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9
귀환 마교관
559화
멸마궁 궁주전 후원의 정자.
또로롱.
맑은 소리를 울리며 잔에 술이 채워졌다.
“드시오.”
사비강의 권주에 구윤이 가만히 술잔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궁주님과는 처음으로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것 같군요.”
“그렇소?”
“적어도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 따위가 없이 이렇게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건 처음이지 싶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사비강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술잔을 들었다.
구윤이 멸마궁에 도착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여장을 풀고 멸마궁 내부를 훑어본 그는 해가 저물면서 사비강과 함께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거창한 임명식 따위는 없었다.
사비강도 구윤도 그런 것을 따질 성격이 아니었다.
대신 만인에게 공표하긴 했다.
멸마궁주의 새로운 총군사가 바로 구윤이라는 사실을.
이러한 사실은 강호인들을 다시 한 번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정도맹의 총군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에.
게다가 취임식도 따로 거치지 않은 것을 보고 구윤이 와신상담 한다고 받아들일 것이기에.
술잔을 비운 사비강이 구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술을 못 하시오?”
“아닙니다. 너무 잘 마셔서 탈이지요.”
구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비강이 그런데 왜 안 마시는 것이냐고 묻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윤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마지막 날. 그러니까… 맹주님이 여전하셨던 마지막 날 밤에 지금처럼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능 맹주님과?”
“그렇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사비강이 능 맹주‘님’이라고 불러줘서 고마웠다.
그의 성격이라면 어쩐지 ‘그자’라고 하거나, 더 심하면 ‘그 자식’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사비강은 적어도 자신과 맹주 사이가 어떤 관계였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혹, 맹주님이 이룬 큰일을 앞두고 자축하는 자리였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비아냥거림은 없었다.
추마회를 칼부림 한 번 하지 않고 설득했다고 생각했을 테니, 충분히 술에 취할 만한 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구윤은 고개를 저었다.
“악 막주님이 찾아오셨지요. 그리고 제게 경고를 하더군요. 많은 것이 수상하다고요. 확실히 악 막주님은 그 연세에 어울리는 노회함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능 맹주님을 떠보기 위해 술을 마신 거였소?”
“어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단지… 정말 그분과 술을 한 잔 나누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술자리가 즐거웠나 보군.”
“어찌 아셨습니까?”
“즐겁지 않았다면 굳이 이 자리에서 얘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구윤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술자리는 무척 즐거웠지요. 정말이지 군사가 된 이후로 가장 마음이 편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깨달은 것도 많았지요. 그때 전 한 가지는 확실히 되새겼습니다.”
“뭐요?”
“무릇 군사의 자질이란 책상 앞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군. 한데 왜 내 술잔은 받지 않는 거요?”
구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최근에 새로 깨달은 사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뭐요?”
“군사는 무릇 가슴과 머리를 제각각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저는 그게 정말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지요. 오래 전 제 사부님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가진 최악의 단점이 바로 가슴과 머리를 떼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라고요. 이제는 사부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군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잔을 매만지더니 갑자기 잔에 든 술을 바닥에 뿌려 버렸다.
그리고 빈 술잔을 탁자 위에 탁, 올려두었다.
“저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유는?”
“제 단점을 없애기 위해서지요.”
“주사가 있소?”
예상치 못한 질문에 구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뭐,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다만 제가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이유는….”
“가슴과 머리가 분리가 되지 않아서.”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하자, 구윤이 흠칫거리고는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그렇소. 당신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알고 있소.”
“하긴… 회귀를 하셨다고 하셨죠?”
“그렇소.”
“전생에서 저는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매우 똑똑했지. 하지만 빛을 발하지 못했소. 주인을 잘 만나지 못한 탓도 있고.”
구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말 좋은 군사라면 주인을 바꾸었겠지요.”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무인이 검을 바꾸긴 쉽지만, 검이 무인을 바꾸긴 어려운 법이오.”
“하지만 그게 가능한 검도 있지 않습니까?”
구윤의 시선이 사비강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베르타스를 두고 한 말이었다.
“적어도 저는 그 정도의 검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방법은 찾았소?”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제 단점을 보완하지 못한다면 아예 제거하기로. 머리를 사용할 때와 가슴을 사용할 때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머리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저의 최고 장점일 테니까요.”
“과연.”
사비강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윤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세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첫째, 능 맹주님의 호신위인 천무가 사라졌다는 것을 사실 진즉 알고 있었지요. 맹주님께 듣기 전부터 말입니다. 혜성각에서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두려웠을 겁니다. 만에 하나 절대로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알게 될까봐. 결국 머리로 움직여야 할 순간에 저는 가슴으로 움직인 거지요.”
“그렇군. 두 번째로 하지 않은 건 뭐요?”
“대운산에서 마지막 날 밤, 만리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악 막주님이 보냈지만, 저 역시 만리응을 멸마궁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하지만….”
“맹주님을 믿어보고 싶었겠지.”
“우습게도 그랬습니다. 그때도 전 역시 머리로 움직이지 않고 가슴으로 움직였지요.”
“마지막 세 번째는?”
구윤이 사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어른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나무 상자였다.
사비강이 그게 뭐냐는 듯 바라보자, 구윤이 천천히 덮개를 열었다.
이번에는 사비강도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폭렬단입니다.”
데블 파이어.
사비강은 일전에 만약을 대비해서 정도맹에도 폭렬단을 소량 나눠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폭발력이 워낙 무시무시한 것이었기에 제대로 쓸 만한 기회가 없었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때 구윤은 만약을 대비해서 이 폭렬단 하나를 항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구윤이 말했다.
“이건 저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이 폭렬단을 터뜨리고 자폭하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세 번째는 실행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칭찬하고 싶군.”
사비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구윤이 세 번째를 실행했다면, 자신은 유능한 군사를 잃었을 것이다.
구윤은 결코 무능하지 않다.
이 많은 대안들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
다만 그는 지나치게 정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몰랐던 것이다.
구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 폭렬단을 터뜨렸어야 했지요. 그랬다면 맹주님도, 마족으로 변한 십만 무인들도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맹주를 믿고 싶었다.
마족으로 변해 버렸다지만, 그래도 되돌릴 수 있다면 돌리고 싶었다.
자신의 죽음보다도, 자신이 섬기고 따랐던 주인을 그렇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비강이 구윤의 잔을 채워 주었다.
구윤이 바라보자, 사비강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맹주님과 십만 동도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걸로 군사의 재능을 끝내기엔 아깝소.”
“…….”
“오늘의 각오를 다지는 의미로, 앞으로 내가 주는 술은 언제나 바닥에 뿌리시오. 나는 마시고, 군사는 버리고.”
사비강이 히죽 웃더니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구윤이 굳은 표정으로 술잔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술잔을 들어 바닥에 촤악 뿌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저는 가슴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머리로만 생각할 겁니다. 마족보다 더 악랄한 인간이 되어 그들을 씹어 삼킬 겁니다.”
“군사가 아무리 악랄해도 나만큼 비열하진 못할 거요.”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구윤은 어금니를 꾹 씹더니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는 포권을 취했다.
“앞으로 마족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사비강 궁주님을 주군으로 섬기겠습니다. 이제 말씀 편히 놓으십시오.”
사비강은 마다하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두 사람은 곧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사비강은 마시고, 구윤은 바닥에 술을 뿌렸다.
그렇게 몇 순배가 돌고 나서 사비강이 말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누굽니까?”
구윤의 질문에 사비강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가 총총걸음으로 정자로 다가왔다.
애체를 낀 남자는 이제 약관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남자가 구윤을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혜수각주(慧數閣主) ‘담우기’라고 합니다. 군사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비강이 구윤을 돌아보았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도 천멸대원이었지. 머리가 비상해서 귀영단에서 자금을 불리는 역할을 맡다가 이번에 멸마궁 혜수각을 맡게 했어.”
“아… 그렇군요.”
혜수각은 정도맹의 혜성각과 같은 곳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중요한 작전을 세우는 곳.
즉, 멸마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기재들이 모인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담우기가 애체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에 군사님께서 조치하신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구윤이 묻자, 담우기가 흥분한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능 맹주님이 마족과 싸우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자정 작용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마족들에게 잘못을 빌고 목숨을 구걸하자는 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특히 친마 앞잡이들 사이에서는 마족에게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는 맹주님을 탄핵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지요. 그야말로 마족 이중대나 다름없는 놈들이었지요.”
“한데?”
“그런데 배신자에 의해 능 맹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번지자, 강호인들 사이에서 먼저 친마 앞잡이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 됐군.”
“그 결과 친마를 주장하던 앞잡이들의 움직임이 점점 줄어들고 조용해졌습니다. 오히려 마족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군사님의 혜지 덕분입니다.”
사비강이 구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작전 회의는 주로 담 각주와 하게 될 거야.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이야기가 잘 통하리라 믿는다.”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뜻밖에도 구윤이 냉철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비강은 그가 괜히 꺼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그간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그러라고 미리 홍염을 보내 정보를 전달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일을 진행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아직 심적으로 부담이 있을 텐데.”
대운산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맹주와 십만 동도들을 잃었다는 죄책감이 아직은 남아 있을 테니.
하지만 구윤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가슴으로 움직이지 않겠다고요.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사비강이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좋아. 뭔가?”
“지금까지는 늘 그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에 대응을 해왔지요. 하지만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겁니다.”
사비강을 바라보는 구윤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