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84화 (584/670)

# 584

귀환 마교관

584화

“헉!”

쩌어어어엉!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소리가 터질 때까지 카멘자일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전신을 음습해 오던 살기.

아름다운 바리탄의 두 눈과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어딘지 이질적인 광기 서린 안광.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강렬하게 느껴지는 투기!

이 모든 것들이 온몸을 옭아매고 꿈쩍도 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 같았다.

마치 서큐버스의 농간으로 지독한 악몽을 꾸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와 비슷하달까?

그 답답함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드라칸이 즉각적으로 소환한 거대한 얼음 창 덕분이었다.

그리고 한쪽 귀가 멀어질 정도로 강렬하게 울린 그 마찰음이 아득해지는 그의 정신을 일순간 깨웠다.

‘제길!’

파바바바밧!

정신을 차린 카멘자일이 후다닥 물러나면서 반사적으로 실드를 펼쳤다.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신경질적으로 이즈란을 돌아보았다.

마력과 악신의 권능이 제대로 봉인되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즈란은 진중한 표정으로 바리탄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길! 설마 이즈란의 특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이즈란은 마왕의 축복을 받으면서 생성된 능력이다.

바리탄이 마족이라면 그 특능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은 진리다.

만약 그 진리를 벗어났다면, 적어도 바리탄이 마족의 방식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을 습득…!

“설마…?”

바리탄이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더니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이제 조금은 눈치를 챘을까?]

카멘자일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드라칸이 읽기라도 한 듯 미간을 좁히며 읊조렸다.

“강호인의 전투 방식을 습득한 거군.”

[그걸 이제 눈치 챈 너희들도 답이 없구나. 그간 강호인을 화신으로 삼으면서 내가 먹고 놀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했나?]

드라칸의 추측은 정확했다.

현재 바리탄이 사용하는 것은 마력이 아니라 내공이었던 것.

그녀는 존야를 화신으로 삼으면서 강호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내공을 다스리는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시간 대비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인간의 몸을 마음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녀 역시 습득해야만 했다.

한데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줄이야.

쿠구구구구득!

콰과과과과득!

드라칸이 양손을 펼치자 얼음 덩어리가 뭉치면서 날카로운 창 두 개를 형성했다.

그가 양손으로 창을 들고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리탄을 노려보았다.

“과연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년이다. 모두 방심하지 마라. 그래봐야 저년은 혼자 발악하는 것일 뿐이니.”

“물론이지. 원래 잡기 어려운 물고기가 맛도 좋은 법이지.”

카멘자일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바리탄이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리석구나. 아직도 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다니. 그 멍청한 탐욕이 너희들을 소멸시키게 될 것이다.]

“잡설은 집어치우고! 한바탕 놀아보자, 계집!”

파바바바밧!

비헤더즈가 일제히 바리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바리탄의 신형이 번쩍 움직였다.

그녀는 진녹색의 눈보라를 뚫으면서 네 명의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이런 느낌이었는지… 생각났네. 기분 더러워졌어.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바리탄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새겨졌다.

**

눈보라가 휘날렸다.

손끝이 얼어 버려서 감각이 무뎌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어린 루시엘은 발터의 등에 업힌 채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당장 급하게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루시엘은 꿈속에서 서큐버스와 재미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넌 굉장히 매력적이구나.”

서큐버스가 자신에게 건넨 말이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꿈속에서 만나는 서큐버스였지만, 오늘따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서큐버스와 한창 놀고 있을 때, 아버지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오늘따라 서큐버스는 자신에게 완전히 반해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양한 꿈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서큐버스가 그만 아버지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의 표정은 몹시 다급해 보였다.

“너에게 권능을 주었다. 이제 너는 너만 믿고 살아가야 한다. 행여나 복수 따위는 꿈도 꾸지 말아라. 아빠는 네가 그저 한 평생을 떳떳하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랄 뿐이다. 이 모든 건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모든 건 그저 힘의 순리대로 움직일 뿐이다. 알겠느냐?”

아버지의 표정이 워낙 엄중했기에 루시엘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몰라도 알겠다고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언뜻 ‘역적’이라는 단어가 들렸고, ‘반란’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충실한 심복인 발터에게 루시엘을 맡겼다.

언제나 충성을 다했던 발터는 이번에도 믿음직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루시엘을 들쳐 업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조건 살아남아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선 발터는 루시엘을 등에 업고 설산을 내달렸다.

날은 몹시 추웠다.

온통 눈밭이었기에 발터의 발이 눈 속에 깊숙이 푹푹 박혔다.

곧 추격자가 생겼다.

뒤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와 욕설이 난잡하게 들려왔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발터는 루시엘을 잠시 내려 두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발터의 검이 섬광을 그리며 적들을 난자했다.

비명이 솟구치고, 피가 터져 나오고, 시체가 쌓여 갔다.

과연 발터는 일당백이었다.

그는 단신으로 수십 명의 마족 기사들을 베었다.

발터는 불사신 같았다.

적의 검이 발터의 복부를 찌르고, 가슴을 찌르고, 어깨를 베고, 허벅지를 베어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발터는 맹수처럼 싸웠다.

적들은 그런 발터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추격자까지 쓰러뜨린 발터는 비척거리면서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어보는 발터였지만, 그 눈빛에는 분명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루시엘은 뒤늦게 눈물이 차올랐다.

새벽녘에 깨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발터의 등에 업혀 달아나면서 엄마의 시신을 보았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이 무뚝뚝한 음성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려 버렸다.

루시엘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눈물을 흘렸다.

발터는 말없이 루시엘을 가슴에 안아 주었다.

발터의 몸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하지만 그 피비린내는 자신을 지켰다는 증거였다.

그것이 발터의 피든, 적의 피든.

그래서인지 피비린내가 좋았다.

발터가 엎드렸다.

루시엘은 말없이 발터의 등에 다시 업혔다.

발터는 그렇게 눈보라를 헤치며 또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자들은 끈질겼다.

어쩔 수 없었다.

쌓인 눈더미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

거기에 피까지 흘리고 있으니 추격자들이 쫓아오기에는 딱 좋은 조건이었다.

추격자들이 뒤꼭지까지 다다르면, 발터는 루시엘을 잠시 내려 두고 싸웠다.

루시엘은 발터의 싸움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언젠간 자신이 저렇게 발터처럼 싸워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반복했다.

발터는 루시엘을 업고 달리다가 추격대가 오면 싸웠고, 다시 루시엘을 업고 달리길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추격대가 도착했을 때, 발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적이 내던진 말 때문이었다.

“오늘부로 21대 마왕은 타란트 폐하이시다. 투알란 공작은 즉결심판을 받아 참수되었다.”

발터는 역적과 충신이 뒤바뀌었다고 항변했지만, 추격대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분노한 발터가 이번에도 추격대를 전멸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터도 부상을 많이 입었다.

앞서 당한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발터는 여전히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가와 루시엘에게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이번엔 루시엘도 울지 않았다.

“응. 괜찮아.”

당차게 대답하자, 발터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루시엘을 업었다.

마지막 추격대를 끝으로 더 이상의 추격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발터였다.

부상이 심각했다.

루시엘을 등에 업은 발터는 이따금씩 쓰러질 듯 비척거렸다.

루시엘이 내려서 걷겠다고 고집을 부려서야 발터는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풀썩!

발터가 눈밭에 넘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얼마나 먼 거리를 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온통 눈밭이었다.

발터의 호흡이 가빠졌다.

“아저씨, 괜찮아?”

루시엘의 물음에 발터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지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응. 알았으니까 일어나. 여긴 너무 추워.”

“죄송합니다, 아가씨. 조금만 쉬겠습니다.”

그렇게 발터는 눈을 감았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겠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발터는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을 흔들며 루시엘이 불렀다.

“아저씨. 그만 일어나….”

발터는 대답이 없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난다고 했잖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그만 일어나.”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루시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발터의 너른 가슴에 엎드려서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녀가 잔뜩 울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는 잠꾸러기야.”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수십 명의 추격대가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며 포위를 하고 있었다.

**

촤악! 촤촤촤악!

바리탄은 검을 휘저었다.

투까아앙!

그의 검과 드라칸의 얼음 창이 부딪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퍼퍼퍼퍼퍽!

눈밭에 꽂힌 얼음 조각들.

하지만 이곳은 온통 드라칸의 무기 밭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손을 뻗기만 하면 허공에서도 저절로 얼음 창과 얼음 칼이 형성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리탄은 검을 휘둘러 깨부쉈다.

‘그날도 이렇게 무아지경으로 싸웠지.’

사실 그날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떻게 싸운 것인지.

발터의 가슴에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을 포위한 추격대를 보고 가장 먼저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발터의 검을 뽑아 들고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적의 비명이 솟구쳤다.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싸웠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추격대 시신들 복판에 서 있었다.

그녀 역시 부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추격대를 도륙했다는 사실에 희열감을 느끼고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길로 타란트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악신의 권능으로 외모를 바꿨다.

그 누구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볼 수 없도록.

‘그 후 나는 ‘바리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용병 생활을 해왔다. 실전에서 구르고 구른 나를 마왕의 품속에서 화초처럼 자란 네놈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쩌꽈아아아앙!

“크으읍!”

강렬한 충격에 드라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진동 때문일까?

구르르르르릉.

쿠콰콰콰콰콰콰콰!

다시 설산 꼭대기에서 눈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눈사태가 일어났다.

거침없이 커진 눈사태가 바리탄을 비롯한 비헤더즈를 한꺼번에 집어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