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2
귀환 마교관
582화
휘오오오오!
북풍한설이 휘몰아쳤다.
바리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눈밭이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양옆으로 숲이 우거진 산길이었다.
한데 지금은 주위가 온통 추위로 얼어붙은 땅이었다.
스벅스벅.
천천히 눈을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환영은 아니다.
그렇다고 텔레포트를 통해서 이동한 것도 아니다.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눈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공간의 틈을 열어서 그곳으로 들어와 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것이 비헤더 중 한 명의 능력이라는 것.
비헤더가 상대하기 껄끄러운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악신의 가호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마왕의 축복을 받으면서 기본적으로 특수한 능력 하나씩은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장소로 변해 버린 것 역시 그 특수 능력 중 하나이리라.
바리탄은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조급하진 않았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라면, 진작 미쳐 버렸을 것이다.
온통 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는 곳.
추위와 외로움만큼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니.
정말이지 악마에겐 딱 어울리는 장소가 아닌가?
바리탄은 묵묵히 언덕을 올라갔다.
그가 높은 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언덕 위에서라면 주변이 더 잘 보일 테니까.
이해하지 못한 현상이 일어날수록 단순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중턱쯤 다다랐을까?
부스스슥.
언덕 위에서 눈덩이 몇 개가 굴러 떨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눈 덮인 언덕 위에 네 명의 비헤더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능운파와 하운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들과 자신만 이곳으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칸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어서 오게. 나의 세계에.”
“환영해줘서 고맙군. 그런데 네 세계는 좀 쓸쓸하군.”
“그런가? 하지만 이 세계는 결국 너의 심연에도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지.”
“그렇다면 더욱 잘 됐군. 어느 정도는 내 세계라는 말이니까.”
드라칸이 희미하게 웃었다.
“좀 더 있다 보면 그리 잘 된 일이 아니라고 느낄 테지. 누구나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절망할 정도로 어두워지기 마련이니까.”
“한 가지 또 알았군.”
“……?”
“생각보다 마왕의 직속 암살대는 수다스럽다는 것 말이다. 특히 얼굴 허연 네놈은 유달리 수다스럽군.”
드라칸이 피식 웃었다.
“그런가? 하면 수다는 여기서 멈춰 주지. 손님에 대한 예우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드라칸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쿠구구구구…!
드드드드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쿠콰콰콰콰콰콰콰!
비헤더즈 위로 어마어마한 양의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거대한 해일처럼 치고 내려오는 눈사태였다.
바리탄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겨우 이 정도로… 실망이다.”
말을 뱉는 순간에도 거대한 눈사태는 그를 단숨에 집어삼켜 버릴 것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콰콰콰콰콰콰콰!
어느 순간, 눈사태는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아가리를 쩍 벌린 괴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괴물이 바리탄을 단숨에 집어삼키려는 순간.
“시시한 장난질은 그만둬라!”
순간 바리탄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뽑아 베었다.
쒸아아아아아아앙!
마치 강기와 같은 마력이 검신에서 쏘아져 나가자.
퍼콰콰콰콰콰콰콰콰쾅!
세차게 쏟아져 내리던 눈사태가 먼지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팟!
다음 순간, 바리탄이 바닥을 차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타다다다닷!
순식간에 언덕 위로 오른 바리탄이 몸을 훌쩍 날렸다.
쒸아아앙!
하늘로 솟구쳐 오른 바리탄이 그대로 검을 내리치며 떨어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아아!
순간 바리탄의 등 뒤로 악신이 현신하며 포효했다.
악신의 권능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사용한 단계다.
이럴 경우 실제로 악신이 배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시전자의 힘은 열 배, 스무 배까지도 강해진다.
어쨌거나 악신의 권능을 등에 업은 바리탄이 혜성처럼 떨어져 내리며 검을 내리쳤다.
그 순간, 드라칸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꽈드드드득!
주변의 모든 눈덩이가 단단한 창날처럼 뭉치더니.
쏴쏴쏴쏴아앙!
날카로운 얼음 창으로 변하면서 그대로 바리탄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콰콰콰콰콰콰앙!
얼음덩어리가 연신 터져 나가면서 바리탄을 에워쌌다.
하늘로 향한 무차별한 폭격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콰콰콰콰콰콰쾅!
연신 터져 나가는 얼음 창을 보면서 드라칸은 눈살을 슬쩍 일그러뜨렸다.
과연 바리탄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보통의 마족이었다면 저 단단한 얼음 창의 공격에 벌써 멀찌감치 떨어져 나갔을 터였다.
한데 지금은….
‘오히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군!’
쿠콰콰콰콰콰쾅쾅쾅!
그랬다.
허공에서 얼음 창이 터져 나가는 지점이 점점 아래로 내려서고 있었다.
튕겨 나가야 할 바리탄이 오히려 힘으로 찍어 누르는 형국이었다.
말이 얼음 창이지, 실제로 드라칸이 만들어내는 이 얼음 무기는 웬만한 금속보다도 단단했다.
한데 바리탄은 지금 강철보다도 단단한 그런 얼음 창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서 점점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드라칸이 다시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떨리더니.
구구구구구구궁!
집채만 한 대창이 날카롭게 다듬어지면서 지상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작은 얼음 창도 연신 바리탄을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쑤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크기로 솟구쳐 오른 대창이 바리탄을 향해 쏘아졌다.
쩌어어어어어엉!
바리탄의 검과 거대한 얼음 창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바리탄도 버텨내지 못했다.
쿠아아아아아앙!
강맹한 속도로 날아든 얼음 창은 그대로 하늘로 사라졌고, 바리탄은 멀찍이 튕겨 날아갔다.
드라칸이 냉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여긴 내 세계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던 녹색 피부의 마족, 카멘자일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드라칸이 눈살을 구기자.
파밧!
추락한 바리탄이 곧장 바닥을 차면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팟!
일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어느새 드라칸의 뒤로 이동한 바리탄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으려는데.
콰악!
뭔가 자신의 머리를 잡는 느낌에 바리탄이 움찔거리고는 눈을 치떴다.
쒸아아아아앙!
빛살처럼 빠르게 돌아선 드라칸이 그대로 검을 횡으로 그었다.
스스슷!
그의 뒤에 서 있던 카멘자일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바리탄이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체내로 스며들려는 이질적인 기운을 몰아냈다.
푸쉬이이이이!
그의 전신에서 녹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카멘자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내 독을 몰아내다니. 제법인데….”
“흥, 그게 독이었나?”
바리탄의 도발에 카멘자일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시건방진 마족이군. 하긴 그 정도의 시건방짐이 있으니 감히 반역을 모의했을 테지.”
그러자 옆에서 후드를 푹 눌러 쓴 마족, 라크나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건 시건방진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감히 제까짓 게 폐하께 이기려 들다니. 멍청하거나 미친 거지.”
“하긴 그 말이 더 옳군.”
둘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바리탄이 툴툴 웃었다.
“수다는 다 떨었나?”
“…….”
“할 말 다 지껄였으면 이제 그만 소멸시켜 주지.”
말을 마친 바리탄이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멘자일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지금껏 새하얗던 눈밭이 진녹색으로 점점 물들기 시작하면서 그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에 자신만만하다면 어디 한 번 독 밭에서도 놀아보아라.”
“사양하지 않으마!”
버럭 고함을 내지른 바리탄이 바닥을 차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다음 순간.
“감히 폐하께 대든 버르장머리는 고치고 죽여야 하는데.”
후드를 눌러 쓴 라크나스가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찰나.
“헙!”
바리탄은 순간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라크나스의 특기는 바로 대상의 공간을 무중력 진공 상태를 만드는 것.
반면 비헤더즈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런 처 죽일 놈들이!’
바리탄은 치미는 분을 삼키면서 마력을 체내에 고루 분산시켰다.
숨을 일절 쉬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최대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
“사라졌군.”
능운파가 미간을 구기고는 중얼거리자, 하운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공간으로 이동한 것일 테지.”
“비헤더즈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군.”
“네 명이 모였을 때는 가능한 일이다.”
“그럼, 한 명이라도 죽으면?”
“아공간이 깨지고 이곳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나도 직접 겪지 않았으니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당연히 추측일 수밖에 없다.
비헤더즈에게 걸린 마족은 누구든 죽었으니까.
해서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어떤 특기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가 있어야 목격자라도 있을 게 아닌가?
하지만….
‘주군을 믿습니다.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속으로 읊조린 하운트가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돌아섰다.
“이제 네가 답할 차례군.”
“뭘 말인가?”
“왜 우리를 배신했나?”
능운파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누가 먼저 줄을 끊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나?”
“역시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군.”
능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나는 마족과 다르지. 하지만 나는 인간과도 다르다. 그만큼 난… 특별한 존재다. 그리고 또 분명한 것 한 가지.”
“뭐지?”
하운트가 눈살을 찌푸리고 보자, 능운파가 히죽 웃었다.
“이 자리에서 너는 죽는다는 것!”
찰나.
쒸아아아앙!
쩌어엉!
짙푸른 검강과 함께 능운파의 검신이 하운트의 검을 때렸다.
그 강렬한 충격에 둘의 몸이 진동했다.
하운트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꼈다.
‘이 미친 새끼…!’
눈동자가 뒤흔들릴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이제 막 마족이 된 반쪽짜리가 어떻게 이런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대체로 마족으로 승화한 인간들은 그들이 바친 제물에 따라서 그 능력이 결정되곤 한다.
지금까지는 한 나라의 군주로 태어나 백성을 바친 헬무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순수 혈통이 아닌 마족 중에서는 그가 유일무이한 강자였다.
한데….
‘이건 더 하잖아?’
검을 맞댄 능운파가 히죽 웃었다.
“놀란 눈치군.”
하운트는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였으니까.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인간 출신 마족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치욕스러웠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생존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슬금슬금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