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28화 (528/670)

# 528

귀환 마교관

528화

일성검문 대연무장에 무인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총 인원은 겨우 삼백 남짓.

규모가 큰 대문파에 비한다면 겨우 일개 단 정도의 인원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표정에는 확고한 투지가 담겨 있었고, 그들이 뿜어내는 정순한 기운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단상에 오른 단리추 곁으로 양문수가 다가갔다.

“서른 명의 무인을 추려서 여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본문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수고했소.”

양문수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단리추가 장내를 냉엄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모두들 알다시피 지금 본문은 위기에 처해 있다. 마족 군단이 십 리 안으로 들어섰으니 조만간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지금껏 그들을 막아서겠다며 대항했던 문파는 모두 전멸했다. 우리도 이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니, 우린 여기서 모두 죽을 것이다!”

말을 잠시 멈춘 단리추가 심호흡을 하고는 장내를 찬찬히 쓸어보았다.

“두렵나?”

“아닙니다!”

“무서운가!”

“아닙니다!”

“두려운 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본문을 떠나도록 하라! 자신의 삶을 사랑한 자를 비난할 사람은 이곳에 없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자, 반드시 이뤄야 할 꿈이 있는 자, 모셔야 할 노부모가 있는 자들은 언제든 이 자리를 떠나도 좋다.”

그러자 뇌검대주 이차명이 한 걸음 나서며 포권을 취하고는 소리쳤다.

“문주님! 저희들은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를 다졌습니다! 저희들은 목숨보다 정의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부모의 안전을 위해! 지금 이곳에 투지를 가지고 서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자 천지가 쩌렁쩌렁 진동했다.

단리추가 눅눅하게 젖은 눈동자로 무인들을 보았다.

격정이 차오른 것인지 그가 잠시 긴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고맙다. 나는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다음 생에도 나의 문도가 되어다오.”

“물론입니다! 문주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자, 그럼 우리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을 지키자!”

“존명!”

우렁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흩어져 각자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려고 할 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연무장으로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귀주십이도(貴州十二刀)가 일성검문을 돕기 위해 왔소이다!”

무인들이 돌아보니 흉흉한 사기를 풀풀 풍기는 열두 명의 무인들이 저마다 독특한 칼자루를 들고 히죽 웃고 있었다.

귀주십이도.

원래 그들은 귀주 지역에서 악명 높은 사파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정사대전 이후 그들의 악행은 잠잠해졌고, 최근에는 각지의 소환지를 공략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면 단리추는 물론 문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칼부림부터 하고 봤으리라.

하지만 이곳 모두의 표정에는 반가움마저 스쳤다.

“그냥 내빼려고 하니까 쪽팔려서 말이지. 누구든 맞서 싸우는 문파가 있다면 도우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귀양에서는 일성검문이 남았다 하여 찾아왔소.”

귀주십이도의 수장인 일 도가 말하자, 단리추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맙소! 환영하오!”

“고맙긴. 우리가 일성검문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아닌데. 소환지를 공략해도 기물이 잔뜩 쏟아지는데, 하물며 마족 군단을 공격하면 얼마나 많은 기물이 쏟아지겠소? 우린 그걸 노리는 것일 뿐이외다.”

“하하하! 어쨌든 좋소!”

단리추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 다시 또 한 노인이 들어서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귀양에 남은 무인이 하나도 없다 해서 빈집털이나 하러 왔더니 여긴 왜 이렇게 버글거리는 게야? 쯧! 이왕 온 거 좀 쉬면서 몸이나 풀어야겠구먼!”

그러자 일성검문의 문도 하나가 그를 보고는 외쳤다.

“엇! 저 영감은 괴도무영(怪盜無影)이다!”

“헐, 진짜네. 키가 난쟁이 똥자루 만하다더니 정말 작군. 그래서 그리 도둑질을 잘하는 건가?”

“쉿! 들릴라! 그래도 놀랐어. 괴도무영이 이곳에 나타나 우리를 도울 줄이야.”

문도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단리추가 환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시오! 노 선배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었소! 본문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흥! 노부의 명성을 들어봐야 순 욕밖에 없었을 테지!”

“하하하! 과거엔 그럴지 몰라도 오늘부터는 아닐 것이오. 이곳 귀양을 지킨 자로 널리 그 명성을 떨칠 것이오.”

“누가 귀양을 지키러 온 줄 아는가? 난 평소처럼 빈집을 털러 온 것일 뿐이야. 마침 사람이 바글거리니 포기한 거지.”

“좋소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본문의 재산을 마음껏 털어 가시오! 하하하!”

단리추가 호탕하게 웃자, 괴도무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의외로 재미있는 친구로군. 소문에는 영 꽉 막힌 친구인 것 같더니.”

“그리 봐 주시니 고맙소!”

단리추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괴도무영은 귀주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대도였다.

특히 그는 명문 정파의 기물들만 털어가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사파 출신이었기에 사도문파는 일절 손도 대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었다.

어쨌거나 초절정 고수가 잠든 방도 제 집처럼 드나든다는 그가 함께 싸워 준다면 틀림없이 큰 힘이 되리라.

그때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번에는 유독 많은 무인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체격이 크고 탄탄한 근육질의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굳건하고 힘이 넘치는 걸음걸이는 그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바로 흑수방주(黑手幇主) 양비웅(楊飛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단리추는 적잖게 놀랐다.

“아니, 당신은…?”

“오랜만이오.”

양비웅이 툭 던지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 흑수방주 양비웅은 대략 삼 년 전에 단리추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흑수방이 귀양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면서 폭리를 취하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서 돈을 뜯어내는 등 상인들의 등골을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가 난 단리추가 직접 흑수방을 찾아가 양비웅에게 비무를 신청했고, 결과는 단리추의 승리였다.

물론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그때의 비무 때문에 단리추의 등에는 아직도 열 십자 모양의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비웅은 그날 오른손을 잃어 왼손잡이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양비웅이 도검을 익힌 게 아니라 권장법 위주로 무공을 갈고 닦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왼손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어쨌거나 사지육신 멀쩡하던 자가 하루아침에 병신이 되었으니, 단리추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양 방주까지 올 줄은 정녕 몰랐소. 내 양 방주를 그간 오해했나 보구려.”

그러자 양비웅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해는 마시오. 당신이 여기서 저 마족새끼들한테 콱 뒈져 버리면 내가 복수를 할 수 없지 않소? 난 반드시 당신에게 비무를 신청해서 그 오른손을 가져가고야 말 테니.”

“좋소! 양 방주가 비무를 신청한다면 내 언제든 받아들이리다. 단, 이 전투가 끝난 후에 말이오.”

“흥, 살아남기나 하시오!”

“물론이외다!”

단리추가 큰 소리로 대답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비웅은 방도들에게 들고 온 짐을 풀어서 다른 무인들에게도 나눠 주라고 지시했다.

“이것들은 다 무엇이오?”

단리추가 묻자, 양비웅이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간 우리가 소환지를 공략하면서 얻은 기물들이오. 어떤 상처든 금세 낮게 해주는 약물도 있고, 던지면 반경 삼 장이 초토화 되는 폭약도 있소. 전투에 도움이 될 거요.”

“오오! 고맙소!”

양비웅은 헛기침을 하고는 먼산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후로도 다수의 무인들이 일성검문으로 찾아왔다.

귀양에서는 더 이상 무인이 남아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무인들이 찾아왔다.

단리추는 바쁘게 움직이는 무인들을 보면서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들이 대거 몰려오니 마음 한편이 든든했다.

일성검문을 찾은 자들은 모두 사파 무인이었다.

그렇다고 정파 무인들은 모두 겁쟁이여서가 아니다.

정파 무인들은 이미 대부분 정도맹이나 멸마궁에 차출되거나 자원한 상황이었다.

귀양문이나 귀도세가처럼 종적을 돌연 감춘 곳도 있었지만, 단리추는 개의치 않았다.

‘모두들 고맙소!’

여태껏 살면서 이렇게 사파 무인들의 도움을 받을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물론 그들이 하는 말은 퉁명스럽다.

하지만 단리추는 알고 있었다.

귀주십이도가 정말로 기물이 탐나서 온 것이 아니며, 괴도무영이 빈집을 털려고 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변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강호에서 정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 사비강 덕분이리라.

애초에 그런 귀인인 줄도 모르고 남색이나 밝히는 교관이라고 착각했으니 이 얼마나 큰 실수란 말인가?

‘사비강 궁주! 보고 계시오? 이들을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 이오! 긍정을 추구하는 힘은 이렇게도 먼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보오!’

그때 수하 한 명이 소리쳤다.

“문주님! 놈들이 삼 리 정도 밖에 포진했습니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단리추가 한달음에 정문으로 달려갔다.

그는 담벼락 위로 훌쩍 뛰어올라서는 천리경을 들어 보았다.

과연 저만치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마족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검은 갑주를 착용한 마족 기사들과 다양한 형태의 마물들이었다.

‘마족 기사만 대략 천 명인가…?’

그 중에서도 최전방에서 유난히 홀로 금빛으로 빛나는 존재는 남다른 존재감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바로 헬무트 기사단을 이끄는 헬무트 드 자일린이었다.

금갑을 착용한 그가 타고 있는 말 역시 금빛 갈기에 금빛 뿔이 달려 있었다.

“다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단리추의 명에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 투기를 끌어올렸다.

단리추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와라! 이 마족들아!’

다음 순간,

뿌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아득히 울려왔다.

곧이어,

두두두두두두두….!

헬무트 기사단 중 약 백여 명 정도와 각종 마물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흥! 간보기인가? 한꺼번에 덤벼도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다!’

단리추가 허리춤에 패용한 검의 손잡이를 콱 움켜쥐며 소리쳤다.

“오늘 이곳에 새로운 정의의 역사가 새겨지리라!”

“우와아아아아아아!”

문도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

단리정은 남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은 아직 평온했다.

정도맹의 본단이 버티고 있으니, 마족들도 섣불리 치고 들어오기 어려우리라.

단리정은 문득 기척을 느끼고는 시선을 돌렸다.

섬서회주인 화양진인이 단리정 곁으로 다가왔다.

단리정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자, 화양진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 곁에 나란히 섰다.

“저 방향이 귀주 쪽인가?”

“…예.”

“정 걱정이 된다면 가보게.”

뜻밖의 제안에 단리정이 그를 돌아보았다.

화양진인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부모가 걱정되는 건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자네는 이곳에 있어도 집중하기 힘들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귀주로 달려가 보게. 운이 좋다면 아버지를 도울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않은가?”

화양진인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단리정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단리정을 돌아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 두게. 천멸대도 부대주가 잘 이끌 걸세.”

천멸대 부대주는 연우경이었다.

단리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동의해서다.

연우경이라면 이제 대주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단리정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화양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단리정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궁주님을 믿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사비강 궁주는 혈사련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하지만… 그분이라면 어떻게든 수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니까요.”

단리정이 화양진인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는 명백한 믿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허어, 도대체 어찌 하면 저런 믿음을 가지게 된단 말인가? 자연의 섭리조차 뛰어넘을 믿음이라니. 거의 신앙에 가깝군. 사비강이라는 자는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내 도량이 아직도 멀었도다.’

그가 남쪽 하늘을 보았다.

저 어디쯤엔가 일성검문이 있을 테고, 또 한참 떨어진 어디쯤엔가 사비강이 있으리라.

단리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저는 이곳에서 제가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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