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72화 (572/670)

# 572

귀환 마교관

572화

일전에 옹기승이 앉아 있었던 멸마궁 언덕 위의 바위.

오늘은 그곳에 등부형이 앉아 있었다.

그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저만치 아래의 대연무장을 하릴 없이 바라보았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로다.’

한때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받던 용천관의 생도들이 지금은 궁도들을 가르치면서 이끌고 있었다.

용천관과 달리 멸마궁도들은 이미 성인이 된 무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공 발전을 위한 수련보다는, 마족을 상대하기 위한 비결이었다.

이런 것을 가장 잘 보충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천멸대와 신생조였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마족들을 상대한 실전 경험이 있었기에.

등부형은 고개를 꺾어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비강과 함께 용천관에서 교관으로 지내던 시절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간 자신은 무엇이 변했던가?

생도들이었던 저 아이들이 천멸대원이 되어 강호의 주축이 되었고, 부교관이었던 사비강은 맹주를 넘어설 정도의 명망을 얻어 궁주가 되었다.

그는 이제 강호의 기둥이었다.

누군가 그를 욕한다면 강호의 적이 되고 말리라.

한데 그간 자신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값비싼 보도에 집착하는 동안,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에 맞춰 달라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인생무상이라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등부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탐대실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그깟 보도 한 자루가 무엇이라고.

결국 칼 한 자루로 정의를 이루겠다고 무인의 길을 택한 게 아니었던가?

한데 어째서 자신은 온갖 욕심으로 마음이 더럽혀지게 된 걸까?

한심하고 한심하다.

얼마 전 묵양제가 자신의 영약을 모두 마셔 버렸을 때만 해도 그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겨우 손에 넣은 천금 같은 기회를 묵양제가 완전히 날려 버렸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집착하여 조금 강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힘을 어디에 쓰려고 자신은 강해지려고 했던 걸까?

평소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을 찾아가서 자랑질을 하려고?

아니면 약자를 괴롭히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무시무시한 마족에게 맞설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던가?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인 것을.

‘나는 허울만 쫓았구나.’

어쩌면 사비강이 자신의 보도를 주야장천 깨부순 것도 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허울만 쫓지 말고 내실을 다지라는.

한데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신의 보도를 깨부술 때마다 사비강이 밉고 미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천세명을 보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천세명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겸손해졌고, 무엇이 강호를 위한 길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는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로 변해 버렸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엄은 단순히 강해진 기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사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했다.

“등 형도 여행을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어떻소? 시기가 썩 좋진 않지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좋은 기회가 될 거요.”

등부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떠나자.’

달라지기 위해 이젠 떠나리라.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에 대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리라.

천세명 역시 여행을 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다고 했다.

자고로 여행이란, 모든 것이 낯선 장소에 자신을 외롭게 던져 두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것이다.

지금 등부형에겐 그런 계기가 필요했다.

마음을 굳힌 등부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자신이 떠난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찾을 사람도 없으리라.

그렇게 바위에서 내려와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저만치 묵양제가 조금 퀭한 눈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어딘지 평소와 다른 상태처럼 보였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인지, 어디서 낮술이라도 거하게 한잔 한 것인지, 그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게다가 풀려 버린 초점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터벅터벅 관성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등부형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묵양제를 불렀다.

“묵 형! 어딜 가시오?”

하지만 묵양제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등부형이 얼른 달려가 그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일전에 사비강이 준 영약인 백초기환탕 때문에 크게 다툰 적이 있던 터라 궁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사죄라도 해두고 싶었다.

“묵 형, 대낮부터 넋 놓은 표정으로 어딜 그리….”

말을 꺼내던 등부형이 이맛살을 구기고는 물었다.

“혹시… 낮술 하셨소?”

묵양제가 걸음을 멈추고 퀭한 시선으로 등부형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매가 어딘지 미묘하게 뒤틀렸다.

조소? 아니다. 단순히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웃음은 아니다.

그래, 광소에 가깝다.

어딘지 모르게 광기가 서린 웃음.

그런 표정으로 묵양제가 등부형을 보며 말했다.

“한잔 했소. 마침 객잔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서 기분도 좋아졌지.”

“그, 그렇소? 한데 누굴…?”

“오랜 친구요. 그런데 내가 그것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잖소?”

“뭐, 그렇긴 하지. 다른 게 아니라, 일전에 내가 묵 형에게 너무 심하게 군 것 같아서….”

“사비강 궁주는 어디에 있소?”

묵양제가 다짜고짜 말을 가로지르면서 불쑥 물어 왔다.

등부형이 다시 한 번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궁주님은 아마 지금 출타 중이실 거요. 궁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어딜 간 건지는 나도 모르겠소. 워낙 바쁜 분 아니시오?”

“그렇군. 하면 매 총관은?”

“글쎄. 나도 모르겠소. 내가 그분들 하루 일과를 다 알고 있는 건 아니… 아, 그러고 보니 매 총관님이 초환당으로 가시는 걸 보긴 했소. 아마 지금쯤 거기 계시지 않을까?”

“그렇군. 초환당이라. 잘 알겠소.”

묵양제가 무뚝뚝하게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기자, 등부형이 얼른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묵양제가 슬쩍 돌아서서는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일일이 당신에게 그것까지 보고해야겠소?”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물어볼 수는 있는 것 아니오?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지만 묵양제는 등부형의 말을 더 듣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초환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등부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돌아섰다.

“거참, 사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로구나.”

그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간단히 여장을 챙긴 그가 멸마궁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궁문을 나서려는 순간, 아무래도 그는 찜찜한 마음에 몸을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꾸만 어딘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묵양제가 마음에 걸렸다.

**

쉬이이잇! 샤아아악!

두 자루의 연검이 허공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검기가 줄기줄기 엮이면서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매설란은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그랬다.

그녀는 검술을 연마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두 자루의 검을 세차게 휘두르며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치 허공에서 노닐 듯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경지에 올랐다는 표현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매설란은 어딘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욕심이 끝이 없었다.

물론, 과거에도 욕심은 많았다.

더 아름다워지고 싶었고, 더 강해지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욕심이 오로지 무공 하나에만 집약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공에서도 사사검법 하나에만 모든 욕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단 하나의 검법만 대성해도 무림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는 법이다.

그녀는 한 우물만 깊게 파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겐 여전히 부족하게만 느껴졌지만.

타다닷!

그녀의 신형이 가뿐하게 날아오르면서 나무 기둥을 발로 차며 날아올랐다.

솨아아아!

그 진동으로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샤샤샤샤샤샤아악!

두 줄기의 검기가 서로 뒤엉키면서 또 한 번 춤을 추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뱀이 우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사검법이었지만, 누군가 사사검법이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였다.

과거에는 요란하게 뱀이 울었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마치 두 마리의 뱀이 아니라, 두 줄기의 바람이 부는 것처럼 고요하면서도 날렵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하늘 움직였다.

바람을 타는 나비 같기도 했고, 두 마리의 뱀이 조용히 감싸고도는 꽃송이 같기도 했다.

화려하지만, 어수선하진 않다.

복잡하지만, 난잡하진 않다.

절제된 아름다움.

그녀의 검법은 딱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나아가야 해!’

언젠가 신수각주 조신량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조의 끝은 순정이지요.”

그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내뱉은 소리였다.

한데 이 단순한 말이 매설란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조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검법은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름답고 단아해졌다.

그리고 사사검법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내공이 조금 부족해.’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해서는 내공이 좀 더 받쳐줘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정말 많은 발전을 이루었군.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구먼. 무공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느껴지는 게 있을 정도야.”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매설란이 수련을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진 당주님, 나오셨군요.”

“이것 참, 내가 불러놓고는 지각을 해버렸네. 미안하이.”

“아니에요. 누구보다 바쁘신 분이잖아요.”

“바쁜 척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별 말씀을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절 부르신 건….”

“아, 이것 때문일세.”

진백이 작은 목곽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매설란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목곽상자를 받아들었다.

덮개를 열어 보니 둥근 단약이 들어 있었는데,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그 향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청마기환단(淸魔氣幻團)일세. 이번에 초환당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단일세. 무랑도사와 힘을 합해서 만든 것이니, 그 효능이 제법 괜찮을 걸세. 자네가 먼저 복용해 보고 그 효능에 대해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아, 운기만 잘해준다면 특별한 부작용은 없네.”

“아…! 정말 대단해요. 이게 그동안 그토록 연구하시던 결과물이군요?”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자네가 복용해 보고 조언을 준다면 그걸 참고해서 대량 생산해 볼 예정이네. 예를 들어 운기하기에 좀 더 편하게 만든다든지. 자네를 택한 이유는, 역시 내공이 제법 든든한 자가 복용해야 그 효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어서 그런 걸세. 그리고 체질 때문에 남성용과 여성용이 구별되어 있거든. 남성용은 당 단주에게 부탁할 생각이고. 이거 왠지 자네에게 실험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군.”

“별 말씀을요! 오히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걸요! 잘 복용해서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제가 고맙죠.”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나는 하던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네.”

“네, 저는 조금 더 수련하다가 돌아가려고요. 여기, 조용해서 마음에 드네요.”

“허허, 이곳에는 무공 수련하는 궁도가 없으니. 마음껏 이용하시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눈 진백이 후원을 돌아나와 건물 옆으로 걸어갈 때였다.

“음?”

저만치 앞에서 퀭한 시선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본 진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묵 조교?’

묵양제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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