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46화 (546/670)

# 546

귀환 마교관

546화

단리추는 눈자위가 축축하게 젖었다.

“이제 또 언제 뵐 수 있겠습니까?”

“언제든 또 인연이 닿겠지요.”

사비강의 대답에 단리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난 아들 녀석을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아는 결코 못난 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나서 탈이지요.”

사비강이 농담처럼 말하자, 단리추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성검문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니,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미 각오는 했다지만,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그 죽음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울분 때문이었다.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그리고 아들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반드시 아들이 되갚아 주리라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 사비강이 나타난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저들을 모두 복속시키다니.’

사비강이 타고 갈 마차 뒤로는 천여 명의 마족 기사단이 서 있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일성검문을 위협하던 자들.

그래서일까?

그들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앞으로 마왕을 무찌르는데 저들이 한 몫을 하게 될 테지.’

단리추는 마음을 추스르고는 사비강에게 포권을 취했다.

“부디 강호를 위해서 힘써 주십시오!”

“글쎄요.”

뜻밖에도 사비강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단리추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비강이 어딘지 차가운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사실 난 단리 문주님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입니다. 강호를 위해서라…. 내가 아는 강호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내가 마왕과 맞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게 뭡니까?”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사비강의 눈동자가 시린 빛을 뿜어냈다.

단리추가 짐짓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하면… 강호의 안전은….”

“덤입니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멍한 표정을 짓는 단리추를 뒤로 하고 사비강은 마차에 올랐다.

사비강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단리추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훗, 하하하하!”

한 차례 기분 좋게 웃은 단리추가 멀어져 가는 사비강의 마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그렇다면 더욱 믿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본래 개인적인 원한이 대의보다 더 오래가는 법이지 않던가?

마침 괴도무영이 그에게 다가왔다.

“나도 이만 가볼까 하네.”

“벌써 가시렵니까?”

“그렇네.”

“일성검문을 도와주셨으니 사례라도 할 기회를….”

단리추의 말에 괴도무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굴 좀팽이로 보는가!”

“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애초에 빈집을 털려고 온 것이라고! 한데 내가 벌써 일성검문의 재산을 다 훑어보았네!”

“벌써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길이 없는 단리추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래! 나원 참, 살다 살다 이렇게 가난한 문파도 또 처음이더구만. 도대체 지금까지 귀양에서 뭘 하면서 지낸 건가?”

“그야 뭐… 열심히 수련을 하면서….”

“수련만 하면서 사람이 어디 살 수 있는가? 밥도 먹고, 야들야들한 살도 만지고… 흠흠. 아무튼! 다른 문파들은 앞에서, 뒤에서 잘도 해 처먹던데, 자네는 도대체 무슨 재주로 문파를 유지한 건지 모르겠군. 털려고 해도 털 게 있어야지. 쯧…!”

“하하…! 죄송합니다.”

단리추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자신이 왜 지금 사과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만 갈 테니, 앞으로는 수완을 좀 살려서 재정을 잘 꾸려 보게. 혹시 아는가? 자네가 일성검문을 아주 크게 키워서 재산이 많아지면 노부가 또 찾아올지?”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땐 제가 먼저 선배님을 초청하겠습니다.”

“흥. 그럴 날이 올 지나 모르겠군.”

괴도무영은 끝까지 냉랭한 얼굴을 하고는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을 보는 단리추의 표정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도 이만 가보겠소.”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니, 귀주십이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귀주오도가 됐다.

이번 전쟁에서 일곱 형제를 잃었다.

일성검문은 최대한 성의껏 장례를 치러 주겠다고 했으나, 대형인 일도가 정중히 거절했다.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흩어지는 바람에 몸을 던진 것과 같은 것 아니겠소? 형제들을 잃은 것은 분한 일이지만, 그들을 마음에 묻고 복수를 다짐했소. 장례는 문주께서 알아서 치러 주시오.”

단리추는 일도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수많은 문도들을 잃었기에.

때문에 그는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면서 일도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맙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이 없소.”

“됐소. 우린 우리를 위해서 싸운 거요. 그리고 이제 우린 우리의 복수를 위해서 싸울 거요.”

“언젠간 일성검문이 대협들의 힘이 되어드리겠소.”

일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단리추가 다급히 불렀다.

“아, 전리품을 챙기셔야 하지 않겠소? 마물들을 제거하고 얻은 것들이 제법 되니 원하는 만큼 챙겨서….”

“됐소. 앞으로 우리가 죽여 나갈 마족과 마물이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을 진데, 그거 몇 개 챙겨서 뭐하겠소? 그럼 이만.”

그렇게 귀주오도가 떠났다.

마지막으로 양비웅이 방도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다들 떠났군.”

“양 대협. 그래도 그대는 귀양에 남으니 내 마음이 위로가 되는구려. 언제든 비무를 신청하면 받아들이겠소. 이 오른손, 양 대협이라면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소.”

“흥! 단리 문주께서는 날 어떻게 보는 거요? 난 이제 당신의 오른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소.”

“어째서 그렇소?”

“이번 전쟁을 통해서 느낀 바가 많았소.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소. 한데 하늘 아래에서 당신의 오른손을 가진들 뭔 의미가 있겠소?”

단리추가 쓴 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말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양비웅이 시선을 먼발치로 던졌다.

“해서 나는 몇 남지 않은 방도들과 함께 귀양을 떠나기로 했소.”

“갑자기 어딜 간단 말이오?”

“멸마궁으로 들어갈 생각이오.”

뜻밖의 발언에 단리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녕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

“그렇소. 하니 내가 없는 동안 귀양을 잘 부탁드리겠소.”

“염려 마시오. 내 최선을 다해서 귀양을 지킬 테니!”

“단리 문주라면 믿을 수 있지.”

양비웅이 히죽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양비웅마저 방도들을 이끌고 떠났다.

단리추는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비강 궁주! 당신은 강호가 비열하다고 했소. 그래서 강호를 위한다기보다는 개인적인 복수에만 집중할 거라고 했소. 하지만… 신기하게도 당신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변하고 있소. 나는 오늘 확실히 깨달았소. 어쨌거나 당신이 이 강호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

소년은 울고 있었다.

집은 불에 타버려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잿더미가 된 집 앞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처참하게 도륙당한 시신이었다.

소년은 서럽게도 울었다.

이따금씩 숨이 차서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엄마…”

작은 손이 엄마의 시신을 흔들었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살아날 리는 없었다.

보다 못한 매설란이 소년의 뒤로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왜 그리 슬피 우느냐?”

돌연 낯선 사내가 다가와 소년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많이 다쳤는데 일어나지 않아요. 아무래도… 죽었나 봐요.”

말을 마친 소년은 다시 설움이 복받쳤는지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소년을 안아 주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내가 너를 보살피마.”

소년은 말없이 사내를 따라서 일어났다.

그제야 매설란은 사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초환당주님…!’

분명했다.

조금 젊은 모습이긴 했지만, 사내는 초환당주 진백을 꼭 닮아 있었다.

그리고 진백을 따라가는 소년.

그 소년은 바로 사비강의 어린 시절이었다.

소년에게서는 사비강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순박해 보이는 얼굴.

‘당신…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모습들을 내가 보는 것일까?

여긴 아직도 그이의 의식 세계인 건가?

아니면 내 꿈속일까?

진백을 따르던 어린 사비강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지.”

문득 진백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지는가 싶더니,

쩌어어어어억!

그의 몸이 거짓말처럼 세로로 갈라지면서 살가죽을 벗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곳에서 튀어 나온 자는 이마에 뿔이 돋은 마족이었다.

그의 존재감이 어찌나 강한지, 매설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왕…!’

매설란이 얼른 고개를 돌려 어린 사비강을 보았다.

그 찰나,

쉬이이잇!

푸욱!

마왕의 검, 베르타스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린 사비강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안 돼!”

매설란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달려가 쓰러지는 사비강을 안아 들었다.

마왕 타란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매설란과 사비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명에 대항한 하찮은 인간의 말로다.”

매설란은 사비강의 손을 맞잡았다.

사비강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안 돼! 죽지 마!’

매설란은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더욱 세게 사비강의 손을 쥐었다.

**

“으음…”

매설란이 여린 신음을 흘리다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사비강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그녀가 벌떡 일어서다 말고 아릿한 통증에 미간을 구겼다.

“윽…!”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좀 쉬어야 할 거야.”

사비강의 부드러운 목소리.

매설란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머릿속을 정리해야만 했다.

좁은 방. 아니,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다.

아, 마차 안인가?

매설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여긴… 현실?”

사비강이 매설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이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당신… 괜찮은 거야?”

“덕분에.”

사비강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 저 미소.

얼마 만에 보는 걸까?

그래, 처음 그를 보았을 때도 저 미소에 모든 게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지.

매설란이 사비강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당신 덕분이지.”

“참, 일성검문은?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사비강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매설란이 피식 웃으며 다시 사비강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행이다.

그에게 안길 수 있어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그의 가슴에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사비강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간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특히 헬무트와 더불어 기사단을 전부 복속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설란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럼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데?”

“왜? 못 믿겠어?”

“솔직히… 너무 갑작스럽게 들은 이야기들이니까.”

“안 되겠군. 애들 다 집합시켜야겠네.”

사비강이 정말로 천여 명의 기사단을 부를 것처럼 행동하자, 매설란이 얼른 말렸다.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야. 모든 게 잘 해결돼서.”

“진짜 해결은 이제부터지.”

“옹기승은 어쩌지? 워낙 급한 사안이라서 추 호위와 나만 왔는데.”

“무랑도사가 스크롤을 써서 혈사련으로 넘어갔어. 옹기승을 치료한 다음 멸마궁으로 데리고 올 거야.”

“어렵게 구한 스크롤을 벌써 많이 써 버렸네.”

“써야할 땐 써야지.”

사비강의 대답을 들으면서 매설란은 창문을 열고 스쳐 가는 풍경을 보았다.

곳곳에 꽃이 피어 봄 내음이 물씬 풍겼다.

정말이지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만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족들의 그림자가 강호 깊숙이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는 그녀의 생각보다도 훨씬 깊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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