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8
귀환 마교관
558화
구윤은 비령과 함께 마차에 올라 정도맹 본단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구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때론 심각한 표정을, 때론 슬픈 표정을, 때론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령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구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자신이 아는 구윤은 한 없이 섬세하지만,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땐 끝없이 독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구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령아.”
마침내 구윤의 입이 열렸다.
“네, 군사님.”
“너는 나를 어찌 보느냐?”
“제게는 언제나 지켜야 할 소중한….”
“그렇구나.”
구윤이 더 듣지도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웃음이 어딘지 예전 같지 않았다.
비령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군사님…?”
“달라지려고 한다.”
“네?”
“그동안 나는 너무 이상을 추구한 것 같다.”
구윤이 창밖에 시선을 둔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젠… 달라져야겠다.”
“군사님이 달라져도 저에게는 늘 한결같은 군사님이십니다.”
구윤이 빙그레 웃으며 비령을 보았다.
그 순간 비령은 느꼈다.
확실히 뭔가 달라졌음을.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금의 구윤은 어딘지 성숙해 보인다고나 할까?
아니다.
성숙하다는 표현은 너무 얌전하다.
그보다는 좀 더 거친….
“아마 네가 보기에도 내가 좀 낯설어 보일 것이다.”
비령은 반박하지 않았다.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까.
대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군사님이 달라지셔도 군사님을 지키는 제 임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맙다.”
구윤은 길게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사비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사비강은 무릎을 꿇은 채 절규하는 자신에게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소?”
“그렇습니다. 전 이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정도맹을 정리하고 멸마궁으로 오시오.”
“정도맹을 정리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어차피 맹주님이 강호를 버리고 마족이 되었는데….”
“아니. 군사가 정도맹을 어찌 정리하는가에 따라서 이 강호는 크게 달라질 거요.”
“하지만….”
“명심하시오. 이제부터 군사는 달라져야 하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착한 군사가 필요 없소. 머리 좋은 군사가 필요할 뿐이지.”
“……!”
“먼저 돌아가겠소. 대신 군사는 정도맹 본단으로 돌아가 모든 걸 정리하고 멸마궁으로 넘어오시오.”
말을 마친 사비강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군사는 정도맹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골몰히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막 결론을 내렸다.
‘그래. 달라져야 한다. 언제나 정도를 고집할 수는 없다.’
생각을 정리한 구윤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도착하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비령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강호가 발칵 뒤집혔다.
정도맹 총군사 구윤이 사실상 정도맹 해체를 공식 발표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능운파와 십만 무인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멸마궁 인근의 객잔도 마찬가지.
무인이 아닌 일반인들조차도 정도맹 해산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러니 칼 좀 부린 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자네도 얘기 들었지? 정도맹이 이제 사라진다는군!”
“그러게 말이야. 이거 정말 큰일이야. 마족은 설치지, 정도맹은 해산됐지. 이제 믿을 건 멸마궁밖에 없겠어.”
“내일이면 장례를 치른다는군.”
“무슨 장례?”
“어허,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군? 능운파 맹주님 장례 말일세!”
“아, 그 소리였군. 참 아까운 분이셨지. 이 빌어먹을 마족 놈들을 전부 씹어버리고 싶군.”
“어디 그 뿐인가? 십만 동도들이 놈들의 손에 이슬처럼 사라지지 않았나?”
“젠장! 그 살막주가 배신만 하지 않았어도 맹주님이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누가 아니라고 하던가? 그래도 능운파 맹주님이 살막주를 죽였으니 다행이지.”
“그러게 말일세. 강호는 정말로 아까운 인재를 잃었어.”
“니미럴, 자, 술이나 마시세! 이놈의 세상 제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티기 힘드니까 말이야!”
한편 무인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객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죽립을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경장으로는 차마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반듯하고 강인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바로 매설란과 사비강이었다.
매설란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결국 군사가 다른 사람이 됐네.”
“그렇군. 기대 이상이야.”
“하지만 악 막주는 좀 억울하겠어.”
“어쩔 수 없지. 죽은 자의 명예까지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꾸미다간 어설프게 변해 버릴 테니.”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겠지?”
“내일이면 모를 사람들이 없을 테지.”
“멸마궁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겠군.”
“바빠질 거야.”
“괜찮아. 차라리 바쁜 게 낫다는 생각이니까.”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확실히 구윤은 변했다.
예전 같으면 강호 동도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진실 대신 거짓을 선택했다.
이 거짓말의 효과는 클 것이다.
적어도 구윤이 사비강의 생각만큼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
구윤은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도맹 해산을 공표한 지 딱 하루가 지났다.
이제 내일 아침 동이 트는 대로 짐을 싸서 멸마궁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령아,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때였다.
“술은 내가 무덤에 부어드리지.”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한 줄기 검기가 날아들었다.
쒸이이익!
따앙!
순간 구윤 앞에서 검기가 튕겨 나갔다.
어느새 비령이 그 앞을 막아선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비령의 목소리에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구윤이 허공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소. 나오시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스르르 나타났다.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살막의 살수들이구나. 은신술이 놀랍다.’
어쩌면 비령보다 이들의 은신술이 훨씬 뛰어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만약 이들이 작정하고 은밀히 구윤을 제거하기로 계획했다면, 지금쯤 그는 죽은 목숨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데도 그러지 않은 것은 마지막 변명이라도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의도를 구윤도 잘 알고 있었다.
차차차앙!
모두 열 명의 살수들.
정확히 일살부터 십살까지였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흉흉한 살기를 쏘아내자, 구윤은 물론 비령조차도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해명, 들어보겠소.”
구윤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들에겐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그랬기에 일살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전혀 미안한 자의 태도 같지가 않군.”
“미안한 마음보다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마음이 더 크기에.”
“무슨 말이지?”
구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능운파 맹주님은 강호의 기둥이었소. 강호인들에게는 정의의 상징이었지. 한데 그런 맹주가 십만 강호인을 제물로 바치고 마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공표하면 어찌 되겠소?”
“…….”
“아마 강호는 사분오열할 것이오. 그들이 그 누굴 믿고 싸우겠소? 하지만 살막주를 희생한다면? 실은 그가 배신을 했고, 맹주님과 십만 동도들이 그에 맞서 싸우다가 전멸한 경우라면?”
“강호인이 의기투합할 거란 말인가?”
“사실 그렇게 움직이고 있소.”
“하지만 왜 하필 막주님이었나! 오히려 막주님은 능 맹주와 싸우시다가 돌아가셨다! 굳이 막주님이 아니었어도, 추마회주를 희생해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구윤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능운파 맹주님이 추마회주에게 배신당해서 돌아가셨다고 하면, 능 맹주님의 무모함을 지적하는 자가 반드시 생길 것이오. 애초에 추마회주를 상대로 말로 설득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올 테지.”
맞는 말이었다.
구윤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살막주는 분명 내 목숨을 구해 주었고, 능운파 맹주와 맞서 싸웠소. 하지만 누군가는 희생이 되어야 했소. 정의의 상징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그쪽이 나았으니까.”
꽈득…!
일살이 어금니를 갈았다.
구윤이 그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족을 섬멸하는 길에 앞장 설 거요. 만약 내가 죽도록 밉다면, 지금 날 죽여야 할 거요. 나는 당신들을 마족 섬멸의 도구로 생각할 테니까.”
“흥! 잘도 떠드는군.”
“거짓이 아니니까. 나는 앞으로 당신들을 소모품처럼 취급할 거요. 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이 강호를 위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으며, 어떤 희생을 했는지 알릴 생각이 없소. 만약 그게 싫다면 지금 날 죽여야 할 거요.”
일살과 구윤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그렇게 숨 막힐 듯한 상황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일살이 살기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검을 갈무리했다.
열 명의 살수들이 모두 검을 거두고 나자, 일살이 입을 열었다.
“기대하지. 당신의 손에 들린 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주 지독하게 이용할 겁니다.”
“그렇다면… 지독한 검이 되어 주지.”
말을 마친 일살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아홉 명의 살수들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비령이 검을 거두고는 돌아섰다.
구윤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앞으로 나를 철저히 지켜야 할 거다. 나를 원망하는 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생길지 모른다. 이제 난 더 이상 선한 군사가 아니니까.”
“목숨을 바쳐 군사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던 비령이 미간을 슬쩍 좁히더니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구냐?”
그러자 이번에는 실내 복판에서 한 인영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구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군.”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귀영단의 일영인 홍염이었다.
“사비강 궁주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용무는?”
“앞으로 군사님께 모든 정보를 제공하라는 명이었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의 마족 상황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히 보고해 주시오.”
“그러지요.”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리탄이 돌아섰다.
“들어오게.”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바리탄의 표정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어서 오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리탄 후작님.”
“오랜만이군, 하운트.”
고개를 든 하운트의 시선이 바리탄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