 어둠에 갇힌 지가 벌써 수년 전이었다.
그 후로 기적처럼 사비강을 만나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역시 이젠 모든 것을 내려두고자 했다.
모든 각오는 이미 옹기승과 함께 다졌다.
“그럼 이제 가볼까?”
결심을 굳힌 흑귀가 자리에서 막 일어날 때였다.
“강아….”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그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아버지 소천악이 이곳에 와 있었다.
“아버지….”
“네가 보낸 전서를 받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정녕 그리 해야겠느냐?”
흑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주님이 구해 주신 여벌의 목숨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목숨을 버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제가 가지지 말았어야 할 힘을 궁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작게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러면 너는 평생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소천악은 가만히 아들 소유강을 바라보았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을까?
걸음마를 떼면서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런 결정을 내릴 나이가 되었다니.
어쩌면 지난 수년 간 아들을 잃고 만나지 못했기에 더욱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감싸고 돌봐야만 할 것 같은 아들.
그런 아들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게 못내 원망스러웠다.
흑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지 못한 못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소천악이 버럭 소리쳤다.
“어깨를 펴라! 너는 강호인을 구하기 위해 위대한 결심을 한 것이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아버지….”
“잘 해내라. 아들.”
“감사합니다.”
흑귀는 소천악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무랑전으로 향했다.
**
“예?”
아들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왕 타란트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마족들을 보았다.
“절반은 흑성에 남고, 절반은 당장 멸마궁을 치도록 한다. 병력은 트라잔 공작이 이끈다.”
마족들이 술렁거렸다.
말이 절반이지 어마어마한 병력이다.
타란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마족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도록. 아들러 백작은 멸마궁 주위를 테라포밍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