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6
귀환 마교관
526화
“사부님! 여깁니다!”
신음하는 부상자들 사이에서 추량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사비강은 천해심보로 귀신처럼 미끄러지며 추량 곁으로 다가갔다.
추량이 부상자 곁에서 빠르게 얘기했다.
“이제 막 힐링 포션을 먹여서 상처 부위는 아물었는데, 몸이 너무 찹니다.”
“힐링 포션으로는 한기까지 치료할 수 없다. 비켜라.”
“예, 사부님.”
추량이 얼른 물러나자, 사비강이 그 옆에 앉아서 부상자의 맥을 짚었다.
과연 한기가 체내에서 거침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부상자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서 하얀 김에 훅훅 뿜어져 나왔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이었음에도 그는 사비강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영, 영광입니다… 헉, 헉… 꼭 한 번은 뵙고 싶었습니다.”
부상자는 비록 사파 무인이었지만 사비강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실제로 많은 사파 무인들이 사비강에 대해 자부심 아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때 혈사련에서 교관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했다.
어찌 보면 사비강의 존재 자체가 정사를 허무는 상징이기도 했다.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운기하도록.”
“알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사비강이 그의 몸에 온기를 조금씩 불어넣었다.
세밀한 조절이 필요한 일이었다.
강한 온기를 갑자기 불어넣으면 신체가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혈맥이 터져 나갈 수가 있다.
차갑게 얼어붙은 자기에 갑자기 불을 가하면 깨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새파랗게 질렸던 무인의 표정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그가 스르르 눈을 감으면서 평온한 표정이 됐다.
내공을 일주천한 뒤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든 것이다.
“됐다.”
사비강이 일어서자, 추량이 다가왔다.
“이걸로 대략 위급한 부상자는 모두 치료한 것 같습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매설란과 흑귀를 불렀다.
“지금 혈사련은 수장을 잃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일 거야. 당신이 잘 관리해 줘. 소천악 당주가 당신을 도울 테니.”
“알았어. 맡겨 둬.”
매설란이 호기롭게 대꾸했다.
이곳이 사파의 중심인 혈사련이라지만, 이미 그녀는 사파 무인들을 다스려본 적이 있다.
멸마관에도, 멸마궁에도 사파 무인은 존재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흑귀의 아버지인 소천악이 자신을 돕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말 안 들으면 패버려도 되지?”
“엇! 방금 말투가 완전 사부님 같았습니다!”
추량의 너스레에 매설란과 사비강이 가볍게 웃었다.
“흑귀도 일단은 이곳에 남아서 마무리를 하도록.”
“예, 주군!”
“그럼 이제 가자.”
“예, 사부님!”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는 매설란이 소리쳤다.
“조심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그만큼 소중하니까.
이 강호에.
그리고 나에게.
**
추종술의 기본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누군가를 추적하는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대신 지금 쫓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이건 너무 쉬운데요? 이쪽입니다.”
추량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몸을 날렸다.
과연 그는 숲속의 다람쥐만큼이나 망설임 없이 재빠르게 이동해 갔다.
사비강이 도중에 못미더운 눈치로,
“너 정말 제대로 가는 것 맞냐? 나중에 ‘죄송합니다.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놓친 것 같습니다.’ 이딴 소리 하면 죽여 버린다.”
하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추량의 눈빛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그가 거침없이 이동하면서 말했다.
“추격자를 의식할 겨를도 없이 일단 내달린 모양입니다. 하루가 꼬박 지났는데도 흔적이 명확하군요.”
‘도대체 무슨 흔적이 명확하다는 거야?’
사비강은 추량의 뒤를 따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였지만, 섬세한 관찰력은 추량에 게 미치지 못하는 그였다.
반면 추량은 모처럼 자신의 전문 분야를 찾아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에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무릇 추종술이란 나를 잊어야 하는 것. 그것은 자아를 지우고 타성으로 주변을 견고하게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요. 나뭇가지가 꺾인 방향? 검이 스친 자리? 나뭇잎이 나뒹구는 모양새? 이런 것들은 다 추종술의 잔기술에 불과합니다. 추종술의 깊은 경지에 다다르면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게 되고, 나아가 자아가 지워지면서 완벽한 타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추종술의 기보오오온 중에서도 기보오오온!”
“아까부터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
“예? 아, 하하. 그냥 저 자신에게 되새김질 했습니다. 아무튼.”
추량의 표정이 다시 진중해졌다.
“이 추종술이라는 것은 인간의 심연을 탐구하는 매우 심오하고도 난해하며, 신비롭고도 놀라운….”
“닥치고 빨리 쫓기나 해라.”
“아, 예.”
추량이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피더니 몸을 날렸다.
“이쪽입니다!”
**
“련주… 끈질기군.”
혈도사괴 중 일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한숨을 탁 내쉬고는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
“네놈들이 감히 본좌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추희룡의 전신에서 내력이 뿜어져 나오면서 장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추량으로부터 흡수한 내력 덕분에 몸을 상당 수준으로 회복한 그였다.
혈도사괴의 표정에서 빈정거리던 비웃음이 사라졌다.
비록 상대는 혼자지만 혈사련을 이끄는 련주다.
사파를 대표하는 무인.
부상을 입었다지만 그가 작정을 하고 덤비면 이쪽에서도 방심할 수 없다.
일괴가 표정을 굳히고는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도대체 여기에 뭐가 들었기에 그토록….”
말을 꺼내던 그가 흠칫거리고는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뭐야?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예? 그럴 리가요. 다른 게 있겠지요.”
“없다.”
삼괴가 묻는 말에 일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괴가 다가와 가죽 주머니를 건네받고 뒤적거렸다.
“진짜네.”
그 모습을 본 추희룡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봤다시피 거기에 든 건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본좌에겐 소중하지만 너희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 그러니 본좌에게 넘겨라. 그렇다면 너희들의 과오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
“흐음… 그건 안 되겠는데.”
일괴가 고개를 젓자 추희룡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익…! 대체 왜!”
“련주, 당신한테 소중하다는 건 우리의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오. 당신 말만 믿고 넘겨주었다가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이런 답답한 것들…!”
“잡소리 집어치우고 이렇게 합시다. 그럼.”
“무슨 말이냐?”
“반반.”
“반반?”
“그렇소. 반반 나눕시다. 공평하게.”
‘공평은 개뿔! 애초에 내 것을 반반 나누는 게 어떻게 공평하다는 거야!’
추희룡이 속으로 발끈했지만, 그는 애써 눌러 참았다.
어차피 녀석들은 저 두루마리를 사용하는 방법도 모를 터.
반이라도 얻어 낸다면 언제든지 놈들에게서 나머지 절반을 뺏어 올 수도 있다.
녀석들의 위치만 파악하면 그만이니까.
한편 혈도사괴 역시 추희룡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은 부담이 됐다.
지진 않을 테지만 자신들 중 한둘은 죽을 각오를 해야 하리라.
그러니 절반은 내어 주고, 나머지 절반은 안전장치로 사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추희룡이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것을 보면 이 두루마리들이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었다.
틀림없이 매우 진귀한 기물이리라.
절반을 포기하는 건 아깝지만 어쨌든 피 보지 않고 절반이라도 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마침내 추희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신 그 물건들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일괴가 가죽 주머니에 든 두루마리를 세어 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좀 곤란한데.”
“또 뭐지?”
“두루마리가 열다섯 개요. 반반으로 나누려면 한 장을 찢어서 나눠 가져야겠는데?”
“안 돼! 내가 일곱 개를 갖지.”
추희룡의 말에 일괴가 내심 웃었다.
‘과연 이 물건이 보통 물건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저리 조바심을 내다니. 언젠간 반드시 기회를 봐서 모두 가져와야겠다.’
일괴가 속내를 감추고는 말했다.
“좋소. 그렇게 양보를 해주신다면야. 막내야 갖다드려라.”
“예, 대형.”
사괴가 두루마리 일곱 장을 받아들고는 추희룡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받으시오.”
그가 두루마리 일곱 개를 건네주자 추희룡이 가만히 살펴보았다.
과연 손상된 부분은 없는 듯했다.
사괴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툭 던지듯 물었다.
“됐소? 그럼 이만 찢어집시다.”
“잠깐.”
사괴가 돌아서는데 추희룡이 두루마리 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거 좀 문제가 있는데?”
“뭐요?”
“여기 말이다.”
“대체 뭐가….”
사괴가 추희룡에게 다가갈 때였다.
낌새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일괴가 버럭 소리 질렀다.
“막내야! 조심…!”
하지만 그보다 추희룡이 한 박자 더 빨랐다.
탓, 쉬이이잇!
그가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사괴에게 다다르더니 일수를 뻗어 곧장 목을 틀어쥐었다.
“커억!”
“노옴!”
추희룡이 일갈하는 것과 동시에!
파지지지직! 치지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악!”
강렬한 뇌전이 두 사람을 휘어 감으면서 짜르르 울려 나갔다.
그 바람에 추희룡에게 달려들려던 혈도사괴가 저마다 뇌기를 이기지 못해 튕기듯 물러났다.
“헛!”
“저런! 막내가…!”
한편 추희룡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사괴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지르다가 눈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이내 사괴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축 늘어지자, 추희룡은 타고 남은 장작처럼 변해 버린 사괴를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털썩!
“이노오오옴!”
차차차아앙!
남은 혈도사괴들이 분노를 금치 못하고는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하지만 사괴의 내공을 단숨에 흡수해 버린 추희룡은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쥐고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뇌전흡살공이라… 과연 마음에 드는군.”
뇌전흡살공은 전 련주인 허무극이 사용하던 사공이었다.
한데 련주가 된 추희룡이 련주실을 살피다가 숨겨져 있던 이 뇌전흡살공의 비서를 우연히 찾아낸 것이었다.
자신이 익힌 심법과 호환성도 나쁘지 않았기에 그는 빠르게 뇌전흡살공을 습득해 갔다.
그리고 이렇게 실전에서 써먹게 된 것은 지난 번 추량에 이어 두 번째였다.
파직…! 치짓…!
그의 몸에서 아직 잔류하는 뇌전이 흘렀다.
그가 혈도사괴를 노려보며 격장지계를 펼쳤다.
“덤벼라, 애송이들.”
“이 창자를 꺼내 찢어 버릴 놈!”
“네놈의 가죽을 벗기겠다!”
혈도사괴가 섬뜩한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추희룡이 얼른 검을 들어 그들의 칼을 막아냈다.
까강! 깡깡!
역시 그가 제대로 작정을 하고 싸우니 혈도사괴와 거의 호각을 이루었다.
만약 사괴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혈도사괴가 조금 더 유리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거의 박빙(薄氷)!
하지만 추희룡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뇌전흡살공으로 얻은 내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소실된다는 것을.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한다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지만, 지금 그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혈도사괴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치잇! 과연 까다로운 놈들이로구나!’
만약 자신이 내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혈도사괴에게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았으리라.
점점 위험한 순간이 늘어났다.
차라리 사괴를 죽이자마자 달아나는 쪽으로 선택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였다.
“난리도 아니군.”
낯익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혈도사괴는 물론 추희룡도 동작을 뚝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 위에 추량이 서 있었고, 그 곁에 사비강이 걸터앉아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 난 구경하고 있을 테니 하던 일들 계속해. 생각보다 관전하는 것도 재미있네.”